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제 4 강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말씀/ 요한일서 4:1-21
요절/ 요한일서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한일서에는 '형제 사랑'이 강조되어 나옵니다. 2:7-11절에는 형제 사랑이 '참빛'과 관련되어 나옵니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거리낌이 없게 됩니다. 3:11-18절에서는 형제 사랑이 '영생'과 관련되어 나옵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요,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형제를 사랑하게 되면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 알게 됩니다.
오늘 4장에서는 형제 사랑이 하나님의 본성과 관련되어 나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7,8).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이 구절은 요한일서의 최고 절정이 되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는 신자의 윤리의 최고봉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왜 서로 사랑해야 하는가? 서로 사랑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 특히 형제 사랑이 복음역사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성도간에 서로 사랑하는 역사가 충만히 일어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진리의 영과 거짓의 영 (1-6)
1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이 말씀은 신령한 것이라고 하면 무엇이든지 믿고자 하는 자들이 있음을 암시해 줍니다. 요사이도 영성운동이라면 무조건 믿고 따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간은 짐승과 달리 영혼을 소유하고 있어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영을 다 믿지 말고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여 보라고 하십니다. 영에는 하나님의 영이 있고 마귀의 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거룩한 영, 곧 성령 또는 진리의 영을 말하고, 마귀의 영은 악하고 더러운 영, 곧 악령 또는 미혹의 영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보면 무조건 믿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도 기적을 보일 수 있기 때문에 무조건 믿으면 안됩니다. 무분별하게 영을 믿다가 마귀의 영을 받게 되면 악령에 시달리게 되고 결국에는 그 영혼이 파멸에 이르게 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가정도 파괴되고 사회적으로도 해악을 끼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영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가, 마귀에게서 왔는가 시험해 봐야 됩니다. '시험하다'는 동사는 헬라어로 '도키마조'( )인데 이는 화폐의 진위를 알아볼 때 쓰는 단어입니다. 요사이는 위조달러가 많기 때문에 100달러를 내면 혹시 위조달라가 아닌가 자세히 조사합니다. 이처럼 영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믿지 말고 자세히 조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참된 선지자는 자기 말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말씀을 전하기에 힘씁니다.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때로는 책망도 하고 위로도 하며 복음진리를 선포합니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애쓰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온갖 오해와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지만 자기 말을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좇게 합니다. 결국에는 사람들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자기 유익을 구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15,16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2,3절은 하나님의 영과 적그리스도의 영을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인가를 제시해 줍니다. 기독교의 근본 교리는 성육신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요, 완전한 인간이시라는 교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예수님의 영원하신 신성과 역사적 인간성을 인정하지만, 적그리스도의 영은 이중 하나를 부인합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간과 공간의 장애를 받는 인간의 육체로 오셨음을 부인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여호와증인이나 유니테리안,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영원하신 신성을 부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는 삼위일체 되시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만일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는 적그리스도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어 친히 육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33년 동안 사시다가 마침내는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으로 인간의 죄를 위한 대속제물이 되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사망권세를 파하시고, 그 후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육신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의 공생애, 십자가와 부활, 재림, 심판 등 복음의 전반적인 것을 다 포함합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기독교의 신앙을 잘 요약해 놓은 전통적인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나 적그리스도의 영은 사도신경 중 하나를 부인하거나 교묘히 변형시킵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을 인정하고 고백하는냐 하지 않느냐를 기준으로 하나님의 영과 적그리스도의 영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말세의 현상은 적그리스도의 영이 난무한다는 것입니다. 말세가 되면 재난이 연속적으로 일어나서 사람들은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리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여러 가지 재난으로 사회가 불안해지자 무속이 삶의 현장을 구석구석 파고 들어 사회가 깊이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전주 안디옥 교회의 이동휘 목사님의 조사에 의하면 인구의 70%가 부적을 소유하고 있고, 전국에 흩어져서 활동하고 있는 무속인은 목사의 6배가 되는 60만명에 이르고, 지난 한해동안 정치인들, 재벌총수, 대학생들을 비롯해서 월 평균 약 3백만명이 복채를 들고 무속인을 찾았다고 합니다. 복채는 몇만원에서 시작해서 1억원에 해당되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흰돌선교센타의 조사에 의하면 중요한 의사결정시 국민의 70% 정도가 무당이나 점장이나 역술가와 같은 점술가의 말을 참고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불안한 심리를 이용하여 적그리스도의 영이 난무하여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때일수록 깨어서 복음진리를 전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4-6절에는 세상에 속한 자와 하나님께 속한 자가 대조되어 나옵니다. 세상에 속한 자는 진리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세상적인 말에만 귀를 기울입니다. 세상의 부귀와 영화와 권세와 쾌락을 사랑하고 그런 것들을 자랑으로 삼고 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은 세상의 말을 듣게 되면 심령이 답답해지고 머리에 통증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진리의 말씀을 듣기를 좋아하고 힘들지만 진리의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합니다. 회개하기에 힘쓰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애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기에 힘씁니다. 그러나 세상에 속한 자들은 자기 부인, 십자가, 회개, 희생과 같은 말만 들어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킵니다. 이는 그가 마귀에게 속하여 마귀의 영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알 수 있습니다.
II. 서로 사랑하자 (7-21)
첫째, 서로 사랑해야 할 이유 (7-12)
7a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이 말씀은 헬라어로 보면 "아가페토이, 아가포멘 알레루스"( )로서 모두 '아'자 돌림으로 운율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는 그만큼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사랑의 사도로서 입만 열면 "서로 사랑하자"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말년에 사람들이 사도 요한에게 말씀을 전해 주도록 부탁하였는데 그의 나이가 너무 많아서 사람들의 부축으로 단상에 올라갔습니다. 그때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서로 사랑하자"는 말에 담긴 의미가 무엇일까요? "서로 사랑하자"는 말은 얼른 듣기에는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는데 너도 나를 사랑해야 된다"는 뜻으로 들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사랑을 요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자"는 말에는 상대방에게 사랑을 요구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이는 '사랑'이라는 말 자체가 아무 요구가 없이 무조건적으로 베푸는 것을 의미하는 아가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서로 사랑하자"는 말에는 상대방이 먼저 나를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것보다 내가 먼저 상대방을 사랑해 주어야 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사랑이란 상대방이 먼저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상대방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아무 요구없이 베풀 때 상대방도 감동을 받고 서로 사랑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서로 사랑하자"는 말에는 상대방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해심과 겸손히 낮아져서 상대방을 섬기고자 하는 겸손과 섬김의 마음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순수하고 진실된 마음, 상대방을 존중하고 귀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깔보는 교만한 마음, 자기 유익을 위해서 상대방을 이용하고자 하는 이중적인 마음, 자기를 귀히 여기고 높이는 자존심,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 있을 때 서로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7b절과 8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게 될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체험적으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론적으로 아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체험적으로 알게 될 때 진정한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또한 서로 사랑하게 될 때 성령의 그릇이 이루어져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서로 미워하는 곳에는 분열의 역사, 파괴의 역사가 일어나지만, 서로 사랑하는 곳에는 역동적인 사랑의 관계성이 이루어져서 연합의 역사,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서로 사랑하면 사랑의 공동체가 이루어져서 세상의 악한 세력과 싸워서 능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7-12절에는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세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본성 자체가 사랑으로서 본성이 이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를 두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것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은 모든 사랑의 원천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요, 이런 자들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임에 틀림없습니다. 반면에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은 "하나님은 영이시라"(요4:24), "하나님은 빛이시라"(요일1:5)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사랑 자체시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 때문입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의 사랑하는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은사로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독생자를 내어 준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잘 알지 못합니다.
아들 아홉과 딸 셋을 가진 어떤 인디안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 가난하여 자녀들을 양육하기가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생각다 못해 아들 하나를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백인 선교사에게 주고 자녀 양육비를 얻고자 하였습니다. 백인 선교사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이를 몹시 기뻐하고 자녀 양육비로 많은 돈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그 인디안 아버지는 "아빠 아빠"하며 부르짖는 아이의 울부짖음으로 인해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인디언 아버지는 아들 아홉 중에서 하나 정도는 주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견디다 못해 그 다음 날 새벽에 돈 보따리를 들고 다시 그 선교사의 집에 가서 두시간동안 울었습니다. 그리고 돈 보따리를 내 놓으면서 아이를 다시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홉 중의 하나도 주기 힘든데 하물며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내어 준다는 것은 얼마나 큰 희생이겠습니까? 그것도 그냥 내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죽도록 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가장 귀한 것을 내어 놓으셨을 뿐만 아니라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해 아들을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희생시키시다니 이보다 더 놀랍고 기이한 사랑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인간의 머리로는 측량할 수 없는 신비한 사랑입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증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7,8절에서 이 사랑을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또한 로마서 8:32절에서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 적도 없었고, 또 죄로 말미암아 사랑할 수도 없었습니다. 아니 사랑이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에게 먼저 사랑의 손길을 내어미심으로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 주셨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의 자존심을 다 버리시고 모든 권리와 특권을 다 포기하셨습니다. 또한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심으로 인간의 죄값을 대신 치루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먼저 사랑하신 선수적인 사랑이요 대속의 사랑이요,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11).
셋째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현재도 계속 사랑의 활동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다만 하나님의 영원하신 본성만으로 되거나 과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 안에서 또 그들을 통해서 계속 사랑의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서 잘 나타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게 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성령을 통해 그 사랑을 완성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현재도 믿는 자의 마음에 거하셔서 계속 사랑의 활동을 하고 계심을 말해 줍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게 될 때 진정으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행복하리라고 생각하고 인간의 사랑을 갈구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와 같아서 아무리 사랑을 받아도 참된 만족이 없고 끝이 없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한계가 있고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고 영원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나갈 때 우리의 영혼은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둘째, 온전한 사랑 (13-21)
13-16절에는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신앙고백을 하고 또 그 믿음을 기초로 형제를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어 하나님과 온전한 사랑의 교제가 이루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 온전한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다는 것처럼 큰 축복은 없을 것입니다.
17-21절에는 온전한 사랑이 주는 영적 축복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첫째로, 하나님의 심판날에 담대함을 갖게 해 줍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것은 사람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없거나 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9:27절은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일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또 그 심판 후에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영원토록 고통해야 하는 둘째 사망이 있음을 엄숙히 경고하고 있습니다(계21:8). 심판의 날은 하나님의 영원한 시간 계획표 안에 확정적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에 결코 변개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가볍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심판은 실로 무섭고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세상의 법정에 서는 것도 두려운 일인데, 하물며 우리를 능히 지옥불에 던져 넣으실 수 있는 엄위하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은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두려움은 죄를 통해 우리에게 들어옵니다. 우리가 아무도 모르게 죄를 짓고 나면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여도 마음 속으로는 온갖 두려움으로 떨게 됩니다. 교통신호만 위반하여도 두려움 때문에 교통순경을 보면 놀란 자라모양 깜짝 놀라게 됩니다. 그러나 죄를 범하지 않고 선을 행하게 되면 경찰을 봐도 떳떳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하나님과 온전한 사랑의 관계성을 맺게 될 때 마음 속에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담대함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온전한 사랑은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내적인 힘을 공급해 줍니다. 19절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임을 말해 줍니다. 20절은 형제 사랑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말해 줍니다. 만일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바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마땅히 그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21).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일치된 것임을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분리해서 말씀하시지 않고 하나로 묶어서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2:40).
마귀는 분열시키고 파괴시키고 죽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되게 하고 세우고 살립니다. 마귀의 속성은 미움과 시기와 질투심이지만 하나님의 속성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사람을 하나되게 하고 세우고 살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함으로써 참된 행복을 누리고 위대한 생명의 역사를 창조해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