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 View


성도의 사귐

by Mark Yang   08/18/2019   1John 1:1~10

Message


요한일서 제 1 강

성도의 사귐
말씀 / 요한일서 1:1-10
요절 / 요한일서 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요한복음서와 요한일서는 모두 사도 요한이 썼지만 이를 쓴 목적은 다릅니다. 요한복음은 비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요20:31). 그러나 요한일서를 기록한 목적은 이미 믿는 신자들을 더 깊은 신앙의 이해 가운데로 이끌며, 그들에게 이미 얻은 바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기 위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5:13절은 이를 잘 말해 줍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Plummer라는 학자는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의 뚜렷이 구별되는 목적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자는 역사적인 진술이고, 후자는 진리의 윤리적 서술이다. 전자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하는 행위와 말들을 제시하고 있는 반면, 후자는 이 위대한 진리를 믿는 자들이 의무적으로 행해야 하는 행위와 말들을 제시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불확실하고 혼돈스럽고 타락한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세계에 살면서 믿는다고 하면서도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이 불안한 삶을 영위하기 쉽습니다. 요한일서 공부를 통해서 우리가 영생에 대한 확신을 갖고 불확실하고 혼돈스럽고 부패한 이 시대를 이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요한일서를 쓴 시기는 A.D 80년대말에서 90년대초로 보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영지주의(靈知主義)라는 이단사상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분열의 위기에 놓이게 된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이에 사도 요한은 영지주의를 대항하여 정통적 그리스도론을 말함으로써 복음진리를 변호하고 확증하였습니다. 또한 요한은 이단 사상을 물리치기 위해서 믿는 자들간의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를 가리켜 '진리의 변증서', 또는 '사랑의 편지'라고 말합니다.
오늘 제 1강 말씀은 참된 사귐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극도의 이기주의로 말미암아 공동체 의식이 무너지고 점점 관계성이 파괴되어가고 있습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가족 공동체마져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1996년 10월에 성균관대 교수팀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건전한 가정이 30%에 불과하였습니다. 이는 불건전한 가정, 파괴된 가정, 파괴되어가는 가정이 70%나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시대는 한마디로 참된 사귐이 없기 때문에 관계성이 점점 파괴되어가고 있습니다. 각종 모임은 많은데 공허하고 의미없는 사귐이 대부분입니다. 사람들은 의미없는 사귐을 통하여 서로 부딪히고 상처를 주고 받고 괴로워합니다. 또한 영상매체와 PC 통신의 발달로 인해 젊은이들은 인격적인 사귐보다도 감각적인 사귐을 더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회는 인정과 사랑이 메말라 각박해지고 곳곳에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를 바라볼 때 소망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과 진리에 기초한 참된 사귐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는 바로 '성도의 사귐'입니다. 성도의 사귐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거룩한 사귐이요 영적인 사귐입니다. 하나님은 이 성도의 사귐을 통하여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 이 시대를 살리기를 원하십니다. 성도의 사귐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이 시대에 영적각성운동을 일으키는 불씨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생명의 말씀 (1,2)

1,2절을 보십시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말씀이 태초부터 있었다는 것은 말씀의 영원성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신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생명의 말씀'이라고 한 것은 말씀이, 헬라 철학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인격체임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창조주로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원천이 되시고, 생명의 주인이 되십니다(요1:4). 이 생명은 우리 인간과 같이 결국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시지만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을 말합니다.
요한은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말함으로써 성육신의 진리가 확실함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3년동안 예수님과 동거동락하면서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의 말씀'을 직접 듣고 또 눈으로 보았습니다. 여기서 보았다는 말은 헬라어로 호라오( )로서 '보고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주목하다'는 것은 '지각하다', '관찰하다'는 뜻으로서 요한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가까이서 자세히 관찰했음을 말해 줍니다. 손으로 만지는 것은 체험 중에서도 가장 친밀한 체험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지만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혹 귀신이 아닌가 의심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24:39) 제자들은 그들의 손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져 보았습니다. 이는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요 완전한 인간이심을 말해 줍니다. 요한은 이 성육신 하신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며 보고 듣고 만졌던 확실한 증인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눈이 쌍가풀인지 아닌지, 헤어 스타일이 어떠한지, 또한 예수님이 족구를 잘하셨는지 못하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이 왜 이렇게 예수님에 관하여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주목하고 손으로 만져 보았다고 확실하게 증거하는 것입니까? 이는 당시 복음진리를 위협하고 있는 영지주의 사상 때문이었습니다. 영지주의(Gnosticism)자들은 이 세상은 궁극적으로 두 개의 서로 다른 우주적인 세력, 즉 선과 악으로 양분되어 있는데, 보이는 물질세계와 육신은 악하고, 보이지 않는 영적세계만이 선하다는 이원론을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직관적 지식을 전수받은 자만이 악한 물질세계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는 폐기되고, 예수님의 성육신은 부인됩니다. 어떻게 거룩한 신이 악한 육신의 몸을 입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신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보이는 것 뿐이라는 가현설(假現說)을 주장했습니다. 이 이단사상은 초대 성도들의 복음신앙을 뿌리채 흔들었으며, 교회내의 분열을 조장하였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에 관하여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주목하고 손으로 만져 보았다고 증거함으로써 성육신의 진리를 변호하고 확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 높고 영화로운 보좌에 계셔서 인간이 감히 가까이 할 수 없는 분이시요, 죄인들과 함께 하실 수 없는 거룩하고 높으신 분으로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그러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셔서 냄새나는 인간들과 함께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성육신 하셔서 우리와 동거동락하시고, 아주 가까이서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분이십니다. 대학교의 교수만 되어도 쉽게 접근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너무나 겸손하시고 온유하셔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분이시요,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II. 성도의 사귐 (3,4)

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요한이 성도들에게 보고 들은 바 생명의 말씀을 증거하는 목적은 그들과 '사귐'을 갖고자 함이었습니다. 여기서 '사귐'이란, 헬라어로 '코이노니아( )'입니다. 이는 '친구, 우정, 동역자'라는 뜻을 지닌 '코이노노스'( )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동료의식, 상호교류, 참여, 교제"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코이노니아'란 '성도의 사귐'을 말합니다. '사귐'이라고 해서 서로 대화하며 운동하며 친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사귐'에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성도의 사귐'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적인 사귐을 의미합니다.
'성도의 사귐'의 원형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서로 완전한 조화와 질서를 이루시며 사귐을 갖고 계십니다. 이 사귐은 상호 긴밀한 인격적인 사귐이요, 정체되지 않고 끊임없이 활동하는 역동적인 사랑의 사귐입니다. 이 사귐은 자기를 비우는 겸손과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는 순종에 기초한 사귐입니다. 빌립보서 2:6-8절은 이를 잘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근본 본체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제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시되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이렇게 자기 부정과 자기 권리 포기와 겸손과 순종을 통해서 삼위일체간에 완전한 조화와 질서가 있는 사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자유의지를 주시고 인간들과 함께 사랑의 사귐을 갖고자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귐은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사귐이기 때문에 영적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이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계명의 말씀을 주시고 영적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인간들은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과 사랑의 사귐을 이루고 에덴동산에서 무한한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말씀에 불순종함으로써 사귐이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인간의 불행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깨어진 인간은 급속히 부패하고 타락하게 되었으며,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가지처럼 말라 비틀어지고 못쓰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사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르시고 그를 통하여 새로운 사귐을 갖고자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온전히 믿음으로 살았을 때 하나님은 그를 친구 삼으시고 깊은 사귐을 가지셨습니다. 하나님은 사귐을 통하여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고 천하만민의 복의 근원으로 삼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시고 그들과 사귐을 갖고자 원하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 백성으로서 영적 소원이 낮은 저차원적인 백성들이었습니다. 아무도 이들과 상종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과 함께 하셔서 대화하시고 인도하시고 자기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전반부에서는 모세에 의한 출애굽역사와 광야생활을 다루고 있고, 후반부인 25-40장까지는 '성막'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막'이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는 곳입니다.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께서 비천한 노예 백성들과 사귐을 갖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귐을 통하여 그들을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으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인간들과의 사귐은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 절정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모든 영광과 존귀를 다 버리시고 가장 낮고 비천한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죄인들과 한 사람 한 사람 함께 하시고 겸손히 낮아져서 사귀시고 섬겨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남편 문제로 내면이 깊이 병든 목마른 사마리아 여인과 우물가에서 장시간 대화하심으로 깊은 사귐을 가지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두레박이 없다고 무시하고 야곱과 비교하며 면박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여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여인에게 영생수를 주시고, 참 남편이 되어 주셨습니다. 세리 마태는 이기심과 탐욕으로 인해 내면이 깊이 병들어 소망이 없는 자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따돌리고 침뱉고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를 좇으라"고 부르심으로 그를 제자로 삼으시고 삼년동안 그와 깊은 사귐을 가지셨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과의 사귐을 통해 상한 갈대와 같은 내면이 치료받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방황하는 인생들에게 쉬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치심으로 영적인 사귐을 가지시고 인생들에게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귐은 열 두 제자와의 공동생활에서 가장 잘 나타났습니다. 제자들은 대부분 갈릴리 바다의 어부 출신들이라 허물과 약점이 많았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감당키 힘든 자는 이기주의의 대명사인 세리 마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날 입으시려고 와이샤스를 빨아서 대려놓으면 마태가 몰래 입어 버렸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입에서 누구의 이름이 먼저 나오는가 늘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마다 의심하고 있었고, 빌립은 자기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늘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종의 도리를 가르치셨지만 제자들은 '누가 더 크냐'며 다투기를 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겸손히 낮아져 섬기시며 인내와 사랑으로 감당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사귐을 통하여 내면이 변화되고 위대한 하나님의 종으로 빚어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과의 사귐은 그들에게 생명을 주었고 희망과 비젼을 주었습니다. 예수님과의 사귐을 통하여 인간적인 사람들이 영적인 사람들이 되었고, 꿈이 없고 소심한 자들이 세계를 품고 섬기는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도의 사귐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적인 사귐이요 생명을 주는 사귐입니다. 성도의 사귐은 하나님 중심적인 사귐이요, 말씀 중심적인 사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영적인 사귐을 갖는 개인이나 모임을 축복하시고 인류 구원역사에 귀히 쓰셨습니다.
18세기 영국은 산업혁명을 통하여 산업자본주의가 발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술취하고 방탕하였습니다. 교회마저 물질주의와 육신주의에 타협하여 타락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옥스퍼드 대학에 "Holy Club"이라는 조그마한 모임이 있었습니다. 이 모임은 찰스 웨슬레가 시작하였는데 후에 그의 형인 죤 웨슬레와 죠지 휫필트가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주일날 저녁에 한번씩 모였는데, 얼마후에는 일주일에 두 번씩 모이다가 나중에는 매일 저녁 6-9시까지 모여 특공대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모이면 우선 기도부터 하고, 그 후에 말씀의 깊은 맛을 알기 위해 원어로 성경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매주 이틀씩 금식기도를 하였습니다. 이들은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거룩한 성도의 사귐을 나누었습니다. 이 조그마한 "Holy Club"이라는 성도의 사귐이 당시 부패한 대학을 각성시키고, 영국를 각성시키고, 미국과 전세계를 영적인 잠에게 깨어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미국은 청교도들이 개척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18세기의 미국의 상황은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부패해져가고 있었습니다. 청교도들의 유산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퇴색해 가고 후손들은 조상들의 개척정신을 상실하고 신앙적 안일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술취함과 방탕으로 타락하였습니다. 이때 '죠나단 에드워즈'는 말씀을 깊이 연구하여 전함으로 놀라운 영적 각성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가 메시지를 전할 때 사람들은 죄에 대해 애통해 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의 메시지를 듣기 위해 사람들은 가게문을 닫고 일손을 놓고 그에게로 몰려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제 1차 영적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미국이 복음신앙위에 견고히 서게 되었습니다. 19세기에 시작한 제 2차 각성운동은 '챨스 피니'와 '무디'에 의해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무디는 새벽 일찍 일어나 두 세 시간동안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고 열정적으로 말씀을 전파하였습니다. 그의 영향으로 대학생들 가운데 SVM운동(학생선교지원자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이 운동을 통하여 미국이 세계 선교하는 제사장나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 영향으로 미개한 조선 땅에도 복음의 빛이 비추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진리에 기초한 영적인 사귐은 사회를 변화시키고 나라를 변화시키고 나아가 세계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저희 모임도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고 영향력있는 모임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사귐이 하나님 중심적이고 말씀 중심적인 영적인 사귐이요 또한 사랑과 순종을 기초한 사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게 되자 하나님 중심의 절대적이고 순수한 복음신앙이 점점 흐려지고, 이 시대의 영향을 받아 상대적이고 인본주의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새롭게 하나님 중심적이고 말씀 중심적인 사귐이요, 사랑과 순종에 기초한 영적인 사귐을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모임을 통하여 이 나라와 전 세계에 놀라운 영적 각성운동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이 편지를 쓰는 것은 그들에게 부담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영적인 사귐은 전혀 재미가 없을 것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이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인 사귐이야말로 우리 영혼에 참된 기쁨을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깊이 있는 기도를 할 때 하늘 나라의 기쁨과 영혼의 참된 위로와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체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영혼의 기쁨입니다.

III. 빛 가운데 행하는 삶 (5-10)

요한은 지금까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성도의 사귐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이제 그는 어떻게 이러한 사귐을 이룰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사귐을 가질려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잘 알아야 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요한이 듣고 전하는 것은 하나님은 빛이시요,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긍정적 진술과 부정적 진술이 나옵니다.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다는 부정적 진술은 하나님은 빛이시다는 긍정적 진술을 강하게 뒷받침해 줍니다. 이는 빛되신 하나님의 성품을 잘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악하지 않으십니다. 선과 악이 양립할 수 없듯이, 선하신 하나님께는 악이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에게는 조금도 죄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생명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죽음의 요소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진실하시기 때문에 거짓이나 불의가 함께 거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미움이나 증오심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빛되신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려면 하나님의 거룩하심 같이 우리도 거룩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같이, 우리도 진실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귐을 갖고자 하는 자는 어떻게 행해야 합니까? 6,7a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첫째로, 어두움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어두운 가운데서 행한다'는 것은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다는 뜻입니다. 그 반대 개념은 죄없는 생활이 아니라 경건의 연습을 통해서 영적으로 점점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어두운 가운데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고 죄의 소욕을 좇아 살아갑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고 습관적으로 죄를 지으며 신앙과 생활이 분리된 이중 생활을 합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고 몰래 죄를 짓습니다. 이런 자들은 빛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하나님과 사귐이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빛되신 하나님과 사귐을 갖기 위해서는 어두움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이는 '어두움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적극적으로 어두움과 싸우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어두움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어두움을 즐기고 적극적으로 내속에 있는 어두움의 요소와 싸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두움의 세력에 붙잡혀 어두움의 종이 되고 말 것입니다. 가인은 의를 행치 않고 어두움을 즐기다가 어두움의 종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때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제물을 열납치 않는다고 하나님의 주권에 반발하고 분하여 씩씩거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에게 카운슬링하셨습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리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6,7) 어거스틴은 정욕을 즐기다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어두움의 노예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어두움과 싸웠을 때 그는 변하여 새사람이 되어 어두운 시대를 비추이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붙던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13:12-14절이었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2-14)

둘째로, 빛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은 인격적이고 내면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떤 어두움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감추고서 사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을 갖기 위해서는 저가 빛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해야 합니다.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을 의미할까요? 이는 먼저 죄를 회개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의 몸을 입고 있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3:10). 아무리 의로운 자라 할지라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 자신이 망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죄인임을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불의한 세상을 비판하다가 성전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때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발견하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부르짖었습니다(사6:5). 베드로는 성실하게 살았기 때문에 자신이 죄인인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거룩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눅5:8).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율법으로는 흠이 없을 정도로 의롭다고 생각했으나 부활하신 만났을 때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임을 깨달았습니다(딤전1:15). 우리는 날마다 거울과 같은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어 보고 죄를 깨닫고 죄를 회개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실되게 죄를 회개할 때 빛 가운데 드러나 죄의 세력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며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생활을 할 때 자연히 죄의 소욕이 물러가고 빛 가운데 살게 됩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어떤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하나님과 사귐이 있고 또한 성도 간의 진실된 사귐이 있게 됩니다. 우리는 이 사귐을 통하여 생명을 덧입을 수 있고 영적인 세계를 알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우리의 죄는 물로도 깨끗케 할 수 없고 하이타이로도 깨끗케 할 수 없습니다. 선행으로도 깨끗케 할 수 없고,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깨끗케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만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실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요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진실되게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해 주십니다(9,10). 세상에서는 죄를 고백하면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또한 그것을 꼬투리로 사람을 비난하고 이용하고 파멸시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고백하지 않으면 판단하고 정죄하십니다. 그러나 죄를 진실되게 고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죄를 다 용서해 주시고 새롭게 하여 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약속에 관해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 예레미야 선지자도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가 저희의 패역함을 사하며 저희의 죄를 다시는 기억치 아니하리라."(렘31:34) 그러나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거할 수 없게 됩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갖는데 가장 큰 방해 요소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올바른 성도의 사귐을 가지려면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사죄의 은혜를 덧입고 생명력이 넘치는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성도의 사귐은 인간 상호간의 사귐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적인 사귐입니다. 우리는 이 성도의 사귐을 귀히 여기고 아끼고 사랑하고 더욱 하나님 중심적이고, 말씀 중심적인 모임으로 가꾸워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이 시대를 살리는 영적 각성운동의 불씨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