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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6:1-17:27(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by Mark Yang   08/14/2019   Genesis

Message


창세기 제 9 강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말씀:창세기 16:1-17:27
요절:창세기 17:4,5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
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우리는 지난 강의에서 절망 중에 있는 아브람에게 위로부터 복음의 계시가 임함으로, 그가 영적인 눈을 뜨고 믿음의 비밀을 깨닫게 된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지만, 그의 내면은 아직도 자기 중심적이고 소시민적인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를 열국의 아비로 세우시고, 그에게 두신 크신 뜻을 계시해 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얼마나 크신 소원을 두고 역사 하시는가 공부해 보고자 합니다.

Ⅰ. 감찰하시는 하나님(16장)

15장에서는 아브람이 문제에 빠졌으나, 16장에서는 사래가 문제에 빠졌습니다. 그들이 신앙 출발한지 10년이 되었으나 자식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3b). 사래는 참다 못해 마음이 조급해 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시 풍습을 좇아 아브람에게 여종을 첩으로 주어 후사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사래의 제안은 “아브람의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15:4)는 약속의 말씀에 위배되지 않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인간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문제였습니다. 아브람도 기다리다 지쳤는지 사래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끝까지 인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시작했으므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끝까지 참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불신이 생기자 참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인내는 매우 중요합니다. 인내하지 못할 때 더 큰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히10:36절은 말합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그들이 인내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갈은 잉태하자 마음이 교만해져서 여주인을 멸시하고 안방마님 행세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갈은 밥이나 설거지도 하지 않고, 맛있는 음식만 먹고, 뱃속의 아이를 위한다고 “바하”음악만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래 앞에서 나오는 배를 더 내밀었습니다. 그의 배가 불러감에 따라 교만도 점점 커져 갔습니다. 이로 인해 가정의 질서가 파괴되고, 평온하던 가정에 풍파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래는 그렇지 않아도 서러운데, 여종에게서조차 멸시를 받으니 분하여 견딜 수 없었습니다. 사래는 아브람이 하갈을 지나치게 사랑하여 교만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 책임을 아브람이 져야 한다고 했습니다(5). 이때 아브람이 만일 하갈 편을 들었다면 문제는 더 심각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사래에게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고 하며 질서를 세워 주었습니다. 그러자 사래는 하갈을 학대하기 시작했고, 하갈은 견디다 못해 도망을 갔습니다. 아브람의 가정은 해결하기 힘든 복잡한 인간 문제에 말려 들게 되었습니다. 아브람과 사래가 믿음으로 참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쓴 결과, 사랑과 은혜와 평화가 충만하던 가정이 멸시와 학대, 투기와 미움, 원망과 분쟁, 분요와 슬픔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역사적으로 이스라엘과 아랍간에 원한과 대적과 분쟁의 불씨를 낳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아브람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람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뒤에서 그의 허물과 실수를 다 감당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율법적으로 대하지 아니하시고 깊은 이해와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허다한 허물을 덮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났습니다. 하나님께서 하갈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는 존재 위치를 일깨워 주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문제가 교만해져서 질서를 깬 것이므로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사래와 하갈 모두를 살려 주셨습니다. 사람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지혜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10-1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하갈이 낳을 아들로 크게 번성할 것과,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고, 또 장차 그가 어떤 생활을 할 것인가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에 하갈은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습니다. 이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로, 항상 우리를 가까이서 지켜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하면 하나님이 주무시는 것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졸거나 주무시지 아니하시고 항상 우리를 지켜보시는 분이십니다(시121:4). 역대하 16:9절에 보면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하였습니다. 또 다윗은 시편 139:1-4절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숨길 것이 없습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 살 때 함부로 생각할 수 없고, 함부로 행동할 수없고, 함부로 생활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과 슬픔과 어려움을 외면치 않으시고 돌봐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며 신음할 때 그들의 고난을 감찰하셨습니다(출3:16, 4:31). 하갈은 사래에게 학대를 받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광야로 왔을 때, 세상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은 비참한 심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절망과 고독과 슬픈 운명 가운데서 슬피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외면치 않으시고 돌아 보셨습니다. 비천한 그를 찾아오시고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갈은 하나님께서 주신 방향에 순종하여 집으로 돌아와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때 아브람의 나이는 86세였습니다.

Ⅱ. 아브람을 열국의 아비로 세우신 하나님(17장)

그로부터 1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아브람이 어떤 생활을 했는지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1절과 17,18절 말씀을 볼 때 아브람의 영적 상태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라가 그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을 말씀하시자, 아브람은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말했습니다. “백 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그리고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하며 소원을 아뢰었습니다. 아브람은 그 동안 후사 문제로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후사 문제는 그에게 있어서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인생 문제였습니다. 그는 이 문제 때문에 마음 고생도 많이 하고 문제에 빠진 적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통해 믿음의 비밀을 깨닫고 또 끊임없이 투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이 탄생한 이후부터는 상황이 아주 달라졌습니다. 심각한 후사 문제가 해결되었으므로 이제는 더 이상 힘써 투쟁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는 매일 이스마엘과 함께 공놀이도 하고 씨름도 하며 고상한 아버지가 되고자 애를 썼습니다. 여기에는 전에 맛보지 못했던 잔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는 점점 아기와 자기를 중심한 아기자기한 생활에 빠졌습니다. 그는 자기 만족에 빠져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두신 크신 뜻을 잊어버리고 소시민적으로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인생 문제가 해결되자 마음에 영적 소원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자 사명인의 생활이 부담스럽고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이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 같았지만, 내면 깊은 곳에는 영적 소원이 없으므로 애써 영적 투쟁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영적 투쟁을 하지 않으므로 영적 성장이 없었습니다. 이 때가 사실 영적으로 위기입니다.
하나님께서 13년 동안 아브람을 참으시고 때가 되자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책망하셨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나님은 이때까지 한 번도 아브람을 책망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가 실수할 때마다 그의 허물과 실수와 약점을 섬세히 감당해 주셨습니다. 보호가 필요할 때 보호해 주시고, 위로가 필요할 때 위로해 주시고, 비전이 필요할 때 비전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단호히 책망하셨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믿음으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허물과 실수가 많고 인간적으로 부족할지라도, 온전히 믿음으로 살 때 기뻐하시고 그를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믿음으로 살지 않을 때 심히 슬퍼하시고 그를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이는 그의 내면 깊은 곳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불신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래가 늙었으므로 아이를 낳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인간 한계에 갇혀 하나님도 이 문제 만큼은 어쩔 수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하심으로 그 내면에 있는 불신의 돌을 제거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이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이 하나님은 사라의 마른 태에서 새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고, 넘실거리는 홍해를 갈라 길을 내실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은 반석에서 샘물이 나게 하실 수도 있고, 아론의 마른 지팡이에서 새싹이 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치의 병도 고치실 수 있고,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100%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에는 해도 안된다는 불신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나는 아무리 해도 제자 양성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불가능하니까 하나님도 불가능한 줄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아이를 놓고 반신반의하는 아버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하나님은 계속해서 그와 언약을 세우시고, 그로 심히 번성케 하고자 하셨습니다. 그 언약의 내용과 목적과 표징이 무엇입니까?

첫째, 언약의 내용: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시자, 아브람은 그 앞에 겸손히 엎드렸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명령에 복종하겠다는 자세였습니다. 4-6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세우신 언약의 내용입니다.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열국의 아비로 삼고 그의 허리에서 나라들과 열왕들이 배출되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복의 근원’이란 말씀이 ‘열국의 아비’라는 단어로 좀 더 구체화 되었습니다. 이 언약의 내용을 살펴 볼 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두신 소원이 얼마나 크고 웅장하고 원대한가를 보게 됩니다. 아브람은 고상한 아버지로서 자식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주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며 아기자기하게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소원은 자기 중심적이고 현실적이고 소시민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두신 소원은 그가 열국의 아비가 되어 세계 만민을 품고 섬기며, 나라들과 열왕들을 배출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은 역사적이고 범세계적입니다. 아브람은 good man(선한 사람)이 되기를 원했지만, 하나님은 그가 만민 구속 역사에 쓰실 만한 great man(위대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브람이 이 하나님의 크신 소원을 영접하고 그 소원을 좇아 살아갈 때, 좁고 편협한 자기 세계에서 벗어나, 넓고 원대한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또 그 때 비로소 자기 만족에 빠지지 않고, 힘써 영적 투쟁을 하며 영적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역사하십니다. 빌2:1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은 우주를 지으신 크고 광대하신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두신 소원도 크고 광대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복의 근원, 열국의 아비의 소원을 두셨듯이, 우리에게도 이 시대의 복의 근원, 열국의 아비로서의 소원을 두고 역사하십니다. 노예 백성 이스라엘을 바로의 권세에서 구속하사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쓰시고자 하신 것과 같이, 우리를 죄와 사단의 권세에서 구속하사 거룩한 나라요, 왕같은 제사장으로 쓰시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통해 이 시대에 죄로 멸망해 가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코자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노테일러 선교후보님을 통해 복음을 알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 가고 있는 중국의 수많은 불쌍한 영혼들을 구원코자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실 엄청난 역사를 생각할 때 가슴이 뛰고 희망에 불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위대한 일을 기대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시도하게 됩니다. 시편81:10절에 보면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입을 넓게 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입을 연 만큼 채우십니다.

5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열국의 아비로 삼기 위해 구체적으로 그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의 이름을 바꾸어 주신 데에는 무슨 뜻이 있습니까? 이름은 그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를 나타냅니다. ‘아브람’은 고상한 아버지란 뜻으로, 여기에는 아기자기한 소시민적인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란 열국의 아비란 뜻으로, 여기에는 수많은 종류의 사람을 품고 섬기는 열국의 아비의 이미지가 연상됩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이름을 바꾸어 주신 것은 내면성의 변화를 통해 그의 이미지를 형성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아브람이 개울과 같은 내면성의 소유자라면, 아브라함은 태평양과 같은 내면성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울에는 작은 물고기들이 올망졸망 살 수밖에 없지만, 태평양에는 새우에서 시작해서 고래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각종 물고기들이 수없이 많이 살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열국을 품고 열왕을 키우는 위대한 사명인의 인생을 살기 원하셨습니다. 사명인의 인생에는 많은 아픔과 희생이 따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참된 인생의 의미와 생명의 열매가 있습니다.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말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말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제 후로는’ 이 말씀은 과거야 어떤 삶을 살았던 간에, 지금부터는 열국의 아비로서의 인생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이 시대가 주는 영향으로 인해 대체적으로 생각하는 스케일이 적고 왜소합니다. 신앙생활도 소시민적인 신앙생활을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삶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좀 고생스럽지만 웅장한 스케일을 가지고 역사 창조를 하는 위대한 사명인의 삶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집안에서 사랑이나 받으며 주는 밥이나 먹고 쥐나 잡는 고양이나 삽살개가 되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먹이를 찾아 산야를 헤매더라도 온 천지가 진동하도록 울부짖으며 백수를 다스리는 포효하는 호랑이나 사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비바람이 없는 온실의 나무보다도, 거센 비바람을 맞더라도 많은 새들이 깃들 수있는 거목으로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신 소원은 웅장하고 장엄하고 원대합니다.

15,16절에 보면 하나님은 사래에게도 아브라함에게 두신 동일한 소원을 두셨습니다.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사래는 ‘나의 공주’라는 뜻으로 한 남편의 사랑받는 아내로서 아줌마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라는 열국을 품고 열왕들을 키우는 열국의 어미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라가 남편의 사랑이나 받고 보글보글 찌개나 끓여 주고 깍두기나 담고 자식들을 키우는 평범한 아줌마가 되기를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편도 섬기지 말고, 찌게도 끓이지 말고 라면이나 먹고, 자식들도 키우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남편도 더 잘 섬기고 찌게도 더 맛있게 끓이고 자식들도 더 잘 돌보아야 합니다. 다만 현실에 안주하여 소시민적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크신 뜻을 좇아 열국의 어미로서의 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열왕을 낳고 키우는 일은 사라가 다 합니다. 그러므로 사라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사라가 어떻게 돕는가에 따라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비로 성장할 수도 있고, 소시민으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로서 살고자 하는데, 사라가 소시민적으로 살고자 뒤에서 끌어당긴다면 결국 함께 망하게 됩니다. 사라가 열국의 어미로서 살 때 비로소 그릇이 이루어져 하나님의 축복을 담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언약의 목적: 7,8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시는 목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하나님이 되고자 하심입니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 말씀에는 아브라함을 통해 무너진 창조의 질서를 바로 잡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소원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창조주로서의 대접을 받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십니다(고전15:28).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마땅히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고 복종하고, 그에게 찬송과 경배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나 인생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였습니다(롬1:21). 그리고 오히려 헛된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세상이 어그러지고 비뚤어진 세대가 된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불쌍히 여기시고 아브라함을 통해 세상에 영적 질서를 세우시고, 만유를 회복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또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 곧, 믿음으로 사는 자들을 구속하사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보호해 주시고 돌봐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마귀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보호와 관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셋째, 언약의 표징: 9-14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견고케 하시기 위해 할례를 받도록 하셨습니다. 할례는 언약의 표징으로서 하나님께서 그와 그 후손 사이에 세우는 영원한 언약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할례를 행하는데 아브라함과 그 후손의 집에 있는 자는 선민이나 이방인을 막론하고 다 할례를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는 만민 구속의 원리가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민이 이방화가 되는 것은 금하셨지만, 이방이 선민화 되는 것은 원하셨습니다. 이는 신자가 세속화되는 것은 금하시지만, 불신자가 신자가 되는 것은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할례는 깨끗하게 한다는 뜻과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어 선민이 된다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즉 순결과 성별의 뜻이 있습니다. 할례는 육신의 죄와 더러움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별된 자가 된다는 표입니다. 이 할례가 후에 형식적으로 되어 육적 할례에 그쳤을 때, 선지자들은 마음의 할례를 강조했습니다. 마음의 할례는 마음으로부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신30:6). 이 할례는 신약에 와서는 세례가 되었습니다. 할례는 자기 뜻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순종의 표시입니다. 또한 아기자기한 소시민적인 꿈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크신 소원을 영접하고, 그 소원을 좇아 살겠다는 결단의 표시입니다.
23-27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그날 즉시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는 순종하는데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만 하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순종하는데는 아픔이 따르지만 그는 기쁨으로 이를 잘 감당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됩니다. 마음으로부터 자기를 중심한 생각과 계획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사명인의 인생을 살고자 결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고 열국의 아비요, 어미로 키워 주십니다. 우리가 마음의 할례를 받음으로 이 시대를 감당할 만한 열국의 아비요, 어미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