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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0:1-33(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by Mark Yang   08/18/2019   1Corinthians

Message


고린도전서 제 7 강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말씀/ 고린도전서 10:1-33
요절/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지난 강의에서 우리는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를 자기를 위해서 사용해서는 안되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 권리를 포기하고 낮아져서 섬길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불신자와 별 다를 바가 없이 자기 권리만을 주장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큰 죄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10장에서 사도 바울은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한 것을 거울 삼아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고(1-13), 적극적으로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할 것을 권면합니다(14-22). 그리고 우상의 제물에 대한 결론적 교훈을 준 후에,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신앙생활의 대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23-33).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은 어떤 것인가를 배우고자 합니다.

I. 역사의 교훈 (1-13)
1절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이스라엘 역사의 교훈을 알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과거 역사를 통해서 현재의 모습을 발견하고 어리석게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먼저 1-4절에서 조상들이 광야생활에서 받은 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1b)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한 직후의 광야생활과 홍해를 건넌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 동안 바로의 권세 아래에서 노예생활을 하며 혹독한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비참했으며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런 비참한 노예생활을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사 그들에게 모세를 구원자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크신 권능으로 바로를 치시고 그들을 바로의 권세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베푸신 구원의 은혜였습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바로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노예근성이 남아 있어 하나님의 자녀답게 생각하고 행동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세계 만민을 품고 섬기는 제사장나라로서 크신 소원을 두셨지만, 그들의 소원은 너무나 육신적이고 인간적이어서 하나님께 도저히 쓰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법도가 필요했고, 하나님의 법도를 좇아 살아가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사흘이면 약속의 땅 가나안에 갈 수 있는데도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급했지만 하나님은 조금도 조급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광야생활은 거칠고 황량했으므로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보살핌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구속하사, 아비가 사랑하는 자녀를 보살피듯이 섬세하게 보호하시며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3:21,22절은 그 아름다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여기에 택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으로 홍해를 건넘으로 믿음의 능력을 체험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이 애굽에 대한 미련을 온전히 버리고 하나님 안에서 새 생활을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그들을 홍해 앞으로 인도하사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으셨습니다. 그들의 앞에는 시퍼런 홍해요, 그들의 뒤에는 애굽의 전차와 기병들이 추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뒤로 물러가 다시 바로의 노예가 되든지, 아니면 홍해에 빠져 죽든지 해야 할 진퇴양난의 절박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모세가 시퍼런 홍해를 향하여 믿음으로 하나님의 지팡이를 내어 밀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큰 동풍으로 홍해가 갈라지게 하심으로 기적적으로 길을 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게 하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그들은 모세를 하나님의 종으로 깊이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출14:31). 바울은 이 사건을 가리켜 2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3,4절은 홍해를 건넌 후의 광야생활을 말합니다. 그들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신령한 음료를 마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만나를 주신 사건과, 반석에서 물을 공급해 주신 사건을 말합니다. 신령한 식물, 신령한 음료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이를 주신 목적이 단지 육신의 배고픔과 목마름만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영적생활을 위해서 주신 것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신명기 8:2,3절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령한 음료를 마신 것은 그리스도의 역사로 보았습니다. 4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저희를 따른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동행하신 것을 말합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시기 전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행하시며 그들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배고픈 자에게는 생명의 양식이 되시고, 목마른 자에게는 영생의 샘이 되시는 분이 되십니다. 그리스도는 공급의 원천이 되셔서 인생들의 영적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소시켜 주시는 분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은혜를 어떻게 감당했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1-4절에는 '다'라는 말이 다섯번 반복되어 나옵니다. (개역 성경에는 4번 나오지만 원어 성경에는 다섯번 나옴) 이 '다'라는 말과 '다수'라는 말이 대조됩니다. 이는 이스라엘은 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다수가 불신으로 인하여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민수기 13,14장 사건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 앞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희망으로 부풀었을 것입니다. 이 때 모세는 각 지파마다 두령을 뽑아서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 돌아와서 보고하였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13:27,28,33)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현실을 바라보고 절망하며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불신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불신을 심었습니다. 백성들은 그들의 불신에 찬 보고를 듣고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 장군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그들은 열 두령의 불신에 찬 보고에 분노하며 백성들에게 믿음을 심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민14:8,9) 여호수아와 갈렙 장군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가나안 백성들이 아무리 강하게 보일지라도 잘 차려 놓은 밥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었고, 백성들에게도 이 믿음을 심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불가능에 도전하는 믿음의 용사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의 용사들을 기뻐하시고 그들만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과 멸망의 기준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냐,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 하시느냐에 있음을 배웁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데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면 일이 잘 되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모든 일이 뒤틀리고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어떤 사람이 주일도 빼먹고 열심히 일하여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러나 병이 나서 번 돈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병원에 다 바쳐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출세하여 떵떵거리며 살아보기 위해 하나님을 떠나 열심히 공부하여 고시에 합격하여 그토록 원하던 판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계속적인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자 마침내는 교통사고로 치셔서 하루 아침에 반신불수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면 인생이 잘 풀리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면 결국에는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맙니다.
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일이 잘 안되는 것 같지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결국에는 가장 좋은 길로 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손해보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이익을 보고, 패배하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승리하게 됩니다. 우리 인생은 과정 과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생의 결국이 중요한 것입니다. 인생의 결국이 축복이냐 저주냐, 멸망이냐 구원이냐, 영생이냐 영벌이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9,10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자를 기뻐하십니까? 히브리서 11:6절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믿음 뿐임을 강조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을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믿음의 사람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아니하고 불가능에 도전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상황이 힘들다고 어리석게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아니하고 범사에 감사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어떤 경우에나 기가 죽지 않고 늘 스피릿이 충만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핑계하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새 역사를 창조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어서 두려워 떠는 자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자들,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의로 죄를 짓는 자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다수라고 해서 결코 봐 주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다수를 원칙으로 하는 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다수가 행하는 길을 따라 가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의를 행하거나 죄를 지을 때도 "다 그렇게 하는데 뭐 어쩔 수 없어"라고 합리화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수니까 봐 주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민주주의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죄는 반드시 벌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노아시대에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였을 때 노아의 일곱 식구들만 제외하고 세상 모든 사람을 다 심판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과거 역사는 현재 우리에게 거울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거울을 통해서 나의 모습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고, 내 얼굴에 무엇이 묻었는지 발견하고 깨끗이 씻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과거 역사를 통해서 현재 우리의 모습을 조명해 볼 수 있고 이를 통해 삶의 지혜와 방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역사공부를 해 보면 잘한 것보다 실수한 것을 통해 더 큰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이는 우리가 이스라엘 조상들과 같이 악을 즐겨하지 않게 하려 하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으나 멸망한 이유는 그들 마음 깊은 곳에서 악을 즐겨했기 때문입니다. "즐겨한다"는 것은 "마음을 쏟고 갈구한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의 법도를 좇아 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고 세상으로 향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애굽을 그리워하고 탐욕을 부리며 지도자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7-10절에서는 그들이 구한 악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상 숭배와 간음과 주를 시험한 것과 원망이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이 사건은 출애굽기 32:1-6절에 있는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모세가 율법을 받기 위해 시내산으로 올라가서 더디 내려오자 마음이 불안해졌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애굽에서 배운 그대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 앞에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마음껏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신나게 뛰놀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도대로 사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기고, 훈련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영접하기 보다 얽어매는 것으로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도자 모세가 없자 고삐풀린 망아지와 같이 마음과 육신이 원하는대로 행하며 자행자지 했습니다. 정욕을 좇아 행하며 육신의 쾌락을 즐겼습니다. 죄에는 쾌락이 있어서 순간적으로 짜릿한 즐거움이 있지만 그 후에는 무서운 죄의식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하게 됩니다. 또 죄는 반드시 열매를 낳게 되는데 그 결국은 사망입니다 (롬6:23a). 우상 숭배는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란 하나님을 마음의 첫 자리에 모시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거부하는 제반 행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 대신에 물질이나 권세나 명예나 동역자나 자식이나 다른 것이 차지하고 있을 때 그것은 우상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상 숭배하는 자를 멸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상 숭배는 언제나 음란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민수기 25:1-5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여 함께 먹었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의 신들에게 절함으로 그들의 신인 바알브올에게 부속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으로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는 대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간음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아야 합니다(8).
9절을 보십시오.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이 말씀은 민수기 21:4-9절에 나오는 사건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많은 표적을 보고도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의심하고 주를 시험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시험했다는 것은 악한 의도를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길이 험하자 하나님과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에게 불뱀을 보내어 불평하는 입을 물게 하심으로 온 몸에 독이 펴저 죽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그들의 악한 의도를 파하셨습니다. 그들이 주를 시험한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희와 같이 주를 시험해서는 안됩니다.
원망하는 사건은 민수기 16장에 나오는 고라의 반역사건을 위시하여 여러군데 나타납니다. 원망이란 반항하는 마음을 갖고 불평하고 비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라와 그 일당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 모세에게 불만을 품고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 의해 하루 아침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를 원망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민16:11, 출16:8). 이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아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한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가를 보게 됩니다. 이러한 사건들을 성경에 기록한 목적은 말세를 사는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기 위함입니다. 말세가 될수록 사람들은 노아시대와 같이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육을 좇아 살아갑니다. 영적인 소원을 상실하고 육체가 되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만 몰두합니다. 디모데후서 4:3,4절에 보면 말세가 되면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귀가 가리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허탄한 것을 좇게 됩니다. 말세가 될수록 사람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헛된 우상을 숭배하며, 쾌락을 좇아 음란한 행위를 하며 육신의 본성을 좇아 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말세가 될수록 믿음을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은 말세가 될수록 더욱 깨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우상 숭배하지 말아야 합니다. 간음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을 시험하지 말아야 합니다.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온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경건하고 순결한 삶을 살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진정으로 자신을 이기고 환경을 이기고 이 시대를 이기고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12절은 우상의 제물에 관한 지식이 있다고 자부했던 믿음이 강한 자들에게 주는 경계의 메시지입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나는 믿음이 있으므로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시험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입니다. 이런 자들은 헛된 자부심을 가지고 영적인 투쟁을 게을리 합니다. 이런 자들은 말씀공부와 기도를 하지 않고서도 과거 신앙경륜으로 얼마든지 믿음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자들입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성장이 멈추고 결국 사단의 시험에 들어 넘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시험에 들지 않을까 조심하다 보면 혹 나도 모르게 시험에 들어서 넘어지지 않을까 염려하게 됩니다. 그러나 조금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미쁘사 어떤 경우에나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만한 마음을 품지 않고 겸손하게 주님을 의지하면 주님께서는 그를 믿고 의지하는 자를 책임지시고 돌봐주십니다. 그러나 이 약속의 말씀은 고의적으로 죄에 빠지는 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13절 말씀은 연약한 우리가 험한 세상에서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는 확신을 줍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고 연약할지라도 하나님은 미쁘사 모든 환난과 위험 가운데서도 우리를 눈동자와 같이 보호해 주시고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II.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14-33)
첫째, 우상 숭배를 피할 것 (14-22). 사도 바울은 역사의 교훈을 이야기 한 후에 이제는 고린도 교회에 대한 직접적인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피하라'는 말은 도망하라는 뜻입니다.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안전한 방법 중의 하나는 요셉과 같이 도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한 정욕을 자극하거나 영혼을 함정에 빠뜨리는 성향이 있는 모든 것에서 멀리 도망해야 합니다. 비디오 방을 피해야 합니다. 회식이 2,3차로 이어질 것 같으면 피해야 합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악한 친구들을 피해야 합니다. 이단에 빠져있는 자들과 사귀지 말아야 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우상 숭배하는 장소에 출입하며 그들의 식탁에 동참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의심스럽고 양심에 꺼리는 것은 적극적으로 피해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일을 고린도 성도들의 스스로의 판단에 맡겼습니다.
16-22절에서는 고린도 성도들이 우상의 전에 앉아서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만찬에서 잔을 마시고 떡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고귀한 몸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신 사건에 동참함으로써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구약의 제사에서 제물을 바친 자들은 제사장과 함께 제물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제단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상의 전에서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우상의 제단에 참예하는 것이 됩니다.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요 우상의 제물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요 그 배후에 역사하는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방인의 제사에 참예하여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그 배후에 역사하는 귀신과 교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제를 나누는 동시에 귀신들과 교제를 나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을 시기나게 하여 무서운 진노를 받게 될 것입니다. 질투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감정 중에서 가장 강렬한 감정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만큼 우상 숭배를 미워하시고 또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고 계심을 말해 줍니다.
둘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할 것 (23-33). 23, 24절 말씀은 우리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자기 유익을 위해서 쓰지 않고 남의 유익을 위해서 써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자신의 행복과 번영보다 타인의 행복과 번영을 더 생각해야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사랑의 속성입니다.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주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24:1). 또한 불신자가 초청한 경우에도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먹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누가 그 음식이 우상의 제물이라고 말하면 그렇게 말한 사람의 약한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나의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인해 판단을 받거나 비방을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29,30).
구정이 곧 다가오고 있습니다. 구정에는 불신자 가정에서는 조상들에게 제사상을 차려놓고 절을 합니다. 그리고 온 식구가 함께 음식을 먹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만일 우리가 그 제사에 참예하여 제사한 바로 그곳에서 제사 음식을 먹는다면 이는 귀신에게 예배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제사에 참예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피해야 됩니다. 그러나 제사가 다 끝난 후에 그 제사음식이 다른 음식과 함께 섞여서 가족 친지들이 함께 식사를 할 경우에는 음식을 먹어도 괜찮습니다. 다만 제단에 참예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31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이 말씀은 신앙생활의 대 원칙이 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는 것은 인생의 제일되는 목적입니다. 인간은 불멸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고귀한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인간은 짐승과 같이 육의 것만을 위해 사는 저차원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고차원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이 불멸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때 비로소 인간답게 살 수 있고 진정으로 의미있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아니할 때 썩어 없어질 인간이나 금수나 버러지를 섬기는 우상 숭배자로 전락하게 되고, 육신의 정욕을 추구하는 쾌락주의자가 되어 버립니다 (롬1:21-25).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은 하찮게 보이는 먹고 마시는 일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은 신앙과 생활이 분리된 생활이 아니라 일치된 생활입니다. "무엇이든지 다"는 생활 전반에 걸쳐서 예외없이 다 하나님의 영광을 하라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든지 직장에 다니든지 결혼을 하든지 돈을 벌든지 양을 치든지 운동을 하든지 청소를 하든지 잠을 자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는 것은 소극적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거치는 자가 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말이나 행동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실족할 수 모든 원인을 제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32). 또한 적극적으로는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함으로 그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33).
우리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항상 손해만 볼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면 일시적으로 손해볼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우리를 도와 주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승리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은 진정으로 행복을 얻는 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으며, 자신도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불멸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함으로써 영광스러운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