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제 8 강
교회내의 질서와 사랑
말씀/ 고린도전서 11:1-34
요절/ 고린도전서 11: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사도 바울은 이때까지 고린도 교회내에 있는 분쟁 문제(1-4장), 도덕 문제(5-7장), 우상의 제물에 관한 문제(8-10장)를 다루었습니다. 11-14장까지는 교회내의 집회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11장 말씀은 교회내의 질서와 사랑에 관한 문제입니다. 어떤 모임이건 그 모임이 잘 유지되고 발전하려면, 그 모임에 합당한 질서와 모임의 구성원 상호간에 우애와 사랑이 있어야 하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일반적인 모임과는 달리 진리의 말씀에 기초한 거룩한 모임이요, 동시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기초한 사랑의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내에는 말씀에 기초한 분명한 영적 질서와 영적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영적 생명을 유지할 수 있고, 사회에 정신적, 영적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임이 어떤 모임이 되어야 하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Ⅰ. 교회내의 질서 (1-16)
첫째, 그리스도를 본받으라 (1). 1절은 8-10장까지의 논제를 결론짓는 말씀인 동시에 11장부터 전개되는 새로운 주제의 서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한 말의 진정한 의미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애쓰는 것과 같이, 너희도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기에 힘써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본받기에 힘썼습니다. 특히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권리를 포기하시고 한없이 낮아지셔서 죄인들을 섬기신 것 같이, 믿음이 약한 형제들을 사랑으로 품고 섬기고자 애를 썼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바로 이런 태도를 본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자기를 기쁘게 하기 보다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자 애를 쓸 때 그 모임은 자연히 은혜와 사랑과 평화가 차고 넘치는 천국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 자기 유익을 구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고자 할 때 그 모임은 자연히 불화와 갈등, 원망과 불평이 가득차게 되어 지옥이 되고 말 것입니다.
모든 다툼과 불화와 판단과 불평의 원인은 그리스도를 본받지 않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개인의 신앙생활과 복음 사역의 표준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구속 역사를 완성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으며, 영생에 이를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면에서 본을 보여 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 자취를 따라 오도록 하셨습니다 (롬8:29, 벧전2:21). 예수님은 섬기는 종이 되셔서 각종 냄새나는 죄인들을 섬기시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섬기는 종의 생활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막10:43-45). 또한 예수님은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시고 하나님께 복종하실 뿐만 아니라 죄인들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친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막8:34). 예수님의 말씀이 언제나 생명력이 있고 만고불변의 진리가 되는 것은 말만 하신 것이 아니라 친히 실천하심으로 본을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바로 이 예수님을 본받는 생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을 때 우리의 내면에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형상이 조각됩니다.
개인의 신앙생활 뿐만 아니라 복음 사역의 중심도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신앙 공동체가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중심이 되지 않고 구원파와 같이 구원이 중심이 된다면 교회 내에 여러 가지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구원파는 한번 회개하고 구원받으면 그것으로 끝나기 때문에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고 또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 애써 노력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런 생활에 신앙 성장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이 성장하지 않으면 영적 기쁨도 있을 수 없고 자연히 육을 좇아 행하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복음 전파를 통해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구원받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린 아기가 태어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음식을 먹고 끊임없이 성장해야 하는 것과 같이, 영적으로 태어난 자도 하나님의 말씀을 먹음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 공동체의 구성원 개개인이 예수님을 본받기에 힘쓸 때 그 모임은 은혜와 사랑과 생명력이 차고 넘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본받는 생활을 하지 않을 때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생활을 하게 되어 그 모임은 냉랭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서로 판단하고 정죄하게 되어 분열과 분쟁이 생기게 됩니다. 특히 영적 지도자가 그 모임에 끼치는 영향력은 지대합니다. 만일 그 모임의 영적 지도자가 예수님을 본받기에 힘쓰기 보다 사업적이 되고 인간적이 되고 물질적이 될 때 그 모임은 인간적인 모임으로 전락하고 말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본받기에 힘씀으로서 우리 모임이 은혜와 사랑과 생명력이 차고 넘치는 모임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만민 구원 역사를 능히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교회 내의 영적 질서 (2-16).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책망하기 전에 먼저 2절에서 그들을 칭찬합니다. 이는 그들이 모든 일에 목자 바울을 기억하고 또 바울이 그들에게 전하여 준 그대로 유전 곧 신앙생활의 규범들을 지키기에 힘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3절부터 그들 중 몇몇 여자들이 집회시에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은 것으로 인해 책망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내에는 여자 성도들 가운데 집회시에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고 예배 드리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캐톨릭에서는 집회시에 여자들이 너울을 쓰고 미사를 지냅니다. 당시 고린도 여자들은 외출을 할 경우에 페프럼(Peplum)이라는 천으로 얼굴이나 전신을 가리고 다녔습니다. 옛날 동양 사회에서는 여자들은 천으로 얼굴과 전신을 감싸고 다녔습니다. 오늘날도 중동에서는 그렇게 합니다. 너울은 여인의 정숙과 남편에 대한 순종을 상징했습니다. 그러므로 너울을 벗어버리는 것은 정숙에 대한 요구와 남편에 대한 순종을 거부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 여자 성도들이 왜 머리에 너울을 쓰는 것을 거부했을까요? 실내에서 너울을 쓰는 것이 너무 귀찮았을까요? 아니면 더운 날씨에도 쓰는 것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남녀 평등을 주장하며 여권을 신장하기 위해서였을까요? 그들은 예배시에 남자는 안 쓰는데 불공평하게 왜 여자만 써야 되는가 반발했는지 모릅니다. 고린도시는 민주주의를 꽃피운 헬라 문화권에 있고 또 항구도시로서 개방적이기 때문에 이에 영향을 받은 몇몇 여자들이 여성 해방을 부르짖으며 의식화 운동을 벌렸는지 모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여자가 예배시에 머리에 왜 반드시 쓰지 않으면 안되는가를 세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풍습상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3-6). 오늘날 여성들은 대체적으로 머리를 짧게 깎고, 남자들 중에는 머리를 길게 기르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보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하기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여성의 남성화와 남성의 여성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여자들은 머리를 길게 길렀으며 남자들은 머리를 짧게 깎았습니다. 3절은 여자들이 예배시에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할 이유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각 남자'는 개개인의 남자가 아니라 모든 남자라는 뜻입니다. 머리는 순종과 질서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남자의 머리가 되십니다. 이는 모든 남자는 그리스도께 순종함으로써 질서를 지켜야 됨을 말해 줍니다. 또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는 것은 남자와 여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하지만 질서상 남자가 먼저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도 성자와 성부는 동등하지만 신성의 질서를 위해 성자가 성부께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만일 남자가 머리에 너울을 쓰고 예배를 드리게 되면 남자의 머리인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이 되고, 여자가 머리에 쓴 것을 벗으면 여자의 머리인 남자를 욕되게 하는 것이 됩니다. 여자가 머리에 쓴 것을 벗으면 머리 민 것과 다름없이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로마에서는 노예 여자의 머리를 밀었으며, 유대에서는 간음한 여자의 머리를 밀었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민다는 것은 여자로서의 미덕을 잃어버린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여자가 부끄러움이 되지 않으려면 예배시에 머리에 너울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풍습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자가 질서를 지킴으로서 여자로서의 미덕을 잃지 말아야 된다는 사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일합니다.
둘째로, 여자가 예배시에 머리에 너울을 써야 하는 것은 창조의 질서 때문입니다(7-12). 7절을 보십시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하나님은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창1:27). 남자와 여자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지만 남자는 사람의 대표로서 하나님의 권위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지만 남자의 영광입니다. 왜냐하면 여자는 남자에게서 났고, 또 여자는 돕는 배필로서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8,9).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이 임재하는 예배에서 반드시 그 머리에 너울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10).
그러나 이렇게 하다 보면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된 것처럼 생각하여 남자들은 여자들을 하인 부리듯 하기가 쉽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11,12절에서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종속적인 관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관계임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주안에서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주안에서 남자와 여자는 동등하며 상호의존적입니다. 어느 한편이 다른 한편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또 삶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는 평등하지만 질서는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현대 여성들은 여자가 남자의 돕는 배필로 지음을 받았다는 창세기의 가르침에 대해서 반발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성이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의 질서를 좇아 사는 것입니다. 여성이 결혼하여 남편을 잘 섬기고 자녀를 양육하며 남편이 하나님 안에서 받은 바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동역을 할 때 가정에 질서가 생기고 행복이 깃들게 됩니다. 그러나 여자가 창조의 질서를 어기고 돕는 배필로서의 의무를 소홀히 할 때 그때부터 불행의 구렁텅이로 굴러 떨어지게 됩니다.
셋째로,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는 것은 본성을 거스리는 행위가 됩니다 (13-16). 우리의 본성은 남자가 긴 머리를 하면 꼴불견으로 여겨지지만, 여자가 긴 머리를 하면 여성답게 보이고 영광으로 생각됩니다. 이는 여자의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자가 머리에 너울을 쓰는 문제에 대해서 변론하려고 하는 자들에게 사도들과 교회의 권위를 내세워 그들의 입을 막았습니다(16).
II. 성도간의 사랑 (17-34)
사도 바울은 교회내의 질서 문제를 다룬 후에 애찬 문제로 고린도 교회내에 야기되고 있는 문제를 다룹니다. 바울은 먼저 그들의 애찬 모임이 유익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해로움이 되고 있다고 책망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애찬 문제로 인해 서로 분쟁이 있기 때문입니다. 19절은 다분히 풍자적입니다.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교회내에 편당적인 분쟁이 있어서는 안되지만 인간의 부패한 성격상 분쟁이 있을 수밖에 없고, 이런 분쟁을 통하여 참과 거짓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옳다 인정함을 받는다"는 것은 ( ) 금을 불 속에서 제련하여 순금을 색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참된 믿음을 가진 자들은 이런 분쟁을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렇게 분쟁이 있는데 그들이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인들은 주일마다 성찬을 거행하였는데 성찬을 거행하기 전에 애찬을 가졌습니다.
애찬이란 아가페(agape)인데 이는 함께 음식을 먹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공동식사를 말합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 음식을 가져와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음식을 먹는 가운데 진실된 사랑의 교제를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과 인정이 메마르고 삭막한 세상 가운데서 진실된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힘이 되고 은혜가 됩니까? 이런 참된 사랑의 교제는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이 없이는 결코 참된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본질은 자기 희생에 있습니다. 또한 겸손히 낮아져서 섬기는데 있고, 나누어 주고 베푸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실된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지려면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희생적으로 섬겨야 되며, 높은 자가 겸손히 낮아져서 낮은 자를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부자는 부자들끼리 모여서 여러가지 맛있는 음식들을 가지고 와서 보라는 듯이 먹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많이 먹어서 설사가 났으며, 어떤 사람은 너무 포도주를 많이 마셔서 취하여 헛소리를 하며 다녔습니다.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은 라면을 가지고 와서 한쪽 구석에서 눈물과 함께 먹었습니다. 그것조차 없는 자는 쓰라린 배를 움켜쥐고 원치 않게 금식을 해야 했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내에 부자와 가난한 자들 사이에 파벌이 생겼습니다. 부자들은 멋있는 사륜마차를 타고 와서 화려한 옷을 입고 보란 듯이 뽐내면서 다녔고, 가난한 자들은 기가 죽어서 교회 한쪽 구석에 앉았다가 모임이 끝나자마자 사라졌습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업신여기고, 가난한 자들은 소외 의식을 느끼면서 부자들을 원망하고 저주했습니다. 애찬 모임은 사랑의 잔치가 아니라 자기를 자랑하고 뽐내는 잔치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그들을 심하게 책망했습니다. "너희는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22) 그들은 주의 만찬을 타락시키고, 교회의 신성을 더럽혔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형제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죄를 범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성만찬의 참된 의미를 이야기 함으로써 성도간에 사랑을 회복할 수 있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성만찬의 규례는 바울이나 머리 좋은 어떤 사람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것을 바울이 받아서 고린도 성도들에게 전해 준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정하셨기 때문에 인간이 함부로 범해서는 안되는 신성하고 거룩하고 절대적인 것입니다. 또한 성만찬을 제정하신 때도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 곧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날 밤에 매우 엄숙한 분위기 가운데서 이루어 졌습니다. 그때는 이스라엘이 출애굽의 역사적인 사건을 기념하는 유월절 바로 전날이었습니다. 그날에는 식구들이 모여서 양고기를 잡아 그 피는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는 먹었습니다. 그리고 발효되지 않는 떡인 무교병을 구워서 먹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이 유월절 식사를 하시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몸을 찢기시고 보배피를 흘리실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받아 먹으라(개역 성경에는 없으나 스테반 원어 성경에는 있음)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떡을 뗀다는 것은 떡을 부숴뜨린다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고귀한 몸을 부숴뜨린 것으로서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다 부숴뜨리시고 자신을 온통 우리에게 내어 주셨습니다.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25) 새 언약은 구언약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구언약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입니다. 새 언약은 하나님께서 새 이스라엘, 곧 예수 믿는 자들과 맺은 언약입니다. 구언약은 돌 판에 새겼지만 새 언약은 마음판에 새겼습니다. 구언약은 짐승의 피로 인쳤지만 새언약은 예수님의 피로 인쳤습니다. 짐승의 피는 불완전하고 일시적이며 장차 올 참된 것의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아무 죄가 없는 순결한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서 완전합니다. 그러므로 죄사함의 효력도 완전하고 영원합니다. 구언약은 순종을 요구했으나 인간이 연약하여 순종할 힘이 없어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새언약은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친히 그 몸으로 담당해 주시고 우리에게 믿음만을 요구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행위가 전혀 필요 없는 것으로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베푸신 그 크신 사랑을 단순히 믿고 영접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피로 세우신 새 언약에는 죄인들을 향하신 한없는 용서의 사랑과 희생적인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고 잔을 나누어주신 성만찬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는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그 고귀한 몸을 부숴뜨리시고 보배로운 피를 흘리신 십자가의 사랑을 영접하고 그 사랑으로 성도간에 서로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만찬의 의미는 주님과의 사랑의 교제인 동시에 주안에서 성도간에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념한다"는 말은 그 뜻을 마음에 새기고 새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희생으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마음에 새기고 새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전한다'는 것은 ( ) 선포하는 것(proclaim)을 의미합니다. 이는 구원의 선포요, 죄사함의 선포요, 하나님과의 화해의 선포입니다. 전한다는 것은 현재형으로서 계속적인 뜻이 있습니다. 복음의 선포는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만찬은 이렇게 거룩하고 신성한 것이므로 성만찬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게 됩니다.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됩니다. 이는 자기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만찬을 행하기 전에 먼저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진실되게 고백하고 회개한 후에야 성만찬에 참예해야 하는 것입니다.
30-32절은 성만찬에 대한 그릇된 태도 때문에 그들 가운데 허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죽은 자들도 많이 생겼음을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합니다. 만일 우리 자신을 살폈으면 이러한 심판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은 주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시는 주의 징계로서 이는 최후 심판 날에 세상 사람들과 함께 심판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33,34절에서 결론적으로 권면합니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기다린다는 말에는 받아들인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영접하고 섬기라는 것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너무 배가 고파서 참지 못하겠으면 집에서 먹으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들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입니다.
교회는 진리의 말씀에 기초한 분명한 영적 질서와 함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에 기초한 영적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풍성한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간에 사랑이 메마른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영접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습니다. 이때 그 모임은 은혜와 사랑이 넘치고 생명력이 넘치는 모임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영접하고, 이 사랑을 기초로 서로 진실된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임이 참된 사랑이 메마른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