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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4:1-40, 16:1-24(예언을 사모하라)

by Mark Yang   08/18/2019   1Corinthians

Message


고린도전서 제 11 강


예언 곧 말씀을 사모하라


말씀/ 고린도전서 14:1-40, 16:1-24
요절/ 고린도전서 14:1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사도 바울은 13장에서 우리 믿는 자들이 사모해야 할 참된 사랑에 대해서 노래했습니다. 이 사랑의 시는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신비한 영적 세계로 인도해 줍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로 하여금 참된 사랑을 소유하고자 하는 강한 영적 소원을 갖게 해 줍니다. 14장은 고린도 교회내에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방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성령의 은사 중에서 방언을 중요시하고 방언 못하는 자를 판단하고 정죄했던 것 같습니다. 방언으로 인해 교회내에 무질서가 생기고 인간갈등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교회의 덕을 세워야 함을 역설하고, 모든 것을 질서 가운데서 행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방언 문제는 오늘날에도 교회를 무질서하게 하고 참된 신앙을 흐리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왜 방언보다 예언 곧 말씀을 사모해야 하는가를 살펴 보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신앙이 샤마니즘적인 신앙이 되지 아니하고 말씀이 기초한 신앙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덕을 세우라 (1-25)
1절은 13장과 14장을 이어 주면서 14장의 전제가 되는 말씀입니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구하라'는 말은 사냥군이 짐승을 좇음 같이 각박하게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13장에서 살펴 본 바대로 사랑은 그 어떤 은사보다도 더 큰 가치를 지니고 있으므로 사랑을 소유하고자 각박하게 애를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돈을 벌고자 각박하게 애를 쓰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고자 각박하게 애를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게 될 때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으며,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많은 사람들이 예언을 점치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예언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제사장은 백성들의 대표로서 백성들의 죄와 허물을 짊어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중보자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반면에 선지자는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회개를 촉구하는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을 때는 하나님께서 장차 기근과 질병과 전쟁으로 심판하실 것을 경고했습니다. 이 때문에 선지자는 미래의 사건을 예언하는 예언자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곧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대언자라는 뜻입니다. 청와대에는 대통령이 한 말을 대신 전달하는 대변자가 있습니다. 대변자는 자기 뜻을 말하지 아니하고 대통령의 뜻을 전달합니다. 이와 같이 예언자도 자기 뜻을 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을 사모하라"는 것은 말씀의 뜻을 깨닫고 가르치기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말씀 속에는 이미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어 있기 때문에 말씀의 뜻을 깨닫고 가르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과 말씀임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사랑과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만일 사랑은 있는데 말씀이 없다면 그 사랑은 사람을 병들이고 못쓰게 만드는 인간적인 사랑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반면에 말씀은 있는데 사랑이 없게 되면 서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바리새인들의 집단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기에 힘쓰고 또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때 생명력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2절부터는 우리가 왜 방언보다 예언 곧 말씀을 사모하기에 힘써야 하는가를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방언은 자기 덕을 세우나,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2-5). 방언의 역사는 사도행전 2장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120명의 성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리고 말씀에 기초하여 가룟 유다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인본주의 누룩을 제거하고 성령의 그릇을 이루었습니다. 이때 오순절날에 성령께서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이 그들 각 사람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천하 각국으로부터 온 사람들이 각기 자기 나라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고 몹시 놀랐습니다. 이때의 방언은 분명히 외국어였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고넬료 집에서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도 방언을 말하였습니다. 이때도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고 한 것을 보면 분명히 의사 소통이 되는 언어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행10:46). 19장에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열 두 제자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을 때 그들에게 성령이 임한 표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행19:5,6). 이때의 방언은 신자된 표로서 내적 확신을 주는 신령한 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이 외에는 방언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 방언은 신령한 은사로서 성령이 임한 표로 주어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방언을 하지 않으면 성령을 받지 못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방언은 성령이 임한 표적의 일부분일 뿐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2:3절은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는 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임을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지, 방언을 말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다양하여서 방언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전혀 다른 방법으로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사도행전을 공부해 볼 때 성령의 역사는 곧 말씀의 역사로서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행2:14, 4:31, 6:7, 11:1, 12:24, 19:20). 사도 바울이 두란노 서원에서 2년 동안 날마다 말씀을 강론하였을 때 아시아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주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며, 은 오만어치나 되는 마술책을 불사르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때 저자는 이렇게 코멘트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행19:20)
이렇게 성령의 역사는 말씀을 통해서 일어나고, 방언은 여러가지 성령의 은사 중에서 한 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고린도 성도들은 방언이 전부인양 방언을 중요시 여겼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방언보다 예언 곧 말씀을 사모하기에 힘쓰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방언은 사람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말하며, 또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방언은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나누기 위한 신령한 언어로서 적절히 잘 사용한다면 개인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이로 인한 폐단이 많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방언을 금하지는 않지만 권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방언을 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나누는 것이 안전하고 건전하기 때문에 말씀을 사모하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지만,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웁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개인 신앙생활에는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언 곧 말씀을 전하는 자는 말씀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위로와 격려를 함으로써 믿음을 북돋아 줍니다. 그러므로 교회 내에서는 예언 곧 말씀을 전하기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방언은 성도간에 의사 소통이 되지 않지만, 예언은 의사 소통이 되기 때문입니다 (6-19). 6절은 사도 바울 자신의 판단과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방언보다 예언을 말한 것이 그들에게 유익이 되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만일 바울이 그들에게 나아가서 그들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설교를 하고 가르쳤다면 그들은 믿음의 세계에 대해서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외국에 선교사로 가서 그들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한국말로 말씀을 가르친다면 아무리 잘 가르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의 말씀으로 전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회개하고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7-9절에서는 악기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플룻이나 거문고는 아름다운 음을 내는 악기입니다. 풀룻이나 거문고로 사람들이 듣기 좋은 아름다운 소리를 내려면 피나는 투쟁을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귀에 거스리는 시끄러운 소리만 낼 것입니다. 나팔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군대에서는 나팔을 통해서 의사 전달을 합니다. 기상나팔, 식사시간을 알리는 나팔, 행군 나팔, 전투개시 나팔, 퇴각 나팔 등 여러 종류의 나팔이 있습니다. 이 나팔 소리들은 의미가 있습니다. 만일 아무 뜻이 없이 나팔을 분다면 의사 전달이 되지 않아서 군인들은 우왕좌왕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이는 '소귀에 경 읽기'(牛耳讀經)와 같이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메시지를 전하거나 일대일 말씀 공부를 할 때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의사 전달이 되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제가 아는 어떤 교수님은 학자로서는 국보급에 속할만큼 실력이 대단한 분이시지만 목회자로서는 은사가 없는 분이십니다. 이 분은 할머니, 할아버지 열대명을 앉혀 놓고 메시지를 전하는데 어려운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섞어 가면서 메시지를 전하기 때문에 그들은 전혀 알아듣지 못해 계속해서 졸기만 합니다. 메시지는 청중에 맞게 전해야 합니다. 지성인들에게는 지성인들에게 맞도록 전해야 하고, 대중에게는 대중에 맞도록 전해야 합니다. 일대일 성경 공부를 할 때도 상대방에게 맞도록 연구를 해서 필요 적절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일방적으로 내가 아는 지식을 주입식으로 가르치기만 한다면 얼마 못가서 관계성이 끊어지고 말 것입니다.
세상에는 소리의 종류가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습니다. 그런데 만일 내가 어떤 사람의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한다면 내가 말하는 사람에게 외국인처럼 되고, 그도 나에게 외국인처럼 될 것입니다(11). 그러므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알아 듣지 못하는 방언보다 모든 사람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예언 곧 말씀에 풍성하기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방언으로 말하고자 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14절은 통역의 은사를 받지 못하면 자기가 한 기도를 자신도 이해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마음은 이해하고 깨닫는 좌소입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은 기도하지만 나의 마음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기도를 하면 아무리 열심히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영으로 기도할 뿐만 아니라 또 마음으로도 깨닫고 기도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또한 영으로 찬송을 하면서 동시에 마음으로 찬송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아무리 영으로 은혜가 충만하여 축복한다 할지라도 상대방이 알아 듣지를 못하면 '아멘'으로 화답을 하지 못하고 멍하게 앉아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보다 방언을 더 잘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회에서 남을 가르치기 위해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마디 말을 하는 것이 아무 뜻도 모르고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나 말씀을 공부할 때 아무 뜻없이 말을 많이 하기보다 몇마디를 하더라도 깨닫는 마음으로 해야 함을 배웁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교회내에서 말씀과 기도와 찬양을 할 때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마음으로부터 깨닫고 은혜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찬양을 하는데 이태리어로 찬양을 하여 듣는 사람들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마음으로부터 이해하고 깨닫는 것은 이성의 작용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이성을 무시하고 영적인 것만 지나치게 강조한다면 신비주의로 흘러서 신앙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게 될 것입니다. 또 반대로 이성의 역할만 지나치게 강조하고 영적인 것을 소홀히 한다면 아무런 감동이 없는 냉냉한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영적인 것과 이성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어거스틴은 "우리가 처음 믿음의 세계에 들어갈 때는 오로지 믿음만이 필요하지만 믿음의 세계에 들어가서는 더 잘 믿기 위해서 이성이 필요하다" 하였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거나 기도와 찬송을 할 때 영으로 하고 또 마음으로 그 의미를 깨닫고 한다면 얼마나 은혜가 되겠습니까? 내 자신이 은혜가 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은혜를 끼칠 수 있습니다.
셋째로, 방언은 불신자 전도에 방해가 되지만 예언은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20-25). 20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사도 바울이 방언과 예언에 관한 말씀을 하다가 왜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는 것입니까? 이 말씀은 분명히 방언과 예언과 관련시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지혜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판단력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는 데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고 은혜가 되는가를 분별하는 분별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 즉 분별력이 있는 사람은 모임 가운데서 자신이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이 무엇인지를 알고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말합니다. 이로써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고 위로와 격려를 주고 상대방의 믿음을 세웁니다. 반면에 지혜가 없는 사람은 분별력이 없어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므로써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믿음을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자기의 옳은 것만 주장합니다. 이렇게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고 상처를 입히는 것이 바로 악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들은 자기 자신의 신앙생활만 생각하고 남을 생각지 않음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는 악을 행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방언보다는 남에게 은혜가 되는 예언 곧 말씀 전하기에 힘써야 되는 것입니다.
21절은 방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임을 구약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이 완악하여 예언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다른 방언을 말하는 앗수르를 보내어 심판하고자 하셨습니다. 앗수르는 그들이 회개하도록 하는 심판의 표적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방언은 믿지 아니하는 그들에게 심판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심판의 표적을 보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도 무시하고 듣지 아니했습니다. 이렇게 방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지만, 예언은 믿는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방언을 말하여서는 안되고 예언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영적으로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교회에 들어왔는데 모든 교인들이 다 그들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말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교회에 나아 올 때는 심심풀이로 나아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마음에 무거운 죄짐을 안고 나아 오며, 해결되지 않는 인생 문제로 인해 답답한 심령을 안고 나아 옵니다. 또한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세계에 살면서 지치고 피곤하여서 이제는 영적인 세계를 사모하여 나아옵니다. 세상에서는 참된 인생의 의미와 목적과 위로와 소망을 찾지 못해 방황하다가 나아 옵니다. 이렇게 나아 온 사람들에게는 죄 사함의 말씀, 위로의 말씀, 소망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한마디로 복음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만일 이런 그들에게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한다면 그들은 실망하고 "미친 놈들!" 욕을 하며 돌아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믿는 자들은 그들을 실족케 하는 큰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에게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복음의 말씀을 전하게 되면 그들은 "이는 바로 나에게 하는 말씀이구나" 하며 말씀을 통해서 양심에 찔림을 받고 숨은 죄를 진실되게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경배를 하며 "하나님은 과연 이 가운데 살아 역사 하시는구나" 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여름 수양회를 통해서 이러한 역사를 많이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는 말씀이 살아 있는 모임이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모임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없을 때 죄를 깨닫고 회개할 수 없으며, 살아 계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임이 말씀을 통해 불신자들이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모임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Ⅱ. 질서를 세우라 (26-40)
26절은 당시 예배의 프로그램이 어떠했는가를 말해 줍니다. 당시 예배에는 찬송시도 있고 가르치는 말씀도 있고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고 통역함도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성경이 완성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계시와 방언이 있었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는 계시가 완료된 성경 말씀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계시가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직통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다 거짓 선지자나 거짓 메시야들입니다. 방언을 말하고자 하면 두 세사람만 하고 반드시 한 사람의 통역을 세워야 합니다. 만일 통역이 없으면 혼자서 하고 교회에서는 덕이 되지 않으므로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언도 2-3명이 차례대로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다 배우고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언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32).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33). 만일 우리가 무질서하게 예배를 본다면 하나님이 정신이 없으셔서 예배를 열납하시기 힘들 것입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34-35절은 교회 내에서 질서를 지키기 위해 여자는 잠잠하라고 합니다. 이는 공적인 예배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이지 일대일도 하지 말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편지한 내용은 사사롭게 받아들여서는 안되고 주의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36-38). 39,40절은 결론적인 권면의 말씀입니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되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Ⅲ.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16:1-24)
사도 바울은 15장에서 고린도 성도들에게 부활 신앙을 심은 후에 16장에서 몇가지 사무적인 지시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고린도 성도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구제 헌금을 미리 준비하여 드리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제 헌금도 교회가 신임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예루살렘에 전달하도록 함으로써 선한 일에 신중을 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보내는 구제 헌금을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단순히 구제의 차원을 넘어서서 이를 통해 예루살렘 모교회와 이방 교회가 주안에서 하나 되도록 하고자 하는 역사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5-9절은 사도 바울의 앞으로의 계획에 관한 것입니다. 그는 고린도에서 겨울을 보내기를 원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기 때문에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복음을 전할 효과적인 좋은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회를 분별하고 이를 최대한 활용할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기회를 잘 활용할 줄 알지만 미련한 자는 기회가 주어져도 이를 잘 활용할 줄 모르고 딴 생각만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는 것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대적하는 사단의 역사도 많이 있을 것을 인식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으면 동시에 사단의 역사도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또한 사단의 역사가 있으면 성령의 역사가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10-18절은 주님의 일에 힘쓴 자들을 알아주라고 합니다. 디모데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영접하라고 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바울에게 아볼로를 권장하여 고린도에 보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아볼로를 고린도에 보내게 되면 아볼로파가 득세하게 되고 자연히 바울 파는 세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아볼로에게 고린도에 가도록 여러번 많이 권면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볼로는 자신이 고린도에 가면 분쟁이 더 많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일절 사양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바울이나 아볼로는 아무 사심이 없는 영적인 사람들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스데바나의 집 사람들은 성도 섬기기를 작정한 사람들로서 주와 복음을 위해 헌신적으로 수고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을 알아주고 복종하라고 하십니다.
13,14절은 바울이 최후로 고린도 성도들에게 준 종합적인 권면입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는 말씀은 네 가지 권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깨어라", "믿음에 굳게 서라", "남자다워라", "강건하여라" 입니다. "깨어라"는 말씀은 악의 세력에 대한 경계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영혼이 망하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원수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아 헤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위에는 우리의 믿음을 넘어뜨리고자 하는 세력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 우리를 유혹하는 세력들을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에 굳게 서라"는 말씀은 악의 세력과 대항하기 위해 부활신앙위에 굳게 서라는 말씀입니다. 부활 신앙 위에 굳게 설 때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복음 역사를 섬길 수 있습니다. "남자다워라"는 말씀은 사내 대장부답게 용기를 가지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비겁하게 굴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자의 여자됨은 정숙함에 있고, 남자의 남자됨은 용기에 있습니다. 남자가 비겁하게 행동한다면 더 이상 남자가 아닙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용기 있는 믿음의 용사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 생활하다가 좀 손해를 본다고 해서 비겁하게 몸을 도사린다거나 도망을 간다면 그 결국은 비참하게 될 것입니다. "강건하여라"는 말씀은 "강해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한 믿음, 병든 내면을 가지고 시련을 견딜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시련도 이기고 승리의 인생을 살려면 예수 그리스도 은혜 안에서 강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을 행하는 기초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할 때 모든 문제가 사라지고 은혜가 넘치게 되지만, 사랑으로 행치 아니할 때 분쟁이 일어나고 분열이 생기게 됩니다.
19-24절은 문안과 축도입니다. 문안은 성도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는 것은 거룩한 성도의 교제를 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는 말씀은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표현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멸망에 처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는 주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23, 24절에서 축도로 편지를 끝맺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찌어다." 아멘!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우리가 힘써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기에 힘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함으로써 죄의 소욕을 이기고 유혹을 이기고 환난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