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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1-4:31(모세를 부르신 하나님)

by Mark Yang   08/14/2019   Exodus

Message


출애굽기 제 2 강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

말씀: 출애굽기 3:1-4:31
요절: 출애굽기 3:5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우리는 제 1강에서 애굽에서 노예가 된 이스라엘과 이런 가운데 모세 한 사람을 지도자로 키우신 하나님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오늘 제 2강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출애굽의 사명을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세계 제 2차 대전의 명장인 몽고메리 장군은 모세를 가리켜 전무후무한 지도자라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누가 보든 위대한 지도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200만의 노예백성을 이끌고 출애굽의 위대한 역사를 창조했습니다. 또 그는 인간 행동의 규범이 되는 율법을 전수한 자요, 하나님의 온 집에 충성한 충성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이렇게 위대한 지도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실 때 그는 자신 하나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두려움과 불신과 회의와 깊은 자의식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세를 부르시고 키우사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모세를 부르시고 그가 사명을 영접하기까지 도우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살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시대에 모세와 같은 영적 지도자로 키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Ⅰ.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3:1-5)

2:23-25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었고, 그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돌아보셨습니까?

3:1절을 보십시오. 모세는 장인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고 있었습니다. 궁중에서 화려한 왕자복을 입고 백마를 타고 다니며 섬김을 받던 그가 광야에서 I. Q가, 낮은 말 못하는 양들의 시중을 들어야 했으니 얼마나 고생이 심했겠습니까? 그것도 1, 2년이 아니라 무려 40년 동안 양치는 생활을 해야 했으니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이제는 양치는 생활도 익숙해졌습니다. 그는 양치는 생활을 통해 목자의 섬김의 내면성을 몸에 익히게 되어 내면이 성숙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40년 간의 광야훈련을 통해 겸손과 온유의 사람이 되었고, 인내의 사람이 되었고 어떤 사람도 품고 섬길 수 있는 내면이 깊고 넓은 사랑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양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여기서 모세는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 활활 타고 있는데 나무는 전혀 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불꽃은 보통 불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의 마음 가운데 큰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그는 이 신비스러운 광경을 보기 위해 떨기나무 있는 곳으로 몸을 돌이켰습니다. 하나님은 40년 광야생활로 인해 꺼져가는 심지와 같이 된 모세의 마음에 불꽃을 불러 일으키셨습니다. 하나님은 40년 동안 침묵하셨으나 때가 되자 모세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후에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계시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성육신 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하나님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이는 친밀하고도 긴급한 음성이었습니다. 모세는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대답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러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사명을 주시기 전에 먼저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에게 왜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이는 그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기 때문입니다. 발에서 신을 벗는 것은 존경과 복종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신은 우리가 착용하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더럽고 냄새가 많이 나는 것입니다. 아마 모세의 신은 양치느라고 양똥을 많이 밟아서 냄새가 고약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더럽고 냄새나는 신을 신고 경거망동하게 함부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신을 벗고 옷깃을 여미며 두렵고 떨림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신을 벗는다는 것은 회개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더럽고 추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보배피로 씻음 받을 때만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세상과 자신의 인생을 저주하며 체념적인 인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의 인생은 무의미하고 허무하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는 자기를 배척한 동족들을 원망하며 또 자신을 학대하며 운명적인 인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가 처한 형편을 생각할 때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도 없었고 비젼도 없었고 사명도 없었고 방향도 없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체념한 채 소시민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에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셨습니다. 그곳은 모세가 생각한 대로 결코 운명의 땅이나 저주 받은 땅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실패의 땅도 아니요 한과 슬픔이 맺힌 땅도 아니었습니다. 이 땅은 소망의 땅이요 거룩한 땅이요 역사창조의 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이 계신 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은 그 어디나 뜻이 있습니다. 집이나 학교나 직장이나 군대든 또 한국이나 미국이나 러시아나 중국이나 아프리카든 그 어디나 하나님이 계신 곳은 거룩한 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경을 탓하고 자신이 처한 형편과 위치를 탓하며 불평하고 원망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처한 바로 그곳에서 죄의 신을 벗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Ⅱ. 모세에게 사명을 주신 하나님(3:6-12)

모세가 신을 벗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는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웠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7, 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이 말씀에는 택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과 하나님의 희망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현재 노예백성으로서 무시 받고, 멸시 받고, 천대 받는 백성이었습니다. 소망을 두기 힘든 쓸모없는 백성이었습니다. 이런 자들의 하나님이 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더군다나 이러한 자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더욱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을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죄와 사단의 노예가 되어 아무 쓸모없게 된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7, 8절에는 여섯 개의 동사가 나옵니다. ‘보고’, ‘듣고’, ‘알고’, ‘내려와서’, ‘건져내고’ ‘인도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서 ‘보고’, ‘듣고’, ‘안다’는 동사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고통을 잘 아시고 그들의 고통에 깊이 동참하고 계심을 보여 줍니다. 또 이 동사들은 현재완료형으로서 하나님께서 이때까지 그들의 고통을 다 보고 계셨고 그들의 고통 소리를 다 듣고 계셨음을 말해 줍니다. 때로 우리는 어려운 상황 가운데 처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나의 간구를 외면하시고 돌아보지 않는 것같은 생각이 들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불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모든 형편을 잘 아시고 나의 고통에 깊이 동참하고 계십니다.
‘내려온다’, ‘건져낸다’ ‘인도한다’는 동사는 구체적인 행동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형편을 잘 알고 계시지만 그들을 도우실 능력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능히 그들을 바로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로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모세를 구원자로 보내신 것은 장차 올 구속역사의 모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약 1500년 후에 인간들의 고난에 동참하시고 인간들을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친히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냄새나는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동고동락하셨습니다. 마침내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십자가에 못박혀 인생들의 모든 죄를 그 몸으로 담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셨습니다(골1:13). 이는 죄인들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구속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희망. 하나님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의 손에서 건져내어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말씀하실 때는 그냥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이는 현재 그들에게 희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노예 백성으로서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좀 더 잘 먹고 잘 입고 편히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명인으로 사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할 수만 있으면 출애굽하지 않고 노예생활을 하더라도 선진 애굽의 문화를 즐기며 고기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고 달구지 자가용을 굴리면서 편히 살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들에게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들 마음에 출애굽의 소원을 심으신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의 땅이요, 장차 그들이 제사장 나라로서 새 역사를 창조할 사명의 땅입니다.

9, 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향한 구속의 사랑과 희망을 말씀하신 후 이제는 구체적으로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출애굽시키는 역사적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때 모세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11) 과거 그는 자신의 능력과 힘과 지혜와 학식을 믿고 자신이 능히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행7:25). 이때 그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내가 누구관대”하며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광야훈련을 통하여 자신이 얼마나 무능하고 무력하고 무가치하고 무지한 자인가를 뼈져리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무능과 무력함을 깊이 깨달을 때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할 수 있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덧입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에게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12a). 이것은 실로 놀라운 약속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출애굽 역사를 위해서 바로와 애굽 군대를 격파할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주지 않으시고 다만 “정녕 너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확실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천지의 주재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불가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어떤 사명을 위해서 사람을 택하시고 부르실 때는 “반드시 너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선교사명을 주신 후에도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28:20).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셔서 이를 감당할 힘과 지혜와 용기를 주십니다.
12b절을 보십시오.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이 말씀에는 출애굽의 목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것은 애굽에서 바로를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출애굽하여 바로를 섬기는 데서 사신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은총입니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성을 맺고 하나님을 섬길 때 비로소 영혼의 참 만족과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Ⅲ.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3:13-22)

13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모세는 백성들을 핑계 삼아 하나님의 이름을 묻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광야 생활하는 동안 마음 깊이 자리잡고 있던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 그의 이름이 무엇인가?” 이는 모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우리 모두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격적으로 알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세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14절을 읽어 봅시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who I am) 이 말씀은 참으로 신비로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홀로 존재하는 자”,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는 존재자”로서 자존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다른 것에 의해 존재할 수가 없고 모든 것을 존재케 하시는 제 1원인자 곧, 창조주가 되심을 말해 줍니다. 또한 이 말씀에서 시제가 현재라는 사실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현재에 살아계신 분으로서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존재하시고 영원히 계실 분이심을 말해 줍니다. “여호와”란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뜻인데 이는 영원 불변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서 사람이 만든 이방신과 구별됩니다. 고대 근동의 신들은 남신과 여신이 있었고 또 인간과 같이 서로 사랑하고 질투하고 짝을 지어 번식하기도 하고 또 신들 간에 엄격한 위계질서가 있고 각자 맡은 역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신들은 문명의 발달과 함께 나타났다가 문명의 쇠퇴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일하시고 완전하시고 거룩하시고 절대적인 분으로서 역사 속에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지혜로 이해할 수 없고 파악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분이십니다(사13:18). 우리는 다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한도 내에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who I am) 이 말씀에는 목적어가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나는 생명의 떡이니”(I am the bread of life), “나는 선한 목자라”(I am the good shepherd) 등 자신을 여러 모양으로 계시하셨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는 스스로 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역사 가운데 구체적으로 계시하신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삭의 하나님이 되시고 야곱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I am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sac, and the God of Jacob) 이는 모두 현재형으로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죽었지만 모두 부활하여 하나님 앞에서 현재 살아 있음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역사 가운데 살아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모세의 하나님이 되시고,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에게 보내시고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강한 손으로 바로를 치고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한 후에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여 출애굽을 하게 될 것입니다(16-22).
Ⅳ. 하나님의 지팡이(4장)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이 어떤 분이며 또 그가 백성들과 바로에게 전할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자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4:1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이 말 가운데는 모세의 백성들에 대한 깊은 불신과 두려움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과거 자신의 힘과 의지로 동족을 구원하고자 하다가 백성들로부터 배척을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그의 선한 의지는 여지없이 땅에 짓밟히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여 정처없는 나그네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과거를 회상할 때마다 백성들로부터 배신당한 아픔과 실패로 인한 패배감으로 몸서리쳤을 것입니다. 우리도 양을 치다가 실패할 경우 이로 인해 깊은 상처를 받고 실의와 좌절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는 인간에 대한 혐오감으로 인해 더 이상 양을 치고 싶지 않게 됩니다. 또한 그때는 사랑스럽던 양이 두려운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모세는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다. 백성들도 나를 버렸다. 나는 소망이 없다. 나는 떡 쪄 먹고 시루 엎었다.”는 생각으로 인해 뼈저린 고독과 깊은 자의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불신과 두려움과 자의식으로 인해 심령이 마비되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실한 증거와 또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실제적인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의 심정을 잘 이해하시고 섬세하게 도와 주셨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이때 그는 지팡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지팡이는 양을 칠 때 사용하던 것으로서 양들을 인도하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입니다. 양들이 딴 길로 가고자 하면 막대기로 목을 잡아 당겼습니다. 또 피곤할 때마다 이 지팡이를 의지하였습니다. 그런데 모세에게 있어서 이 지팡이는 운명의 지팡이요 한숨과 좌절의 지팡이였습니다. 이 지팡이에는 40년 간의 그의 말 못할 사연이 아로새겨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 지팡이는 아무 쓸모없는 막대기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무엇이라고 명하셨습니까? “그것을 땅에 던지라.” 모세는 말씀에 순종하여 지팡이를 땅에 던졌습니다. 그러자 그것이 뱀이 되어 혀를 날름거리며 모세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모세는 본능적으로 뱀을 피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을 내밀어 꼬리를 잡으라.” 이것은 모세의 심령 가운데 있는 속두려움을 제거하고자 주신 훈련이었습니다. 뱀은 꼬리를 잡으면 안 되고 머리를 잡아야 합니다. 모세는 광야 생활을 하면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뱀의 꼬리를 잡기가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잡았습니다. 그러자 다시 본래의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6절에서 이렇게 하는 목적으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네게 나타난 줄을 백성들로 하여금 믿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때부터 모세의 지팡이는 능력의 지팡이요,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사명을 감당키 위해 애굽으로 돌아갈 때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았습니다. 모세는 이 지팡이로 능력을 행했습니다. 지팡이로 하수를 쳤을 때 하수가 피로 변하고(7:20), 땅의 티끌을 치니 티끌이 이가 되고(8:16), 하늘을 향하여 지팡이를 들었을 때 뇌성과 우박이 내렸습니다(9:23). 지팡이로 반석을 쳤을 때 샘물이 나왔습니다(17:5,6). 아무 쓸모없던 운명의 지팡이가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능력의 지팡이가 되고 역사창조의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지팡이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에 의지하여 지팡이를 던질 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손에 문둥병이 발하는 이적과 하수가 피가 되는 이적 등을 보여 주심으로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라고 불의를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에게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으며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소경이 되게 하셨는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하며 계속 불의를 주장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노를 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사명을 영접하지 않고 계속 불의를 주장하자 화를 내셨습니다. 그러나 그를 포기하시거나 짤라버리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그에게 말 잘하는 형 아론을 대변자로 붙여 주심으로써 그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끝까지 도와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 부르시고 택하신 자는 끝까지 놓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마침내 모세는 사명을 영접하고 사명의 땅으로 나아가 출애굽의 위대한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애굽으로 가는 도중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 하셨습니다. 이는 모세가 아들에게 할례를 행치 않음으로 언약을 소홀히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참지 못하시는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때 십보라가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자 하나님께서 비로소 그를 놓으셨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말씀을 전하고 백성 앞에서 이적을 행하니 백성이 믿고 머리 숙여 하나님께 경배하였습니다.

이상에서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노예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돌아보셨습니다. 그들에게 제사장 나라로서의 큰 희망을 두시고 이 희망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는 부르심을 받고 선뜻 응답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또 백성들이 나를 믿지 않을 것이라고 불신과 회의에 찬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도 알고 하나님의 능력도 체험하고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확실한 증거도 얻었지만, 그는 계속해서 불의를 주장했습니다. 이는 그의 마음 가운데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던 부정적이고 운명적인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포기치 않으시고 그가 사명인으로 살도록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도와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두신 크신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온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크신 구속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이 소망의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는 심령에 새로운 힘과 소망을 갖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바라볼 때 소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나는 연약하여 내 자신 하나도 감당할 수 없어 괴로와하고 탄식하고 울부짖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오래 참으시고 여러 모양으로 도와 주십니다. 속두려움과 불신과 연약한 생각을 극복하고 모세와 같이 위대한 사명인의 인생을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이는 저희를 통해 멸망해 가는 세상 만민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입니다.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 소망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