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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0:1-22:19(아브라함을 시험하신 하나님)

by Mark Yang   08/14/2019   Genesis

Message


창세기 제 11 강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하나님


말씀:창세기 20:1-22:19
요절:창세기 22: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
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오늘 말씀은 이삭이 탄생함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고, 또 하나님의 시험을 통해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으로 인치심을 받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구속 역사의 기초를 쌓기 위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가 믿음의 비밀을 깨닫고 열국의 아비가 되기까지 힘든 해산의 수고를 감당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아브라함의 믿음은 터가 굳어지고 약속의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려 견고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믿음의 나무는 높이 자라 무성한 잎사귀를 내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믿음의 조상으로서 인류 구속 역사의 영원한 반석이 되기 위해서는 좀 더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훈련하신 점이 무엇이며, 아브라함은 어떤 자세로 이를 감당했는가 공부해 보고자 합니다.

Ⅰ. 약속을 성취하신 하나님(20:1-21:7)

소돔,고모라의 멸망 이후 아브라함은 가축을 위한 목장을 구하고자 블레셋 족속의 지역인 남방으로 이사하여 그랄에 우거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는 좋지 못한 옛 습관을 좇아 아내를 누이라 속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그랄왕 아비멜렉에게 사라를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구습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하고 반복해서 실수하는 것을 보면 구습을 벗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든 것일지라도 우리는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어야 합니다(엡4:22-24). 아브라함이 아내를 누이라 한 것은 그랄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기 때문에 아내의 미모로 인하여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11). 이를 볼 때 그에게는 아직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제한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무소부재하신 분이시며, 또 세상 모든 나라와 왕들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를 열국의 아비로 세우신 것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습니다. 이 때문에 아브라함은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세상 권세자들을 두려워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반복되는 실수로 문제를 일으켰을 때 하나님은 그에 대해 실망하고 고생을 하도록 내버려 둘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꿈에 아비멜렉에게 나타나 사라를 돌려 보내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언약하신 대로 그의 편이 되사 어떤 경우에나 그를 보호하시고 돌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그를 사랑하시고 귀히 여기셨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그를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 선지자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대언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세상에 당신의 뜻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아주 중요한 인물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통해 그가 살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아브라함은 기도를 통해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으며 축복할 수도 있고 저주할 수도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선지자가 된 것은 그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불러 책망한 후 그에게 후한 선물과 함께 사라도 돌려 보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원하는 대로 거하도록 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아비멜렉의 처사는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아비멜렉 위에 세우시고, 아브라함이 기도할 때 그 가정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실책으로 인해 그와의 언약을 취소하지 아니하시고 때가 되자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21:1,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찾아오셨고, 약속하신 대로 사라에게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식언치 아니하시고 약속대로 역사하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선거 때는 수많은 약속을 하지만 일단 권력을 쥐고 나면 쉽게 약속을 어깁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세상 통치자들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번 하신 약속은 어떤 경우에나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성경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살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기독교는 약속의 종교입니다. 구약과 신약은 모두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심으로 스스로 그 약속에 구속(拘束)되시고, 그 약속을 기초로 역사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이러한 약속을 믿고 살 때 우리는 승리의 인생, 축복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약속 중에서도 가장 큰 약속은 인류를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할 메시야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자 약속대로 메시야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사라가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때에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요구나 상황에 따라 역사하지 아니하시고, 주권적으로 그의 구속 계획에 따라 역사하십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결코 실패함이 없습니다. 이삭이 탄생될 때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사라는 90세 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신앙 출발한 지 만 25년만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의 원대로 빨리 아들을 주시지 않고 그토록 오랫동안 애태우며 기다리게 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이삭을 주시기까지 아브라함을 훈련하신 점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아들을 얻고 인생 문제 해결하는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꼬투리로 그에게 믿음을 심는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현실적으로 자기 당대에 필요한 눈에 보이는 축복을 원했지만,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더 큰 축복을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영적인 눈을 떠서 하나님의 원대한 뜻을 깨닫고, 그 뜻을 섬기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삭 탄생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로 말미암은 것임을 나타내셨습니다. 또한 이삭은 육신의 자녀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로서 장차 오실 메시야의 증표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원할 때 빨리 주셨다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깊이 체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고 소원하는 바를 빨리 들어주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신실한 양을 구하는데 안 들어 주시고, 선교사로 빨리 나가고자 하는데 안 들어 주십니다. 이는 아직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빨리 들어주시면 쉽게 자족하고 교만해져서 믿음의 성장이 막히고 쓸모없게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자라 축복을 감당할 만한 내면의 그릇이 준비되고, 하나님의 때가 되면, 반드시 기도를 응답해 주셔서 가장 좋은 것을 주십니다. “God is best"(“하나님이 최고야!”) 이것이 믿는 자들의 신앙 고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가장 좋은 것을 받으려면 믿음으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사라가 아들을 낳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대로 아들 이름을 이삭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난지 8일만에 하나님의 명대로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기쁨 가운데서도 하나님과의 언약을 기억하고 성실히 의무를 이행했습니다. 그는 축복을 받기 전이나 후나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변소 들어갈 때의 마음과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듯이 축복받기 전의 마음과 받은 후의 마음이 다르기 쉽습니다. 결혼하기 전의 마음과 결혼한 후의 마음이 다르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삭이 탄생했을 때 사라의 기쁨이 어떠했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사라는 이가 다 빠져 합죽 웃음을 웃으며 기뻐했습니다. 이 웃음은 18:12절의 불신의 웃음과는 다른 믿음의 웃음이요 환희에 찬 웃음입니다. 이삭은 웃음, 즉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가정에 기쁨을 주셨고, 이 소식을 듣는 모든 자들이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산 결과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의 열매였습니다. 90세가 된 할머니가 품에 갓난 아기를 안고 젖을 먹이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능력의 역사입니다. 사라는 너무 기뻐 입을 다물 줄 몰랐습니다. 그 동안 그가 당한 수치와 아픔과 번민과 심중의 괴로움이 눈녹 듯이 사라졌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는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이 기쁨은 단순한 감정적인 기쁨이 아니라 믿음으로 영적인 열매를 맺은 데서 오는 참된 기쁨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아브라함이 맺은 열매와 롯이 맺은 열매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때까지 믿음으로 사느라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장막 생활을 하며 나그네 생활을 했습니다. 좋은 것을 양보하고 손해보는 아픔, 아기자기한 꿈을 버려야 하는 아픔, 오랫동안 아무 것도 손에 잡히는 것이 없이 비전만 붙들고 사는 아픔 등 아픔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힘든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고자 하는 마음을 한번도 품지 않고 끝까지 믿음의 중심을 지켰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열매를 맺고 진정으로 웃는 자가 되었습니다.

반면 롯은 어떠합니까? 그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양다리 걸치며 타협적인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세상을 지혜롭게 사는 현명한 자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소돔.고모라의 불심판과 함께 모든 재산을 잃어 버렸습니다. 또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로 불심판 가운데서 겨우 구원을 받았으나 믿음이 없어 이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세상에 대한 미련 때문에 구원의 기쁨보다도 두려움과 절망으로 가득찼습니다. 결국 두 딸과 함께 동굴 속에 거하다가 절망 중에 두 딸로부터 술을 마시우고 이용당하여 죄악의 씨를 낳았습니다.

인생은 중간평가보다 결국에 어떤 열매를 맺는가가 중요합니다. 열매는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가를 가장 진실되게 말해 줍니다. 과정은 속일 수 있으나 열매는 속일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6:7,8절은 말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Ⅱ. 이삭과 이스마엘(21:8-34)

이삭이 자라자 젖을 떼고,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당시는 보통 3살 때에 젖을 떼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때 이스마엘은 17세로서 건장한 청소년이었습니다. 이삭이 이스마엘과 함께 자라게 되자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였습니다. 여기서 희롱한다는 것은 ‘멸시하다’, ‘비웃다’, ‘핍박하다’는 뜻입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상속권을 상실하게 되자 그에 대한 시기심과 자신의 비참한 운명에 불만을 품고 고의적으로 동생을 멸시하고 핍박한 것입니다. 이를 본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을 내어 쫓으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깊은 근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이삭도 자식이지만 이스마엘도 자식이었습니다. 이제 이스마엘은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스마엘을 내어쫓으라니 이는 인간으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이삭과 함께 키우자니 이삭이 기가 죽어 잘 자라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깊은 번민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은 분명한 방향을 주셨습니다.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12). 그러나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씨이기 때문에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갈과 함께 이스마엘을 내어 보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과거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모든 인본주의적인 요소를 잘라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읽을 때 사라도 너무하고 하나님도 너무 하시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왜 이삭과 이스마엘을 함께 키울 수 없단 말인가? 하는 반발심이 생깁니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갈4:21-31절에서 이스마엘은 계집종에게서 육체를 따라 났고, 이삭은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약속으로 말미암았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인간적인 방법으로 얻은 육신의 자녀요, 이삭은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약속의 자녀입니다. 문제는 이스마엘이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 구속역사를 계승합니다. 이스마엘은 율법을 가리키고, 이삭은 은혜를 가리킵니다. 또 이스마엘은 인본주의를 가리키고, 이삭은 복음주의를 가리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의 문제는 율법과 은혜, 인본주의와 복음주의의 갈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본주의는 인간 중심이요, 복음주의는 하나님 중심입니다. 인본주의는 이성 중심이요, 복음주의는 말씀 중심입니다. 이 두 세력은 서로 공존할 수 없습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한 것같이, 율법씨는 은혜씨를 구박하고 인본주의는 복음주의를 핍박합니다. 이삭은 연약하고 이스마엘은 강합니다. 이삭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보호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과감하게 이스마엘을 쫓아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이스마엘은 기독교 인본주의입니다. 예수님을 믿되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절대적으로 믿지 않고 인간을 위주로 상대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8:3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인본주의 신자들은 자기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또 사명의 십자가를 지지 않습니다. 다만 복음이 주는 은혜만 누리고자 합니다. 이러한 기독교 인본주의는 복음의 가장 큰 원수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인본주의 신자들이 많습니다. 이들의 비복음적인 신앙은 불신자들에게 좋지 못한 영향력을 미칩니다. 이들은 복음주의자들을 비웃고 핍박합니다. 이들은 말씀대로 사는 것을 어리석게 생각하고, 말씀은 시대에 맞게 변형되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자들은 말은 그럴듯하게 잘하지만 실제 생활에는 아무런 영적인 열매가 없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습니다.

또 우리의 내면에도 이스마엘적인 요소, 즉 인본주의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성보다 친구간의 의리를 더 중히 여깁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 중심의 절대적인 복음신앙의 싹이 자라기 위해서는 이러한 인본주의적인 요소를 내어쫓아야 합니다. 여기에는 결코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삭이냐, 이스마엘이냐 하는 선택이 있을 뿐입니다.

아브라함은 두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마엘을 내 쫓고 이삭을 붙들었습니다. 그가 이스마엘을 내 쫓고자 했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갈5:24). 결국 아브라함은 자신 속에 있는 인본주의적인 요소와 싸워 이겼습니다. 그는 자신과 가정 속에 있는 인본주의 누룩을 온전히 제거함으로써 그의 믿음은 더욱 순수하고 진실된 믿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도 친히 돌봐 주셨습니다.(15-21)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제 상당히 성장했습니다. 그는 거목이 되어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믿음의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하심으로 점점 창성해 가는 것을 보고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고자 찾아 왔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의 종들이 그의 우물을 늑탈한 일에 대해서 아비멜렉을 책망했습니다. 그리고 대등한 입장에서 평화 조약을 맺고 또 우물에 대한 소유권도 확실하게 했습니다. 이를 볼 때 아브라함은 세상 권세자들을 두려워 하던 데서 이제는 책망하는 당당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아브라함은 무엇을 했습니까? 33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에셀나무는 위성류로서 사막의 모래 언덕이나 염분이 많은 늪 지대에서 잘 자라는 상록수입니다. 그가 이렇게 상록수를 심은 것은 불변의 신앙을 상징하고, 평화가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나무를 심었을 것입니다. 또 그가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그만큼 깊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영원한 역사 가운데 살아 계시는 영존하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의 믿음은 이 영존하시는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현존하는 시간 세계 속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불가능한 가운데서 이삭을 낳고 흔들릴 수 없는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의 신앙은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그가 복의 근원으로서 영원토록 반석과 같은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해서는 최종적인 졸업 시험을 치루어야 했습니다.

Ⅲ.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하나님(22:1-19)

1절의 ‘그 일 후에’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넘치도록 축복을 주신 후를 의미합니다. 약속의 아들 이삭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무럭무럭 자라고, 아브라함의 믿음도 성숙하여져서 아무 부족함이 없을 때를 의미합니다. 이 축복의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시험에는 사단으로부터 오는 시험이 있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시험이 있습니다. 사단으로부터 오는 시험은 인간을 범죄케 하는 유혹(temptation)으로서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시험은 test로서 성도의 신앙을 좀더 견고케 하고, 보다 높은 믿음의 단계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연단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고자 하신 것은 그를 연단하사 그의 믿음을 영원토록 견고케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은 주지 않으십니다(고전10:13).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청종하겠다는 준비된 자세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이 시험은 너무 가혹한 것 같습니다. 이삭은 천신만고 끝에 얻은 언약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아들로서 아브라함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대를 이을 유일한 독자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유일한 소망이요 존재 의미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위해 이스마엘까지 내어쫓았습니다. 이런 귀한 아들을 불에 태워서 바치라니 해도 너무 심한 말씀인 것 같습니다. 이 시험은 비합리적이고 비도덕적이고 비 신앙적입니다. 아브라함은 얼마든지 말씀의 불합리성을 따지고 항의할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불신하고 원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한마디 대꾸나 반발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간적인 생각을 하고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불신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아침 일찍이 일어나 준비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는 영적 질서를 생명과 같이 귀히 여겼습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또한 약속의 말씀에 기초하여 하나님께서 죽은 아들도 능히 살리실 것이라는 부활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히11:17-19)

아브라함은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아들 이삭과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모리아 산으로 나아갔습니다. 그곳은 3일 길이나 되는 먼 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먼 길을 묵묵히 순종하여 나아간 것은, 마치 아무 죄없이 십자가를 지시고 묵묵히 골고다 언덕을 올라간 예수님과 같았습니다. 제 삼일에 모리아 산에 도착하여 산 밑에서 사환들을 기다리게 한 후 이삭에게 번제할 나무를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들고 두 사람이 동행했습니다. 이때 길을 가다가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알아차린 이삭이 “불과 나무는 있지만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하며 물었습니다. 이때 그의 마음의 고통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에게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마침내 두 사람이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았습니다. 이때 이삭이 반항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묵묵히 순종한 것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어 묵묵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것을 상징합니다. 아브라함은 칼을 들어 이삭을 잡고자 했습니다. 그는 흉내만 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잡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의 믿음에 크게 감동을 받고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며 급히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합격 통지서를 주셨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 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은 이 사건으로 아브라함이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볼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장 원하시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하나님 한 분만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믿음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사랑하는 가족이나 양이나 꿈이나 이상이나 그 어떤 것도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믿음이요 하나님과 연합한 온전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이냐? 이스마엘이냐?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이냐? 이삭이냐?를 선택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삭은 약속의 자녀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에 불과합니다. 이 축복으로 말미암아 심령이 막히고 영적 눈이 감기워진다면 계속해서 축복을 받을 수 없고 비참하게 됩니다. 세상에는 축복을 받았을 때 축복으로 인해 심령이 막혀 믿음을 잃고 축복 받기 전보다 더 비참하게 된 자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축복의 원천 되신 하나님을 붙들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축복 그 자체에 얽매이지 않고 축복 주시는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아브라함은 한 수양이 뿔이 수풀에 걸린 것을 보고 이삭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의 쓸 것을 미리 아시고 때를 따라 공급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때로 우리는 장래 진로 문제, 결혼 문제로 심령이 어두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자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예비해 놓고 계십니다.

16-1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맹세는 최후의 확증입니다. 하나님은 변개할 수 없는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심으로 약속을 확증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와 같은 허다한 영적 자손을 허락하실 뿐만 아니라, 장차 그리스도를 통해 주실 승리와 구원의 축복까지 계시해 주셨습니다. ‘네 씨’는 단수로서 장차 아브라함의 후손 가운데 태어나실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기초로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죄와 죽음을 이기시고 사단의 머리를 박살내셨습니다. 그리고 믿는 자들이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케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천하 만민이 저주에서 구원을 받고 영생의 복을 누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와 저주와 죽음과 불행이 왔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한 사람의 순종으로 구원의 역사는 시작되고,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으로 구원의 역사는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기뻐하시고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 하셨습니다.

결론: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의 중심이 어디로 향해 있는가를 알아 보시고자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우리에게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이삭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이는 이삭보다 더 좋은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