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제 5 강
세상을 이기는 믿음
말씀 : 요한일서 5:1-21
요절 : 요한일서 5: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사도 요한은 1-4장까지에서 사랑에 대해 증거했습니다. 요한은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초로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함을 강조해서 말했습니다. 이제 요한일서의 마지막 장인 5장에서는 사랑의 근원이 되는 믿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만이 근본적으로 세상을 승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밖에 없는 인생을 사는 동안 성공적인 인생, 승리의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해 열심히 달려 갑니다. 그러나 인생을 다 달려 간 후에 조금도 후회가 없는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이 "내가 만일 다시 한번 인생을 산다면" 하며 후회합니다. 사람들은 원치않게 패배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시험에서 패배하거나, 승진에서 누락되거나, 경기에서 지면 비통한 심정을 느낍니다. 그리고 패배감 때문에 기를 펴지 못하고 주눅들린 인생을 살기 쉽습니다. 이렇게 부분적으로 패배하는 것도 슬픈 일인데 하물며 인생 자체를 패배한다면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우리는 한번밖에 없는 고귀한 인생을 반드시 성공적인 인생, 승리의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은 우리가 근본적으로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줍니다.
I.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만이 세상을 이김 (1-5)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 믿는 자들이 믿는 다른 형제들을 사랑해야 하는 근거를 제시해 줍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자는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자는 마귀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되면 영적으로 거듭나서 영적인 눈을 뜨고, 영적인 세계를 보게 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육적으로 출생하게 되면 자기를 낳아 준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다른 형제들에 대한 사랑이 생기듯이, 영적으로 출생한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또한 동일하게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된 믿음의 형제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에 따르는 직접적인 결과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된 자의 특징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며,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내 힘으로 사랑할 수 없는 다른 형제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2,3절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 사랑은 상호 연관성이 있음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인데 이는 곧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3b절에서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고 합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이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들에게 구원을 주고 참 자유와 쉼을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28-30).
또한 무슨 일이든지 억지로 하게 되면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지만 사랑할 때는 어떠한 일도 힘들지 않게 됩니다. 의무적으로 하라고 하면 결코 하지 않을 일도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기꺼이 하고자 합니다. 야곱은 라반을 위해 무려 칠년 동안이나 고달픈 머슴살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에 칠년을 수일 같이 여겼습니다(창29:20).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거나 또 마음에 세상적인 욕심이 생기고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 특히 봄이 되어 연애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 하나님의 말씀이 괜히 부담스럽고 일대일 성경공부가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런 것들이 나를 병들게 만들고 행복을 주기는커녕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뜨린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다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과 기쁨을 주는 은혜의 말씀이 됩니다.
4,5절은 그의 계명들이 무거운 것이 아닌 근본적인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해도 안될 것이라는 패배감을 안고 하면 하는 일이 무거운 짐으로 느껴집니다. 예를 들어서 시험공부를 할 때 반드시 떨어질 것이라는 패배감을 안고 하면 공부가 무거운 짐이 되어 잘 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일대일을 할 때도 이 양은 때가 되면 반드시 도망갈 것이고 제자양성은 결국 실패할 것이라는 확신하에서 하면 일대일이 천금만금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반면에 나는 부족하지만 믿음으로 하면 하나님께서 도와 주심으로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하면 하는 모든 일이 가볍고 재미가 있게 됩니다. 4,5절에서 우리는 두가지 중요한 원칙을 배우게 됩니다.
첫째로, 세상에 대한 승리는 그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긴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 상태로는 결코 세상을 승리할 수 없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은 하나님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신 세상을 말합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은 물질적이고 이기적이며, 탐욕적이고 정욕적입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은 약육강식과 만인 대 만인의 생존투쟁이 지배하는 냉엄한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연히 이기적이 되고 탐욕적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이길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도와 주시지 않는다면 결코 세상을 승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만이 세상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한번밖에 없는 인생을 살면서 성공적인 인생, 승리의 인생을 살고자 많은 노력을 경주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공의 기준을 어디에 두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성공의 기준을 소유와 타이틀에 둡니다. 다른 사람보다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권세를 소유하여 남의 위에 군림하면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고시에 합격하여 판검사가 되거나 고급 공무원이 되면 출세했다고 합니다. 또한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또 안정되고 보수가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인정을 받아 계속해서 진급을 하면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요사이는 무엇을 하든지 전문분야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여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면 성공했다고 합니다. 이런 세상적인 성공의 기준에 비추어 보면 소수의 사람들만이 성공하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패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패배의 심정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성공의 기준은 상대적이고 한계적이어서 참된 성공의 기준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도 죽음이라는 한계 때문에 말년에는 허무를 느끼며 비참한 패배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부자나 빈자나, 권세자나 피지배자나, 고귀한 자나 천한 자나, 아름다운 미인이나 추한 자나, 지혜자나 우매자나 죽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우매자의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가 어찌하여 지혜가 더하였던고 이에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전2:15,16) 우리가 아무리 다른 사람에 비해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 할지라도 죄와 죽음을 이기지 못한다면 실패의 인생을 산 것입니다. 아무리 과정 과정을 승리한다 할지라도 인생 자체를 실패한다면 그것은 비참한 것입니다. 반면에 비록 인생의 과정 과정은 패배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인생을 승리한다면 그는 진정으로 승리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승리의 인생을 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승리의 인생을 살려면 죄를 이기고 유혹을 이기고 환난을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심판을 이겨야 합니다. 요사이 많은 정치인들이 물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하루 아침에 쇠고랑을 차는 것을 봅니다. 또 많은 젊은이들이 정욕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비참한 인생을 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를 볼 때 유혹을 이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게 됩니다. 우리가 승리의 인생을 살려면 물질의 유혹, 정욕의 유혹, 권세에 대한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역사를 살펴 볼 때 세상을 정복한 영웅들은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줄리어스 시저는 "나는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승승장구 승리하였지만 심복인 부루터스에게 암살당하고 말았습니다. 막 트웨인(Mark Twain)은 부와 명예와 절세의 미인인 아내와 딸들을 두고 부족함이 없이 살았습니다. 당시 청소년들은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막 트웨인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흠모하고 부러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만일 내가 다시 인생을 산다면" 라는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비참한 말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우리가 후회함이 없는 인생, 진정으로 승리의 인생을 살려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 곧,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는 죄사함을 받고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받아 영생을 얻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세상을 이길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이 세상을 이길 수 있음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외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세상을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패배의 인생을 산다는 것은 슬프고 비참한 일입니다. 우리는 시험을 쳐서 떨어질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참한 심정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여러번 운전 시험에 떨어지자 견디지 못하여 자살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시험에 떨어져도 비참한데 인생 자체가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이 패배한다면 얼마나 비참하고 절망스럽겠습니까? 우리는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죄와 죽음 권세에 패하여 근본적으로 패배의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죄와 죽음의 사슬은 나를 더욱 옭아매어 나를 사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하며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해 주시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죄와 죽음의 사슬을 끊어 주심으로 이제는 근본적으로 승리의 인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별 메시지를 전하시면서 제자들로 하여금 승리의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격려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넉넉히 이기고도 남는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승리가 너무 감격스러워서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사도 바울도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7). 믿음으로 사는 자만이 진정으로 승리의 찬가를 부를 수 있습니다.
II.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증거 (6-12)
6-8절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세가지 증거가 나옵니다. 이는 물과 피와 성령입니다. 물은 예수님의 세례를 가리키고, 피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가리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역사적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단순한 인간에 불과한데 세례시에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내려오셨다가 십자가 처형 직전에 그를 버리셨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역사적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인쳐 주셨습니다. 또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둘로 찢어지고, 무덤이 열리는 등 많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의 죽음이 일반 사람들의 죽음과 달리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임을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처형을 총 지휘하던 백부장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보고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마27:50-54). 또한 예수님은 요한복음 15:26절에서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과 피는 객관적 증거고, 성령은 주관적 증거입니다. 이 세가지 증거가 합하여 완전한 증거가 됩니다.
9절은 하나님의 증거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인간들의 증거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과 능력의 역사를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가장 확실한 증거는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절에서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10절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다는 것은 성령의 내적 증거를 말합니다. 믿는 자는 그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내적 증거로 말미암아 누가 뭐라고 해도 예수님을 도저히 부인할 수 없게 됩니다. 시카고에 Any Kang 선교사가 있습니다. 이분은 명문 콜롬비아 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믿음이 있고 아름답고 지혜로운 여인입니다. 그녀는 학창시절에 인생의 허무에 시달리던 중에 뉴욕에 있는 Ruth Shin 선교사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후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고 공동생활을 하는 등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감당해왔습니다. 신실하게 예수님을 믿게 되자 집안에서 핍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요동하지 않고 믿음의 중심을 지켰습니다. 그러자 부모들이 CAN이라는 Deprogram 단체와 짜고 어느날 납치를 하였습니다. CAN이라는 단체는 복음신앙을 가진 자 중에서 부자인 부모를 가지고 있는 자들을 골라서 공격하는 적그리스도 단체였습니다. 그들은 불신을 심고 믿음을 파괴하는 대가로 막대한 돈을 받았습니다. CAN은 Any Kang 선교사의 마음에 여러 가지로 불신을 심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요동치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CAN 본부로 이송하는 도중에 비행기 안에서 스튜어디스에게 쪽지를 써서 자기가 납치되어 가고 있으니 공항에 내리면 경찰에게 신고하여 자기를 보호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결국 공항에 내리자마자 경찰의 보호 아래 극적으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내적 증거가 있는 자는 아무리 불신을 심어도 그 마음에 있는 보배와 같은 믿음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생명이 넘치는 삶을 살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다는 것은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죽음과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행복을 맛보지 못하고 지옥을 맛보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안 믿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는 행복이냐 불행이냐, 더 나아가 영생이냐 영벌이냐 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III. 우리의 확신 (13-21)
13-17절에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갖게 되는 두가지 확신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영생에 대한 확신이고, 다른 하나는 기도에 대한 확신입니다. 이 확신은 우리의 삶과 인격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첫째, 영생에 대한 확신(13). 13절을 보십시오.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이 글을 쓴 것은 그들로 하여금 영생이 있음을 확신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영생이란 단순히 끝없는 생명이 아닙니다. 이는 바로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영생에 대한 확신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영생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영지주의나 영생교나 구원파와 같은 이단에 미혹되지 않고 믿음의 중심을 지킬 수 있습니다. 또한 마음의 이기심을 극복하고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한 탐심에서 해방되어 여유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으며, 허무와 절망을 극복하고 의미있고 희망찬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둘째, 기도에 대한 확신(14-17). 14,15절을 보십시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기도에 대한 확신은 우리가 그의 뜻대로 무엇이든지 구하기만 하면 기도를 응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기도가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원동력임을 말해 줍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나가는데는 힘과 위로가 필요하고 지혜가 필요하고 인도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위로와 힘을 공급해 주시고 지혜를 공급해 주시고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가 자신의 연약함과 절망감과 패배감과 무력감을 이기고 생명력이 넘치는 인생을 살 수 있는 비결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보화를 열어 우리에게 아낌없이 부어 주십니다. 과거 우리는 죄로 인해 거룩하신 하나님께 감히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담당해 주심으로 이제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데에는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뜻대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선생님은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4:2,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뜻대로" 구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간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변화시켜서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기도란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에 일치하도록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또한 기도는 하나님의 생각대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소원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기도란 우리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전능하신 분의 힘을 빌어오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소원이 하나님의 마음에 따라 재조정되고 그의 뜻을 성취하는 통로가 되는 수단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이야기 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때 기도를 통해 우리의 인격이 성장하게 됩니다. 이때 인간적인 사람이 영적인 사람으로 변화되고,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하나님 중심적인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또한 기도를 통해서 내면이 넓고 깊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하였는데도 여전히 인간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면 그는 아직도 참된 기도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16,17절에서는 죄를 범한 형제를 위해 중보기도를 해야 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형제가 죄를 범할 경우 그 허물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판단하고 정죄하기보다 간절히 기도를 해 주어야 합니다. 중보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형제를 위한 중보기도는 신자의 의무요, 특권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한 자를 위해서는 중보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이는 영지주의자들과 같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의로 부인하는 이단에 속한 자들을 말합니다.
18-20절에는 세가지 단언적인 확신이 나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한다는 것입니다(18).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은 죄를 범하기는 하지만 반복해서 죄 안에서 무한정 거하지는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성이 그 안에 거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지키시기 때문에 악한 마귀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것입니다(19). 세상에는 하나님께 속했거나 마귀에게 속했거나 두 종류의 사람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면 하나님께 속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마귀에게 속한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알게 하신 것과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신 예수님 안에 거함으로서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20). 이때까지 참되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알게 해 준 사람은 예수님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많이 안다고 떠들어대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계시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참 하나님을 알았다면 자신을 지켜 우상으로부터 멀리해야 합니다(21). 그때 우리는 진정으로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진정한 승리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