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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5:23-34, 28:6-31:55(야곱의 하나님)

by Mark Yang   08/14/2019   Genesis

Message


창세기 제 14 강


야곱의 하나님


말씀: 창세기 25:23-34, 28:6-31:55
요절: 창세기 28: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
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야곱은 이삭의 둘째 아들로서 아비 이삭이나 형 에서와는 판이하게 다른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투쟁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투쟁하기 시작하여 그의 생애는 축복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는 무슨 일에든지 포기하거나 뒤로 물러설 줄 모르는 불요불굴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라헬에게 성실했고 또 맡은 바 일에 성실했습니다. 그는 인간적이면서도 영적이며, 영적이면서도 인간적인 사람으로서 변화되기 힘든 강한 인간성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강한 인간성 때문에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런 야곱을 키우시느라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야곱의 전반부 생애로서 그가 쟁취하고자 했던 바가 무엇이며, 또 야곱에게 뜻두시고 그를 키우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공부해 보고자 합니다.

Ⅰ. 야곱과 에서(25:23-34,27장)

야곱의 생애는 어머니 뱃속에서 형과의 투쟁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리브가가 오랫동안 잉태하지 못하다가 쌍둥이를 잉태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태속에서 서로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리브가는 하나님께 그 뜻을 물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두 국민이 태중에 있는데 복중에서부터 나누일 것이며, 또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 에서와 야곱이 탄생했습니다.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온 몸이 마치 털로 된 가죽 옷을 입은 것처럼 털투성이였으므로 에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자는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습니다. 에서는 신체적 특징을 따라 이름이 붙여졌으나, 야곱은 성격을 특징으로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태로부터 야곱에게 뜻을 두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태어나서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일방적으로 야곱을 택하시고 야곱을 통해 구속역사가 계승되게 하고자 하는 뜻을 두셨습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의지나 행위가 조금도 개입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주권적인 혜택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에 대해 하나님께 불만스러운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왜 에서에게 전혀 기회도 주시지 않고 일방적으로 하시는가? 하나님이 불의하신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로마서 9:10-13절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와 전혀 관계없이 주권적으로 인류 구속 역사를 이루어 나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이나, 이스마엘보다 이삭을 택하신 것이나, 에서보다 야곱을 택하신 것은 구속 역사를 그 뜻대로 이루어 나가고 계심을 말해 줍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의지적 선택이나 선행이나 전통적인 관습이 전혀 개입될 수 없습니다. 만일 이러한 것들이 조금이라도 개입된다면 구속 역사는 은혜에 기초하지 못하고 행위에 기초하게 됩니다. 그러면 믿음은 헛 것이 되고 하나님의 약속은 폐하여지게 됩니다(롬4:14). 만일 인간의 행위에 의해 인류 구속 역사가 좌우된다면 구속 역사는 이루어질 수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구속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는 것은 가장 공평하고 확실하고 은혜로운 방법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성장함에 따라 외모나 성격면에서 너무나 판이하였습니다. 에서는 몸에 털이 많고 익숙한 사냥꾼으로서 야성미가 넘치는 들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전통을 메고 사냥을 나가면 토끼, 사슴, 노루, 꿩, 멧돼지와 같은 짐승들을 푸짐하게 잡아와서 아버지를 기쁘게 했습니다. 그는 힘이 세고 운동도 잘하고 체격도 균형미가 잘 잡혀서 세상 자매님들에게 인기가 좋은 타입입니다. 반면 야곱은 매끈매끈하고(27:16), 성격도 종용한 사람으로서 주로 장막에 거하며 어머니 심부름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팥죽도 쑤고 무도 썰며 부엌일을 도와 드렸습니다. 그는 마미 보이였습니다. 겉으로 볼 때 에서가 야곱보다 훨씬 훌륭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외모로 판단할 수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내면은 어떠했습니까?

하루는 야곱이 어떻게 하면 형의 명분을 빼앗을 수 있을까 곰곰히 생각하면서 부엌에서 죽을 쑤고 있는데 에서가 들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는 몹시 배가 고픈 차에 먹음직스러운 팥죽을 보니 식욕이 동하여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야곱에게 내가 심히 곤비하니 팥죽을 좀 달라고 하였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형! 배고프지”하며 팥죽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하며 팥죽 한 그릇으로 흥정을 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야곱의 마음에는 장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한이 맺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먼저 나오기 위해 형과 필사적으로 싸웠습니다. 또 힘이 부족하여 뒤로 밀렸을 때도 나오는 순간까지 포기치 않고 형의 발꿈치를 붙잡고 나왔습니다. 그는 간발 차로 장자의 권리를 빼앗긴 것이 너무 억울하여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제 태어난 이상 운명에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운명에 도전하여 이를 쟁취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사전에는 ‘운명’이란 단어가 없었습니다. 그는 주야로 어떻게 하면 이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인가 연구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형이 배고플 때 그 약점을 이용하여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사고자 시도한 것입니다. 야곱은 무엇이 가치있고 귀중한 것인줄 알았습니다. 당시 가부장적 제도하에서 장자가 누릴 수 있는 권리는 컸습니다. 장자에게는 가족을 다스리는 지배권이 있었고(창27:29), 또한 재산을 상속 받을 때도 차자의 두 몫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신27:17).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있어서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언약의 축복을 계승할 수 있었습니다. 장자의 명분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구속 역사의 주인공으로 쓰임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로 야곱에게는 심각한 인생 문제였습니다. 당시 장자의 명분은 신성시 될 정도로 큰 명예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명예를 중히 여겼습니다. 장자의 명분이 현실적으로 별 유익이 없고 때로는 손해를 볼지라도 명예를 중히 여겼습니다. 그는 물질적인 것보다도 영적인 것, 현실적인 유익보다 영적인 축복, 순간적인 것보다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무엇이 귀중한가를 알고 이를 쟁취하고자 하는 가치관이 분명한 사람이요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에서는 어떠했습니까? 그는 야곱의 흥정에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그는 식사 한 두끼 굶고 죽게 되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육신의 고통만 알고 신성한 특권은 몰랐습니다. 또 그는 현재 당장 필요없다고 해서 영적인 것을 소홀히 여기고 무가치하게 여기고 무익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현재의 유익과 만족만을 추구하고 영원한 축복은 생각지 않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자였습니다. 그에게는 진리에 기초한 분명한 인생관과 가치관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생각하고 그때그때 상황을 좇아 행동하였습니다. 에서는 야곱에게 맹세까지 하며 장자의 명분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팥죽을 다 먹은 후에 조금의 죄의식도 없이 ‘아 맛있게 잘 먹었다’고 하며 입을 씻고 나갔습니다. 저자는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를 망령된 자, 즉 불경스러운 자, 불신앙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히12:16)

에서와 야곱의 가치관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그들의 결혼이었습니다. 26:34,35절에 보면 에서는 40세 때 헷족속의 딸 중에서 두 명이나 아내를 취하였습니다. 헷족속의 딸들은 우상 숭배자로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자기 신들에게 빌고 몸이 아프면 굿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서는 부모들이 자기가 이방 여인들을 취한 것을 기뻐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이스마엘의 딸을 또 아내로 취했습니다(28:6-9). 그는 육신적이고 감정적인 자였습니다. 그에게는 영적 가치관이 없었습니다. 반면 야곱은 부모의 방향을 좇아 믿음의 결혼을 하고자 하는 분명한 영적 가치관이 있었습니다.

에서와 야곱의 가치관을 살펴볼 때 우리가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귀히 쓰임 받으려면 야곱과 같이 명분을 귀히 여겨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이념보다는 실리, 명분보다는 현실의 유익을 중시 여기는 시대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물질적이고 육신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에서의 철학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살면서 우리는 재물을 얻기 위해 믿음을 버리고, 세상 권세와 명예를 얻기 위해 복음신앙을 버리기 쉽습니다. 이렇게 하는 자는 신자의 명분을 파는 현대판 에서입니다. 우리에게는 목자의 명분, 성경 선생의 명분, 선교사의 명분이 있습니다. 이러한 명분은 현실적으로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요, 세상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목자라고 하면 목자가 다 뭐냐, 목자가 밥 먹여주냐고 말합니다. 오히려 이런 명분 때문에 현실적으로 손해 보고 무시를 당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에서와 같이 이를 경홀히 여기고 현실의 유익을 좇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같이 명분을 귀히 여기는 자를 축복하시고 귀히 쓰십니다.

27장에서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쟁취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내면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아버지를 속이는 거짓말을 해야 했습니다. 그에게는 간교한 면이 있지만 어떤 희생을 치루고서라도 하나님의 축복을 쟁취하고자 하는 영적 소원이 충만했습니다. 그는 차자로 태어난 운명을 딛고 마침내 장자의 명분과 하나님의 축복을 쟁취했습니다.

Ⅱ. 벧엘의 하나님(28:10-22)

(i)야곱에게 비전을 주신 하나님(28:10-15)
야곱이 에서의 축복을 가로채자 에서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동생을 죽이고자 하는 복수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이를 안 리브가는 이삭으로 하여금 야곱을 외조부 집으로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이삭은 야곱을 밧단아람으로 보내면서 믿음의 결혼을 할 것을 당부하고 그를 축복해 주었습니다(28:1-4).
이제 야곱은 모든 축복을 한 몸에 안고 개나리 봇짐을 지고 하란으로 향하여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처량한 나그네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가 한 곳에 이르자 해가 지게 되었습니다. 그 곳은 루스로서 브엘세바에서 이 곳까지는 90Km입니다. 보통 하루에 걸을 수있는 거리는 100리, 40Km입니다. 그런데 그가 90Km를 온 것을 보면 에서에게 쫓기는 몸으로 거의 뛰다시피 왔을 것입니다. 그는 그 곳에서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하늘을 지붕 삼아 별을 보면서 누워 자게 되었습니다. 이때 야곱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사랑하는 부모, 특히 어머니 품을 떠난 슬픔과 외로움, 장래에 대한 불안, 형이 뒤에서 활을 들고 쫓아오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인해 편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곧 피곤으로 인해 잠이 들었는데 그는 꿈에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앞으로 홀로 험한 나그네 인생 길을 가야 했습니다. 그에게 현재 가장 필요한 것은 위로와 비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위로와 비전을 주셨습니다. 사람에게 비전이 있을 때 어떤 어려운 현실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보여 주신 비전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늘 나라의 세계였습니다. 또 사닥다리가 지상에서 천상까지 연결되어 있는 것은 장차 중보자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에까지 들어가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음을 계시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찾아 오셔서 그가 험한 나그네 인생길을 가는 동안 꿈을 간직하고 믿음으로 살도록 불안하고 두려운 그의 마음에 꿈을 심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비전을 주실 뿐만 아니라 은혜스러운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요, 이삭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께서 야곱의 하나님이 되시고자 그에게 인격적으로 찾아오사 약속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역사의 하나님이시요, 개개인의 하나님이십니다. 항상 살아계셔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신 약속을 야곱에게도 동일하게 주셔서 신실하게 구속역사를 이끌어 나가십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약속을 주실 뿐만 아니라 이를 다 이루기까지 그가 어디를 가든지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실로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가 막막하고 불안하고 두렵고 아무 것도 의지할 수없는 절망적인 때에 나타나셔서 그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고, 놀라운 비전을 주시고, 그가 붙들고 의지할 수있는 약속의 말씀까지 주셨습니다. 야곱은 전혀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놀라운 뜻을 두시고 그와 동행하고 계셨습니다.

(ii) 벧엘의 서원(28:16-22)
야곱은 꿈에 하나님을 만나고 잠이 깨었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알지 못하였다고 하며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아버지 집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알았으나 아직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처음으로 인식하고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만나 주신 곳을 기념하기 위해 그 표식으로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또 그곳을 성별하는 뜻으로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께 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그곳 이름을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이라 이름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하였습니다. 20-22절을 보십시오. 그의 서원 기도는 “하나님께서 만일 자기와 함께 하셔서 여행길에서 자기를 지키시고 또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시고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오면”이라는 조건이 붙어있습니다. 이 조건은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고 현실적인 것 같지만 현재 야곱에게 있어서는 가장 절박한 인생 문제였습니다. 그는 여행길에서 산적이나 맹수를 만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또 앞으로 의식주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또 과연 아비집으로 돌아올 수있을 것인지, 그의 장래는 불투명하여 불안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는 절박한 인생 문제를 안고 주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그 인생을 인도해 주시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기의 인생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면 다음 세 가지를 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첫째는,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겠다는 그 이상의 숨은 뜻이 있습니다. 이는 우상숭배가 범람하는 시대적 분위기 가운데서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유일한 참 하나님으로 모시고 경배하고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들을 하나님의 전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상숭배가 성행하는 이방 문화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배하는 하나님의 전을 짓겠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소득의 십분의 일을 반드시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이를 볼 때 그의 서원 기도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인생을 살겠다는 결단이요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나타나 은혜와 축복을 약속하셨고, 야곱은 이 하나님께 경배하고 충성을 약속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과 야곱 사이에 관계성이 맺어진 것입니다.
이 서원은 야곱 편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출발했다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그 인생을 출발한 것처럼, 야곱도 함께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인생을 출발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인생을 출발할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의미있는 인생을 출발하게 됩니다. 또 이 서원은 하나님 편에서는 그와 동행하시고 그의 인생에 구체적으로 역사하실 수있는 꼬투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보잘 것 없는 서원이지만 그의 서원을 받으시고 이를 기초로 그를 섬세하게 인도하셨습니다. 야곱은 이 서원을 한 후 이를 잊어버렸지만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시고 시시때떄로 이 서원을 기억나게 하시고, 이 서원을 지키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 주시고 친히 벧엘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습니다(31:13, 35:1, 14, 15).

여기서 우리는 서원 기도의 중요성을 배우게 됩니다. 서원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인생을 살겠다고 뜻을 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와 축복을 받기는 좋아하지만 서원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이는 서원을 얽매이는 것으로 생각하고 절대로 잡히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잡히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잡히지 않으면 사단에게 잡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손에 잡힐 때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서원을 하면 반드시 지켜야 되기 때문에 지키지 못할 바에야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서원을 하면 하나님께서 이를 지킬 힘도 주십니다. 서원이 없는 인생은 정함이 없는 인생으로서 하나님과 관계성이 맺어지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기초로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진실되게 서원 기도를 할 때 하나님께서 이를 받으시고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시고 인도하십니다.

Ⅲ. 밧단아람의 하나님(29-31장)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힘을 얻어 발걸음을 동방으로 옮겨 마침내 하란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우물에서 양떼를 먹이고 있는 목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는 라반의 소식을 물은 후에 7절을 보면 그들에게 해가 아직 높은즉 짐승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뜯기라고 방향을 주었습니다. 그의 사업가적인 기질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또 10절에서 라헬을 만났을 때도 먼저 그가 몰고 온 양들에게 물을 다 먹인 후에 라헬에게 입맞추고 자신을 알렸습니다. 그는 감정을 자제하고 하고 싶은 일보다도 해야 할 일을 먼저 하는 자였습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처음 한 달 동안 무료 봉사를 했습니다. 야곱이 와 있으니 유익한 것을 본 라반은 야곱과 고용계약을 맺고자 했습니다. 보통 사람같으면 장가갈 비용이나 장사할 밑천을 벌기 위해 돈을 요구할 것이지만 야곱은 라헬을 위해 7년을 봉사하겠다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돈이 있어야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물질을 앞세웁니다. 그러나 야곱의 가치관은 달랐습니다. 그는 물질보다도 사랑, 사랑보다도 명예를 중히 여겼습니다. 그의 가치관은 명예→사랑→물질이었습니다. 야곱은 아비 이삭의 부탁대로 믿음의 결혼을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결혼이라고 해서 로맨스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29:20절을 보십시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기 때문에 7년을 수일같이 여겼습니다. 7년을 수일같이 여길 정도로 라헬을 연애하는 야곱은 정말 정열적입니다. 그의 사랑은 단순히 감정적이고 육신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만일 육신적인 사랑이라면 1년도 참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의 사랑은 순수하고 고상하고 진실된 사랑이었습니다. 또한 그의 사랑은 변함없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일생 동안 라헬 한 사람을 진실되게 사랑했습니다.

드디어 결혼식 날이 되어 잔치를 하고 첫날밤을 치루고 보니 라헬이 아니고 레아였습니다. 그는 라반에게 속아 라헬을 얻기 위해 또 7년을 봉사해야 했습니다. 결국 라헬 한 사람을 얻기 위해 14년을 봉사했습니다. 여기서도 집념이 강한 그의 인간성이 잘 나타납니다. 그가 이렇게 14년을 투자한 것이 결코 헛되지 않아 4아내를 얻고 열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낳게 되었습니다. 29:31-30:24절에는 레아와 라헬이 남편의 사랑을 받고자 아들 낳기 경쟁을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야곱의 가정은 평안하지 못했습니다. 두 여인의 시기심과 불꽃튀는 경쟁으로 인해 가정은 잠시도 평안할 날이 없이 전쟁터와 같았습니다. 레아는 아들을 잘 낳았으나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콤플렉스에 시달렸고, 라헬은 남편의 총애는 받았으나 아들을 낳지 못하는 콤플렉스에 시달렸습니다. 그들이 야곱을 가운데 두고 서로 자신의 콤플렉스를 해결하고자 몸부림치는 가운데 12아들이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서 하나님은 두 가지 큰 일을 하셨습니다.

첫째는, 인간성이 강한 야곱을 연단시킨 것입니다. 속담에 겉보리 서말만 있어도 처가살이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야곱은 처가살이를 하면서 많은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4아내의 등살에 시달리며 정신없이 훈련을 받았습니다. 자식을 낳아도 자기가 이름을 짓지 못한 것을 보면 그의 강한 자존심이 깨어지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그를 연단하사 그의 강한 인간성을 깨시고 열국의 아비로서의 내면성을 갖도록 하셨습니다(삼하7:14).

둘째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두 여인의 시기심과 경쟁심을 쓰셔서 야곱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 뜻을 이루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4아내와 많은 자식들을 얻게 되자 야곱은 그제야 재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야곱은 재물을 모으기 위해 라반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것은 라반의 양 중에서 아롱지고 점 있는 자, 검은 자만 자기의 소유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라반은 그런 양들을 다 가려내어 자기 아들들의 손에 붙이고 사흘 길을 뜨게 하였습니다. 야곱은 불리한 조건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낙심치 않고 머리를 써서 불가능에 도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유전학적으로 흰 양에서 얼룩진 양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전법칙을 무시하고 버드나무, 살구나무, 신풍나무의 껍질을 벗겨 새끼 밴 양 앞에서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과 같이 하나님은 이런 야곱을 도우사 마침내 거부가 되게 하셨습니다(30:43). 그러나 사실 이 지혜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입니다(3:8-12).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야곱과 함께 하시고 그를 넘치도록 축복하셨습니다. 야곱은 라반 밑에서 사랑을 얻기 위해 14년, 재물을 얻기 위해 6년, 도합 20년을 봉사했습니다. 그러면 그가 20년 동안 라반을 어떤 자세로 섬겼습니까? 31:38-42절에는 그의 간증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남의 밑에서 일한다고 해서 눈치를 보며 적당히 일하지 않았습니다. 라반이 10번이나 품삯을 변역하여도 그는 불평하지 않고 힘을 다하여 라반을 섬겼습니다(31:6). 또 그는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책임성있게 섬겼습니다. 그는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여 눈붙일 겨를도 없이 성실히 일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답게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일하였습니다. 그는 실로 위대한 인간성의 소유자였습니다.

야곱이 거부가 되자 라반의 아들들이 야곱에 대하여 불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라반의 안색도 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야곱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방향을 주었습니다(31:3). 이에 야곱은 라헬과 레아를 불러 가족 회의를 한 후 이때까지 모은 모든 소유를 이끌고 라반 몰래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삼일만에 라반이 이 사실을 알고 야곱을 추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야곱은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평생 라반의 머슴살이를 하게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꿈에 라반에게 나타나셔서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고 하심으로 야곱을 해치지 못하도록 보호하셨습니다. 야곱은 라반과 미스바 협정을 맺고 20년 동안의 밧단아람 생활을 청산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야곱을 지키시고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올 수있게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야곱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모태로부터 야곱을 택하시고 야곱에게 뜻을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처량한 나그네 신세가 되었을 때 그에게 나타나 하늘나라에 대한 비전을 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셨던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신실하게 동행하셔서 그에게 사랑이 필요할 때 사랑을 주시고, 재물이 필요할 때 재물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넘치도록 채워주셨습니다. 야곱은 영적 가치관이 분명하고 성실하고 책임성이 강한 큰 그릇이었습니다. 장차 12민족의 아버지가 될 만한 거목이었습니다. 반면 야곱은 인간성이 강하여 변화되기 힘든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키우시는데 결코 조급하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적인 그가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영적인 사람이 되기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품고 키우셨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실로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