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제 17 강
구원 역사에 요셉을 쓰신 하나님
말씀: 창세기 42-47장, 50장
요절: 창세기 45: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
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우리는 지난 강의에서 요셉과 함께 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이 고난 중에서나 영광 중에서나 그와 함께 하셔서 승리의 인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만사 형통케 되고, 역경에서 은총의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요셉의 후반부 생애로서 하나님께서 요셉을 생명 구원 역사에 어떻게 쓰셨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첫째, 진정한 사랑에 대해서, 둘째, 섭리를 믿는 믿음에 대해서, 셋째, 참된 소망에 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요셉과 같이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간직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형들을 훈련시키는 요셉(42:1-44:34)
7년 동안의 풍년이 끝나고 온 세상에 기근이 심하여 흉년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각국 백성이 양식을 사러 애굽으로 왔습니다. 기근은 야곱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도 강타하여 요셉의 형들도 애굽에 곡식을 사러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베냐민은 보내지 아니했습니다. 형들은 애굽에 와서 총리 대신인 요셉 앞에 엎드려 절하였습니다. 이때 요셉은 그들을 알아보고 어릴 때 꾼 꿈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대로 꿈이 그대로 성취 되었습니다. 만일 요셉에게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과 형들에 대한 사랑이 없었다면 그들을 보자마자 당장에 능지처참을 하거나 아니면 갖가지 고문으로 두고두고 괴롭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품에 품고 훈련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요셉은 엄한 소리로 그들을 정탐꾼으로 몰았습니다. 그리고 막내 동생을 데려 오도록 함으로써 그들의 진실을 증명토록 하였습니다. 그런 후에 그들을 다 함께 삼일을 가두었습니다. 요셉은 삼일만에 그들을 풀어 주면서 방향을 주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그리고 시므온을 결박하여 인질로 잡아 두고 곡식을 가지고 집으로 가도록 하였습니다. 이때 형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42:21,22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20년 전에 요셉에게 지은 죄를 기억하고 우리가 그 피값을 내게 되었도다고 하며 죄의식으로 괴로워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20년이라는 긴 세월이 그들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죄 문제는 하나님께로부터 사함 받을 때만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순간부터 마음에 행복이 없습니다. 죄에는 반드시 값이 있습니다. 그 값은 죽음입니다.(롬6:23a) 요셉은 그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와서 훈련을 시켰습니다. 요셉이 우는 것을 볼 때 그 마음이 얼마나 순수하고 진실되며, 또 마음으로부터 형들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그들을 보낼 때 곡물과 함께 돈도 도로 넣어 보냈습니다. 형들은 돌아가는 도중에서 이 사실을 알고 혼이 나서 떨며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 일을 행하셨는고” 요셉은 형들에 대한 애정으로 돈을 넣어 주었으나 그들은 하나님이 벌하시는 줄로 생각하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들은 집에 돌아와 자초지종을 아비 야곱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야곱은 요셉도 잃고 시므온도 잃고 또 베냐민까지 잃게 될 것을 생각하니 그의 흰 머리가 슬피 음부에 내려가는 듯한 고통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기근이 너무 심하여 다시 애굽에 내려가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때 유다가 그의 몸을 담보하며 베냐민을 책임지고 데리고 오겠다고 다짐을 하여 아버지를 설득했습니다. 이때 야곱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라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길 때 비로소 모든 근심과 염려, 장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사라지게 됩니다. 내 인생, 부모의 인생, 자식의 인생, 양들의 인생을 내가 책임질 수 없습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책임질 수 있습니다.
그들은 베냐민을 데리고 그 나라 특산품인 각종 예물을 가지고 애굽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집으로 모시고 짐승을 잡고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요셉에게 예물을 드리고 엎드려 절하였습니다. 요셉은 그들에게 가장 먼저 아버지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동생 베냐민을 보고는 마음이 타는 듯 하므로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 울고 얼굴을 씻고 그 정을 억제하고 나와 그들을 맞이했습니다. ‘그 정을 억제하고’ 이 말씀은 그가 감정의 지배를 받지 않고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요셉은 사랑하는 동생을 21년만에 보았으므로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겠습니까? 그가 타는 듯한 정을 억제한다는 것은 자신의 힘과 의지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요셉이 만일 그 정을 억제치 못하여 형들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면 더 이상 그들을 훈련시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정을 억제함으로 그들을 끝까지 훈련시킬 수 있었습니다. 절제는 성령의 열매입니다.(갈5:23)
요셉은 형들을 나이 순서대로 앉히고 자기 식물로 그들에게 주며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오 배나 더 주었습니다. 형들은 이상히 여겼지만 영문도 모르고 요셉과 함께 즐거워했습니다. 돌아갈 때가 되자 요셉은 또 다시 한 사건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청지기로 하여금 자기의 은잔을 베냐민의 자루에 넣게 함으로 그를 도둑으로 몰았습니다. 그들이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각본대로 뒤쫓아가서 조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 당연히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왔습니다. 이제 현장에서 잡혔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선을 악으로 갚은 배은망덕한 짓을 했으므로 죽을 죄인들이 되었습니다. 이때 그들은 과거 같으면 베냐민에게 책임전가를 하고 자신들의 살 길을 강구하기에 급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모두 다 종이 되겠다고 하였습니다(44:16). 그러자 요셉은 은잔이 발견된 베냐민만 종이 되고 모두 평안히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요셉은 형들의 참모습을 테스트 한 것입니다. 이때 유다가 요셉에게 가까이 가서 간청하기 시작했습니다. 44:18-34절까지는 유다의 간청입니다. 이 유다의 간청은 구약성서 중 가장 장엄하고 설득적인 웅변이라 일컬어집니다. 여기에는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 베냐민을 구속하고자 하는 대속의 원리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베냐민을 대신하여 일생 종이 되겠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큰 감동을 줍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자신을 온전한 희생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이로써 우리에게 참 자유와 생명을 주셨습니다.
유다의 말 가운데서 그가 정말 회개했다는 사실을 두 가지 면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책임성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베냐민에게 문제가 생기면 모든 책임을 자기가 지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는 이 약속대로 베냐민 대신 자기가 종이 되겠다고 한 것입니다. 과거 그는 약속을 했다가도 자기에게 손해가 될 것 같으면 쉽게 그 약속을 번복하고 지키지 않는 신실치 못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의 고귀한 생명을 희생해서라도 자기가 한 말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자 하는 책임성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둘째로, 그 마음에 사랑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과거 그는 동생 요셉을 미워하고 시기하여 파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는 요셉이 얼마나 괴로워 하고, 아버지가 얼마나 슬퍼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베냐민까지 잃게 되면 늙으신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생명보다도 아버지와 동생을 더 사랑하는 희생적인 사랑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진실되게 회개한 유다를 받으시고 구속 역사를 계승하는 주인공으로 귀히 쓰셨습니다.
45:1절을 보십시오. 요셉은 형들의 회개한 모습을 보았을 때 더 이상 자신을 숨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궁중 모든 사람이 들리기까지 방성대곡을 하였습니다. 그가 이때까지 많은 사건을 일부러 만들어 형들을 곤경에 빠지게 한 것은 그들에게 원수를 갚으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진정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형들이 죄의식으로 괴로와 할 때 마음이 아파 그들을 떠나가서 울었습니다. 형들은 자기 중심적이고 감정적이고 무책임하여서 하나님께서 보실 때 아무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사람이 되려면 진실되게 회개하여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여러 모양으로 훈련시키므로 그들이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쓰실 만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선물을 사주고, 리포트를 대신 써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사람이 되도록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귀하게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하나님께서 쓰실 수없는 죄악된 요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게으르고, 어떤 사람은 너무 이기적입니다. 어떤 사람은 감정적이며, 어떤 사람은 정욕에 쉽게 무릎을 꿇습니다. 이런 요소들은 신앙생활을 오래 한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는 훈련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죄악된 자신을 발견하고 진실되게 회개할 때 가능합니다.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사람이 되도록 돕는 것이 참된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이 중요한 만큼 쉽지 않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깊은 관심과 목자의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훈련시키는데는 많은 아픔이 따릅니다. 훈련받는 사람도 자기가 깨어지는 아픔이 있지만, 훈련시키는 사람은 그보다 더 큰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픔이 있더라도 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냥 내버려둘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오해와 아픔이 있더라도 죄악된 요소와 싸워서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훈련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목자님이 나의 죄를 책망하고 훈련시키면 섭섭한 감정을 품기 쉽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이란 훈련시키는 사랑이요 죄를 회개시키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신 후 광야에서 40년 동안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빨리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젖과 꿀을 맛있게 먹고 편히 살 것인가 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그들이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가 되어 만민 구속 역사를 감당하는데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 먹는 훈련, 안식일을 지키는 훈련 등 기본 훈련을 40년 동안 시키셨습니다. 이를 통해 눈치보고 의존적이고 규모 없는 노예근성을 빼고, 자립적이고 개척적이며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키우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만이 몹쓸 죄인들을 살릴 수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회개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 동안 받은 바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이 그 마음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Ⅱ. 하나님이 쓰시는 요셉(45:1-47:26)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을 밝힌 다음 그들을 가까이 오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들에게 자신을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역사를 간증했습니다. 45:4-8은 요셉의 간증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셉이 형들을 용서할 뿐 아니라 뜨겁게 영접할 수 있었던 내적 힘이 그의 믿음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인생이 형들의 손에 의해서 좌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섭리 가운데 인도되었음을 증거했습니다. 형들은 시기심 때문에 요셉을 팔았지만, 하나님은 이를 선으로 바꾸사 요셉을 연단하셔서 애굽의 총리로 세우셨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야곱의 권속들의 생명을 보존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기근으로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권속들을 살리셨습니다. 이로써 구속 역사가 끊기지 않고 이어지게 하셨습니다. 또 그들 후손들이 애굽 땅에서 번창하여 큰 민족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둘째는, 세상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47:13-26절을 보면 요셉이 얼마나 지혜롭게 일하고 있는가 나옵니다. 요셉은 애굽 백성들의 생명을 살릴 뿐만 아니라 짐승과 전토를 몰수히 거두어 바로의 소유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는 충성스럽게 청지기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이로써 그는 애굽 백성과 그 주위에 있는 모든 백성의 생명을 살렸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생명 구속 역사에 귀히 쓰셨습니다.
요셉이 가장 운명적인 삶 속에서도 이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귀히 쓰임 받을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45:5,7절을 보십시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또한 50:20절을 보십시오. “당신들이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요셉은 자신이 애굽에 팔려 온 것을 결코 운명의 장난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형들이 자기를 팔았다고 생각지 않고 하나님께서 절대적인 섭리 가운데서 자기를 먼저 이곳에 보내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섭리를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가 이 믿음의 눈으로 자기 생애를 바라 보았을 때 그의 생애는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편에서 보지 않고 운명이란 관점에서 보았다면 그의 생애는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그는 세상에서 가장 운명적인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열 한 번째로 태어나 배 다른 형들과 함께 자라야 했습니다. 어릴 때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늙은 아버지의 편애를 받으며 자라났습니다. 어쩌다가 철없이 꿈 이야기를 한 것이 화근이 되어 어린 나이에 노예로 팔려 가 낯선 이방 땅에서 종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가정 총무가 되었지만 또 다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억울한 감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운명의 장난입니까? 요셉은 뼛속까지 스며드는 슬픔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어머니 왜 나를 낳으시고 일찍 돌아가셨나요?”하며 슬픔 운명을 한탄했을 것입니다. 또한 세상을 원망하고 저주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그의 눈을 이글거렸을 것입니다.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일개 죄수에서 하루 아침에 총리가 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한없이 교만해져서 자기에게 주어진 권세를 모두 복수하는데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요셉의 아름다운 사랑을 이야기하는 대신에, 요셉하면 피도 눈물도 없는 악랄한 사람이라고 몸서리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기의 생애를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 가족과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시고자 이곳에 자기를 먼저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8:28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요셉은 하나님께서 완전무결하신 뜻 가운데서 그의 인생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하나님의 온전한 섭리를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요셉에게는 운명이란 단어가 없었습니다. 허무, 실패도 없었습니다. 운명, 허무, 실패란 말은 불신자들이 쓰는 단어입니다. 성경에는 운명, 실패란 단어가 없습니다. 운명적인 요소에 시달리고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생각지 않고 인간 편에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생각할 때 모든 것이 다 의미가 있습니다. 요셉은 말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하셨다”고 증거했습니다. 요셉에게는 하나님이 주어이고 자신은 목적어였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생애를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인생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나님 없이 볼 때 우리의 인생은 운명적이 되고 슬픈 인생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선한 일을 위하여 섭리 가운데서 나를 인도하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이 있을 때 인생은 밝아지고 긍정적이 됩니다. 모든 연약함과 슬픔과 고독을 물리치고 감사와 은혜가 충만한 힘찬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으로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은 그로 하여금 낯선 이방 땅에서 슬픔과 고독을 극복하게 했습니다. 또한 유혹을 물리치고 청년의 순결을 지키게 했습니다. 섭리를 믿는 믿음은 감옥에서 최악의 환경을 극복케 했고, 인내할 수 있게 했습니다. 섭리를 믿는 믿음은 총리가 되었을 때에도 교만하지 않고 맡은 바 일에 충성하게 했습니다. 섭리를 믿는 믿음은 형들을 품고 훈련시키고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게 했으며, 가는 곳마다 하나님을 증거하는 생활을 하게 했습니다. 그의 삶의 한 순간 한 순간은 실패한 것 같고 패배하는 것 같고 망하는 것 같았지만, 모든 것을 합하여 볼 때 결국 선이 되었습니다. 섭리를 믿는 믿음으로 그의 인생은 고난 중에서나 영광 중에서나 조금도 요동치 않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Ⅲ. 요셉의 소망(50:22-26)
요셉은 17세에 애굽에 와서 30세에 총리가 되고 110세에 죽었습니다. 그는 80년 동안 선진국 애굽에서 문화생활을 누리며 지냈습니다. 이는 문화에 동화되고 변질되기에 충분한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동화되지 않고 중심을 지켰습니다. 그의 임종시 가진 바 소망이 무엇입니까? 50:24,25절을 보십시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것을 예언 하였으며, 동시에 자기 시체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에 묻어 줄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분명한 identity가 있었습니다. 그의 소망은 애굽에 있지 않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새 가나안, 하나님 나라에 있었습니다. 그의 분명한 소망으로 인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결론: 이상 요셉의 생애를 살펴 볼 때 그가 너무나 훌륭하여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요셉은 요셉이고 나는 나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요셉의 생애를 아름답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저자는 반복해서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사 그의 생을 주장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그가 슬픔을 이겨야 할 때 이기게 하시고, 유혹을 물리쳐야 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인내가 필요할 때 인내를 주셨고, 지혜가 필요할 때 지혜를 주셨습니다. 또한 사랑이 필요할 때 형들을 품고 섬길 수있는 풍성한 사랑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역사를 주재하실 뿐 아니라 우리 개개인의 생애를 주장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셔서 나의 전 인생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다 헤아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완전무결한 뜻을 두시고 완전한 사랑 가운데 인도하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믿음으로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