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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3:1-13(사랑은…)

by Mark Yang   08/18/2019   1Corinthians

Message


고린도전서 제 10 강


사랑은 …


말씀/ 고린도전서 13:1-13
요절/ 고린도전서 13:4a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본문은 아름다운 사랑의 찬가로서 사랑의 시편이라고 일컫습니다. 이 사랑의 시편은 사람의 심령을 감동시키기 때문에 모든 세대를 통하여 교회의 특별한 찬양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우리도 본문을 사랑하여 암송하기도 하고 즐겨 노래를 부르기도 합니다. 그만큼 사랑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중요합니다. 경제학자 사무엘슨은 인간에게 여러 가지 많은 문제가 있는 것 같지만 문제의 근원을 따지고 또 따지고 보면 경제 문제, 즉 돈 문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을 물질적인 측면에서만 보았을 뿐입니다. 인간의 문제는 따지고 따지고 보면 결국 죄 문제요 사랑 문제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부족함이 없이 모든 것을 소유하였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인간은 사랑을 먹고사는 존재입니다.
사도 바울은 12장에서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말한 후에 13장에서 성령의 은사를 활용하는 원리가 되는 사랑에 대해 기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모든 것 가운데서 사랑이 왜 중요하며, 또 사랑의 특성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참된 사랑이 결여된 시대입니다. 우리는 참된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참된 사랑이 무엇인가를 배워서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사랑이 없으면 (1-3)
1-3절은 "사랑이 없으면" 이라는 가정 아래 사랑이 모든 성령의 은사보다 뛰어나다는 사랑의 우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사람의 방언'이란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땅의 언어를 말하고, 천사의 말은 영적이고 고상한 하늘의 신비스러운 언어를 말합니다. 또한 꽹과리는 악기 중에서 가장 저급한 악기로서 우리의 신경을 건드리며 고막을 상하게 하는 날카로운 불협화음의 소리입니다. 이렇게 땅과 하늘의 모든 언어를 아름답고 논리 정연하고 유창하게 구사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듣기 싫은 소음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을 잘하는 목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조리 있게 말씀을 잘 가르치고 멋있는 메시지도 전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무리 말을 잘하고 멋진 메시지를 전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할 뿐이라고 합니다. 사랑이 없는 말이나 메시지는 은혜도 없고 감동력도 없고 오히려 시끄럽고 피곤하게만 할뿐입니다. 사랑이 없는 말은 아무리 옳다 할지라도 반발심이 생기고 때로는 마음에 상처가 생깁니다. 또한 아무리 미사여구를 많이 사용해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생명력과 호소력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말은 마치 계모의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비록 말은 잘 못한다 할지라도 사랑으로 하는 말은 힘이 있고 감동력이 있습니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이 사투리로 아무 조리가 없이 말한다 할지라도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는 말은 사람의 마음을 찡하게 감동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사랑으로 하는 말은 책망을 해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를 볼 때 말 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중요함을 배웁니다. 사랑이 있으면 말을 잘 못해도 좋은 성경 선생이 될 수 있고 좋은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좋은 목자는 말을 잘하는 목자가 아니라 사랑이 많은 목자입니다. 사람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본문에서 말하는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헬라어에서는 사랑이란 단어를 세 가지로 쓰고 있습니다. 아가페( )와 필리아( )와 에로스( )입니다. 아가페는 신적인 사랑을 말하고, 필리아는 부자나 형제나 친구간의 인정적인 사랑을 말하며, 에로스는 남녀간의 육적이고 감각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아가페라는 단어는 이교도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단어로서 전적으로 하나님께로서 나온 하나님의 특별 계시 언어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요한복음 3:16절에 가장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들을 구원코자 하시는 구원의 사랑이요, 독생자도 아낌없이 내어 주신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예언하는 능'이란 미래사를 예언하는 것뿐만 아니라 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능력입니다. 또 비밀은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을 말하며, 지식은 계시된 진리에 대한 지성적 이해나 인식을 의미합니다.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풀어서 사람들의 곤고한 영혼을 풍성하게 채워 주고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정보와 지식 사회에서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솔로몬은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았기 때문에 영적 세계에 대해 논했고, 삶의 지혜가 담긴 지혜서를 썼으며, 천문학, 자연과학, 정신세계 등 모든 분야에 대해 논할 수 있었습니다. 또 우리에게 산을 옮길 만한 큰 믿음이 있어서 큰 능력의 역사를 이룰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는 지성과 능력을 갖춘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I am nothing)고 합니다. 이는 아무리 영적인 은사들과 뛰어난 학식과 능력을 소유했다 할지라도 그것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것이 아닐 때 무가치하다는 것입니다.
3절에서는 구제하는 자선 행위나 순교 행위까지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불쌍한 사람을 돕는 구제는 참으로 아름답고 가치 있고 보람되고 위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을 구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희생이 요구됩니다. 우리가 조그만 희생을 하기도 힘든데 전 재산을 털어서 구제한다면 얼마나 큰 희생입니까? 이는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곧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기가 사랑 없이 행할 수도 있습니다. 구제하는 일을 허영이나 명예심에서 할 수 있습니다. 국회의원에 당선되기 위해서 할 수 있습니다. 그 이름이 신문에 크게 나서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기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자기 만족이나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큰 희생이라 할지라도 사랑의 동기에서 하지 않는다면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는 것은 순교로서 최고의 희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이같이 희생적인 사람을 영웅시합니다. 안중근 열사, 전태일 열사라고 부르며 기념비도 세우고 기념 사업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순교 행위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목자 생활을 하기 위해서 물질과 시간과 젊음과 정열을 다 바쳐 많은 희생을 합니다. 또 선교사님들은 자기의 꿈을 버리고 명예를 버리고 낯선 이국 땅에서 무시당하며 많은 희생을 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이 헛수고에 불과하게 됩니다.
이상을 살펴 볼 때 사랑은 방언의 은사보다 낫고, 예언과 지식과 능력의 은사들보다 나으며, 자선 행위나 순교 행위보다도 낫습니다. 이를 볼 때 사랑은 그 어떤 것보다도 우월하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소홀히 하거나 무시해서는 안되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우리 몸에 있어서 생명과 같습니다. 생명은 보이지 않지만 없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몸에 생명이 없다면 시체에 불과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영적 생활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랑 없이 구제 헌금을 했다면 그것은 값싼 동정에 불과하고, 사랑 없이 헌신한다면 그것은 위선일 뿐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정말 부끄러운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면 아름다운 생명의 열매를 풍성히 맺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랑으로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양도 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구제 헌금도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세계 선교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Ⅱ. 사랑이란 (4-7)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사랑이 없으면"이라는 가정을 통하여 사랑의 필요성에 대해서 역설했습니다. 이제 그는 사랑이란 무엇인지 사랑의 특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범죄한 사람에 대해서 오래 참는 것입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세월이 흘러가도록 그냥 버려두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범죄한 자를 당장에 심판하지 않고 허물과 죄를 끝까지 감당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우리는 오래 참고 도와주고자 하다가도 계속 반발하고 문제를 일으키면 신경질이 나고,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 때문에 정죄하고 소망을 끊기 쉽습니다. 이는 고통을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사람을 도울 수 없게 됩니다. 사람을 돕고 키울려면 오래 참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여기에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 따르지만 이런 고통이 없이 사람을 구원할 수 없고 키울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고통 가운데서 얼마나 오래 참으셨습니까? 로마서 2:4절은 죄인들을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오래 참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본성으로는 불가능하고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덧입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고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벧후3:9). 하나님은 이 사랑으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 하시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오래 참으십니다(마12:20).
우리는 아브라함을 키우신 하나님을 통해 오래 참으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신앙 초기에 부르심의 은혜에 감사하여 가는 곳마다 감사의 단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기근이 들어 살기 힘들어지자 믿음의 중심을 지키지 못하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하다가 아내까지 빼앗겼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늙은이라 노망이 들어서 정말 소망이 없구나" 하며 소망을 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바로를 책망하시고 아브라함의 실수와 허물을 크신 사랑으로 감싸주셨습니다. 그후에도 아브라함은 자식을 빨리 주지 않는다고 담요를 뒤집어쓰고 장막방에 드러누워 버렸습니다. 또한 그는 믿음의 조상의 체면도 버린 채 여종 하갈을 첩으로 삼아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이후 10년 동안이나 이스마엘과 어울려 만화책이나 보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을 포기할 수밖에 없지만 끝까지 포기치 않으시고 참고 키우셨습니다. 이렇게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소망 없던 그가 믿음의 조상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을 키우고자 할 때 우리는 오래 참기 힘들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오래 참으셨는가를 생각할 때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둘째, 사랑은 온유합니다. 온유한 마음은 문자 그래도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 포용성 있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온유한 마음은 어떠한 사람도 품고 섬깁니다. 이기적인 사람, 삐딱한 사람, 교만한 사람,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사람도 다 품고 섬깁니다. 사람을 돕다 보면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나게 됩니다. 중풍이, 정욕이, 절망이, 교활이 등 이런 사람들을 품고 섬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이런 사람들을 다 품고 섬깁니다. 그래서 마음이 온유한 사람 곁에는 항상 갖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위로를 얻고 쉼을 누리고 힘을 얻습니다. 마음이 온유한 사람은 사람을 얻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부러워하고 마음이 온유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질이 못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함부로 말하고 신경질을 부리고 상처를 줌으로써 문제에 빠지게 하고 실족시키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온유하지 못한 자신 때문에 고통하고 절망하곤 합니다. 그러나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와서 배우라."(마태12:29) 예수님은 온유의 표상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장 높고 존귀하신 분이시지만 가장 낮고 천한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섬기는 종이 되셔서 냄새나고 교만한 죄인들을 다 품고 섬기셨습니다. 마침내는 죄인들의 죄를 그 몸으로 담당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모진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 온유해 질 수 있습니다. 온유한 마음은 결코 타고난 기질적인 성품이 아닙니다. 이는 실생활 가운데서 끊임없이 예수님을 배우고 연단 받는 것을 통해서 맺어지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온유한 마음을 배웠을 때 하나님의 양무리를 품고 섬기는 큰 목자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본래 율법적이고 날카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고자 몸부림쳤을 때 유모와 같이 부드럽고 온유한 목자가 되어 많은 종류의 사람들을 품고 섬기는 대 목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라고 권면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은 온유한 것입니다.
셋째, 사랑은 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보면 자신도 원치 않게 시기심과 질투심에 사로잡혀 신음할 때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 되면 기뻐해야 할 텐데 이상하게도 아랫배가 아파 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잘못되기를 은근히 바랍니다. 이것은 죄악된 본성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이 잘되는 것을 보면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투기와 사랑은 종이 한 장 차입니다. 투기라는 단어에는 열심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사랑과 투기는 둘 다 열심이지만 사랑은 남을 향해 열심이고, 투기는 자기를 향해 열심인 것이 다릅니다. 투기는 언제나 남보다 우위에 두려는 욕망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이와 반대로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섬기는 것입니다. 투기는 남의 발을 걸어서 넘어뜨리는 것이지만, 사랑은 남이 잘 갈 수 있도록 엎드려 디딤돌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넷째, 사랑은 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4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자랑이란 타인으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얻기 위해 애쓰는 모든 형식의 갈망이요, 교만은 자랑의 원인이 되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사람들은 별 내용이 없으면서 자기를 자랑하고 우쭐되며 과장하여 드러내기를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부를 자랑하고 가문을 자랑하고 남편을 자랑하고 자식을 자랑합니다. 학력을 자랑하고 권세를 자랑하고 실력을 자랑하고 업적을 자랑합니다. 아파트를 자랑하고 차를 자랑하고 농짝을 자랑하고 심지어는 개를 자랑합니다. 이렇게 열심히 자기를 자랑하다 보면 허탈해집니다. 그러나 사랑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은 자기를 내 세우지 않고 상대방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속성도 예수님에게 가장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자기를 낮추고 남을 섬기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다섯째,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 것입니다.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바울은 5절에서 사랑의 또 다른 속성 4가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겨 존중하고 예의바른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또한 사랑은 자기의 유익보다 남의 유익을 더 생각하고 남을 위해 손해보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 중심적이 아니라 다른 사람 중심적입니다. 또한 사랑은 감정대로 화를 내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사랑은 악을 도모하거나 계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악한 일을 기억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생각한다"는 단어는 계산하다, 숙고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는 남에게서 받은 해나 상처를 마음 속 깊이 묻어 두고 하나 하나 헤아리면서 원망하고 비판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사람들은 남에게서 받은 은혜는 별로 기억하지 않고 받은 바 상처는 잘 기억합니다. 그래서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돌에 새긴다는 속담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정 반대로 원한은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으로부터 해나 상처를 받았을 때 "어디 두고 보자"하며 칼을 갈면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갚고자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악을 갚아야 할 부채로 기입하는 대신에 완전히 기억 속에서 삭제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6). 여기서 불의는 개인적인 악이나 허물이 아니라 공적인 면에서의 불의입니다. 진리는 불의와 대조하여 의를 뜻합니다. 사랑은 공적인 불의를 묵인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공의의 편에 서는 것이요, 진리 편에 서서 의를 행하기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일곱째,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7). '모든 것'은 어떤 경우에나 '항상'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참는다는 것은 성가심과 고통을 묵묵히 참는 것을 의미하고, 견딘다는 것은 고난과 박해를 대항하여 끈기 있게 견디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어떤 경우에도 참으며 어떤 경우에도 믿으며 어떤 경우에도 소망을 끊지 않으며 어떤 경우에도 견디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도와주어도 변화가 없고 여전히 죄악된 양들을 보면 소망을 끊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끝까지 포기치 않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에 대한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사랑의 위대한 힘입니다. 사랑은 조급한 사람을 인내의 사람으로, 날카로운 사람을 온유한 사람으로, 이기적인 사람을 희생적인 사람으로, 인본적인 사람을 복음적인 사람으로 바꿔 놓습니다. 이 사랑의 힘이 성급한 베드로를 오래 참는 자로, 날카롭고 배타적인 요한을 사랑의 사람으로, 불신적인 도마를 믿음의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사랑의 힘은 위대합니다.
둘째로, 사랑은 말에 있지 않고 행함에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말이 있다면 "사랑합니다"일 것입니다. 또한 가장 거짓되게 사용되는 말도 "사랑합니다"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도 없으면서 입으로만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입으로만 하는 사랑은 거짓된 사랑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권면 했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한1서3:18) 사랑은 말에 있지 않고 행함에 있습니다.

Ⅲ. 사랑은 영원하다 ( 8-13)
8절을 보십시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떨어진다'는 것은 나뭇잎이나 꽃이 하나 하나 떨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예언이나 방언이나 지식은 한 때 필요에 의해서 번창하다가 필요 없으면 떨어집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런 것들은 아무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은 이 세상에서나 하나님 나라에서도 언제까지나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영원합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모든 지식이나 모든 믿음의 역사들도 부분적이고 상대적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온전하고 완전하고 절대적입니다. '온전한 것'이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때는 부분적이고 상대적인 것들은 다 폐하여지고 맙니다. 아침해가 돋으면 뭇별이 자취를 감추는 것처럼 그때에는 모든 부분적이며 상대적인 것은 다 폐하여지게 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내가 어렸을 때는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여기서 '어렸을 때'란 사랑이 없을 때를 말합니다. 사랑이 없는 자는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영적으로 미숙아입니다. 이런 자는 어린아이와 같이 경쟁하고 시기하고 감정적이고 자기 자랑을 일삼습니다. 이런 자는 말하는 것이나 깨닫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유치하고 자기 중심적입니다. '장성한 사람'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은 자입니다. 이런 자는 영적으로 성숙하여 남을 잘 이해하고 섬기고 베푸는 삶을 삽니다. 사람이 나이가 많고 신앙 경륜이 많다고 해서 성숙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지 아니할 때 어린아이의 상태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어렸을 때에는" 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 그는 율법적이고 날카로웠으며 모든 것이 인간적이었고 자기 중심적이었습니다. 바울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 우리에게 큰 위로와 희망을 줍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장성한 사람이 되자 어린아이의 일이 부끄러워 이를 버렸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버렸습니다. 쓸데없는 자존심과 권위 의식을 과감히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선명하게 보지 못하고 거울로 보는 것과 같이 희미하다는 것입니다. 당시는 거울이 잘 연마되지 않은 청동거울이었기 때문에 희미하게 보이고 수수께끼처럼 알쏭달쏭하게 보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다가도 때로는 희미하게 보여서 주님의 사랑을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또 우리가 천국에 가게 되었을 때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것 같이 인격적으로 분명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그 사랑에 대하여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13절은 결론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믿음도 영원하고 소망도 영원하며 사랑도 영원하지만 이중 사랑이 제일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사랑이 믿음과 소망의 근거가 되고, 믿음과 소망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믿음과 소망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나 사랑은 남을 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믿음도 있어야 하고 소망도 있어야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믿음의 가마를 타고 신랑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갔는데 사랑이 없어서 신랑을 만나지 못했다." 믿음도 있고 소망도 있지만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근본 문제는 사랑 문제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사는 존재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추구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하고 윤택하게 하고 풍성하게 합니다. 사랑은 우리 인생을 값지게 하고 가치 있게 하고 위대하게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을 다 소유했다 할지라도 우리의 삶은 무미건조하고 무가치하고 사막과 같이 메마른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랑이 최고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참된 사랑이 없습니다. 내 속에도 없습니다. 참된 사랑은 하나님에게서만 나옵니다. 우리는 본래 참된 사랑을 알지 못해 곤고하고 허무하고 불만족한 가운데서 참된 사랑을 찾아 방황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죄를 짓고 마음의 상처를 안고 괴로워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사랑을 보여 주심으로 비로소 사랑을 알고 참 만족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우리는 인생을 살아 나가면서 구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지식도 구해야 되고 능력도 구해야 되고 지혜도 구해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절실하게 구해야 할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 모두가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배움으로써 사랑의 목자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해 울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어주는 사랑의 사도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