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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6:1-11:9(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방주)

by Mark Yang   08/14/2019   Genesis

Message


창세기 제 6 강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방주


말씀: 창세기 6:1-11:9
요절: 창세기 6:14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죄는 점점 성장하여 가인과 라멕을 거쳐 노아 시대에 와서는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인구가 증가하고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죄도 함께 성장했습니다. 세상은 부패와 강포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암이 온 몸에 퍼진 것과 같이 죄가 세상에 만연하여 하나님의 심판은 불가피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죄악된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과 노아 한 사람을 통해 세상을 보존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Ⅰ. 노아가 살던 시대(6:1-7)

창세기 저자는 먼저 노아가 살던 시대 배경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났습니다. 그들은 모두 절세의 미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습니다. 여기서 사람의 딸들이란 가인의 후예를 말하고, 하나님의 아들들은 셋의 후예를 말합니다. 가인의 후예는 하나님께 반항하고 하나님 없이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사는 불신자들을 의미합니다. 셋의 후예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신자들을 의미합니다. 신자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며 세상에 영향을 끼쳐야 되는데 오히려 불신자들의 영향을 받아 타락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자는 그들이 타락하게 된 원인이 신자가 불신자와 결혼함으로써 혼합하기 시작한데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결혼은 그 시대의 가치관을 잘 반영해 줍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창설하신 것으로서 거룩하고 신성한 것입니다. 결혼은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연합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고귀한 뜻이 있고 인간이 함부로 범할 수 없는 거룩함과 신성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엡5:32절에서 ‘이 비밀이 크도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셋의 후예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육신의 아름다움을 기초로 마음에 원하는 대로 마구 결혼하였습니다. 에베소서 2:3절에 보면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은 하나님을 심히 슬프시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부패하여 절대적인 가치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 17:9절에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원하는 대로 좋아하는 대로 한다는 것은 타락한 본성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내면성은 전혀 보지 않고 얼굴이나 몸매의 아름다움만 보고 아내를 취했습니다. 자매님들은 형제들에게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 화장을 진하게 하고 화사한 옷을 입고 온갖 장신구로 몸을 치장하고 아기죽거리며 다녔습니다. 그리고 음심이 가득한 눈으로 형제를 유혹했습니다. 그러면 형제들은 그들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정신나간 사람처럼 바라보았습니다. 그 시대는 도덕적으로 음란하고 부패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육신적인 결혼을 한 결과 육체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육체란 인간의 부패한 본성을 말합니다. 육체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동물과 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동물과 달리 이성과 영혼을 가진 존재로서 이성의 지배를 받으며 영을 좇아 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인간이 영을 좇아 거룩한 삶을 살 때 인간으로서 가치가 있고 인간다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인 것에 무관심하며,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며, 인간의 부패한 본성을 따라 살았습니다. 육체가 된 그들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눅17:27절에서 노아 시대를 한마디로 잘 표현하셨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다 저희를 멸하였으며”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지 않을 때 하는 일이란 자연히 먹고 마시고 파티하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쾌락을 추구하고, 사고 팔고 짓고 증권투자하는 일밖에 없는 것입니다.

4절은 그 시대 어떤 사람들이 유명했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들은 용사로서 고대에 유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네피림이란 침략자, 폭군, 거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체격이 크고 성질이 포악하여 침략을 잘 하였습니다. 이것은 당시 힘센 자가 영웅 대접을 받고 하수인들을 거느리는 약육강식하는 시대였음을 말해 줍니다. 힘을 자랑하는 가치관이 성장하여 나중에는 강포가 온 땅에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할 수밖에 없는 근본 이유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노아시대 사람들의 죄악은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이 아니라 내면 뿌리 깊이 박혀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무가지가 썩으면 잘라내면 되지만 나무의 뿌리가 썩을 때는 뽑아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시대는 근본적으로 그 심성이 부패하여 생각하고 계획하는 마음의 모든 경향이 하나님 보시기에 다 악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롬3:11,12). 모든 사람이 죄에 오염되어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죄의식조차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는 한마디로 소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시대를 보시고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근심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의 아픔을 의인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므로 실패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죄악이 관영한 것을 보시고 세상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사람 뿐만 아니라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도 모든 지면에서 쓸어 버리시고자 하셨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돔, 고모라도 죄악이 관영할 때 심판하셨고, 폼페이도 죄악이 관영할 때 심판하셨습니다. 오늘날도 죄악이 관영하면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이것은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시대 사람들을 심판하고자 작정하셨지만 당장에 그들을 멸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 120년간 심판을 유보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근본적으로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벧후3:9). 하나님께서 심판을 유보하신 120년간은 그들에게 은혜의 날이요 구원의 날이었습니다.

Ⅱ. 은혜 입은 노아(6:8-7:5)

하나님은 이런 시대 배경 가운데서 노아 한 사람을 발견하셨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과 모든 생물을 심판하고자 하셨지만, 노아만은 그 심판의 계획에서 제외시키셨습니다. 이는 노아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총애를 받고 택함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시대 사람들을 보실 때 심히 슬퍼하셨지만, 노아를 보실 때는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노아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전도서 7:20절에 보면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롬3:10절에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의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아무 죄가 없는 완전한 인간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과 비교하여 완전한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창세기 저자는 에녹의 믿음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한마디 말로 표현하듯이 노아의 믿음도 이 한마디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은 세상 가치관이나 자기 원하는 대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육신과 감정대로 살아갈 때 홀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들은 믿음으로 의롭고 진실되게 살려고 하다가도 캠퍼스나 세상 분위기가 죄악될 때 분위기에 말려들어 타협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비난받지 않고 소외당하지 않기 위해 적극적으로 죄는 짓지 않더라도 분위기에 맞추어 동조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노아는 조금도 그 시대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믿음을 버려도 그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다 육신적인 삶을 영위할 때, 그는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넓은 길로 갈 때 그만 홀로 좁은 길로 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물질과 인간 중심으로 살 때 그는 하나님과 말씀을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법도대로 살고자 애썼습니다. 그의 삶은 마치 살아 있는 잉어가 폭포수를 거슬러 올라가듯, 홀로 죄악의 파도와 싸우는 거룩한 삶이었습니다. 그는 소극적으로 중심만 지킨 것이 아닙니다. 벧후 2:5절에 보면 그는 적극적으로 의를 전파했습니다. 그는 그 시대의 영향을 받지 않고, 그 시대에 영향을 끼치는 도전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노아 한 사람을 그 시대에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보다도 더 귀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무서운 심판 가운데서 그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11,12절은 온 땅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부패하고 강포가 땅에 충만했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 땅은 강도, 살인, 약탈, 강간으로 충만하여 심판은 불가피하게 되었습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심판의 계획을 말씀하시고 방주를 짓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방주의 크기와 모양과 어떤 재료를 사용할 것인가를 상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후 그와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이는 방주를 짓고 그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생명을 보존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18,19). 방주는 세상의 모든 생물을 한 쌍씩 보존해야 했기 때문에 길이가 약 135m, 넓이가 22.5m, 높이가 13m가 되는 큰 배였습니다. 배수량이 약 2만톤, 용적이 1만 4천톤으로 항공모함과 같이 큰 배였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 가족만 구원받을 수 있도록 아담하게 지으라고 하지 않으시고,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도록 엄청나게 크게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크고 넓은 스케일을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나와 내 가족 뿐만 아니라 많은 영혼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크게 지으라고 하십니다. 방주는 장방형의 큰 상자 모양으로서 항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물 위에 뜨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친히 설계하셨기 때문에 공학적으로 가장 견고하고 안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이 방주를 “너를 위하여”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신앙 생활은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노아는 이 말씀을 어떻게 영접했습니까? 6:22절을 보십시오.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보통 사람으로는 120년 후에 홍수가 난다는 말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방주를 예비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죄악의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파멸의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조용히 이를 준비했습니다. 그는 이를 준비하되 자기 나름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잣나무가 구하기 힘들다고 소나무로 하지 않고, 크기가 크다고 1/10로 줄여서 작게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말씀에 자기 생각을 덧붙이거나 빼지 않았습니다. 말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말씀을 맞추지 않고, 말씀에다 자기를 맞추었습니다. 그는 어리석을 만큼 우직하게 인내로 말씀을 준행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히11:7절은 말합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그가 100년이 넘도록 방주를 예비하는 생활이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단, 삼단, 광신자, 현실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 노망한 영감이라고 하며 놀려대었을 것입니다. 또 많은 물질과 시간과 정열을 투자해야 함으로 육신적인 고달픔과 물질적인 어려움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외적인 것보다도 내적으로 파고드는 고독과 소외감, 사단이 심는 회의와 두려움, 상대적인 생각이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방주 짓는 것이 힘들 때는 “꼭 이렇게 크게 지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정말 세상을 심판하실까?” 하는 생각들이 스쳐 갔을 것입니다. 특히 아무리 심판에 대한 경고의 나팔을 불어도 사람들이 들은 척도 하지 않을 때 절망적인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이 모든 외적 내적 어려움을 이겼습니다. 그는 의를 전파하는 고독한 전도자였고 의의 후사였습니다.

그러면 그가 인상을 쓰며 억지로 이 사명을 감당했을까요? 1, 2년은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10년,20년 아니 100년이 넘도록 이렇게 한다는 것은 마음에 기쁨과 소망과 확신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짓기 전이나 방주를 짓는 생활을 하는 중에서나 변함없이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는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고 의지했습니다. 또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항상 spirit이 넘쳤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방주 짓는 생활을 통해 노아의 믿음을 연단하시고, 그를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심판에 대한 경고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의 방주에 들어오도록 오래 참으셨습니다.

마침내 거대한 방주는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고 명하셨습니다(7:1). 그리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공주의 새는 암 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 수 둘씩을 취하여 방주에 들여 보내도록 하셨습니다. 7:4절을 보십시오. “지금부터 칠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나의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하나님은 지금부터 7일 후에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겠다고 하셨습니다. 7일 후면 세상이 멸망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루, 한 시간, 1분이 귀하여 헛되게 보낼 수 없을 것입니다. 노아는 두렵고 떨림으로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습니다.

노아와 그 가족들과 모든 짐승들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방주에 들어 갔습니다. 이는 구원의 행렬이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들이다 들어가자 하나님께서 방주의 문을 닫으셨습니다. 방주의 문은 이때까지 누구나 다 들어올 수 있도록 넓게 열려 있었으나 이제는 때가 되자 “철커덕”하며 굳게 닫혔습니다. 하나님께서 닫으신 이 문은 누구도 열 수 없었습니다. 이제 은총의 시대는 지나가고 무서운 심판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기회는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천국 문이 닫힐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아무리 문을 열어 달라고 애원해도 소용없습니다. 그 때는 모든 것이 끝장입니다.

Ⅲ. 홍수 심판과 언약의 무지개(7:6-11:9)

노아가 600세 되던 해 2월 17일은 역사적인 심판의 날이었습니다.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40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지하수가 터지고 궁창 위의 물이 마구 쏟아졌습니다. 순식간에 집이 잠기고, 센타가 잠기고, 63빌딩이 잠기고, 남산이 잠겼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빌딩인 110층 Sears Tower가 잠기고 에베레스트산이 잠기고 온 세상이 잠겼습니다. 21-23절을 보십시오. 저자는 홍수 심판이 얼마나 무섭고 철저한 가를 강조해서 말했습니다.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육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더라.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 그날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하던 자, 믿음으로 사는 자들을 핍박하고 조롱하던 자, 세상 욕심을 좇아 살며 자행자지 하던 자, 정욕대로 살던 자, 교만한 자, 은혜를 배반한 자, 아기죽거리며 형제를 병들이던 자, 부자, 권세자,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물을 잔뜩 먹고 가라앉았습니다.

오직 방주에 있던 노아와 그 가족들만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 이 말씀은 놀라운 은총의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심판을 받아 멸망하였지만 방주에 있던 자만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방주에는 노나 닻이나 기관이나 키가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운행하는 피난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선이었습니다. 이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의 구원선으로 허락하셨습니다. 방주 안에 들어간 자만이 구원을 받은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간 자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방주 안에 생명이 있고 안식이 있고 평화가 있었던 것과 같이 예수님 안에 참 생명과 평화와 영원한 안식이 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홍수 심판을 통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죄를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간 조건이나, 소유나 업적을 따라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행한 죄를 따라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심판은 공의롭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심판은 무섭고 철저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이 지옥 가는데 난들 못 가랴”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가볍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가 상상할 수없을 만큼 무섭습니다. 계시록 21:8절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영원토록 고통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막9:48,49절은 ‘그곳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곳으로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심판을 믿지 않습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고 사는 날 동안 쾌락을 추구하며 살고자 합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히9:27절은 말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사도 바울은 고후5:10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사도 베드로는 좀 더 무섭게 경고했습니다.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벧후3:10,11). 예수님께서도 말세의 징조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노아 시대와 롯의 시대를 예로 들어 최후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눅17:26-30)

성경은 장차 무서운 불 심판이 있을 것을 엄숙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심판을 생각할 때 인생을 함부로 살 수 없고, 옷깃을 여미며 두렵고 떨림으로 살게 됩니다. 인생은 일회적입니다. 이 일회적인 인생을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영생을 얻느냐? 영원한 멸망에 처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구원의 방주 되신 예수님 안에 거하느냐? 거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홍수 심판으로 인해 세상에는 물이 150일 동안 창일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방주에 있는 모든 생물들을 권념하사 바람으로 물을 감하게 하셨습니다. 무서운 진노의 물결을 감하게 하신 것은 방주에 있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었습니다. 물이 완전히 감하자 노아 일행은 방주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들의 감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 가장 먼저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았습니다(20). 그는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다시는 사람으로 땅을 저주하지 않고자 결심하셨습니다(21,22). 이는 심판으로 인간 내면에 있는 죄의 성향이 뿌리 뽑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증거로 세상과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 증거로 비온 후에 무지개를 허락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짐승들의 내면에 있는 두려움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무지개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모든 생물과 언약을 맺으신 것을 자연 계약이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류로 하여금 생존 또는 번성하기에 적합한 환경을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 하나님의 보편적인 은혜 때문에 생명을 유지할 수있고 번성,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방주에서 나온 후 노아는 농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망령을 부렸습니다. 술 취하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추하게 하는 가를 보게 됩니다. 함은 아비의 하체를 보고 안목의 정욕을 즐기고, 또 그 수치를 형제들에게 폭로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저주를 받아 형제들의 종이 되었습니다. 함 한 사람의 정욕에 기초한 행동이 후손들에게 큰 악영향을 끼쳤습니다(9:25). 그러나 셈과 야벳은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않고 덮음으로 축복을 받았습니다(9:26,27).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으로 인하여 세상은 그 족속과 방언과 지방과 나라대로 나뉘어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온 땅의 구음이 하나요 언어가 하나였습니다. 말과 글이 하나일 때 문화는 별 어려움이 없이 발전하게 됩니다. 노아의 후손들이 시날 평지에 거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성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성과 대를 쌓아 하늘 꼭대기까지 닿게 하여 그들의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창조의 목적에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합심하여 고도의 물질문명을 이룩하여 하나님과 겨루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무한한 잠재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 그들의 교만과 인간적인 야망을 파하셨습니다. 이때부터 인간들은 어학 공부를 하느라 많은 고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를 살펴볼 때 인간들은 끊임없이 교만의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때마다 전쟁, 지진, 화산 등의 재난으로 이를 파하셨습니다.

결론: 하나님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엄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장차 올 심판을 대비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방주 짓는 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또 우리가 죽어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하며 칭찬을 받고 하나님의 상급과 함께 영생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