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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5:1-58(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적 의미)

by Mark Yang   08/18/2019   1Corinthians

Message


고린도전서 제 12 강


성경대로 살아나신 예수님


말씀 : 고린도전서 15:1-58
요절 : 고린도전서 15:3,4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나사"

봄이 되어 말라 비틀어졌던 가지에 물이 오르고 새움이 트고 있습니다. 만물이 소생하는 부활의 계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은 큰 뜻이 있는 줄 믿습니다. 우리에게 추운 겨울만 있고 봄이 없다면 적막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 인생은 적막하고 진정한 소망이 없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참 소망을 주고 또 죽음조차도 이기는 진정한 승리를 줍니다. 제한된 생명을 영원과 연결시켜 주고, 시들었던 우리 영혼을 소생케 해 주며 생명력 있는 삶을 살게 해 줍니다.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초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의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진정으로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1-14장까지를 통해 고린도 교회내에 생긴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느라 많은 애를 썼습니다. 고린도 교회내에는 분쟁 문제, 음행 문제, 송사 문제, 우상의 제물 문제, 예배시 여인의 복장 문제, 자매님들의 결혼 문제, 은사 문제 등 많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아비가 자식에게 하듯 상한 목자의 심정으로 권면하였습니다. 그리고 13장에서는 모든 문제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해결하도록 유명한 사랑의 시를 읊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음을 부활의 복음을 심고자 합니다. 이는 부활의 복음만이 모든 인생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신앙이 없을 때 근본적으로 인생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증거하는 부활의 복음은 어떤 것입니까?

Ⅰ. 그리스도의 부활 (1-11)

1-11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분명히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바울은 먼저 복음의 중심 내용과 부활의 증인들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1) 복음의 내용 (1-4)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미 전한 복음을 다시 알게 하고자 합니다. 바울은 왜 이미 전한 복음을 다시 상기시킵니까? 사도행전18:1-11을 보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고린도는 고대 헬라 세계에서 최대의 상업과 무역 도시였습니다. 이곳에는 헬라철학이 성행하고 음란과 방탕이 활개를 쳤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1년 6개월 동안 유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파했습니다(고전2:1-3). 이를 통해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영접하는 큰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행18:8). 고린도 형제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영접하고 그 가운데 섰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서 세상의 여러 가지 유혹과 풍조, 현실문제로 인하여 처음 받은 바 복음진리를 굳게 지키지 못하고 헛되이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점점 구원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그들에게 다시 복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는 복음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할 때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복잡한 이론을 연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이란 이미 우리가 성경공부를 통해서 배운 단순한 복음진리를 매일 새롭게 하고 굳게 붙잡을 때만이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3,4절을 보십시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나사" 바울은 이 복음의 내용이 자신이 받은 바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임을 말합니다. (NIV에서는 as of first importance라고 하였음) 복음의 내용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임으로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십자가의 복음'과,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복음'이 있습니다.

첫째, 십자가의 복음: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셨습니다. 인간의 근본문제가 무엇입니까? 경제 문제입니까? 정치 문제입니까? 제도 문제입니까? 자원 문제입니까? 요즈음에는 에너지 자원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특히 물 문제는 매우 심각합니다. 앞으로 물 때문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인간 내면의 죄문제입니다. 인간은 자원이 부족하여 비참한 삶을 살고 있기 보다는, 죄로 인해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요 반발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는 것입니다(롬1:21). 죄는 하나님 없이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교만입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고,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동물과 같은 육체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롬3:23, 창6장). 죄는 문둥병과 같아서 인간을 추하고 더럽게 만듭니다. 죄는 AIDS 바이러스균과 같아서 면역성을 없이하고 조직을 파괴시켜서 결국 죽게 만듭니다. 죄는 인간을 육신의 노예, 감정의 노예, 정욕의 노예, 욕심의 노예, 이기심의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죄는 인간을 무서운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습니다. 세상에는 죄가 만연하여져서 죄를 심각하게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는 인간의 인격을 파괴시키고, 사회를 무정하고 무자비하게 하고, 폭력과 부정부패가 난무하여 황폐케 합니다. 죄를 범한 인간은 마음의 평화를 상실하고 죄의식과 두려움과 불안에 시달리며 살아갑니다. 결국 죄의 삯으로 죽게 됩니다(롬6:23a). 그러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히9:27). 이 심판은 가볍게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영원토록 고통해야 하는 실로 무서운 심판입니다(계21:8). 이 죄 문제는 선행이나 고행이나 수도 등과 같은 인간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죄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시고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피를 흘리며 비참하게 죽어야 하지만 예수님께서 내 대신 피흘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의 고통에서 벗어나 죄사함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이 십자가의 복음만 영접하기만 하면 죄사함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둘째, 부활의 복음: 죄로 말미암아 세상에 죽음이 오게 되었고, 죽음은 인류를 지배해 왔습니다. 이 죽음 문제를 극복한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끝나셨다면 인생의 가장 큰 원수인 죽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죽음의 권세 아래 무릎을 꿇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사흘만에 죽음의 권세를 파하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지낸바 되셨으나 무덤에 영원히 갇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선이 패배하고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실 때 제자들에게 여러 번 말씀하신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로써 인간을 그토록 괴롭히던 죽음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나사로의 부활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나사로는 부활했지만 또 다시 죽었습니다. 또한 그의 부활은 다른 사람의 부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의 권세를 파하시고, 죽음의 권세 아래 신음하고 있는 모든 인생들을 구원하는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망 권세를 파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더 이상 사망 권세에 시달리지 아니하고 생명과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죄사함에 대한 확신을 주고, 궁극적인 승리를 주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줍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이 '성경대로'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갑자기 이루어진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오랫동안 하나님께서 성경에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하시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오랜 역사적 배경을 두고 역사적인 자료를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믿을만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인간이 공교히 만들어 낸 허구가 아니라,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으로서 역사적인 사실에 기초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심문한 빌라도가 가이사 황제에게 낸 「빌라도의 보고서」를 보면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2) 부활의 증인들 (5-11)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확실함을 증거하기 위해 증인들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먼저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보이셨습니다. 후에 열 두 제자들이 유대인들이 두려워 방문을 꼭 닫고 숨어 있을 때 그들에게 나타나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의심하는 도마에게 십자가에 못박힌 손과 창으로 찔려 물과 피를 쏟으신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요20:19-29). 그후에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습니다. 그중에는 당시 태반이나 살아 있다고 말합니다. 그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습니다. 이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을 가리킵니다. 그후에는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바울에게도 보이셨습니다. 이들은 모두 부활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그 생애에 결정적이고도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두려움 많던 자가 용기 있는 사람으로, 의심의 사람이 확신의 사람으로, 이기적인 자가 희생적인 자로, 소시민적인 자가 역사의 수레바뀌를 돌리는 역사 창조자로 변화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베드로와 바울은 두 거성으로서 기독교 역사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베드로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신 뜻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허물과 실수가 많았습니다. 그중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예수님을 죽는데 까지 따라 간다고 장담해 놓고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그후 베드로는 통곡하며 회개했지만 그 상처는 깊이 남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의 약점을 아시고 그를 사랑하사 부활의 첫증인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후 베드로는 교회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해서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까? 그는 원래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그는 스테반 집사를 돌로 쳐죽이는데 주동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나사렛 예수당을 이단으로 생각하고 박멸하기 위해 살기등등하여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이었습니다. 이때 갑자기 그에게 하늘로서 빛이 비추었습니다. 이 빛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의 광채였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9:4) 이 사건으로 그는 거듭나 새사람이 되고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사도의 자격은 예수님의 생전에 항상 함께 다니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한 자라야 했습니다(행1:22). 그런데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빛으로 순간적으로 잠깐 보고 또 잠시 그의 음성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를 근거로 자신이 예수님의 사도요, 부활의 증인임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정규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곧팔푼이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또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하였고, 핍박자, 훼방자, 포행자,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였습니다(딤전1:13,15). 과거 그는 스스로 큰 자라고 생각하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교만하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한없이 겸손하여져서 지극히 작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이지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그는 과거 자신이 얼마나 몹쓸 죄인이었는데 구원받고 주님의 종이 되었는가 하는 기본적인 은혜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습니다. 그는 이 은혜만 생각하면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위해 힘에 지나도록 죽도록 일했습니다. 4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통하여 그가 개척한 교회는 수없이 많습니다. 또 신약의 서신의 대부분은 그가 쓴 서신입니다. 사람이 일을 많이 하고 성공적으로 역사를 이루면 자기 의가 생겨서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많은 일을 하고도 조금도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힘으로 한 것이 아니고 오직 자기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바울 사도로부터 배울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의 겸손입니다. 그는 그렇게 많이 수고했으나 조금도 자기 공로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이런 겸손이 그를 위대하게 만든 것입니다. 둘째는 은혜를 감당하는 자세입니다. 그는 은혜를 받은 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죽도록 수고했습니다. 그는 은혜를 따먹지 않았습니다. 인간 사이에도 은혜를 배반하는 자는 가장 몹쓸 자로 여깁니다. 은혜를 감당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은혜를 감당할 줄 아는 자는 위대한 내면성을 가진 자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감당할 줄 아는 자에게 더 큰 은혜를 베푸십니다. 바울과 부활의 증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전파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고린도 성도들이 믿게 되었습니다(11).

Ⅱ. 죽은 자의 부활 (12-34)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셨다고 분명히 전파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성도들 가운데는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12). 이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죽은 자가 다시 살아 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은 좀 이상하게 들리지만 당시 시대 배경을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섞여 살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사후의 생을 일체 부인하고 따라서 영혼의 부활과 몸의 부활도 부인하였습니다(행23:8). 헬라인들은 사두개인들과 달리 영혼의 불멸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몸의 부활에 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헬라인의 사상은 이원론(Dualism)으로서 정신과 영혼의 세계는 아름답고 참된 것이나 육신과 물질의 세계는 추하고 더러운 것으로 보았습니다. 육체는 물질이며, 모든 악의 근원이며 또 영혼을 속박하며 방해하고 감금하는 감옥으로 보았기 때문에 육체는 거룩해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육체는 영혼의 무덤과 같아서 육체가 완전히 소멸되어야 영혼이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헬라 사상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복음증거를 듣고 신자가 되었지만 부활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믿을지라도 신자의 몸의 부활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고린도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자의 부활과의 관계성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1) 만일 죽은자의 부활이 없다면 (12-19)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어떤 심각한 문제들이 생기게 되는가를 논리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논리의 모순을 제시함으로서 죽은 자의 부활은 반드시 있다는 것을 반대 급부적으로 증명코자 한 것입니다. 그러면 고린도 성도 중 일부가 주장하는대로 만일 죽은자의 부활이 없다면 어떤 심각한 문제가 생기게 됩니까?

첫째,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게 됩니다(13). 일반적으로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도 몸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어떤 문제가 생기게 됩니까?

둘째, 우리의 전파하는 것이나 믿음도 헛되게 됩니다(14,15a). 우리가 믿고 전파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사 생명의 구주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이를 받치고 있는 기초가 무너지기 때문에 모든것이 헛되게 됩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거짓증인이 되어 버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는 자들은 거짓말쟁이 중에서도 최고 거짓말쟁이요, 사기군 중에서도 최고의 사기군입니다. 또 우리가 피싱을 하거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최대의 사기 행각에 불과합니다.

셋째, 하나님은 무능력자로 발견됩니다(15b).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능력자가 되어 버립니다. 니체가 말한대로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 되어 버립니다. 선이 악에게 패배 당해도 하나님은 아무 것도 하실 수 없는 분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심으로 지금도 살아 계셔서 능력으로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입증하셨습니다.

넷째,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됩니다(17).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는데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십자가의 은혜도 헛되게 되어 버립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죽음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죄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 잠자는 자도 망할 뿐 아니라 신자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됩니다(18,19). 많은 성도들이 부활의 소망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의 피를 흘리고 잠들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부활의 소망 때문에 이 땅에서 기쁨으로 모든 것을 희생하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헛된 소망을 바라다가 망하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신자들은 가장 불쌍한 자가 되어 버립니다. 인생들은 낙원을 상실하고 먹고 살기 위해 죽도록 고생하는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인생들의 소망은 이 땅에 살 동안만이라도 좀 더 편안하게 인생을 즐기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런 소망을 부인하고 주님을 위해서 시간과 물질을 드리고 청춘을 드리며 복음역사를 섬깁니다. 학사님들에게는 주말이 가장 좋은 날입니다. 그러나 학사님들은 주말에는 심방하고 양을 치고 소감을 쓰는데 보냅니다. 그리고 양들을 초청하여 정성스럽게 섬깁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부활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거짓 희망에 속아서 죽도록 고생하고 희생하다가 죽음으로 끝나게 되니 신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상의 문제들을 볼 때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하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부인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 신앙체계 전체가 흔들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기초는 그리스도의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2)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20-28)

20절을 읽어봅시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가 되셨도다." 여기서 '첫열매'라는 단어가 주는 뜻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추수 때에는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첫 열매는 앞으로 거두어들일 추수의 표시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부활은 앞으로 모든 신자들이 부활한다는 표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과 같이 부활하리라는 것은 신자들에게 놀라운 소망을 줍니다. 그런데 예수님 한 사람이 부활했는데 어떻게 모든 신자들이 부활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바울은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다고 하십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아담과 동일한 죄를 짓지 않았지만 아담 안에 (In Adam) 있기 때문에 다 죽게 되었습니다. 아담 안에 있을 때는 아담으로 인한 죄와 사망의 권세에 지배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아담 안에 있는 사망의 세력권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생명이 왕노릇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구 안에 있는가? 즉 누구에게 속하였으며 누구에게 지배를 받는가 하는 것은 중대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그에게 소속된 모든 신자들은 공중으로 휴거되어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됩니다(살전4:16-18).

그리스도의 부활은 개개인의 생명을 살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장차 우주적인 놀라운 변혁을 가져오게 됩니다. 24-28절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장차 일어나게 될 우주적인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최후의 날에 심판장이 되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게 됩니다. 그때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칩니다. 이때 예수님은 인생들을 그토록 괴롭혀 왔던 사망권세를 멸하십니다. 예수님은 만물을 발아래 복종시킨 후 자신도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하심으로 만유의 질서를 바로 잡으시고 만유를 회복하십니다. 이때까지 세상은 사단의 권세로 인해 창조질서가 무너지고 그 가운데서 인생들과 자연만물은 신음하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무너진 창조의 질서를 바로 잡으시고 만유를 회복하심으로 우리 신자들은 새하늘과 새 땅에서 사랑하시는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왕노릇하게 됩니다. 그때는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 없습니다(계21:1-4).

(3) 깨어 의를 행하라 (29-34)

바울은 이때까지 죽은 자의 부활의 확실성과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 인생들에게 주는 희망에 대해 증거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부활신앙 가운데 사는 자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자신의 예를 들어 권면하고 있습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받는 행위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29). 이 말씀은 우리에게 생소하게 들립니다. 당시에는 세례 받고자 하는 자가 받지 못하고 죽으면 사후의 구원을 위해서 대신 세례를 받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또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해 때마다 위험을 무릅 쓸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좋은 환경 가운데서 편하게 전파한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늘 질병의 위험, 강도의 위험, 궁핍의 위험, 유대인의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고자 도처에서 목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순간순간 갖가지 위험을 무릅쓰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날마다 죽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이것을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한다고 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안일하게 살고자 하는 육신의 소욕을 날마다 부인했습니다. 또 세상 영광을 구하고자 하는 명예심을 부인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부인했습니다. 사도바울은 학문과 재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세상에서 얼마든지 존경받으며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이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오히려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는 날마다 자신은 죽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희생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부활의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마치 권투선수 헤비급 챔피언과 같습니다. 챔피언이 되기 위해서는 날마다 자기 자신을 쳐 복종시키고 단련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챔피언이 된 후에도 끊임없이 그런 생활을 해야 챔피언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부활신앙이 없는 자의 삶은 어떠합니까? 근본적으로 쾌락주의자가 됩니다. 바울은 자신도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며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겠다고 말합니다. 당시 에베소에는 원형경기장이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맹수들과 싸우는 검투사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맹수와 싸우다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먹고 마시는 것 외에는 아무 소망이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부활신앙이 없을 때 근본적으로 쾌락주의자가 되어 버립니다. 전도서 기자는 세상사를 살펴볼 때,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전2:24). 이 세상 사는 것이 끝이라면 인생을 마음껏 즐기며 사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돈을 벌면 호화주택을 짓고 맛있는 것 먹고 마시고 여행하고 죄짓는데 다 소비합니다. 사도바울은 32절에서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절대 손해보는 자가 아닙니다. 그는 유익을 따져 본 결과 부활 신앙 가운데서 날마다 죽는 생활이 훨씬 유익하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영원한 소망을 위해서 잠시 손해보는 생활을 했습니다. 또한 좋고 영원한 유익을 위해서 잠시 현실적인 유익을 버렸습니다. 이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죄를 짓는 자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로서 영적으로 무지한 자입니다. 우리는 부활신앙으로 날마다 자신을 쳐 복종시키고 깨어 의를 행해야 합니다.

Ⅲ. 부활의 영광 (35-49)

바울은 이때까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부활하면 어떠한 몸으로 부활하게 되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 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 육신은 죽으면 썩어 냄새가 납니다. 이런 육신이 어떻게 부활하게 되는가 의문스럽습니다. 또한 교통사고나 전쟁 등 불의의 사고로 인하여 사지가 다 떨어져 나가고 흉하게 된 육신을 가진 자들도 있습니다. 또 화장한 자들도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어떠한 몸으로 부활하게 되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의문에 대해 씨앗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뿌리는 씨는 죽어야 살아나게 됩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씨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게 됩니다. 죽어야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나기 위해서는 우리 육신이 죽고 썩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씨를 뿌릴 때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알갱이만을 뿌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뜻대로 각 종자에게 새로운 형체를 주십니다. 봉숭아씨를 뿌리면 그 씨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아름다운 형체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봉숭아 씨는 어디까지나 봉숭아씨이지 그 개성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백승원 목자님은 부활한 후에도 백승원 목자님이지 결코 다른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셋째는, 육체에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사람에게 합당한 육체가 있고, 짐승에게는 짐승에게 합당한 육체가 있습니다. 또한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습니다. 또 그 영광도 해의 영광, 달의 영광, 별의 영광, 또 별과 별의 영광이 다 다릅니다. 땅에 속한 형체는 거기에 맞게 형체가 주어지고, 하늘에 속한 형체는 또 거기에 맞게 주어집니다. 짐승은 땅에 살 수 있도록 네 다리를 주시고 , 새는 하늘을 날을 수 있도록 날개를 주시고, 물고기는 물에서 살 수 있도록 지느러미를 주셨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 육신의 몸은 지상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지음 받았지만, 부활한 후에는 하늘나라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몸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몸으로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까? 42-4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우리 육신은 근본적으로 썩을 것, 욕된 것, 약한 것, 육의 몸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육신은 결국 다 썩게 마련입니다. 썩지 아니할 육체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여성들은 고운 것, 아름다운 것을 자랑합니다. 미스 코리아, 미스 세계 등 미모의 경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다 썩게 됩니다. 썩으면 구더기가 다 파먹습니다.
또 우리 인생은 욕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영광스러운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특히 신입생들은 부푼 꿈을 안고 대학에 들어와서 영광스러운 대학생활을 마치고자 합니다. 그러나 4년을 지내놓고 나면 허물과 실수 뿐입니다. 나이를 자꾸 먹어갈수록 원치 않게 욕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인생을 새롭게 살아보고자 결심하지만 지내놓고 보면 또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우리 육신은 흙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약합니다. 아무리 강하다고 생각하는 자도 병에 걸리면 약해집니다. 또 우리는 죄를 짓지 않고자 하지만 육의 몸을 입고 있기 때문에 원치 않게 죄를 짓습니다. 끊임 없이 죄의 소욕에 시달립니다. 이러한 육신의 몸이 어떻게 변화됩니까?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게 됩니다. 또한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살게 됩니다.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게 됩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게 됩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 나라에 맞게끔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시공간에 얽매이지 아니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였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벽을 뚫고 그냥 들어오셨습니다. 그때는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에 원하는 곳에 얼마든지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같이 될 수 있습니까? 이는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이 되시기 때문입니다(45). 우리는 흙에서 나서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었으나 이제는 예수그리스도의 살려주는 영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게 됩니다(49). 이 형상은 하늘에 속한 자 예수그리스의 완전한 형상입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와 같이 신령한 형상을 덧입고 영원토록 주와 함께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모든 불완전한 것은 다 사라지고 또 부분적으로 알던 것도 사라지고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온전히 주를 알게 될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러운 것으로서 정말 우리가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Ⅳ. 최후의 승리 (50-58)

이때까지 사도 바울은 우리 몸이 어떠한 몸으로 부활할 것인가 하는 부활의 영광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최후의 승리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마지막날에 있을 비밀을 말하고 있습니다. 혈과 육에 속한 것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으려면 혈과 육에 속한 것을 벗어버리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는 날이 머지않아 반드시 오게 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날은 최후의 날입니다. 하나님의 원수들에게는 심판의 날이지만, 그날을 고대하던 우리 신자들에게는 구원의 날입니다. 이날에는 천사장의 나팔소리가 남과 동시에 갑자기 다 변화 됩니다. 그리고 공중으로 이끌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됩니다. 이것은 신자들만이 간직한 비밀입니다.

성도들이 이 부활의 영광에 참예하게 되는 때에 사망 권세는 완전히 파하여집니다. 그때는 사망의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는 말씀이 응하게 됩니다. 이때까지 사망권세는 인류 위에 왕노릇해 왔습니다. 인간들은 사망이 쏘는 독소에 쏘여 다 죽었습니다.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쳤지만 죽음의 권세 앞에 어쩔 수 없이 굴복 당하고 고통스럽게 죽어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는 날 동안에도 사망권세에 시달려 왔습니다. 허무주의, 무의미, 무정, 무자비, 무관심, 두려움에 시달렸습니다. 율법으로 인해 항상 죄의식에 짓눌려 왔습니다. 그러나 그날에는 사망권세가 멸망됨으로 자연히 죄의 세력과 율법의 세력이 힘을 잃고 맙니다. 사도 바울은 이 승리가 너무나 엄청나서 외쳤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5-57)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승리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승리의 인생을 살기 원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죽음을 이겨야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권세를 파하신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 수 있습니다.

이때까지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죽은 자의 부활이 반드시 있다는 것과 부활의 영광과 소망을 증거했습니다. 바울은 결론적으로 이 부활 신앙 위에 굳게 서서 더욱 주의 일에 힘쓰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58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의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너무나 좋은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신앙에서 흔들리기 쉽습니다. 세상에 속아 헛된 것을 좇기 쉽습니다. 욕심이나 장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기 일에는 열심이지만 주의 일에는 인색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세상일은 다 헛되지만, 주의 일은 헛되지 아니합니다. 살아 계신 주님께서 100배로 다 갚아주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바치는 것은 결코 희생이 아니요. 가장 안전한 곳에 저축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부활의 복음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부활의 소망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