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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2:1-13:4(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

by Mark Yang   08/14/2019   Genesis

Message


창세기 제 7 강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말씀: 창세기 12:1-13:4
요절: 창세기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홍수 심판 후 세상은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후손들로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죄도 번성하여 인간은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여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창3:15절에서 약속하신 대로 12장부터 본격적으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그 방법은 장기적으로 사람을 키워 하나님을 경외하는 민족을 이루고, 그 민족을 통해 세상 만민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인류 구속 역사의 초석이 되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마태복음 1:1절에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함으로써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의 족보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또 성경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벗이라 칭하였습니다(대하20:7, 사41:8, 약2:23). 아브라함은 우리 믿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요(롬4:16), 믿음의 본보기입니다(롬4:12). 이 시대는 무엇보다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ⅰ)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주신 약속의 말씀이 무엇이며, (ⅱ)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은 어떤 생활을 했는가 살펴 보고자 합니다.

Ⅰ. 아브람에게 약속을 주신 하나님(11:27-32, 12:1-3)

아브람의 가계는 11:27절부터 시작됩니다. 아브람의 아비 데라는 셈의 후예입니다. 그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는데 하란은 롯을 낳은 후 아비 데라보다 먼저 본토 갈대아우르에서 죽었습니다. 아브람은 결혼을 했으나 그 아내 사래가 잉태치 못하여 후사 문제가 심각하였습니다. 데라는 아브람과 사래와 손자 롯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란에 머물러 살다가 거기서 죽었습니다. 아브람은 그곳에서 자식도 없이 쓸쓸하게 살다가 한 줌의 흙으로 허무하게 사라질 존재였습니다. 이런 그에게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부르심이 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명령과 약속이 있습니다.

(1) 명령(1)
1절을 보십시오. 영광의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복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말씀을 주시기 전에 먼저 명령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명령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아브람이 살던 본토 친척 아비 집은 어떤 곳이며, 그가 왜 이곳을 떠나야 합니까?

아브람이 살고 있던 본토는 갈대아 우르로서 고대 바벨론 수메르 지방의 상업, 문화,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우르 왕조는 B.C 약 2160-2000년 경에 고대에 찬란한 문화를 형성하였으며, 문화의 발달과 함께 수많은 우상이 범람하였습니다. 신들의 아버지인 아누신, 하늘의 대기권을 맡은 엘릴신, 땅의 신인 아닫신, 지혜의 신인 엥키신, 태양신인 사마슈신, 달의 신인 난나르신, 그 외에도 전쟁의 신, 무기의 신, 물의 신, 고목나무 신, 고무신, 나막신 등 갖가지 신들을 만들어 섬겼습니다. 당시 우상의 종류가 3천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 중 달의 신이 우르성의 주신이었습니다. 그들은 신들에게 제사 지내고 신들을 찬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행사였고 생활화가 되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그곳은 우상 문화가 지배하는 곳이었습니다. 우상 문화는 쾌락 문화를 낳게 됩니다. 우상 숭배 뒤에는 음란한 행위가 뒤따랐습니다.(고전10:7,8)

아브람이 살던 아비 집은 어떠했습니까? 여호수아 24:2절에 보면 아브람의 아비 데라는 우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상 판매업자였다고 합니다. 아브람은 그 시대가 주는 영향 아래서 조상의 망령된 행실을 본받아 헛된 우상을 섬기다가 멸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상 숭배로 가득찬 죄악된 분위기 가운데서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없습니다. 새 역사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새 환경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이 주는 좋지 못한 영향력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에는 인간적인 정을 끊는 아픔과 안정된 생활을 포기해야 하는 희생이 따릅니다. 또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새 역사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모험을 해야 했습니다. 모험이 없이는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개척자의 인생을 살기를 원하지만 모험하기는 싫어합니다.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안정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모험 없이는 결코 역사를 창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믿음으로 모험을 하며 영광스러운 개척자의 인생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브람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으로 가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은 어떤 곳입니까? 이곳은 새 역사 창조의 터전이요 사명의 땅입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소망의 땅이요, 거룩한 땅입니다. 우리에게 이 땅은 미국이나 서독이나 캐나다나 멕시코가 될 수 있고, 소련이나 중공이나 인도나 아프리카가 될 수 있습니다. 또 이곳 한국도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곳은 그 어디나 될 수 있습니다. “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게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이 말씀은 아브람에게 임한 거룩한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거룩한 명령을 주십니다. 우리가 믿음의 새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악된 생활이나 죄악된 분위기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인본주의 가치관, 물질주의 가치관에서도 떠나야 합니다. 나에게 좋지 못한 영향력을 끼치는 친구로부터도 떠나야 합니다. 우리는 죄악의 도시를 떠나 천성을 향해 거룩한 순례의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곳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만일 현실의 작은 유익이나 죄의 쾌락을 끊지 못해 죄악의 도시를 떠나지 않을 때 결국 죄악의 도시와 함께 영원히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2) 약속(2,3)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실 때 명령만 하신 것이 아니라 그에게 구체적으로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기초로 인류 구속 역사를 시작하셨고, 또 이 약속을 기초로 메시야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은 지극히 보배롭고 큰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었습니다(벧후1:4). 그 약속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첫째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아브람에게 육신의 자녀를 많이 주시겠다는 그 이상의 깊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 숭배에 빠져 있을 때 아브람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의 왕국을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민족은 인종, 영토, 국경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법도를 좇아 사는 백성을 의미합니다(창18:19). 출애굽기 19:5,6절에서는 구체적으로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계시됩니다. 신약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습니다(벧전2:9). 이 민족은 하나님께 속한 위대한 민족입니다.

둘째로,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세상 명예와는 달리 영적으로 유명하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세상 명예는 풀의 꽃과 같이 시들고 허무하게 사라지지만, 하나님 안에서의 명예는 영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유명케 하셨을 때 그는 이름도 없이 사라질 무명의 할아버지에서, 역사상 모든 사람이 흠모하는 위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열국의 아비(창17:4), 선지자(창20:7), 하나님의 방백(창23:6), 하나님의 벗(약2:23), 여호와의 종(시105:5,6), 이스라엘의 조상, 믿는 자의 조상(롬4:16) 등이 되어 실로 유명케 되었습니다. 믿음의 세계에서는 아브라함을 모르는 자가 없습니다. 모두 그의 이름을 사모하여 그와 같이 되고자 애씁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유명하게 해주셔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이름 석자를 세상에 남기기 위해 피나는 투쟁을 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유명해지려면 하나님께서 유명케 해 주셔야 됩니다.

셋째로, 복의 근원으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큰 민족을 삼으시고 또 그의 이름을 창대케 하시는 이유는 그를 복의 근원으로 삼고자 하신 것입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이 말씀은 “너는 복이 되라” 즉, 복덩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아브람의 현재 형편이 어떠하든 간에 그를 복덩이로 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소원과 의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The Living Bible에 보면 “네가 그렇게 하면”(If you do)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이는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복의 근원으로 삼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는 죄로 말미암은 저주와 심판 가운데서 구원받고 영생을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에게 여러 가지 많은 축복이 있는 것 같지만 우리의 영혼이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받고 영생을 누리는 것처럼 큰 축복은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었다 할지라도,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는 가장 비참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서 얻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할지라도,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고 영생을 누릴 수 있다면 이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모든 사람에게 복을 나누어 주는 존재, 즉 복의 샘터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가 가는 곳에는 어디에나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과거 우리는 자기와 자기 가족만을 위해 이기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 무가치하고 쓸모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저주와 심판 가운데서 구원하시고 복의 근원으로 삼으심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내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내 자체가 복이기 때문에 이곳에 있어도 복, 저곳에 있어도 복, 센타에 있어도 복, 집에 가도 복, 캠퍼스에 가도 복, 한국에 있어도 복, 미국에 가도 복, 중국에 가도 복, 아프리카에 가도 복, 내가 어디를 가나 복! 복! 복! 나는 실로 복의 근원입니다. 나는 어딜 가나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존재가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의 개념에 대해 생각해 봐야 됩니다. 옛날부터 ‘복’하면 ‘오복’을 생각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샤마니즘적인 ‘복’ 사상이 뿌리깊이 박혀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재앙과 질병과 불의의 사고와 죽음과 같은 화를 면하여 운수대통하고, 자식 많이 낳고, 농사나 사업이 잘 되어 하는 일마다 형통하고, 벼슬하여 명예를 얻고, 건강하여 장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을 얻기 위해 새벽에 정화수 떠놓고 천신, 지신, 산신, 삼신, 용신, 칠성신, 고목나무 신께 정성스럽게 빌었습니다. 오늘날도 사업이 잘 되도록 돼지 대가리를 놓고 고사를 지냅니다. 이러한 복 사상은 존재보다도 소유지향적이고, 내면적인 것보다 외적인 것이고, 미래적인 것보다 현세적이며, 절대적인 것보다 상대적이며,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복은 참 축복이 될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복의 개념은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고 내면적인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축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말씀하신 것은 아브람의 후손 가운데서 인류를 구속할 메시야를 보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는 창22:18절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는 말씀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계시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3:8,9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그러므로 본문에서 말하는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을 받고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축복을 나누어 주는 존재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3절에서 복의 근원으로 삼겠다는 말씀의 뜻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첫째는, 아브라함을 축복의 표본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그 사람도 축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게 되면 저주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귀히 여기고 그의 믿음을 본받아야 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으로 살 때 아브라함에게 임한 동일한 축복을 받게 됩니다(롬4:12,23).

둘째는, 아브라함 때문에 땅의 모든 족속을 축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저주를 받을 것같이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 인해 모든 인생들을 축복하시고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대로 아브라함의 씨에서 온 인류를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구원할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하셨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아브람을 부르시고 그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과 그 역사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온 세상이 우상 숭배의 죄에 빠져 소망이 없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절망치 않으시고 아브람 한 사람을 부르심으로 소망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의 인간적인 조건과 자격을 따지지 아니하시고 주권적으로 그를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무조건적인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세계에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신 것은 그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늙고 무자하여 인간적으로 소망이 없는 아브람을 복의 근원으로 부르셨습니다. 이 부르심은 결코 얽매임이나 자유를 제한하는 구속이 아닙니다. 이 부르심은 쓸모없는 자를 빚어 만드사 쓸모있는 자로 영원한 구속역사에 귀히 쓰시고자 하시는 부르심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르심은 그 자체가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 인생을 의미있게 하고 풍성하게 하고 위대하게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도매금으로 사람을 부르지 아니하시고 아브라함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부르사 키우셨습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는데 한 사람을 키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한 사람을 키우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기 위해서 모세 한 사람을 80년 동안 키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이 세계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부르시고 키우고 계십니다.

Ⅱ. 아브람의 새 생활(12:4-9)

그러면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의 반응이 무엇이었으며, 그는 어떤 생활을 했습니까?

첫째, 말씀에 순종한 생활
4절을 보십시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세였더라.”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주저하거나 말씀이 부담스럽다고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다만 약속의 말씀만을 붙들고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신앙 출발을 했습니다. 말씀에 기초하여 신앙 출발을 하지 않을 때 무당신앙이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붙들고 신앙 생활 하기보다, 꿈이나 예언이나 자기 생각을 기초로 신앙 생활하기 때문에 이상한 방향으로 나갑니다. 말씀에 기초하지 않은 신앙은 매우 위험합니다.

아브람이 말씀에 순종하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동안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깊이 연루된 인간적인 정을 끊는 아픔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또 안정된 생활도 버리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도 극복해야 했습니다. 친척들과 주위 사람들로부터 미쳤다, 망령이 들어도 톡톡히 들었다는 등의 마음 아픈 비난의 소리도 들어야 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데는 아픔이 따릅니다. 그러나 이 아픔은 의미있고 가치있는 아픔이요, 새 역사를 창조하는 영광스러운 아픔입니다. 아브람은 이 모든 아픔을 믿음으로 잘 감당했습니다. 그는 실로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순종이 아브람을 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순종은 위대한 순종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을 믿고 단순히 순종했습니다. 그는 머리로 유익을 계산하고 따지지 않고 절대적으로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의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보여 줍니다. 그의 순종은 옛 생활에 대한 회개와 새 생활에 대한 결단을 보여 줍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의 순종하는 믿음을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11:8). 믿음은 순종으로 표현됩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실제 생활에서 순종치 않는 자는 믿음이 없는 자입니다. 순종은 머리로 이해가 되고 완벽한 계획 하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래 어찌할 바를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고, 자신의 모든 인생을 전폭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지만 조금도 불안하거나 두렵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보배로운 약속의 말씀과,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시카고의 Jimmy Rhee 선교사님, L.A의 김이삭 선교사님, 뉴욕의 John Shin 선교사님들을 생각할 때 이분들의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배우게 됩니다. 이분들은 한국에서 높은 사회적인 지위를 가지고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Jimmy Rhee 선교사님은 경향신문사 사회부 차장이었으며, 김이삭 선교사님은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판사였으며, John Shin 선교사님은 외환은행 차장이었습니다. 이분들은 본국에서 평신도 목자로서 존경 받으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믿음으로 이방 땅에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숱한 고생을 하며 복음역사를 섬겨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분들의 믿음을 통해 영광 받으신 줄 믿습니다.

둘째, 장막 생활
아브람은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가 가나안 땅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는 원주민인 가나안 사람이 시퍼렇게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실제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비전은 비전이고 현실은 현실이었습니다. 그는 안정된 생활을 떠나 가나안 땅에 와서 장막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생전에는 약속만 하시고 발붙일 만큼의 유업도 주지 않으셨습니다(행7:5). 심지어는 자기 동역자 사라의 매장지도 없어 막벨라 굴을 돈을 주고 사야 했습니다(창23장). 그러나 그는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는 기쁨으로 장막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명하시면 언제든지 순종하여 떠날 수 있는 군인과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 뿐 아니라 이삭, 야곱에게까지도 장막생활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가나안이 영원히 거할 곳이 아니라, 장차 들어갈 하나님 나라가 본향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히11:9,10). 장막 생활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사는 거룩한 나그네 생활입니다.

셋째, 단을 쌓는 생활
아브람은 가는 곳마다 단을 쌓았습니다. 12:7절에서는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고, 12:8절에서 이사했을 때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또 13:4절에서도 애굽에서 돌아온 후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고, 13:8절에서는 롯이 떠난 후 하나님께서 위로와 비전을 주실 때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습니다. 그의 신앙 생활의 특징은 가는 곳마다 단을 쌓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는 것은 그가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감사하고, 그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에 감사했습니다. 또한 허물과 실수를 정죄치 않으시고 감싸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사랑에 감사했습니다. 그는 왜 나를 위험한 곳으로 이끌어 내어 이 고생시키느냐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쓸모 없는 나를 부르사 연단하시고 영원한 구속 역사에 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심령 깊이 감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심령에는 신경질과 짜증 대신에 감사의 찬송이 흘러 나왔습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찬410). 감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살전5:18).

또한 단을 쌓은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굳게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환경이 바뀔 때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신 사회에 나타내었습니다. 그는 실수해도 하나님께 나아가고, 성공해도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관계성 맺는 것을 그 어떤 것보다도 중히 여겼습니다. 그는 이방 문화에 위축되지 않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전파했습니다. 그는 단을 쌓음으로 선민으로서 구별된 생활을 했습니다.

Ⅲ. 아브람을 보호하신 하나님(12:10-13:4)

아브람이 약속의 땅에 거하여 새 생활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 땅에 심한 기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현실의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자 굶어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기도도 하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아름다운 사래 때문에 강포가 심한 애굽 땅에서 맞아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는 고민하다가 늙은 머리를 짜내어 아내를 누이라 하기로 사래와 약속을 하였습니다. 아브람이 믿음을 잃었을 때 비겁해졌습니다. 결국 그는 자기 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애굽에 도착하자 절세의 미인이 왔다 하며 사래를 칭찬하였습니다. 사래는 궁녀로 취직이 되고, 이로 인해 아브람은 바로로부터 우대를 받아 많은 물질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브람은 부자가 되었지만 전보다 더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절망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정상적인 신앙 궤도를 벗어나 탈선한 것을 의미합니다. 탈선한 그의 생활에는 고통과 위험과 불행이 뒤따랐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람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람을 책망하시기보다 약속대로 아브람의 편이 되사 오히려 바로에게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아브람은 불신자 바로에게 심한 책망을 듣고 동역자를 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아브람의 실수와 허물을 책망하시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섬세히 돌봐 주심으로 어린 믿음의 싹을 키우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실로 은혜의 하나님이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람은 이를 통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깊이 체험했을 것입니다. 그는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에 이르렀을 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는 첫번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와 회개의 단을 쌓았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우상 숭배가 범람하는 절망적인 시대에 아브람 한 사람을 부르심으로 인류 구속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큰 소원을 두시고 그를 복의 근원으로 부르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큰 소원을 두시고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