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제 15 강
이스라엘의 하나님
말씀: 창세기 32-35장, 46-49장
요절: 창세기 35:10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지난 강의에서 우리는 야곱의 하나님을 공부했습니다. 야곱은 이때까지 사람들과의 경쟁을 통해 세상에서 얻을 수있는 모든 축복을 다 얻었습니다. 그는 형 에서와의 싸움에서 속임수로 장자의 명분과 하나님의 축복을 쟁취하였습니다. 또한 밧단아람에서는 권모술수가 능한 삼촌 라반과의 싸움에서도 승리했습니다. 사랑을 얻기 위해 14년, 물질을 얻기 위해 6년을 투쟁하여 승리하였습니다. 그는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눈물겨운 투쟁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세상에서 원하는 바는 다 얻었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때까지의 축복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축복이 필요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고자 하시는 참 축복이 무엇이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Ⅰ. 브니엘의 하나님(32,33장)
야곱은 고향을 떠날 때는 빈손으로 갔으나 고향으로 돌아올 때는 두 떼나 이룰 만큼 많은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20년만에 금의환향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고향에 가까워 옴에 따라 형 에서 때문에 점점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그를 어떻게 보호하고 계셨습니까? 32:1,2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두 영이나 더 되는 수많은 하나님의 군대였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내면의 불안과 두려움을 잘 아시고 그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대로 수많은 천군 천사들을 보내어 그를 전후 좌우로 호위하며 강력히 보호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평안히 가나안 땅에 이르도록 도와주심으로 그가 약속의 말씀을 깊이 영접하고 열국의 아비로서의 인생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렸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나기 전에 먼저 그의 동정을 살피고자 사자들을 앞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에서가 400인을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려고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318인의 병사를 거느렸는데 에서는 400이을 거느린 것을 보면 강력한 전투력을 갖춘 부족의 족장이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왜 야곱을 만나는데 400인을 거느리고 왔을까요?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서였을까요? 아니면 야곱의 태도 여하를 보아서 과거와 같이 교만하게 나오면 싹 쓸어버리기 위해서였을까요? 어쨌든 에서가 400인을 거느리고 온다는 소식은 야곱에게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큰 두려움과 고통이 야곱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는 지난 20년 동안 죽도록 고생하며 쌓아 놓은 모든 것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절망과 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절대 절명의 상황에서 짓눌리는 듯한 고통과 좌절감에 빠져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가운데서도 한 떼는 피하리라는 계산 하에 소유를 즉시 두 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매달려 필사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을 부르며 은혜 베푸시기를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기억하며 또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근거로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믿음의 기도가 아니라 위기의 때에 S.O.S를 요청하는 긴급 구조 요청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가 위기의 때에 절망하여 엎드러지지 않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했다는 것은 귀한 것입니다.
그는 기도한 후에도 안심이 되지 않아 머리를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형이 감정적인 사람이라 정에 약하다는 것을 알고 예물 작전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즉시 짐승 중에서 엄청난 예물을 마련하여 그것을 첫째, 둘째, 셋째와 각 떼로 나누어 상거가 뜨게 한 후 에서를 만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받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비상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불안과 두려움은 조금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어 밤에 일어나 처자들과 모든 소유를 얍복강 건너편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홀로 남았더니” 이 말씀은 야곱의 현 실존을 한마디로 표현해 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야곱이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없는 인간의 한계 상황에 처하게 되었음을 말해 줍니다. 또한 그가 이때까지 얻은 소유와는 아무 관계없이 벌거벗은 몸으로 단독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음을 말해 줍니다. 이것은 그에게 고통의 순간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자아 발견할 수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관계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 소유하고 있는 명예나 권세나 물질과는 아무 관계없이 단독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서 나의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봐야 됩니다.
홀로 남아있는 야곱의 내면은 심히 두렵고 답답했습니다. 무엇보다 미치도록 고독했습니다. 그의 내면의 괴로움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고, 어느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왜 이토록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것입니까? 그의 문제는 겉으로는 에서 문제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20년 전에 형 에서를 속이고 아버지를 속인데서 오는 죄 문제였습니다. 이 죄 문제는 형 에서와의 문제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의 문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야곱이 에서에게 범죄했지만 실상은 하나님께 범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에서와 화해한다고 해서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화해해야 해결되는 것입니다. 죄 문제는 하나님을 만나 죄사함 받기 전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20년의 긴 세월도 야곱의 내면의 죄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에서를 만나려고 하자 그의 내면 깊이 잠재해 있던 해결되지 않은 죄 문제가 살아나서 그를 괴롭히고 그의 영혼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내면의 죄 문제는 세상의 어떤 위대한 인간도, 어떤 심오한 사상도, 그 많은 물질도 해결해 줄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강한 의지나 성실도 내면 속에 끊임없이 파고드는 불안과 두려움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었습니다. 그의 의지와 성실은 바닥이 나고 한계 상황에 부딪히게 된 것입니다.
이때 어떤 사람이 야곱을 찾아와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였습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30절에서 볼 때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은 성육신하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한계 상황에 부딪쳐 절망하고 있는 야곱을 찾아오셔서 그의 고뇌에 동참하시고 함께 괴로워하고 함께 고통하신 것입니다. 이는 야곱에게 임한 놀라운 성육신의 은혜였습니다. 야곱은 모태로부터 쌓아 온 실력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씨름하였습니다. 그는 결코 지지 않고자 필사적으로 싸웠습니다. 여기에 그의 강인한 인간성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이때까지 사람들과의 싸움에서도 이겼습니다. 라반은 단수가 높아 엎어치기로 그를 넘어뜨리고자 했지만 그는 돌려치기로 라반을 쓰러뜨렸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 누구인지 잘 모르지만 본성적으로 그에게 지지 않고자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운 것입니다. 이에 그 사람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태권도로 야곱의 환도뼈를 쳤습니다. 얼마나 세게 쳤는지 그의 환도뼈가 위골되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야곱의 환도뼈를 치셨습니까? 이는 그가 인간적으로 의지하고 있던 것을 완전히 꺾으심으로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환도뼈는 사람의 몸을 받쳐 주는 물리적 힘의 생성부분으로서 생명과 힘의 근원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환도뼈가 위골되었다는 것은 그가 의지하고 지탱하고 있던 모든 것이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즉 그의 재능과 소유, 그의 의지와 성실, 그의 투쟁심과 같은 강한 인간성이 무너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의 아담 안에서의 인간적인 본성이 깨어지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자아가 탄생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환도뼈를 맞고 비로소 영적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와 씨름한 분이 사람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하나님이심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날이 샘으로 가고자 할 때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않으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하며 필사적으로 붙들었습니다. 호세아서 12:4절에서는 울며 간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많은 축복을 받았는데 무슨 축복을 또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를 볼 때 그는 이때까지의 축복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이때까지 추구해 온 것은 명예와 사랑과 물질이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다 얻었음으로 마땅히 행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축복은 하나님의 축복이기는 하지만 소유에 관한 것으로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진정한 축복은 아니었습니다. 소유는 인간 내면의 죄와 죽음 문제, 불안과 두려움과 허무와 같은 인간 실존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의 관심은 이제 소유에서 존재로, 외적인 것에서 내면적인 것으로, 인간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는 진정한 축복을 갈구하게 된 것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이때 그 사람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름이란 그 사람의 전존재와 인격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네가 어떤 존재냐?”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존재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그의 존재를 바꾸어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야곱과 같이 항상 소유에 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지만,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십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했을 때도 가장 먼저 그의 존재에 관심을 가지시고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창3:9). 또한 예수님께서도 더러운 귀신들린 자아를 상실하고 울부짖고 있는 한 청년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막5:9)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름을 물으심으로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 자아 발견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질문에 야곱은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야곱이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야곱이란 속이는 자, 싸우는 자, 빼앗는 자란 뜻입니다. 여기에는 경쟁하고 빼앗아서 자기에게로 끌어 모으는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이미지가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의지와 성실과 강한 자아로 똘똘 뭉쳐진 강한 인간성의 소유자라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야곱의 이때까지의 삶은 만나는 사람마다 경쟁의 대상자로 삼고 투쟁하여 모든 축복을 다 자기에게로 끌어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보잘 것없는 비참한 죄인인가를 깨닫고 “나는 야곱이니이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는 거룩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한 시몬 베드로의 고백과 같았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야곱의 이름을 바꾸어 주었습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28) 이스라엘이란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긴 자”, 즉 영적 싸움에서 승리한 자란 뜻입니다. 여기에는 자기 중심보다 하나님 중심, 빼앗는 자보다 나누어주는 자, 개인보다 민족의 의미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에는 a prince of God 즉 하나님의 황태자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변화된 것은 아담 안에서의 옛 자아가 하나님 안에서의 새로운 자아로 변화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존재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볼 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시고자 하는 참 축복은 소유에 있지 않고 그 존재가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야곱은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영적인 소원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고 말씀하시며 그를 축복하셨습니다. 이는 “네가 어찌 오묘하신 하나님을 알겠느냐?”하는 뜻입니다. 사사기 13:17,1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름을 묻는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에게 “내 이름은 기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It is beyond understanding, 즉 인간의 지혜로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분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인생 문제가 시원스럽게 해결되었습니다. 세상은 조금도 변화된 것이 없었지만 야곱은 내면이 변하여 세상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이 말씀은 변화된 그의 내면의 모습을 문학적으로 잘 표현해 주는 말씀입니다. 육신은 비록 환도뼈에 위골되어 절고 있었지만, 그 내면은 고뇌에 찬 절망의 밤이 지나고 기쁨과 희망이 넘치는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내면에 역사하던 모든 불안과 두려움, 허무와 죄의식이 사라지고 은혜와 평강과 기쁨이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만남으로 죄 문제를 해결 받은 것입니다.
야곱은 에서를 만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에서와의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눈을 들어 에서가 4백인을 거느리고 오는 것을 보고 여종과 그 자식들을 전진 배치시키고, 레아와 그 자식들을 그 다음에 두고, 사랑하는 라헬과 요셉은 제일 뒤에 두고,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에서를 맞이했습니다. 에서는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울었습니다. 에서를 만난 야곱의 심정은 10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이는 아첨하는 말이 아니라 형의 얼굴에 나타난 따뜻하고 친절한 우애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집도 짓고 우릿간도 짓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게 되자 성 앞에 장막을 치고 장막친 밭을 샀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 이스라엘이라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그는 벧엘의 서원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마땅히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서 단을 쌓고 거기에 거주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벧엘은 하나님께서 최초로 그를 만나 주시고 약속하셨던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에서와의 문제가 해결되자 현실에 안주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34장에서 디나 사건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숙곳에 머물러서는 안되고 벧엘로 올라가야 합니다.
Ⅱ. 엘 벧엘의 하나님(34, 35장)
34장에서 야곱의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다가 그 땅 추장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세겜은 디나를 연연하여 통혼을 요청하였습니다. 야곱은 이 문제가 선히 해결되어 그 땅에 계속 머무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시므온과 레위가 그들에게 할례를 받으면 통혼하겠다고 거짓말을 한 후 그들이 고통 중에 있을 때 잔인하게 칼로 다 죽여 버렸습니다. 야곱은 자녀들로 인해 심한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사건으로 인해 야곱은 더 이상 세겜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새로운 방향을 주셨습니다. 35:1절을 보십시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이에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벧엘로 올라가서 단을 쌓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는 먼저 해야 할 세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이방 신상을 제거해야 합니다. 이는 생활 속에 뿌리 박혀 있는 이방문화의 잔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시며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도 섬기고 다른 것들도 섬기는 상대적인 자세가 결코 용납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절대적인 자세로 하나님만 섬겨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외에 의지하고 있는 이방 신상들을 모두 제거해야 됩니다.
둘째는, 자신을 정결케 해야 됩니다. 이는 진실된 회개를 의미합니다. 세상에서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함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의복을 바꾸어야 됩니다. 이는 구체적인 생활의 변화로서 경건한 자세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두움의 일을 벗고 예수 그리스도의 옷, 곧 믿음의 옷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롬13:12,13)
야곱은 브니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인생 문제를 해결 받았으나 세겜에 머물러 자기 중심적으로 신앙생활 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디나 사건을 통해 그가 벧엘로 올라가도록 하셨습니다. 야곱은 구습을 청산하고 새롭게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의 단을 쌓고자 벧엘로 올라갔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첫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감사의 단을 쌓아야 됩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단을 쌓고 그곳 이름을 엘벧엘이라 하였습니다. 이는 ‘벧엘의 전능자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벧엘에서 엘벧엘로 바뀌어졌습니다. 이는 자기 중심적인 신앙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으로 바꾸어졌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본주의 신앙에서 신본주의 신앙에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야곱은 이 때까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필요한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자기의 행복을 위해 하나님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믿음의 중심이 자기에서 하나님으로 바뀌어진 것입니다. 이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그를 새롭게 축복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믿음의 사람이 되려면 우리의 믿음의 중심이 자기에서 하나님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10-12절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축복한 내용입니다. 첫째는, 야곱이 이스라엘로 되는 존재의 변화입니다. 이는 인간적인 사람에서 영적인 사람으로, 세상적인 사람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는 것은 가장 큰 축복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영원한 구속 역사에서 많은 영적 열매를 맺고 복의 근원으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 나의 옆구리에서 수많은 영적 자녀들이 탄생되고 또 위대한 영적 지도자들이 탄생되는 것은 가장 보람있고 생각만 해도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셋째는, 역사의 터전으로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세계 174개국 캠퍼스를 기업으로 주시고, 더 나아가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참된 축복은 소유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가 변화되어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쓰임 받는 것입니다. 또한 이 땅에 속한 현세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때 야곱은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습니다. 전제물은 포도주와 독주로 드리는 예물로서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의미합니다. 또한 기름은 성별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야곱은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고자 결단한 것입니다. 야곱의 일생은 벧엘에서 시작해서 한 바퀴 돈 다음 다시 벧엘로 돌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벧엘의 하나님이 되셔서 야곱을 인도하셨습니다.
Ⅲ. 이스라엘의 십이지파를 세우신 하나님(47-49장)
야곱의 전반부의 생애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과 경쟁하여 축복을 쟁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후반기 생애의 특징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축복을 가는 곳마다 나누어주는 것이었습니다. 47:7-10절을 보십시오. 그는 요셉으로 인해 애굽으로 가게 되고 바로 왕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초라한 가나안 시골 촌사람이 초강대국 애굽의 바로 대왕 앞에 설 때 수족이 떨려 함부로 말을 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들어가며 나오며 바로를 축복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분명한 자세가 있었습니다.
또 그는 연세를 묻는 바로에게 인생이 나그네 인생임을 증거하였습니다. “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47:9)” 야곱이 인생을 나그네로 본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야곱은 이 땅에서 영원토록 살고자 했기 때문에 자기에게로 모든 것을 끌어 모으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얍복 강가에서의 투쟁과 사랑하는 라헬과 요셉을 잃는 사건 등 여러 가지 인생 편력을 통해서 결국 인생이란 한번 오면 언젠가는 가야 하는 나그네 인생길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는 이 땅에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목적과 방향도 알지 못하고 흘러가는 구름처럼 정처 없는 나그네 인생 길을 살아갑니다. 이는 낭만적인 것 같지만 실상은 비참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가며,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거룩한 순례자들입니다. 저는 나이가 조금씩 먹어 갈수록 내가 이 땅에서 생명을 받쳐 감당할 사명이 있다는 것과, 또 내가 가야 할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심령으로부터 느끼고 깊이 감사하게 됩니다. 거룩한 순례자의 인생을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48장에서 야곱은 요셉을 위하여 그의 두 아들을 축복합니다. 야곱의 축복으로 인해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르우벤과 시므온과 같은 형의 명의 하에 있게 되고 한 지파의 족장이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49장에서는 야곱이 12아들을 그들이 맺은 인생의 열매에 따라 그 분량에 맞게 축복합니다. 르우벤은 아비의 침상에 올라 정욕의 죄를 범하였으므로 구속 역사의 주인공에서 탈락되고, 시므온과 레위는 혈기를 부려 잔인하게 칼로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요셉을 파는데 주동했으나 후에 진실되게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음으로 구속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그의 후손 가운데서 메시야가 탄생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유다지파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요셉은 비록 11번째 아들이지만 장자의 명분이 그에게로 돌아갔습니다.(대상5:1,2) 12아들을 품고 일일이 축복하는 야곱을 볼 때 성숙한 열국의 아비로서의 내면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야곱의 축복을 기초로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세우셨습니다. 야곱의 후반부 인생은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하나님을 경배하고(47:31b), 또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고(49:18),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님의 축복을 나누어주는 복된 인생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야곱을 이스라엘로 변화시켜 그에게 참 축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야곱은 인간성이 강하여 변화되기 힘든 사람이요, 구속 역사에 쓰임 받기 힘든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키우사 이스라엘 12지파의 아버지요,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축복을 나누어주는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야곱은 48:15,16절에서 하나님을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야곱은 남다른 투쟁심과 의지와 성실로 인생을 살아온 것 같았지만, 결국 인생을 지내 놓고 보니 하나님께서 남으로부터 뜻 두시고 그를 키우셨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변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까지 온갖 해산의 수고를 감당하셨습니다. 이는 온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3대 믿음의 조상을 키우심으로 구속 역사에 있어서 반석과 같은 든든한 기초를 놓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경배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