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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가운데 행하라

by Mark Yang   08/18/2019   1John 2:1~25

Message


요한일서 제 2 강

빛 가운데 행하라

말씀/ 요한일서 2:1-29
요절/ 요한일서 2:10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오늘 본문은 신자가 가져야 할 윤리적 의무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네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 신자의 그리스도와의 교제(1-6), 둘째, 신자의 형제와의 교제(7-11), 셋째, 신자의 세상에 대한 자세(12-17), 넷째, 이단에 대한 경계(18-29)입니다. 이 가운데서 사도 요한은 형제를 사랑할 것과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 것을 강조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I. 우리의 대언자 예수 그리스도 (1-6)

1a절을 보십시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사도 요한은 1:8-10절에서 죄의 고백의 중요성에 대해 말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해 주십니다. 우리가 어떤 몹쓸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진실되게 회개하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 피로 주홍 같이 붉은 우리의 죄를 흰눈 같이 깨끗이 씻어 주십니다. 우리 주님의 사죄의 은혜는 차고 넘칩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사함의 보증이 있다면 마음놓고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사죄의 은혜를 남용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이에 사도 요한은 이 서신을 쓰는 목적이 너희로 죄를 범치 않도록 함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죄와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와 싸우되 어느 정도까지 싸워야 하는 것입니까? 히브리서 12:4절은 우리가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함을 말해 줍니다. 과거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죄를 즐기는 생활을 했습니다. 세상의 죄의 탁류에 몸을 내 맡기고 두둥실 떠내려갔습니다. 그 결과는 영원한 파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의 바다에서 건지심을 입고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생활은 죄의 탁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죄의 은혜를 남용하여 죄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적극적으로 죄와 대항하여 싸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단절시키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성도 단절시키기 때문입니다. 죄는 우리의 인격을 파괴시키고, 무기력하고 쓸모 없는 인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죄를 범하면 마음에 평안이 없고 기쁨이 사라지며 머리가 나빠집니다. 무엇보다 죄를 범하면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고, 사명을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대 앞에 서서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됩니다(고후5:10). 그래서 사도 요한은 성도들에게 독감에 걸리지 않도록 몸조심하라고 권면하기보다 죄를 범하지 않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죄와 대항하여 싸운다할지라도 연약하여 자신도 원치 않게 죄를 범할 경우가 있습니다. 죄의 탁류를 거스려 싸우다가 기도와 말씀공부를 게을리 하여 영적 힘이 빠져 거센 죄악의 물결에 밀려 떠내려갈 때가 있습니다. 죄와 투쟁하다가 본의 아니게 죄를 범할 경우 깊은 절망과 좌절에 빠져 신음하게 됩니다. 죄의식과 자의식에 시달리고 사단의 송사에 시달리게 됩니다. "너 같은 놈은 목자 자격이 없어. 목자 사표 내. 목자는커녕 신자도 될 자격이 없어." 이렇게 자신을 학대하며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누워지내게 됩니다. 이때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에게 진정한 도움자가 되십니다.
2b절을 보십시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여기서 '대언자'가 중요합니다. '대언자'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 )라고 하는데 이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보혜사'(요14:16, 26, 15:26, 16:7)와 꼭 같은 말입니다. '보혜사'란 '도움을 받기 위해 곁에서 부름 받은 자'로서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가 도움을 구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본문에서 '대언자'란 변호사와 같은 뜻입니다. 재판정에서 검사는 피고의 죄를 고소하고 어떻게 하든지 형량을 많이 주려고 애쓰는 반면에, 변호사는 피고 편에 서서 피고의 무죄나 형량을 감량시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에서는 변호사비가 너무 비싸고,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불의하고 탐욕스런 변호사가 많아 변호사에 대한 인식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O. J. 심슨과 같이 돈이 많이 있으면 유능한 변호사를 사서 무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언자가 되시는 예수님은 의로운 변호사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사정을 잘 아시고 우리편에 서셔서 신실하고 책임성 있게 변호해 주십니다. 로마서 8:34절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우리가 죄를 범하게 되면 공의로우시고 엄위하신 하나님의 재판정에 서게 됩니다. 이때 사단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낱낱이 고소하여 우리로 하여금 지옥의 형벌을 받도록 애쓰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변호인이 되셔서 자기를 믿는 자들을 무죄하다고 변호해 주시고 영생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무 죄가 없으신 의로우신 대언자가 되시기 때문에 그 변호의 효력은 100%입니다.
2절은 예수님이 어떤 점에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시기에 합당한가를 말해 줍니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화목제물이란 우리의 죄를 속(贖)하여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하나되게 하는 희생제물을 의미합니다. 죄를 범하면 마땅히 그 죄의 대가를 치루어야 하는데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우리 인간은 죄의 대가로 피를 흘리며 비참하게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이런 죄인을 불쌍히 여기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다 치루어 주셨습니다. 때로 우리는 지금은 심령에 은혜가 있어서 괜찮지만 나중에 또 죄를 범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염려와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뿐만 아니라 미래의 죄까지도 십자가에서 다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실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십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죄사함의 은혜는 깊고 넓습니다.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대언자가 되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우리에게 이런 대언자가 있기 때문에 죄를 범한 후에 절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새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3-6절은 대언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가 되려면 그의 계명을 지켜야 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3-6절 사이에는 '안다'는 단어가 4번이나 나옵니다. '안다'는 단어에는 헬라어로 '기노스코'( )와 '오이다'( )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오이다'는 초경험적이요 직관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고, '기노스코'는 경험적으로,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에서 '안다'는 단어는 '기노스코'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고전 헬라 시대에는 플라톤의 영향으로 인간의 이성에 대한 거의 무한정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식이란 가변적인 현상이 아니라 사물의 영원 불변한 본질, 곧 이데아를 아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사유와 추리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로써 철학은 발달하였지만 윤리적 근거를 제시해 주지 못함으로 각종 타락한 생활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또 다른 사상은 동방과의 접촉을 통하여 감정적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불과 음악과 향료와 제의 행위를 통해 신과 감정적 연합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신비 종교들이 범람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감정적 체험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일시적이며 또 진정한 만족을 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달랐습니다. 이는 지성적 접근이나 감정적인 접근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실제적인 접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알 수 있으며, 인격적인 만남은 그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당시 교회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 지식을 중시하는 자들도 있었고, 동양의 신비 종교의 영향을 받아 감정을 중시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순종이 없고, 실천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됩니다. 만일 하나님을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을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게 됩니다(4).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진실된 사랑으로 그의 말씀을 순종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서 온전케 되고 이로써 자신이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5).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의 말씀을 실천하기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6).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말하기는 좋아하고 실천을 하지 않으므로 신앙과 생활이 분리된 이중생활을 하여 악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말씀 공부는 많이 하지만 실천을 게을리 한다면 머리가 크고 가슴이 작은 ET와 같은 구신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저는 주로 말씀을 가르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말씀을 가르치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말씀을 가르쳐도 심령에 참 기쁨이 없었습니다. 이를 통해 저는 말씀 가르치는 것과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임을 깨닫고 말씀을 준행하고자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은 열심히 가르치지만 나를 가르치지 아니하면 바리새인과 같이 되어 버림받을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순종하기에 힘썼을 때 심령에 참 기쁨이 생기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 후에 버림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날마다 자기를 쳐 복종시키는 생활을 하였습니다(고전 9:27). 제가 날마다 내 자신을 쳐 복종시킴으로써 에스라와 같이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고 가르치기에 힘 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에스라 7:10).

II. 옛 계명과 새 계명 (7-11)

사랑의 계명은 그리스도 오시기 오래 전부터 있어 온 계명으로서 전혀 새로운 계명이 아닙니다(7). 계명 중에서 첫째되는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이요(신6:5), 둘째는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19:18)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요한복음 13:34,35절에서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새 계명이란 과거에 없었던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고 참되며 영원한 계명입니다. 이는 항상 현재적으로 새롭게 받아 들여야 하는 의미에서 새 계명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범에 의해 전혀 새로운 강조점과 새로운 차원을 갖게 되었다는 점에서 새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은 새로운 차원의 넓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옛 계명은 사랑의 범위가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가족과 친지들, 가장 넓은 범위가 민족이었습니다. 죄인이나 이방인들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미움과 저주와 심판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의 대상을 죄인들과 이방인들, 모든 족속에게로 확장시키셨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혁명적인 일이었습니다.
또한 새 계명은 새로운 차원의 깊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옛 계명은 이웃은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은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마5:43,44).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심으로 몸소 이를 실천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새 계명은 참된 것입니다. 이는 어두움이 물러가고 참 빛 되신 예수님이 비추이기 때문입니다(8b). 참 빛 되신 예수님이 내 마음을 비추일 때 내 마음속에 역사하는 모든 미움과 불신앙이 물러가고 사랑과 평화와 생명이 차고 넘치게 되어 모든 것이 새롭게 됩니다.
9-11절에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와 형제를 사랑하는 자가 대조되어 나옵니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입니다. 이런 자는 그 마음에 거리낌이 있고 자유함이 없습니다. 마음이 편치 못하고 형제에 대한 미운 감정으로 인해 스스로 괴로워하며 마음 고생을 많이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천국을 맛보며 살아가지만,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옥을 맛보며 살아갑니다. 또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판단력과 분별력을 상실하여 형제의 장점보다 약점을 잘 보고 판단하고 정죄하게 됩니다. 또한 갈곳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게 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형제와의 교제가 막힐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도 교제가 막히게 됩니다. 형제를 미워하게 되면 결국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반면 형제를 사랑하게 되면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형제를 사랑하게 되면 그 마음에 거리낌이 없게 되어 참 자유와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 깃들게 되어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행복의 비결입니다.
그러나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아침에 형제를 사랑할 수 있도록 열심히 기도하고 나오지만 형제를 보기만 하면 나도 모르게 미운 감정이 솟구치게 됩니다. 그러면 그 형제가 하는 모든 것이 다 밉게 보이게 됩니다. 손가락 움직이는 것, 걸음 걷는 것, 웃는 것조차 밉게 보이게 됩니다. 이는 어두움의 세력이 그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어두움의 세력은 내 힘으로 물리칠 수 없습니다. 이 어두움의 세력을 물리치려면 태양과 같이 강렬한 하나님의 사랑의 빛을 받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신자들을 잡아죽이고자 하는 살의가 충만한 자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강렬한 사랑의 빛이 임했을 때 그 마음에 역사하는 모든 어두움의 세력이 물러가고 생명의 빛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담대히 외칠 수 있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5-37)
사랑이란 어떤 다정한 느낌을 뜻하지 않습니다. 또 사랑은 따뜻한 미소도 아닙니다. 사랑이란 행위를 결정짓는 마음의 태도입니다. 말하자면 형제를 사랑하게 되면 어떤 모양으로든지 행위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형제에게 그릇된 행위를 하였는데, 그 형제를 사랑한다면 형제에게 찾아가 미안하다고 사과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쉬운 일 같지만 실제로는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자존심을 꺾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표현하고 서로 하나되게 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또한 사랑은 용서로서 나타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캐캐묵은 옛날의 허물을 기억하고 용서하지 않는다면 형제를 사랑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사랑은 용서입니다. 형제의 허물을 용서한다는 것은 말은 쉽지만 이를 실천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잘못을 인정해야 용서할 수 있고 그전에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자세를 가지셨다면 한 사람도 용서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심으로 우리에게 놀라운 용서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용서의 사랑을 덧입은 우리는 먼저 형제의 허물을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실제적인 섬김의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말만 하고 실제적인 섬김이 없을 때 사랑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사랑 때문에 시간을 희생하고 물질을 희생했습니다. 이로써 시름시름 죽어가고 있던 한 영혼을 살렸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데는 값비싼 대가가 따릅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죄로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가치있고 귀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늘 나라의 상급이 따릅니다.

III.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12-17)

사도 요한은 이때까지 특정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글을 써왔는데 혹시 다른 사람들이 그의 말을 잘못 받아들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12-14절에서 이 편지를 쓰는 대상과 목적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 편지를 쓰는 목적은 그들이 의심스러워서가 아니라, 그들의 확신을 강화시켜 혹시 있을지도 모를 오해와 범죄를 미연에 방지시키고자 하는데 있었습니다.
12-14절에는 세 부류의 신자들이 나옵니다. '아이들'은 신앙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새 신자들을 가리키고, '아비들'이란 신앙적으로 성숙한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또한 '청년들'은 신앙이 성장해 나가는 자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녀들이란 최근에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된 자들이요, 아비들이란 신앙경륜이 많아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영적인 지혜와 은사를 얻은 자들입니다. 청년들이란 교회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실제적으로 활동하는 복음의 일군들입니다.
'아이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역을 통해 죄 사함을 받고 되었고, 동시에 예전에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두렵기만 하던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아비들'은 오랫 동안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영적 체험을 통해 하나님이 영원하신 분이심을 알고 그를 온전히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청년들은 여러 분야에서 가장 정렬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고, 악의 세력과 싸우는 자들입니다. 사도 요한은 청년들에 대해서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강하다고 합니다. 강한 것은 젊은이의 특징입니다. 젊은이들은 힘이 넘쳐서 때로는 그 힘을 주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젊은이들은 그 넘치는 힘을 올바로 사용하지 못하고 죄 짓는데 사용하기 쉽습니다. 만일 젊은이들이 그 넘치는 힘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하고 복음역사를 위해서 헌신한다면 위대한 역사를 창조할 것입니다. 둘째로, 사도 요한은 청년들이 왜 강한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이는 그들 자신이 강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요한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영입니다. 영은 스스로 강해질 수 없습니다. 그들이 강한 이유는 오직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 거하시고 그의 말씀을 통해서 친히 강하게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성령의 검으로 무장할 때만이 영적으로 강건해질 수 있습니다. 셋째로, 요한은 강하다는 사실로부터 생겨나는 결과에 대해 말합니다.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이는 그들이 하나님 안에 거하고, 그의 말씀 안에 거함으로 흉악한 마귀를 이길 수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15-17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을 알고 악한 마귀를 이긴 신자들이 세상에 대해 가져야 할 자세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강한 부정으로서 세상에 대한 미련과 세상 가치관을 온전히 버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이란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에는 사랑할만 하고 좋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멋있는 집, 승차감이 좋은 차, 아름다운 가구들, 멋있는 별장, 큰소리칠 수 있는 권세 등 사랑할만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사랑할만한 가치가 되지 못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아야 할 중요한 이유는 세상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공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빛과 어두움, 의와 불의가 공존할 수 없듯이 세상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공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가치관과 죄를 미워하시는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동시에 그가 미워하시고 그에 반대되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우리가 세상을 사랑치 말아야 할 첫째 이유는 세상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서 이는 다 아버지께로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분석해 보면 결국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 세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이란 인간의 육신적 본성에서 생겨나는 죄악된 욕심들을 말합니다. 이는 감각에 지배되는 삶을 말합니다.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는 탐식, 사치에 빠진 낭비, 정욕으로 인한 쾌락의 노예, 탐심에 기초한 이기적인 삶 등을 말합니다. 육신의 정욕에 사로잡히게 되면 영적 소원이 사라지게 됩니다. 반면 영적 소원이 충만하게 되면 육신의 소욕이 물러가게 됩니다. 육신의 소욕과 영적인 소원은 서로 적대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갈5:16-18).
안목의 정욕이란 눈으로 짓는 모든 죄를 말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볼 것을 보아야지, 못 볼 것을 보면 패가망신하게 됩니다. 이생의 자랑이란 자기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야망과 명예심과 허영심을 말합니다. 우리가 같은 일을 하더라도 어떤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하는가에 따라 완전히 달라집니다. 만일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을 섬기고 그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동기를 가지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그러나 만일 그 동기가 남보다 우월해지고 또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얻고자 하는 것이라면 겉보기에 아무리 그럴듯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입니다. 이는 공부를 하거나 사업을 하거나 양을 치거나 자선사업을 할 때도 다 적용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둘째 이유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요 결국에는 다 소멸되고 말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은 마치 사탕발린 독약과 같습니다. 이것들은 겉으로 볼 때 멋있고 아름답고 달콤하게 보이지만 이는 순간적이고 또 여기에는 우리를 파멸시키는 독약이 묻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것에 미혹되어서는 안됩니다.
1923년 미국 시카고의 한 호텔에서 중요한 회의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이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당시 미국의 경제를 장악하고 있었던 9명의 재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모인 목적은 서로 협조하고 우의를 다짐으로 영구히 그 부귀를 누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25년후 뉴욕타임즈의 한 기자가 그때 회의에 참석한 재벌들의 현주소를 추적해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하나 같이 몰락해 있었습니다. 강철계의 대부는 파산해서 죽고, 비료업계의 대표는 부정축재가 발각되어 파산했습니다. 가스업계의 대표주자는 정신병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순식간에 다 지나가고 맙니다. 사도 베드로는 세상에 있는 것의 본질을 잘 알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벧전1:24,25) 세상은 다 지나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은 영원토록 거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소유하고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것이 허무한 것을 알면서도 청년의 때에 빨리 결단하면 무슨 재미로 인생을 살 것인가 염려합니다. 이는 영적 세계의 참 재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청년의 때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주와 복음을 위해서 살고자 빨리 결단하는 것은 참으로 현명한 일이며 행복의 기초를 쌓는 것입니다.

18-29절은 이단에 대한 경계의 말씀입니다. 말세의 특징은 적그리스도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단에 속한 자들은 교회에 다니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교회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에는 떠나가게 됩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교회의 회원으로 있다가 분리해 나간 것 같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공동체에 가룟 유다가 있었으나 결국에는 떠나간 것과 같습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항상 함께 섞여 있습니다.
적그리스도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것입니다(22,23). 이런 자들은 거짓말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들은 것, 곧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 위에 굳게 거해야 합니다(24).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대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25). 성령이 내재하게 될 때 아무도 가르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27). 그러므로 우리는 적극적으로 주안에 거해야 합니다. 주안에 거하게 되면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됩니다. 또한 의를 행하게 됩니다(28).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함으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여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