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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14(계시의 완성자 예수님)

by Mark Yang   08/14/2019   Hebrews

Message


1997년 히브리서 제 1 강
계시의 완성자 예수님
말씀 : 히브리서 1:1-14
요절 : 히브리서 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번 가을학기에 히브리서를 공부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히브리서는 A.D. 64-70년 사이에 유대인 크리스천들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저자는 바울, 바나바, 아볼로, 누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등 많은 사람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본서를 누가 기록했는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라고 한 오리겐의 견해만이 확실합니다. 저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히브리서를 읽어 볼 때 그는 유대인으로서 구약성경에 능통하였고, 헬라철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헬라어도 능통하게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사도 바울의 감화를 받고 디모데와도 친분이 두터운 사람이었습니다(13:23). 무엇보다 그는 기독교의 본질을 꿰뚫고 구약성경에 기초해서 그리스도론을 확립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서신을 쓰게 된 동기와 목적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처음에는 주님의 제자들로부터 구원의 복음을 받고(2:3),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핍박과 고난에 대해서도 매우 담대하였습니다(10:32).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들을 인도하던 사람들은 세상을 떠나게 되고, 내적으로는 유대교의 교리적 공세에 동요를 일으켜 그리스도의 절대성을 의심하게 되었으며, 또한 밖에서 오는 핍박은 극심해졌습니다. 반면 그들이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버렸던 유대교는 번성하고, 공인된 종교로서 로마의 보호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박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고 옛 생활인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게 되었고, 구원에 대한 도리를 등한히 여기게 되었습니다(2:3). 또 불신과 불순종, 그리고 모이기를 폐하고 이기적인 욕심을 따라 행동하는 자들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히3:12,13,18,19, 10:25). 또한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는 신앙의 정체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5:12).
저자는 이런 그들에게 첫째, 복음의 우월성과 절대성을 깨닫고 복음신앙 위에 굳게 서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둘째, 믿음을 저버린 배교의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경계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믿음으로 어려운 시련과 싸워 영광의 면류관을 얻도록 권면합니다. 셋째, 초보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는 그들에게 영적으로 성장하기에 힘쓸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자는 여러 가지 문제 가운데서 우리 믿는 도리의 사도시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3:1)을 깊이 생각하고, 이 예수님을 굳게 붙잡고(4:14), 이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12:2). 히브리서 공부를 통해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예수님을 굳게 붙잡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죄악된 이 시대를 이기고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제 1 강 말씀은 예수님이 계시의 완성자가 되시며, 천사보다 뛰어난 분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상대적이고 인본적인 시대에 살면서 알게 모르게 이 시대의 영향을 받아서 우리의 신앙도 상대화되고 인본적이 되기 쉽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우리의 신앙을 약화시키고 타락시키는 죄의 유혹과 인본주의 사상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우월성과 절대성을 배워서 우리의 신앙이 반석 위에 굳게 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계시의 완성자 예수님 (1-3)

1,2a절을 보십시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역사를 어떻게 이루어 오셨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범죄한 이래로 인간을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할 인류구원의 계획을 계시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먼저 인간을 타락시킨 사단을 저주하시는 가운데 원시복음의 형태로 계시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5) 그 후 노아 시대에는 홍수 심판과 구원의 방주를 통해서 사람이 하나님을 버리고 육을 좇아 살 때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과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믿음으로 살 때 구원을 얻게 된다는 심판과 구원에 대해서 계시하셨습니다. 아브라함 때에는 그에게 복된 약속의 말씀을 주시고 언약을 세우심으로 인류구원 역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2) 이 얼마나 복된 약속의 말씀입니까? 그 후 하나님은 이삭, 야곱을 통해서 인류구원 역사를 계승하셨습니다. 모세 시대에는 출애굽 역사와 성막과 제사제도를 통해서 장차 올 참된 구원의 모형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출애굽 역사는 바로의 노예로 신음하고 있다가 어린 양의 피로 강한 바로의 권세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는 죄와 사단의 노예 상태에서 신음하던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어린 양되신 예수님의 보배 피로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또 성막과 제사제도는 죄악된 우리 인간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으며,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가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는 죄많은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반드시 중보자가 필요하다는 것과, 또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피흘림이 요구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가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또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를 통해서만 온전한 속죄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구원의 예표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후 다윗 왕과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등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인류구원의 계획을 줄기차게 계시해 오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는 장차 올 메시야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또 메시야가 당할 고난에 관한 계시는 너무나 선명하게 계시되어 우리의 완악하고 무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하나님은 이렇게 구약시대에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인류구원 역사를 계시해 오셨습니다. 때로는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계시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표적이나 자연적인 현상을 통해서 계시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여호와의 사자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계시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계시는 부분적이며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장차 올 완전한 계시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에 나타난 계시를 살펴 볼 때 그 계시의 특징은 그리스도를 향한 점진적인 계시였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 계시가 희미하게 나타났지만 나중에는 점점 선명하게 나타나고 마지막 예수 그리스도에게 와서는 완전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태양이 칠흙과 같은 밤하늘을 뚫고 서서히 희미하게 그 빛을 나타내다가 나중에는 그 찬란한 빛을 온 천하에 밝게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2a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이 모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하나님은 인간을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하는 인류구원 역사를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 시대에 걸쳐서 여러 모양으로 계시해 오시다가 마침내 최후로 아들을 통해서 계시하셨습니다. 아들은 궁극적이며 완전한 계시자가 되십니다. 아들을 통해서 이때까지의 모든 계시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의 계시가 필요없게 되었습니다. 아들을 통한 계시는 이때까지의 계시와는 전혀 다른 새롭고 독특한 방법으로 계시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직접 찾아 오신 것입니다(요1:14,18). 이를 본 사도 요한은 감격하여 외쳤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하나님은 이때까지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루어 오시던 인류 구원역사를 아들을 통해서 최후로 완전히 계시하시고 그 계시를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완성된 계시, 곧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말씀해 오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복음의 말씀을 믿으면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을 말씀해 오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그러면 계시의 완성자 되시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2b,3절을 보십시오.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이 말씀에서 저자는 예수님을 일곱가지로 증거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만유의 후사가 되십니다. 후사는 상속자를 말합니다. 종은 아무리 훌륭해도 상속자는 될 수 없고, 상속은 아들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만유의 상속자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만유의 주인이 되십니다. 만유는 예수님에게서 나오고 예수님으로 말미암고 예수님에게로 돌아갑니다(롬11:36).

둘째로, 예수님은 세계의 창조주가 되십니다.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하나님은 말씀으로 모든 세계를 지으셨습니다(히11:30). 말씀은 로고스(λ γο , 로고스)로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1:1,3절은 이를 잘 말해 줍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16절에서 예수님이 창조주임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예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이 되십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십니다. 태양은 발광체로서 스스로 빛을 발하여 찬란한 광채를 발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발하시는 광채가 되십니다. 이 영광의 광채를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넷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십니다. 형상이란 원형을 그대로 그린 초상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이 인장을 찍은 듯이 그대로 그리스도에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15절에서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4:8절에 보면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빌립을 책망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요14:10,11).

다섯째로, 예수님은 만물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가 되실 뿐만 아니라 그 지으신 만물을 능력의 말씀으로 붙드시고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여섯째로, 예수님은 죄를 정결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최대의 사명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만민의 죄를 대속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추하고 더럽게 되었습니다. 이 죄는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깨끗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배 피는 우리 죄를 정결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몹쓸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진실되게 회개하고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덧입기만 하면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정결케 해 주십니다.

일곱째로, 예수님은 만유의 통치자가 되십니다.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정결케 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 승천 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음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구원의 사명을 완수하신 후에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세상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장차 세상을 심판하시고 만왕의 왕으로서 영원토록 왕노릇 하게 될 것입니다.

이상을 살펴 볼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계시의 완성자가 되시고 완전한 계시자가 되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인류구원 역사의 계시는 완성되었으므로 이제 더 이상의 계시가 필요없습니다. 그러므로 산기도를 통해서 직통 계시를 받았다고 떠들어대는 것은 모두 거짓말에 불과합니다.

II. 천사보다 뛰어나신 예수님 (1:4-14)

그리스도가 선지자들보다 우월하신 것을 밝힌 저자는 이제 나아가 천사보다 우월하신 것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천사는 모든 피조물의 으뜸으로서 선지자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유대인의 관념이었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천사숭배사상이 로마세계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천사들은 로마나 희랍 신전에서는 반신반인의 존재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천사가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에게 전하고, 인간의 기도와 소원을 하나님께 전해 주는 중보자 역할을 하는 존재로 믿었습니다. 천사의 수는 수천 수만인데 그 중에 라파엘, 우리엘, 파누엘, 가브리엘, 미가엘 등의 천사들은 숭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천사보다 뛰어난 분이십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신앙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저자는 예수님이 천사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신분과 역할면에서 비교 대조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신분면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천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셨습니다(4).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는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고 하셨고, 또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지만, 천사들에게는 아들이라 한 적은 없습니다(5). 천사가 아무리 영적으로 뛰어난 존재라고 해도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피조된 종에 불과합니다. 14절을 볼 때 특히 천사는 구원 얻을 후사들, 곧 우리 믿는 자들을 위하여 섬기는 종에 불과합니다. 아들과 종은 신분면에서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아들은 낳은 것이지만 천사는 만들어진 것입니다. 낳은 것은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지만, 만든 것은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영존하시는 분이시며 거룩함과 능력이 무한하신 분이신 것과 같이,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존하시며 거룩함과 능력이 무한하신 하나님과 동일한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는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일한 속성을 지닐 수 없습니다.
또 6절을 보십시오.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찌어다 말씀하시며”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모든 천사들로부터 경배를 받는 경배의 대상이 되심을 말해 줍니다. 경배하는 자와 경배를 받는 자는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사들로부터 경배와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의 맏아들이 되십니다(롬8:29).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도 허다한 천군천사들이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고 찬양했습니다(눅2:14). 요한계시록 5:11,12절에 보면 수많은 천사들이 큰 음성으로 예수님을 찬양했습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경배를 받는 분이 경배하는 자보다 뛰어남은 당연한 것입니다.

둘째로, 사역면에서 예수님은 천사보다 뛰어나신 분이십니다. 7절을 보면 천사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역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아들은 통치자가 되십니다. 8,9절은 그의 나라의 성격과 통치자의 성품이 어떠한가를 말해 줍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온 세상을 통치하는 왕이시요, 그가 통치하는 나라는 영원함을 말해 줍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님을 수태할 것을 예고할 때도 그 나라가 무궁할 것을 증거했습니다.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1:32,33) 요사이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 말년에 레임덕으로 인한 권력누수 현상이 매우 심각합니다. 임기 초기에는 모두 그의 말에 절대 복종하였지만 요사이는 다 자기 나름대로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통치하는 나라는 레임덕으로 인한 권력누수 현상이 전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나라는 영원하고 그의 통치도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통치자가 불의를 행하고 영원히 다스린다면 그것처럼 고통스러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 분이십니다. 그의 나라의 통치 이념은 공평과 정의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의 통치에 관해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사9:7)
10-12절에서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근본 차이점을 말해 줍니다. 이는 예수님은 창조주로서 영존하시며 불변하시는 존재이시지만 천사는 피조물로서 낡아지고 결국에는 소멸해 버리고 마는 일시적인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0-12절 말씀을 볼 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의 속성은 낡아지고 변하고 결국에는 멸망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처음에는 신선하고 멋있고 영원히 갈 것 같지만 엔트로피 법칙에 의해서 낡고 부패하고 변하고 결국에는 멸망하게 됩니다. 정치 세계 뿐만 아니라 유행도 변하고 사랑도 변하고 가치관도 변하고 철학이나 사상도 끊임없이 변합니다. 과거에는 흥부는 가난하고 착한 사람이고 놀부는 욕심이 많고 심술궂은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요사이는 놀부는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 능력 많은 사람으로 인식되고, 흥부는 대책없이 아이만 많이 낳고 무책임한 중풍족속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과학은 절대 불변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원리 이후 과학도 상대적인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는 세상에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확실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예측이 불가능함으로 확률적으로 가능성만 말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태양은 영원토록 세상을 환하게 밝게 비추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태양도 매초당 약 400만톤씩 그 무게를 상실해 가고 있으며 점차적으로 그 열이 식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태양이 식고 빛을 내지 않는다면 이 지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는 세상은 변하고 그 종말이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저는 지난 추석 기간에 오랜만에 가족들과 함께 폼페이 최후의 날 유물전을 관람하였습니다. 폼페이시는 2000년전이었지만 현대 못지않게 호화롭고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순식간에 베수비어스 화산의 폭발로 인해 그 도시는 잿더미가 되었다가 2천년이 지난 후에야 발굴되었습니다. 유물전 마지막에 폼페이시의 길거리에 한 낙서는 세상의 속성을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었습니다.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찬란히 빛나는 태양도 바다 속으로 진다.” 그렇습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회전하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우리가 이런 가변적인 세상에 소망을 두고, 인생의 기반을 두고 살 때 모든 것이 상대적이 되고 불투명해지고 불안하고 두렵게 됩니다. 세상이 요동할 때 나도 자연히 요동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인생의 기반을 두고 살 때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요동치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은 영존하고 불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사랑도 영원하고 능력도 영원하고 거룩함도 영원합니다. 히브리서 13:8절은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그러나 영원토록 동일하고 불변하다고 해서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완전한 조화와 질서 속에서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교통하며 생명을 창조해 냅니다. 하나님은 생명력으로 충만하신 분으로서 끊임없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인생의 기초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둘 때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있고 생명력이 충만한 복된 사명인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또한 영원토록 불변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서로 믿고 신뢰하는 신용사회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미국은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을 때 동전에 “In God we trust"(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신뢰한다)라는 문구를 새겨 넣고 신용사회를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을 때 서로 믿지 못하는 불신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계시의 완성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계를 창조하신 창조주시요, 영원토록 세상을 다스리시는 통치자가 되십니다. 이 예수님께서 인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셔서 세상을 그 뜻대로 통치하십니다(13). 이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께 우월성과 절대성을 두고, 이 예수님께 인생의 기초를 견고히 놓음으로써 생명력이 충만한 복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