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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8:1-9:27(모든 사람의 종이 된 바울)

by Mark Yang   08/18/2019   1Corinthians

Message


고린도전서 제 6 강


모든 사람의 종이 된 바울


말씀/ 고린도전서 8:1-9:27
요절/ 고린도전서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이때까지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내에 있는 분파 문제, 음행 문제, 송사 문제, 결혼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들을 아비가 자식에게 권면하듯 상하고 애타는 마음으로 권면했습니다. 그런데 그 권면은 어떤 철학이나 도덕에 기초한 단순한 권면이 아니라 복음진리에 기초한 권면이기 때문에 보편성과 영원성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5-7장에서는 주로 성도덕의 문제를 다루었다면 8-10장에서는 우상의 제물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상의 제물에 관한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는 것은 이 문제가 우상숭배 문제와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덕의 문제와 우상숭배의 문제는 고린도시의 타락한 사회상을 반영해 주고 있습니다. 당시는 우상숭배가 보편화 되어 있었기 때문에 분명한 영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이 문제에 말려들기 쉬웠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복음진리에 기초하여 분명한 영적 가치관을 확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오늘 살펴 볼 8, 9장은 우상의 제물에 관한 문제를 다루면서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실생활에서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한 분 한 분에게 위로부터 지혜와 계시의 영을 허락하사 말씀 속에 담긴 놀라운 복음진리를 깨달아 알 수 있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I. 지식보다 사랑으로 행한 바울 (8:1-13)
8장에 나오는 우상의 제물에 관한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 시대 배경에 대해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초대 이방교회들이 당면한 문제 중에 하나는 유대인 회심자들과 이방인 회심자들 사이에 상충되는 선입관들과 편견이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문화 배경 가운데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갈등은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같은 문화 배경 가운데서 성장하였다 하더라도 믿음이 강한 자와 믿음이 약한 자의 사이에 자연히 이런 갈등이 생기게 마련인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도 이런 갈등은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살고 있는 사회는 모든 생활에 우상숭배가 차고 넘쳤습니다. 헬라 로마신화를 보면 우상숭배는 생활화되어 있었고, 그 시대 사람들을 지배하는 하나의 거대한 문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사회적 교제, 축제 파티, 법의 집행, 공중 오락, 정부의 직무, 의례 등 모든 생활이 종교의식들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삶은 돼지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내는 것이 하나의 문화 행사처럼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회사를 만들거나, 공장에서 새로운 기계를 들여와서 시운전을 할 때 돼지 머리를 앞에 놓고 그 앞에 절을 하며 고사를 지냅니다. 지성을 자랑하는 캠퍼스에서도 축제 때에 버젓이 돼지 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냅니다. 지난 1월 초에 최첨단 과학기술을 쏟아 부은 미국 우주선 로켓 발사장에서 한국 사람들이 무궁화 위성 2호 발사가 성공할 수 있도록 바비큐 돼지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낸 사건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이 아덴에서 복음의 동역자들을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이 분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행17:16). 이와 같이 고린도시도 온통 우상으로 가득차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제사를 지낼 때 우상에게 절하며 소나 돼지를 잡아 제물을 바쳤습니다. 제사에 바쳐진 희생제물들은 언제나 세 부분으로 나누었습니다. 한 부분은 제단 위에서 불태워졌으며, 다른 부분은 사제에게 제공되었고, 세번째 부분은 봉헌자에게 남겨졌습니다. 그런데 사제에게 제공된 부분은 그가 필요로 하지 않을 때에는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봉헌자에게 주어진 부분은 그의 집에서든지 또는 사원의 경내에서 먹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시장에서 고기를 샀다거나, 또는 이교도 친구들의 집이나 사원의 행사에 초대를 받았을 경우 그들 앞에 놓여진 희생제물을 먹기 쉬웠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고린도 성도들 가운데는 우상의 제물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므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거리낌없이 맛있게 먹었습니다. 이들은 믿음이 강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문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자랑하며, 그런 지식이 없는 믿음이 약한 자들을 무시하고 독선적으로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로 인해 믿음이 약한 자들이 마음에 상처를 받고 실족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그들에게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하였습니다. '교만하다'는 말은 "우쭐해지다, 허영과 자만에 들뜨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지식, 사랑이 결여된 지식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만심에 들뜨게 하여 교만하게 만듭니다. 이런 지식은 인간관계를 세우기보다 분열시키고 파괴시킵니다. 반면에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여기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약점을 감싸주고 허물을 덮어 주기 때문에 인간관계를 건설하고 세웁니다.
2,3절에서 바울은 사랑이 지식의 본질임을 말해 줍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고 교만을 부린다면 그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참된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누구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도 그를 알아주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인간이나 사물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게 되므로 참된 지식을 갖게 됩니다. 사랑은 가장 높은 형태의 지식이기 때문에 사랑 없이 참된 지식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요한 1서 4:7,8절은 사랑이 지식의 본질임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4-6절은 신자가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상은 사람들이 마음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 낸 상상의 산물에 불과합니다. 우상은 인간을 구원할 능력도 없고 실제 문제를 도와 줄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상은 허망하고 거짓되며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은 하늘과 땅에 많은 신과 주가 있다고 합니다. 하늘에 있는 신들은 주피터, 주노, 미네르바, 머큐리, 비너스, 바카스 등을 의미하고, 땅에 있는 신들은 신격화된 통치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들과 주들은 사람이 만들어 낸 거짓 신들에 불과합니다. 세상에 참 신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디모데전서 2:5절은 이를 잘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가 되시며, 그 지으신 만물을 권능으로 붙드시고 유지시키시고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만물이 다 그에게서 났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갑니다 (롬11:36). 이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분으로서 모든 피조물로부터 찬송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계4:11). 또한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도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로서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하게 찬송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계5:12).
세상에는 참 신이 하나님 한 분밖에 없고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므로 우상에 바쳐진 제물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지식을 가진 자는 믿음이 강한 자로서 우상의 제물에서 참 자유함을 얻은 자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이러한 지식을 가지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서 우상에 바쳐진 제물을 먹을 때는 양심이 꺼림직하고 죄의식을 느끼면서 먹게 됨으로 그들의 약한 양심이 더러워지는 것입니다(7). 마치 우리가 제사 음식을 먹을 때 어딘지 모르게 꺼림직하고 기분이 좋지 않는데도 다른 사람들이 먹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먹는 경우 양심이 더러워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고 의심하면서 하는 것은 다 죄입니다 (롬14:23).
바울은 8절에서 음식은 근본적으로 신앙생활과 아무 관계가 없음을 말합니다.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못합니다. 또한 음식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풍성하게도 하지 못하고 부족하게도 못합니다. 우리가 먹는다고 해서 신앙이 더 나아질 것도 없고, 먹지 아니한다고 해서 신앙이 더 나빠질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강한 자들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9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여기서 자유함이란 합법적으로 행할 힘이나 권리를 의미합니다. 자신에게 합법적으로 행할 힘이 있고 권리가 있다고 해서 자기 유익을 위해서 쓸 것이 아니라 믿음이 약한 형제를 위해서 써야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10-13절에서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일 믿음이 강한 자가 우상의 신전에 앉아서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을 믿음이 약한 자가 본다면 그 영향을 받아서 자기들도 우상의 제물을 먹다가 실족하게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의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게 됨으로 그 형제에게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형제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입니다. 그러므로 그 형제에게 죄를 범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를 위해서라면 자기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기꺼이 포기하겠다는 것입니다.
우상의 제물에 관한 문제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있어서는 술, 담배 문제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고난을 많이 겪은 탓인지 옛날부터 술과 담배를 좋아했습니다. 대체적으로 서구라파 사람들은 술을 많이 마시지 않고 담배도 그렇게 많이 피우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 사람들은 한번 술을 마셨다 하면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마시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술주정을 합니다. 길 바닥에 쓰러져서 자기도 하고 갖은 추태를 다 부립니다. 평소 착하던 사람도 술을 마시기만 하면 전혀 딴 사람이 되어 아까운 살림을 때려부수고 처자식을 두드려 패고 괴롭힙니다. 그래서 술이 원수라고 합니다. 또 담배를 피우면 건강에 해로운 줄 알면서도 골초가 되어서 줄담배를 피웁니다. 이렇게 술, 담배로 인해 피해가 너무 크기 때문에 개신교에서는 교회법으로 하지 못하도록 정하였습니다. 이것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면서 신자는 술, 담배를 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깔리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는 신자가 술, 담배를 하면 타락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사실 성경에서는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은 있어도 술마시지 말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또한 담배 피우지 말라는 말씀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자로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술을 마실 수 있고 담배를 피울 수 있습니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운다고 해서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신자인 내가 그렇게 할 경우 왜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이는 신자로서의 영향력 때문입니다. 사회적인 인식이 신자는 술, 담배를 안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내가 자유라고 해서 마음대로 한다면 불신자로부터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목자인 내가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고 해서 술집에 가서 자유롭게 술을 마시는 것을 형제들이 본다면 믿음이 약한 형제는 마음에 상처를 받고 실족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나는 그 형제에게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형제에게 죄를 범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영원히 술 담배를 하지 않음으로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나를 위해서 사용하지 않고 형제를 위해서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II. 자기 권리를 쓰지 않은 바울 (9:1-27)
사도 바울은 8장에서 믿음이 강한 자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권리)를 믿음이 약한 형제들을 위해 포기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9장에서는 이 일에 자신이 어떻게 본을 보였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자기가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말하고(1-6), 그 권리가 어떤 점에서 합당한가를 열거합니다(7-14). 그 후에 그는 복음을 위해 그 모든 권리를 포기했음을 말하고(15-18),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고 합니다(19-23). 그리고 이를 위해 자신과 얼마나 피나는 투쟁을 했는가를 이야기합니다(24-27). 여기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간증은 복음을 위해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 참으로 아름다운 귀감이 됩니다.
첫째, 복음의 일군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 (1-14). 1절을 보십시오.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사도 바울은 자신이 자유자요 사도임을 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저주를 받은 바 되심으로 우리를 죄의 사슬에서 해방시키시고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갈3:13).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율법으로부터 해방시키사 참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 자유는 오직 믿음으로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참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인으로 누릴 수 있는 권리들 이외에도 사도의 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사도권을 증명하는 데에는 세 가지 길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열 두 사도들과 같이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사도로 위임을 받았을 경우, 둘째는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하는 경우, 셋째는 복음사역이 성공하여 그를 통해 회심자들이 많이 나타난 경우에 사도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중에서 두 가지를 내세워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직접 보았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빛으로나마 순간적으로 본 것을 말합니다. 그 때 그는 태양과 같이 강렬하게 비추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빛으로 말미암아 눈이 멀어 버렸습니다. 그는 이것을 기초로 예수님을 보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무엇보다 그가 사도임이 분명한 것은 고린도에서의 성공적인 복음역사였습니다. 그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은 바로 고린도 성도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제 그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답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복음의 일군으로서 교회의 지원을 받으며 먹고 마시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또한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결혼하여 부부 동반하여 심방할 권리도 있었습니다. 또한 복음역사에만 전념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을 권리도 있었습니다.
7-14절에서는 자신이 복음의 일군으로서 그 권리를 누리는 것이 얼마나 합당한가를 조목 조목 열거하고 있습니다. 첫째로는 노동자가 일한 대가를 받는 것이 합당하다는 노동자의 기본 원리입니다. 군인은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 국가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국민의 세금으로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자기 경비로 군인 생활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농부가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따먹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요, 목자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는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이러한 원리가 모세의 율법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이는 하나님께서 소들을 염려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복음의 일군들을 위해서 기록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은 상호 공정의 원리입니다(11). 영적인 것들을 뿌리고 물질적인 것을 거두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다른 복음의 일군들을 인정하고 섬기는 것을 보면 바울은 그들의 목자로서 더욱 당연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12). 또한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모시는 자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게 됩니다(13). 무엇보다 복음의 일군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주님께서 명하셨습니다(14). 예수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에 절대적인 것입니다.
둘째, 자기 권리를 포기한 바울 (12b, 15-18). 사도 바울이 복음의 일군으로서 얼마든지 이러한 권리들을 쓸 수 있는데도 쓰지 아니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2b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범사에 참는다는 것은 온갖 종류의 궁핍을 감내하며 모든 일에 고통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동역자도 없이 혼자서 밥하고 빨래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복음역사를 섬기고자 할 때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복음역사에 아무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 모든 고생을 기쁨으로 감당했습니다. 그는 주와 복음을 위해서는 무슨 고생이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고생 정도가 아니라 목숨을 내 놓을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0:23,24)
사도 바울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의 상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가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그렇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차라리 죽을지언정 자신의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않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은 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그에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가 만일 자기가 원해서 이 일을 한다면 보수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직분을 맡았기 때문에 당연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의 상이 무엇입니까? 18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그는 아무 값없이 복음을 받고 구원을 얻었으므로, 아무 값없이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아무 사심없이 순수하게 복음을 전파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복음의 청지기로서 복음 전파를 가장 영광스러운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들로부터 상을 바라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상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감당하다가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바랄 때가 있습니다. 또한 물질적인 보상이나 청춘을 보상받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힘들 때는 "내 청춘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하며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고 보상을 받는다면 더 이상 하나님께로부터 상급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미 사람들로부터 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역사를 섬길 때 순수하게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고 해야 합니다.
셋째, 모든 사람의 종이 된 바울 (19-23). 19-23절까지는 사도 바울이 자신의 권리를 복음을 위해서 포기할 뿐만 아니라, 이제는 적극적으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구원역사를 섬기기를 원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한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매이지 아니했습니다. 사람들의 비판에도 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하며 자의식에 사로잡히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사람들과 갈등하고 이로 인해 괴로워하지도 않았습니다. 또 물질적인 보수를 받고자 애쓰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나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렸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요동할지라도 그의 심령은 늘 잔잔한 평화와 기쁨으로 차고 넘쳤습니다. 그가 이렇게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요? 이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리스도 한 분에게만 매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만일 자유를 누리기만을 고집했다면 신비주의자가 되거나 아니면 자기 의에 기초한 독선을 쌓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에게 있는 자유를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사용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자유인이므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할 아무런 의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종과 같이 낮아져서 사람들을 섬기고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습니다. 이는 아무쪼록 더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그가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또한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이지만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를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어떤 종류의 사람이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은 자기 사람을 만들고자 함이 아니라 그들을 구원코자 함이었습니다. 그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는 만민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만민구속역사에 동참하기를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바울은 바리새인 출신으로서 매우 엄격하고 빈틈이 없는 율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 것이나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것을 볼 때 잔인하고 무자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매우 자존심이 강하고 자기가 강한 자였습니다. 이런 그가 어떻게 자기를 철저히 비우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될 수 있었을까요? 이는 그가 우리 주 예수님을 본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5-8절에서 예수님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 말씀에는 그리스도께서 인류구원역사를 위해 취하신 몇가지 단계가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근본이 하나님의 본체로서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되십니다 (요1:1-4). 예수님은 창조주로서 마땅히 영광과 권세와 특권을 누리셔야 하셨습니다. 그러나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시되 군림하는 자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고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종으로 오셔서 각종 냄새나는 죄인들을 사랑으로 품고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는 니고데모와 같이 되시고,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되시고, 중풍병자에게는 중풍병자와 같이 되시고, 세리에게는 세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시되 십자가에 못밖혀 죽기까지 철저히 낮추시고 하나님께 복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으로서의 권리포기와 낮아지심과 섬김과 희생을 통해서 놀라운 생명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같이 철저히 자기 권리를 포기하고 겸손하게 낮아져서 섬기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원리를 따라 복음역사를 섬길 때 성공할 수 있지만, 조금이라도 이 원리를 벗어날 때 구원역사를 이룰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는 곳마다 성공적으로 복음역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하게 이 원리를 좇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양을 많이 얻고 제자양성을 잘 하기를 바라지만 실패하는 주요 원인은 자존심을 포기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겸손하게 낮아져서 섬기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요 희생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성공적으로 복음역사를 이룬 사람들은 한결같이 예수님께서 가신 겸손의 길, 섬김의 길, 희생의 길을 좇았기 때문입니다.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에서 성공적으로 복음역사를 섬길 수 있었던 것도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좇았기 때문입니다.
넷째, 자기를 쳐 복종시킨 바울 (24-27).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본받아 모든 사람의 종이 된 것은 저절로 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쳐 복종시키는 피나는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그는 마라톤 경기 비유를 통해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피나는 투쟁을 해야 되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24,25) 운동 경기자는 승리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 모든 일에 절제하고 피나는 노력을 합니다. 음식을 절제하고 잠을 절제하고 정욕을 절제하고 오락을 절제하고 모든 것을 절제합니다. 감정도 절제하고 생각까지 절제합니다. 이는 결국 자기와의 투쟁입니다. 이렇게 오랫동안의 고통스러운 훈련을 통해서 승리의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운동경기에서의 승리는 얼마나 절제하고 노력하며 훈련을 받았는가에 따라 결정됩니다. 88 올림픽 마라톤경기에서 금메달을 따서 민족의 자긍심을 높여준 황영조 선수는 이를 위해 지옥과 같은 훈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마라톤 경기에서 약 40km를 달리기 위해 매일 50-60km를 달렸습니다. 한번은 달리다가 너무 힘들어서 달리는 자동차에 뛰어들어 죽고 싶었다고 합니다. 이런 피나는 훈련을 통해서 승리의 면류관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썩을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도 이렇게 투쟁하는데 하물며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얻고자 하는 우리는 얼마나 힘써 투쟁해야 되겠습니까?
바울은 이제 자신이 어떻게 투쟁했는가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26,27) 인생의 경주에서 분명한 목적과 방향이 없을 때 우왕좌왕하다가 인생을 허비하고 패배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향방 없이 달리지 아니하고 목표 없이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싸우지 아니했습니다. 그에게는 분명한 삶의 목적과 방향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얻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한 분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빌3:8). 그가 그리스도 한 분을 얻었을 때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자였고 승리자였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한 분을 얻기 위해서 이와 같이 달음질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