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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3:1-24:67(이삭의 가정을 세우신 하나님)

by Mark Yang   08/14/2019   Genesis

Message


창세기 제 12 강


이삭의 가정을 세우신 하나님


말씀:창세기 23:1-24:67
요절:창세기 24:3,4
“내가 너로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
니 너는 나의 거하는 이 지방 가나안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로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믿고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드리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크게 인정하시고 그를 천하 만민의 복의 근원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기초로 인류 구속 역사의 집을 짓기 시작하셨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구속 역사가 약속의 자녀인 이삭에게 계승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먼저 이삭의 동역자를 예비하시고 믿음의 가정을 세우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삭의 가정을 세우는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충성된 아브라함의 종과 아름다운 믿음의 여인 리브가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사명인의 모본이 됩니다. 그는 자기에게 맡겨진 어려운 사명을 믿음과 기도와 충성심으로 훌륭히 수행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를 통해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오늘날은 사명인다운 사명인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ⅰ)아브라함의 종을 통해 사명인의 자세를 배우고, (ⅱ)리브가를 통해 믿음의 여인상을 배우고자 합니다. (ⅲ)더 나아가 가정을 이루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배우고자 합니다.

Ⅰ. 막벨라 굴을 산 아브라함(23장)

23장은 사라의 죽음으로 인해 아브라함이 장지를 구입하는 사건으로 그의 믿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라가 127세에 헤브론에서 죽었습니다.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던 믿음의 동역자를 잃은 아브라함의 슬픔은 컸습니다. 그는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였습니다. 그러나 시체를 장사할 매장지가 없었으므로 무한정 슬퍼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시체 앞에서 일어나 나가 헷 족속에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청컨대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소유를 삼아 나로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시오”(4) 이 말씀에서 볼 때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이지만 실제로는 한 치의 소유도 없이 나그네의 인생을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라가 65세 때 가나안에 와서 127세에 죽은 것을 보면 그들은 이곳에서 62년 동안 살았지만 매장지조차 없었습니다.(행7:5)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거룩한 나그네로서 장막 생활을 했습니다.(히11:9,10)

5,6절을 보십시오. 헷 족속은 아브라함에게 크게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을 ‘내 주여’라고 부르고 ‘우리 중에 하나님의 방백’으로 인정할 만큼 아브라함을 크게 존경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방백이란 하나님께서 통치자로 임명하신 하나님의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를 볼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이방 불신자들에게 얼마나 좋은 영향력을 끼쳤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7,12절에서 아브라함이 그 땅 백성을 대하여 몸을 굽히는 것을 보면 겸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민이요 열국의 아비라고 뻣뻣하게 몸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 겸손하게 허리를 굽혔습니다. 그는 이방인들을 품고 섬기는 목자생활을 함으로써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막벨라 굴을 값을 주고 사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땅의 주인인 에브론이 많은 사람이 듣는데서 아브라함에게 흔쾌히 그 땅을 거저 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정도 되면 그들의 호의를 장례비 부조로 생각하고 감사히 받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에브론과 실랑이를 벌이면서까지 기어코 땅 값을 정당하게 지불하고 사고자 하였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당시 통용되는 은 400세겔을 주고 막벨라 굴을 사서 거기에 사라를 장사하였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창세기 저자는 “이와 같이 그 밭과 그 속의 굴을 헷 족속이 아브라함 소유 매장지로 정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헷 족속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왜 막벨라 굴을 사고자 했을까요? 그로부터 배울 바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정당한 자세가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는 헷 족속들이 자기를 동정하고 호의를 베풀지만 겉치레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설령 그 호의가 진실하다 하더라도 후대에 가서는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는 불신 세계에 살면서 불신자들을 잘 이해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공짜를 좋아하지 않고 무엇이든지 정당한 대가를 치루고자 했습니다. 그는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않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믿는 자의 정당한 자세입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은 후손들을 위해 땅의 권리를 확보해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약속과 실제는 엄청나게 달랐습니다. 그는 자기 땅에서 나그네와 같이 장막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거부였으므로 부동산 투기를 하여 많은 땅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땅을 주셨다는 구체적인 증거로 후손들을 위해 그 땅의 권리를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약속의 땅에 말뚝을 박고자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 막벨라 굴을 후손들에게 유산으로 남겨 주었습니다. 그에게는 후대를 내다본 안목과 투철한 역사의식이 있었습니다. 그 후 이 곳에는 아브라함, 사라, 이삭, 리브가, 야곱, 레아와 같은 선조들이 장사되었습니다.(35:27-29, 49:29-32) 이곳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역사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Ⅱ. 아브라함의 결혼관(24:1-9)

1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나이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복을 주심으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이삭의 결혼 문제였습니다. 이삭은 나이 40세가 되도록 결혼할 생각은 하지 않고 어머니 품속에서만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를 그리며 들에 나가 묵상만 하였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그의 결혼이 시급함을 깨닫고 가장 믿을 만한 신실한 청지기인 늙은 종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그의 손을 아브라함의 환도뼈 밑에 넣어 맹세케 했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로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나의 거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아브라함은 이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온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가장 신성한 의식으로 맹세까지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내를 택하는데 왜 가나안에서 택하지 말고 고향에 가서 택하라고 합니까? 이삭이 가나안 여인과 결혼할 경우 어떤 위험이 따르게 됩니까? 그들은 음란한 행위를 종교의식 중의 하나로 행하였습니다. 그들과 통혼하는 것은 곧 신앙의 순결을 잃고 우상 문화에 동화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반면 아브라함의 고향에 있는 사람들은 셈 족속으로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24:50,51,60) 그러므로 이 말은 불신자를 택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여인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는 가나안 대학 음대를 졸업하고 부와 권세가 있는 가문있는 딸이요 키도 크고 얼굴도 잘 생긴 미모의 여성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떤 인간 조건도 찾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만을 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단순히 자기 대를 이을 육신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계승할 약속의 자녀임을 알았습니다. 또 그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데 있어서 가정의 중요성과 특히 여인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삭이 아무리 믿음이 훌륭하다 할지라도 아내가 믿음이 없어 동역을 잘 못할 때 하나님의 축복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함께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잘 계승되기 위해서는 이를 감당할 만한 믿음의 그릇이 필요했습니다.
만일 이삭이 불신자와 결혼할 경우 솔로몬과 같이 유혹을 받아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 숭배자가 되어 버립니다.(신7:3,4) 남자들은 겉으로는 큰소리를 치지만 실제적으로는 은연중에 여자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됩니다. 형제가 좀 부족하더라도 믿음의 뿌리가 있는 믿음의 여인과 결혼하게 되면 좋은 믿음의 영향을 받아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형제가 아무리 훌륭해도 믿음이 없고 인간적이고 육신적인 여인과 결혼하게 되면 좋지 못한 영향을 받아 쓸모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만큼 여인이 남편이나 자식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지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것은 몰라도 믿음의 결혼 만큼은 타협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 만큼은 내 마음대로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결혼 만큼은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합니다. 믿음의 결혼은 아무리 그 중요성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늙은 종에게 사명을 주었을 때 종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그는 참으로 난처했습니다. 세상에 어떤 여자가 자기와 같이 늙은 종을 따라 먼 이곳까지 따라 올 것인가? 인신매매단으로 생각하지나 않을까? 또 당시에는 사진 한 장도 없는데 남편될 사람의 얼굴도 보지 않고 시집오고자 하는 여자가 있을 것인가? 그래서 그는 만일 여자가 오지 않고자 하면 이삭을 그곳으로 데리고 가도 되는가 물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절대로 이삭을 데리고 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7절을 보십시오.

첫째로, 그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그 땅을 이삭에게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을 약속의 땅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게 할 수 없었습니다.

둘째로, 그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 땅을 네 씨에게 주시리라 약속하셨는데 어찌 이삭의 동역자를 예비해 놓고 계시지 않겠는가? 확신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사랑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만일 여자가 따라오지 않으면 종은 책임을 면하게 됩니다. 이에 종은 아브라함의 환도뼈 아래 손을 넣고 맹세함으로써 사명을 마음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는 이 사명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자기에게 맡겨 주신 사명으로 영접했습니다.

Ⅲ. 충성스러운 아브라함의 종(24:10-56)

(ⅰ)기도하는 종(10-27)
아브라함의 종은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은금 패물과 예단을 다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사막의 배인 낙타 10필을 취하여 그곳을 떠나 메소보다미아의 나홀의 성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헤브론에서 하란까지는 약 720Km로서 당시 교통 수단으로 약 20일이 요하는 긴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몹시 지치고 피곤했을 것입니다. 숙소를 잡고 쉰 다음에 아브라함의 친척을 찾아본다거나 동사무소에 가서 호적 열람을 한다거나, 신문에 신부를 구한다는 광고를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착하자마자 먼저 기도했습니다. 그는 인간적인 방법을 강구하지 않고 기도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가 가로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오늘날 나로 순전히 만나게 하사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그는 매사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일을 성공적으로 이루려면 먼저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열심히 뛰어 다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것은 시간 낭비요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도란 일을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일을 맡기면 가장 확실합니다.

13,14절을 보면 그의 기도는 아주 구체적이었습니다. 물 길러 나오는 성중 사람의 딸 중에서 한 소녀에게 물을 좀 달라고 했을 때 목마른 나그네에게 기꺼이 물을 줄 뿐만 아니라 말못 하는 약대에게도 물을 주고자 하면 그 소녀가 바로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임을 알겠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구한 여인상은 이해심이 많고 친절하고 사랑이 풍성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외모와 학력과 집안 배경을 보지 않고 여인의 내면성을 보고자 했습니다. 그가 기도를 마치자마자 리브가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그가 기도한 대로 일이 진행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때 그는 묵묵히 주목하여 여호와께서 과연 평탄한 길을 주셨는가 그 여부를 알고자 했습니다(21). 대개 사람들은 기도한 후에 이를 잊어버리고 자기 나름대로 일을 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종은 기도한 것은 받은 줄로 믿고 묵묵히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살폈습니다. 그리고 기도가 구체적으로 응답되었을 때는 머리를 숙여 여호와께 경배하고 감사 기도를 올렸습니다(26,27). 아브라함의 종은 기도로 일을 시작하고, 기도로 일을 진행하고, 기도로 일을 끝내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충만한 spirit은 바로 기도에서 나왔습니다.

(ⅱ) 사명에 충성하는 종(28-56)
아브라함의 종의 일행은 마침내 브두엘의 집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리브가의 오라비인 라반이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여 들어오소서” 하며 그들을 따뜻이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약대에게 짚과 보리를 주고 또 그들에게는 발 씻을 물을 주고 그 앞에 식물을 베풀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안도의 한숨을 돌리며 음식을 먹고 쉬며 상황을 보아 천천히 일을 진행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33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일을 진술하기 전에는 먹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사명도 좋지만 건강이 제일이다라는 생각 때문에 먹고 쉬어 가면서 적당히 하고자 합니다. 자신의 맡은 바 일을 어떠한 희생과 아픔이 있더라도 책임성있게 완수하고자 하는 사명감에 불타는 자들을 찾아보기 드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종을 보십시오. 그는 사명감에 충만하여 먹고 쉬는 일보다도 사명을 이루는데 온 마음을 썼습니다. 그는 일을 이루기 전에는 음식이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밥상을 앞에 놓고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진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어느 정도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으며, 또 아들 이삭에게 축복이 계승된 것과, 그리고 자기가 무슨 사명을 띠고 이곳에 왔으며, 또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를 인도하셨는가를 자세하게 진술했습니다. 이 진술을 들은 라반과 브두엘은 이 일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음을 깨닫고 허락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를 볼 때 그의 진술이 얼마나 감동력있고 설득력이 있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진술은 정확하고도 상세하며, 꾸밈없이 자연스럽고도 진실되며, 엄숙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의 감동력과 설득력은 인간적인 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의 진실된 믿음과 사명에 대한 충성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는 비록 늙은 종이지만 조금도 늙은 모습이나 피곤하고 지친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에게는 젊은이보다 더 정력이 넘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와 같이 사명감에 불타는 사람은 아무리 나이가 많고 몸이 약할지라도 모든 인간 조건을 넘어서서 지축을 박차고 하늘을 향하여 힘차게 비상하는 독수리와 같은 기개가 충만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명감이 없는 자는 아무리 육신이 젊고 건강하다 할지라도 애늙은이가 되어 쉽게 피곤하고 육신에 져서 먹고 마시고 쉬는 것에만 관심을 갖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사명을 완수하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한 후에야 음식을 먹었습니다. 음식은 다 식어 버렸지만 그 맛은 꿀맛과 같았을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그 다음날 아침에 바로 주인에게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식구들은 적어도 열흘은 준비하고 쉬어 가도록 했으나 그는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는 일을 성공적으로 성사시켰으므로 후대를 받으며 여독도 풀고 메소포타미아 지역 관광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루 빨리 이 기쁜 소식을 주인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사명을 완수하고자 했습니다. 대개 처음에는 일을 잘하지만 뒤에 가서는 적당히 얼버무립니다. 그러나 그는 철두철미 사명에 충성했습니다. 그는 사명에 살고 사명에 죽는 진정한 사명인이었습니다. 사명을 맡은 자에게 가장 첫째로 요구되는 것은 충성입니다. 충성심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맡은 바 사명에 어느 정도 충성하는가에 따라 그 믿음의 분량과 깊이가 측정되는 것입니다. 충성된 자는 참으로 보배롭고 귀합니다. 잠언 기자는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 하였습니다.(잠20:6) 사람은 본래 사명인의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창1:28) 사람이 사명인으로서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에 충성할 때 참된 보람과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머리를 잘 돌리고 처세술에 능해야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의 종과 같이 우직하게 충성하는 자는 시대에 뒤떨어진 전근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쓰시는 자는 머리를 잘 돌리는 자가 아니요 아브라함의 종과 같이 우직하게 충성된 자입니다.

아브라함이 종으로부터 또 한가지 배울 점은 자신은 아브라함의 종이라는 자부심입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나는 아브라함의 종이니이다” 당시 종은 비천한 신분이었습니다. 그는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자신의 신분을 숨기거나 과장해서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나는 아브라함 집의 총책임자요 비서실장이니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자신이 아브라함의 종임을 밝혔습니다. 그는 주인 아브라함을 지극히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그는 주인을 위해서 존재하고 주인을 나의 주인,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영접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그 이름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충성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충성심을 받으시고 믿음의 조상 이삭의 가정을 세우는데 귀히 쓰셨습니다.

Ⅳ. 천만인의 어미 리브가(16-20, 57-67)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리브가는 어떤 여성입니까?
첫째, 순결한 여인이었습니다. 16a절을 보십시오. “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지금까지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더라.” 리브가는 보기에 심히 아리따운 여성이었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얼굴이 예쁘다는 말이 아니라 그 내면의 아름다움을 잘 말해 주는 것입니다. 여인의 아름다움은 겉모습에 있지 않고 그 내면에 있습니다. 내면이 믿음과 정절로 아름답게 단장되어 있으면 아름다움은 자연스럽게 말과 행동에서 풍겨 나게 되는 것입니다. 리브가는 들에 핀 백합화와 같이 청순하고 은은한 향기가 자연스럽게 풍겨 나왔습니다. 이러한 아름다움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저자는 그가 지금까지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니한 순결한 처녀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당시 음란한 시대 분위기 가운데서 순결을 지킨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순결은 여인에게 있어서 생명과도 같이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순결은 단지 육신적인 순결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순결도 의미합니다. 여자들이 이 남자 저 남자에게 마음을 함부로 주고 마음을 빼앗기고 다니는 것은 정신적인 창녀와 같은 것입니다. 순결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고 세속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잠언 31:30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리브가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을 경외한데서 나온 것입니다.

둘째, 사랑이 풍성한 여인입니다(18-20). 리브가는 일하는 여성으로 물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열심히 물을 길었습니다. 손톱에 빨간 메니큐어를 칠하고 설거지도 안하는 여성은 여성으로서 존재 가치를 상실한 여성입니다. 리브가의 손은 일로 인해 거칠었을 것입니다. 리브가는 목마른 나그네에게 물을 줄 뿐만 아니라 말 못하는 짐승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10필이나 되는 약대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열심히 물을 길었습니다. 약대 한 마리가 먹는 물의 양은 45l, 약 2말반이 됩니다. 그러므로 열 필은 2드럼통 반이 되는 엄청난 양의 물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기쁨으로 사랑의 수고를 감당했습니다. 그녀의 심정에서 흘러나온 사랑의 샘물은 먼 여행으로 인해 피곤하고 지친 아브라함의 종과 종자들과 짐승들에게 새로운 힘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의 사랑은 우물과 같이 깊고 신선했습니다.

셋째,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58). 아브라함의 종은 일이 성사되자마자 그 이튿날 가고자 했습니다. 이때 부모들은 그 소녀에게 의견을 물었습니다.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러자 리브가는 조금도 주저없이 “가겠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는 믿음의 결단이었습니다. 리브가가 이런 결단을 내린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리브가는 이삭이 어떻게 생겼는지, 성격이 어떤지, 키가 큰지 작은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한가지 분명히 아는 것은 이 결혼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종의 진술을 통해 이 사실을 마음 깊이 영접했습니다. 리브가는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장래를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었을 때 장래가 조금도 불안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삭이나 아브라함의 종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을 때 아브라함의 종도 믿고 안심하고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녀의 믿음의 결단으로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위대한 믿음의 어미로 쓰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넷째, 천만인의 어미였습니다(60). 리브가가 아브라함의 종과 함께 떠날 때 식구들이 리브가를 축복했습니다.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그들은 리브가가 떠난다고 슬퍼하며 울거나 또 시부모님 잘 공경하고 남편 잘 섬기고 아들딸 많이 낳고 편히 잘 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좀 고생스럽지만 천만인의 어미가 되어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귀히 쓰임 받기를 원했습니다. 천만인의 어미는 갖가지 종류의 사람을 품고 섬기고 키우는 자를 말합니다. 한 사람을 품고 섬기는 것도 힘든데 갖가지 종류의 죄인들을 품고 키우려면 믿음의 내면성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리브가는 믿음으로 이삭을 큰 아들처럼 생각하고 키우고 또 야심 많은 야곱을 키웠습니다. 이로써 2대 믿음의 조상을 키운 것입니다.

이상에서 리브가를 살펴볼 때 참으로 귀한 믿음의 여인임을 보게 됩니다. 한 가정이나 모임이나 나라에서 여성의 역할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자고로 여인이 여성으로서 역할을 잘못 감당하여 가정이 파괴되고 나라가 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인들이 아기죽거리고 다니며 형제들을 병들일 때 그 시대는 실로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리브가와 같은 믿음의 여인이 있을 때 형제들은 안심하고 믿음의 용사로 자랄 수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리브가와 같은 믿음의 여인들이 많이 나타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아브라함의 종의 충성심을 받으시고 리브가와 같은 아름다운 믿음의 동역자를 예비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믿음의 그릇을 이루시고 친히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구속 역사를 이루어 나가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참으로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시대에 충성된 아브라함의 종과 같은 사명인으로 삼으시고, 또한 리브가와 같은 아름다운 믿음의 여인으로 키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