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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3:5-15:21(아브람의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신 하나님)

by Mark Yang   08/14/2019   Genesis

Message


창세기 제 8 강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말씀: 창세기 13:5-15:21
요절: 창세기 13:5,6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의 믿음은 다섯 단계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믿음으로 출발한 초기 신앙생활과(12-14장), 믿음의 비밀을 깨닫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단계(15장), 소시민적인 자에서 열국의 아비로 변화되는 단계(16,17장),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중보기도하는 단계(18,19장) 최종 시험에 합격하여 복의 근원으로서 인치심을 받는 단계입니다(10-22장),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믿음의 비밀을 깨닫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단계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부르심을 좇아 성실히 신앙생활을 했지만 믿음의 비밀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믿음의 비밀을 알지 못했을 때, 그는 보이는 현실 세계에 얽매여 신음하고 절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믿음의 비밀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보이는 현실 세계를 벗어나 보이지 아니하는 신비스러운 영적 세계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영적인 눈을 떠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세계를 보고 믿음의 비밀을 소유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아브람과 롯(13:5-18)

롯은 아브람의 동생 하란의 아들로서 하란이 죽은 후 아브람이 자식과 같이 돌보았습니다. 아브람이 신앙 출발할 때 롯도 함께 떠났습니다. 그들은 애굽에도 함께 갔다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축복하셨을 때 롯도 역시 축복을 받아 부자가 되었습니다(5). 아브람의 소유와 롯의 소유가 많고 또 땅은 좁아서 함께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들이 서로 목초지를 얻기 위해 경쟁하고 다투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불신자들 앞에서 물질 문제로 다투는 것은 영향력이 좋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때 아브람은 숙부의 권위를 내세워 “네가 그 동안 나에게 많은 은혜를 입었으니 네 갈 길로 가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득권을 주장하기보다 오히려 롯에게 우선권을 양보했습니다.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오늘날 신자라고 하면서 사소한 물질 문제로 물고 뜯고 싸우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아브람은 어떤 손해를 보더라도 선민의 향기를 잃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는 물질보다도 인간관계, 더 나아가 믿음의 영향력을 더 중시했습니다.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사소한 유익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더 큰 것을 놓치는 어리석은 자들이 많습니다. 이는 탐욕으로 인해 그 눈이 가리워져서 더 가치있고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믿었기 때문에 물욕에서 자유할 수 있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롯은 아브람에게 감동을 받고 양보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숙부에 대한 예의는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 욕심을 좇아 요단 온 들을 택하고 소돔까지 나아갔습니다. 그는 애굽에 갔다 오는 동안 문화병에 걸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머물렀습니다(12). 그들의 선택은 그들 내면의 가치관을 잘 말해 줍니다. 롯의 가치관은 현실적이고 물질적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내면을 보는 영적 눈이 없었습니다. 그가 택한 소돔은 겉보기에는 여호와의 동산 같았지만, 그 내면은 부패하여 하나님 앞에 큰 죄인이었습니다. 물질 축복을 받았을 때 아브람은 물질에 얽매이지 않고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롯은 물질에 대한 욕심이 생겨 점점 비참한 상태로 전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게 됩니다(약1;15).

롯이 떠나가자 아브람의 심정은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것같이 슬픔과 고독과 실망으로 착잡하게 되었습니다. 또 좋은 땅을 양보한 현실 문제 앞에 마음이 좁아졌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찾아 오셔서 힘과 위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15,16). 하나님은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실감할 수 있도록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도록 하셨습니다(17). 하나님은 당장 현실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보다 비전을 심어 주심으로 좁아진 마음 문을 넓혀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현실 문제에 얽매여 마음이 좁아져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눈을 들어 오대양 육대주를 바라 보라. 보이는 세계를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이에 아브람은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거하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단을 쌓음으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감사를 나타내었습니다. 믿음으로 살 때 현실적인 손해와 아픔이 있지만, 하나님의 위로와 희망과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Ⅱ. 아브람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14:1-24)

14장에 나오는 정치적 상황은 아브람이 살던 당시 국제 정세가 얼마나 복잡하고 불안했는가를 보여 줍니다. 당시 가나안에는 중앙 정부가 없었고, 소돔과 같은 도시가 왕국이었습니다. 소 왕국들은 서로 자국의 이익을 위해 동맹도 하고 배반도 했습니다. 엘람왕 그돌라오멜이 패권을 잡고 맹주 노릇을 하고 있었고, 다른 나라들은 그에게 조공을 바쳤습니다. 당시에도 강대국이 약소 민족을 지배하고 착취했습니다. 그러다가 소돔 왕을 중심한 다섯 왕이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배반했습니다. 그러자 그돌라오멜 동맹국들이 소돔 동맹국들을 쳐서 재물과 양식까지 다 빼앗아 갔습니다. 이 때 소돔에 거하던 롯도 사로잡히고 재물도 약탈당했습니다. 롯은 하루 아침에 집 잃고 재산 잃고 비참한 노예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도망 나온 자가 와서 아브람에게 고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람은 무엇을 했습니까?

우리는 보통 아브람을 생각하면 아무런 능력도 없고 연약하기 때문에 어쩔 수없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멍한 아브람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우리는 아브람의 전혀 다른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는 당시 정치 세계에서도 열왕들과 겨루어 이길 만큼 큰 지도자가 될 수있는 능력있는 자였습니다. 아브람은 롯이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의리가 없는 그런 놈은 고생을 해야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또 롯을 구하려 하다가 자신까지도 화를 입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즉시로 집에서 길리고 군사 훈련을 시켜온 318명의 용사들을 이끌고 단까지 쫓아갔습니다. 그리고 가신을 나누어 야간 기습 작전을 펴서 막강한 그돌라오멜 동맹군을 파하고 빼앗겼던 재물과 조카 롯과 모든 사람들을 다 찾아 왔습니다. 늙은 아브람이 백발을 휘날리며 진두 지휘하는 모습을 연상해 보십시오. 그의 모습은 늙은 할아버지의 모습이 아니라 백만 대군을 쳐부수는 백전 노장의 모습입니다. 또한 그의 모습은 사자에게 물려간 어린 양을 구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들어 사자의 입을 찢고 어린 양을 구해 내는 용감한 목자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선한 목자 아브람을 보게 됩니다.

롯은 세상 욕심이 많고 이기적이어서 소망을 두기 힘든 양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를 무조건 사랑했습니다.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아브람은 목숨을 내걸고 구출했습니다. 그를 위해 물질과 시간과 정열을 아낌없이 투자했습니다. 마음을 쓰고 지혜를 짜내었습니다. 아브람이 조금이라도 실리적인 생각을 했더라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목자의 심정이 충만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목자의 심정을 축복하사 적은 세력으로 막강한 세력을 능히 파할 수 있는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대적을 아브람의 손에 붙이사 승리케 하셨습니다. 그의 목자의 심정은 한계를 뛰어 넘어 불가능한 일을 하게 했습니다.

아브람은 이 전쟁으로 인해 가나안에서 정치적, 군사적으로 세력을 잡을 수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가 적은 세력으로 막강한 그돌라오멜 동맹군을 파하였으므로, 그는 신화적인 존재가 되어 모든 왕들 위에 군림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승리 후에 자족하고 자만해져서 쓸모없는 자로 전락하기 쉬웠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적은 교만입니다. 교만하게 되면 사단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하나님은 이 때에 멜기세덱을 아브람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아브람이 승리의 개가를 부르고 돌아오자 멜기세덱과 소돔 왕이 그를 맞이했습니다. 멜기세덱은 살렘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아브람을 축복했습니다.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19,20). 멜기세덱은 하나님을 천지의 주재요,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라고 하였습니다. 천지의 주재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창조하신 만물을 보존하시고 다스리시고 주관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존하시고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것을 섭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지으신 천지만물을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또 하나님이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라는 것은 어떤 존재와도 비길 수 없는 유일하시고 절대적이고 최고로 높으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 하나님은 인생들로부터 영광과 존귀와 찬송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멜기세덱은 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승리를 주셨음을 상기시킴으로서, 아브람이 승리의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함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에 아브람은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아브람은 승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멜기세덱은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었습니다. 또 그는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가 아브람을 축복하고 아브람이 그에게 예물을 드린 것은, 그가 아브람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음을 말해 줍니다. 그의 제사장직은 장차 올 그리스도의 제사장직과 같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고 하였습니다(히7:3). 그는 장차 올 메시야를 예표하는 자였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종을 귀히 여기고 섬겼지만, 소돔 왕에게는 분명한 자세를 취했습니다. 아브람은 전리품을 취함으로 전쟁으로 인해 소비한 물질을 보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을 믿었기 때문에 소돔 왕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는 축복의 때에 물질에 얽매이지 않고 믿음으로 물질을 다스렸습니다. 그는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Ⅲ. 아브람에게 믿음을 심으신 하나님(15:1-21)

(ⅰ) 방패와 상급 되신 하나님(1)
14장에서 아브람의 모습은 승리에 찬 모습입니다. 그러나 15장에서 그의 모습은 연약하고 두려움과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패자의 모습입니다. 아브람은 전쟁을 치른 후유증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돌라오멜 동맹군의 복수를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또 사람이 축복을 받거나 일이 잘되면 언제나 시기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주위 왕들이 승리한 아브람을 시기하고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가 세상을 바라볼 때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자신의 처지를 바라볼 때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상속자 문제만 생각하면 암담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현실을 바라보고 점점 절망과 두려움과 회의와 피해 의식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때까지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을 했으나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게 되자 신앙생활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의지와 성실이 바닥이 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외롭고 슬픈 마음을 안고 장막방에 누워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했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이 말씀은 아브람이 세상과 자기를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아브람이 이때 바라봐야 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로, 방패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주시고 원수의 공격으로부터 지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방패 되신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가 되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나의 견고한 요새가 되셔서 진정한 피난처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1,2).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46:1).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어는 누구도 우리의 진정한 방패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진정한 방패가 되십니다. 이 하나님을 의지할 때 가장 안전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지극히 큰 상급이 되십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보상 문제는 심각합니다. 아무도 손해 보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께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물질을 주시기를 바라고, 좋은 믿음의 동역자를 주시기를 바라고, 신실한 양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인생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바라는 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손에 잡히는 것이 없을 때 피해의식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신앙생활 하다가는 망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남몰래 자기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극히 큰 상급이 되시는 분이십니다(히11:6). 하나님은 가장 확실한 보증 수표가 되십니다. 사도 바울은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냐고 하였습니다(롬8:32). 또 하나님은 그 자체가 지극히 큰 상급이 되십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롬11:36). 하나님은 바로 자신을 아브람에게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ⅱ) 아브람의 믿음을 그의 의로 여기신 하나님(2-6)
하나님은 아브람이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고 만족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이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주 여호와여, 도대체 무엇을 나에게 주시려나이까? 제가 무자하여 상속자가 없는 것을 잘 아시면서 왜 이때까지 상속자를 안 주시는 것입니까? 정 그러시다면 저도 계획이 있습니다. 나의 상속자는 다메섹 엘리에셀로 정해야겠습니다” 그는 참다 못해 하나님께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하나님은 문제에 빠진 아브람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하나님은 먼저 “그 사람은 네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좁고 어두운 장막 방에 있는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밖은 어두웠고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눈을 들어 하늘의 뭇별을 바라보도록 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하나님은 아브람의 좁은 마음을 넓혀 주시고 비전을 심어 주셨습니다. 좁은 자기 세계에만 집착하지 말고, 넓고 원대한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보도록 하셨습니다.아브람은 자신의 심각한 인생 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착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장에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보다 비전을 보여 주심으로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아브람이 두려움과 회의와 손해 의식에 시달리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높은 세계, 깊은 세계, 원대한 세계로 인도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하늘에는 은가루를 뿌려 놓은 듯한 무수한 별들의 집합체인 은하계가 있습니다. 지구가 속한 은하계에는 약 1,000억개의 별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주에는 이러한 은하계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우리가 상상할 수없는 광대 무변의 세계입니다. 하늘에는 별이 말없이 하나님의 영광과 그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고요한 밤하늘에 보석과 같이 총총히 박혀있는 하늘의 뭇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우주의 대 합창 소리가 들리고 신비한 세계로 이끌림을 받게 됩니다.

아브람은 문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 둘 별을 세기 시작했습니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이렇게 별을 세는 중에 그의 좁아진 마음 문은 점점 넓어지고, 뭇별을 지으신 무한한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늘의 뭇별과 같은 자식을 주시겠다니 아무래도 이 말씀은 너무 황당무계한 말씀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람은 놀랍게도 이를 믿었습니다. 여기서 ‘믿다’는 말은 ‘신뢰하다’, ‘의지하다’는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했습니다. 그는 절망 중에 하늘의 뭇별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그는 뭇별을 통해 그의 심정에 비쳐 오는 한 줄기 빛을 보았습니다. 그 빛은 생명의 빛이요, 희망의 빛이요, 사랑의 빛이었습니다. 그는 이 빛을 통해 우주에 충만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과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믿음의 비밀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에게 위로부터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하사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엡1:17). 그가 하나님을 믿었을 때 모든 두려움과 피해 의식이 사라졌습니다. 그에게 현실적으로 아무 것도 해결된 것은 없었지만, 그의 내면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믿음을 귀히 여기시고 그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의로 여기셨다’는 것은 의롭지 못한 자를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간주해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믿음을 크게 인정하시고 그의 믿음을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믿음을 기초로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람은 많은 일을 하거나 업적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또 성인 군자처럼 살지도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허물과 실수가 많았고, 우리와 꼭 같이 연약하고 두려움과 피해 의식에 시달렸습니다. 행위로 한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고, 믿음으로 하나님과 연합하였으며,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바랄 수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것입니다(롬4:17,18). 믿음이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능히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절망의 때에 믿음의 비밀을 깨닫고 믿음의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인간적으로 절망의 때에, 하나님편에서는 믿음을 배울 수있는 희망의 때입니다.

(ⅲ) 땅에 대한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7-21)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믿음을 심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시고 그에게 두신 역사적이고 세계적인 뜻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그에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내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브람은 이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요구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땅에 대한 계약을 체결하셨습니다. 9,10절에 나오는 것은 고대 계약 형식으로서 그 중간을 쪼개는 것은 만약 언약을 어겼을 경우 이와 같이 쪼갬을 당한다는 뜻입니다. 17-21절은 하나님께서 그 후손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땅의 범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람과 땅에 대한 계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아브람에게 역사 교육을 시키셨습니다(12-16).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고 그 때 장차 그 후손들이 당할 일을 계시해 주십니다. 그 후손들은 애굽에 가서 400년 동안 강대한 나라를 형성하고 또 훈련을 받게 됩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 크신 능력으로 그들을 구속하시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여기서 제사장 나라로서 새 역사를 창조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장에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600년 후에 주시고자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16). 아모리 족속은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족속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우상숭배와 Homo sex와 심지어는 짐승과 교합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케 했습니다. 그러나 그 죄악이 아직 심판하여 멸하실 만큼 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인자와 자비가 풍성하셔서 인생들의 죄악을 길이 참으십니다. 그러나 끝내 회개치 않고 그 죄악이 차면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장차 아브람의 후손을 통해 아모리 족속들의 죄악을 심판하시고, 그들에게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어떤 것보다도 믿음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의 비밀을 간직한 보배로운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의 사람이 될 때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또 어떤 역경 가운데서도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좁은 현실 세계에 얽매여 신음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좁은 자기 세계에서부터 원대한 하나님의 세계로 인도하시기 위해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