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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8:1-19:38(아브라함을 동역자로 삼으신 하나님)

by Mark Yang   08/14/2019   Genesis

Message


창세기 제 10 강


아브라함을 동역자로 삼으신 하나님


말씀:창세기 18:1-19:38
요절:창세기 18:18,19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
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리웁니다(약2:23, 대하20:7, 사41:8). 본문에는 하나님의 친구된 아브라함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제까지 아브라함의 신앙은 자기 중심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7장에서 그는 하나님의 크신 뜻을 영접하고 마음의 할례를 받은 후, 열국의 아비다운 내면성을 소유한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키우사 동역자로 삼으시고, 함께 복음 역사를 이루어 나가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자기 중심적인 신앙 단계를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아브라함의 손님 대접(18:1-15)

하나님은 이때까지 아브라함에게 이상 중에 말씀으로 나타나셨으나 이제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1,2). 이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말해 줍니다(요한8:56). 아브라함이 오정 즈음에 너무 더워서 장막 문에 앉아 쉬고 있을 때, 사람 셋이 맞은 편에 선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들을 보자마자 늙은 몸인데도 재빨리 달려나가 영접하였습니다. 그는 몸을 땅에 굽히며 간청했습니다.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3-5). 아브라함이 손님을 맞이하는 자세를 보면 겸손이 몸에 배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손님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는 급히 장막에 들어가 신속히 고운 가루로 떡을 만들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짐승 떼에 달려가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급히 요리하게 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뻐터와 우유와 함께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맛있는 백설기와 불고기를 가져왔습니다. 그가 손님들을 섬기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은 늙은이의 모습이 아니라 젊은이의 모습입니다. 그는 적극적이었고 열심이었고 간절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손님을 대접하는 장면은 생각만 해도 흐뭇합니다. 그의 심령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차고 넘쳤습니다. 또 사라와 하인들도 불평 한마디 없이 신속히 움직이는 것을 보면, 가정 전체가 손님을 기쁨으로 대접하는 분위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천사인 줄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풍성히 대접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히브리서 13: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그들은 자기 집에 오신 손님은 누구나 이렇게 환영하다가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것입니다. 이를 볼 때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이든 품고 섬기는 사랑이 풍성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손님 섬기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고 기쁨으로 섬겼습니다. 그의 내면은 한마디로 기름지고 살진 송아지와 같이 윤택했습니다.

이런 그의 내면의 풍성함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그에게 물질이 많았기 때문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세상에는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있지만 마음이 인색한 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풍요 속에서도 가난한 자들입니다. 잠언 11:24,2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하게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 지리라.” 세상에는 물질을 벌 줄은 알지만 어떻게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자기를 위해서, 또 죄짓는데는 아낌없이 쓰지만 남을 위해서는 스쿠르지와 같이 인색합니다. 이런 자의 내면은 냉냉하고 날카롭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찾아온 손님을 위해서, 양들을 위해서 아낌없이 물질을 썼습니다. 아브라함의 풍성함은 하나님의 크신 소원을 영접하고 믿음으로 산데서 온 것입니다. 믿음은 각박한 경쟁 사회 속에서도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하여 기쁨으로 남을 섬기게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 때 부요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사,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십니다.(고후9:8)

오늘날은 문화의 발달과 함께 인간성은 점점 고갈되어 개인주의적이 되고 날카로운 이기주의가 세상에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무관심이 미덕이 되어 남에게 전혀 관심이 없고 자기만을 위해 살게 되었습니다. 부자는 너무 많이 먹어 살이 쪄서 살빼는 약을 먹고, 가난한 자는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운명에 슬피 울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인정과 사랑이 메마른 삭막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사회 풍토 가운데서 우리는 믿는 자로서 아브라함과 같이 손님 대접하기에 힘써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가정을 개방하여 수시로 사랑이 필요한 양들을 초청하여 함께 음식을 나누어야 함을 배웁니다. 음식을 함께 나누는 가운데 따뜻한 사랑이 오고가게 되는 것입니다. 양들을 초청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초청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는 물질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요 믿음의 문제입니다. 비록 차 한잔이나 된장 찌개 하나라도 따뜻하고 애정에 찬 마음으로 대접한다면 손님의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풍성하게 대접을 받으신 하나님은 마음이 흐뭇하셨습니다. 그래서 내년 이맘 때에 반드시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기쁜 소식을 알려 주었습니다. 이 소식을 부엌에서 엿듣고 있던 사라는 기가 막혀 속으로 웃으며 말했습니다.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그의 웃음은 불신에서 나오는 씁쓸한 웃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의 속마음을 아시고 책망하셨습니다.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그러자 사라는 두려워서 웃지 않았다고 정색을 하며 시치미를 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하셨습니다. 웃는 문제로 하나님과 사라 사이에 실갱이가 벌어졌습니다.

여기서 볼 때 하나님은 늙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다 웃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웃기시는 분이십니다. 1960년, 70년대는 한국 사람이 선진국 캠퍼스 지성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믿어 순종케 한다는 것은 정말 웃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웃기시고 불가능을 가능케 하셨습니다. 현재는 세계 각 곳에서 제자양성 역사가 보편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이성과 경험과 인식의 범위를 넘어선 기도 제목이 나오면 이를 잘 믿지 못하고 의심에 찬웃음을 웃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상상을 초월해서 역사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엡4:20,21절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Ⅱ. 아브라함의 중보기도(18:16-33,19:29)

식사 후에 그 사람들은 거기서 일어나 소돔으로 가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갔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강대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실 것과, 또 천하 만민은 그의 후손에서 나신 메시야를 통해 구원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갈3:7절에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지어다”하였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모두 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나라는 실로 강대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허락하시고 그리스도의 왕국, 곧 신령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을 통하여 세상에 공의를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말씀대로 살면 얽매인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도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자유롭기는 커녕 우상숭배와 정욕의 노예가 되고 온갖 불의를 자행하게 되었습니다(롬1:21-31). 세상이 부정부패와 음란과 강포가 충만하게 된 것은 근본적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도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건너온 청교도들이 건설한 나라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그 법도대로 살 때 미국은 자유와 평등의 나라로서 낙원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를 버리게 되자 자유는 방종이 되고 소돔과 같이 음란과 강포가 충만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그 자식과 권속에게 하나님의 도를 가르쳐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여 세상에 하나님의 의를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를 좇아 살 때 하나님의 의가 세워지고, 그때 비로소 정의사회가 구현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친구 삼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고자 하시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알려 주심으로써, 그가 이에 관심을 갖고 동참하도록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제 더 이상 문제에 빠져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애먹이는 철없는 자가 아닙니다. 그는 어린 아이의 단계를 벗어나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구속 역사를 함께 섬기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키워서 종의 위치에 두지 않으시고 동역자의 위치에 두셨습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의 명하는 것을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하셨습니다(요15:14).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친구가 되어 하나님의 역사를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친구라고 해서 동등한 관계가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알고 그 일에 동참할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친구된 특권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아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하고 알아도 동참할 수 없습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친구는 주인이 하는 일을 알 수 있고,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습니다. 또 주인의 뜻을 앎으로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아모스 3:7절에 보면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같이 말씀에 순종하는 신실하고 충성스런 자들을 신임하사 그의 동역자로 삼으시고 자기의 비밀을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두신 뜻을 말씀하시고 또 소돔, 고모라에 대한 심판 계획을 말씀하셨습니다.(20,21)

둘째, 중보기도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므로, 하나님께서 소돔.고모라를 심판하실 것을 알았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소돔.고모라 백성들은 악함으로 마땅히 심판 받아야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심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그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무조건 떼를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이에 기초해서 기도하는 인격적인 기도였습니다. 그는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그는 이 하나님을 믿고 소망없는 백성들을 품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여기에 열국의 아비다운 그의 내면성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무리 해도 소돔 성에 의인 오십 명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숫자를 필사적으로 깎기 시작했습니다.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오십 의인 중에 오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이렇게 해서 에누리하기 시작하더니 50 - 45 - 40 - 30 - 20 - 10명까지 내려갔습니다. 그의 기도의 자세는 겸손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티끌과 같은 존재에 불과함을 잘 알았습니다. 또 그의 기도는 끈질겼습니다. 그에게는 한번 잡으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불개미 정신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목자의 심정이 충만했습니다. 그는 죄로 인해 영원히 파멸할 수밖에 없는 영혼들을 생각할 때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의 심중에는 물론 롯이 자리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롯의 구원만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소돔.고모라 백성 전체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대제사장적 기도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아브라함을 사랑하사 그가 기도할 때마다 100% 다 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너무 심하게 숫자를 깎는다고 짜증스럽게 여기지 않으시고 기꺼이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소돔,고모라는 의인 열 명이 없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19:2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간절한 중보 기도를 멸시치 않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롯이 구원받은 것은 자기의 공로가 아니라 온전히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도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온전히 우리의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배웁니다.
첫째는, 의인의 중요성입니다. 하나님은 소돔,고모라에 의인 10명만 있어도 온 지경을 용서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한 나라의 행불행, 심판과 구원을 가름하는 주체는 정치가나 재벌들이 아니라 의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5:1절에 보면 하나님은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를 빨리 왕래하며... 만일 공의를 행하여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을 귀히 여기시고 의인을 중심으로 역사하십니다. 의인이란 하나님과 동행하며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둘째는, 중보 기도의 중요성입니다. 우리는 롯과 같이 힘든 뺑돌이 양들을 위해 기도하다가 소망이 없어 보일 때는 낙심하고 포기해 버릴 때가 많습니다. 또한 가정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다가 쉽게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 기도를 중단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이 나라와 세계 선교를 위해 기도하다가, 나 한사람이 기도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나님께서 과연 내 기도를 듣고 계시는가? 이런 생각이 들면 온몸에 힘이 빠지고 기도할 의욕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양들을 위한 기도, 가족을 위한 기도, 캠퍼스와 나라를 위한 기도, 만민 구원을 위한 기도 등 중보기도를 기뻐하사 하나도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시고 다 응답해 주십니다. 요한1서 5:14절은 말합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의인의 중보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약5:16)

Ⅲ. 소돔.고모라의 멸망(19장)

19장에서는 소돔,고모라의 죄악상과 죄악된 도시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날이 저물 때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자 롯이 성문에 앉았다가 일어나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간청하여 집으로 모셨습니다. 롯은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발효되지 않은 딱딱한 무교병을 구워 대접했습니다. 그는 손님을 대접하기는 했으나 아브라함의 경우와 비교해 볼 때 인색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브라함에게서 볼 수 있었던 포근함이나 유쾌함이나 풍성함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기름지고 살진 송아지가 연상되지만, 그에게는 맛없고 딱딱한 토스트가 연상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천사들이 왔을 때 롯의 아내나 딸들은 나와 보지도 않은 것을 보면 그 가정이 얼마나 메말라 있는가를 보게 됩니다. 롯은 메마른 도시 생활을 하면서 심령도 메말랐습니다. 그는 온전히 믿음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양다리 걸치며 살았기 때문에 마음에 여유와 은혜가 없었습니다.

두 천사가 식사를 한 후 잠을 청하려고 하자 갑자기 성 사람들이 무론노소하고 사방에서 떼를 지어 몰려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상관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Homo sex로서 변태적 성욕을 의미합니다. 이를 볼 때 소돔에는 남녀 노소할 것 없이 얼마나 성적 타락이 극심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영어에 Sodomy란 남색이라는 뜻으로 소돔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롯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정혼한 두 딸을 폭도들에게 내어놓고자 했습니다. 이를 볼 때 롯이 얼마나 세속적이고 타협적인 자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이번에는 롯을 해하고자 했습니다. 이 사건은 소돔.고모라가 얼마나 음란하고 무법 천지인가를 잘 말해 줍니다. 천사들은 당장에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롯을 보호했습니다. 그리고 롯에게 속한 모든 자들을 그곳에서 이끌어 내도록 했습니다. 이에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심판 중에서 피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농담으로 여기고 비웃었습니다. 그들에게 멸망 직전에 놀라운 구원의 은혜가 임했으나, 말씀을 들을 귀가 없어서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롯은 어떠했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그는 천사들이 빨리 멸망 중에서 피하도록 재촉했으나 지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겨우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조차 감당치 못하여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는 두려움에 시달렸습니다. 그가 무서운 심판 가운데서 왜 이렇게 지체했을까요? 이는 그가 너무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믿음으로 나그네 생활을 했습니다. 이때 그는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거룩한 나그네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롯은 신앙 생활을 했지만 동시에 세상도 사랑했습니다. 그는 세상에 안정을 구하며 세상에 뿌리를 박고서는 세속적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현명한 자 같았으나 실상은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마침내 하나님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고모라에 내리사 그곳에 있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들을 다 엎어 멸하셨습니다. 그 화려함을 자랑하던 소돔.고모라는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어 버렸습니다. 심판을 농담으로 여기던 롯의 사위들도 잿더미가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심판이 어디 있냐고 우습게 여기지만 그런 자에게도 반드시 심판은 임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심판은 무섭고 갑자기 임합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천사의 말에 불순종하여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Green House, 농짝 깊이 감추어 둔 물방울 다이어가 생각이 나서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갔습니다. 롯의 딸들도 부모의 영향을 받아 세상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 도리를 좇아 아버지에게 술을 먹이고 근친상간을 하여 죄악의 씨를 낳았습니다. 역사적으로 모압과 암몬 족속은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했습니다. 롯이 맺은 열매는 비참했습니다. 소돔,고모라의 멸망은 하나의 역사적인 거울이 되어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경고를 줍니다. 하나님은 의와 공도를 버리고 육신대로 사는 자들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결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동역자로 삼으셨듯이, 우리도 이 시대에 하나님의 동역자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어린아이의 신앙 단계를 벗어나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만민 구속 역사를 섬기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