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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3:1-4:13(참 안식을 주시는 예수님)

by Mark Yang   08/14/2019   Hebrews

Message


1997년 히브리서 제 3 강

참 안식을 주시는 예수님
 말씀: 히브리서 3:1-4:13
 요절: 히브리서 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현대인의 가장 큰 문제는 참된 안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불안과 두려움, 걱정과 근심, 초조, 긴장, 좌절, 절망, 죄의식, 존재의미 상실에서 오는 허탈감 등 각종 정신질환에 시달리며 살아 갑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것에서 해방되어 마음에 참 평안과 기쁨과 안식을 누릴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은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줍니다.

I.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3:1-6)

1절을 보십시오. 저자는 히브리 성도들을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이라고 부릅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거룩한 형제들아,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아”로 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그들이 세상에서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된 거룩한 자들이요,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임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크리스천이 된 것은 임의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주권 가운데 되었으며, 또 그들의 부르심이 상황에 따라 변개되거나 후회하심이 없는 절대적인 것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합니다. ‘우리의 믿는 도리’라는 것은 ‘우리의 신앙고백의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사도란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예수님은 인류 구원역사를 위해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전권대사임을 의미합니다. 또한 대제사장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많은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서 화목케 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사도요, 대제사장으로서 우리 신앙고백의 대상이 되시기 때문에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하지만 심령에 기쁨과 감격이 없고 무덤덤한 신앙생활을 하며, 끊임없이 인간문제로 갈등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우리가 믿은 신앙의 대상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깊이 생각하면 피곤하지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 은혜가 임하고 기쁨이 차고 넘치게 됩니다. 니체를 깊이 생각하면 허무주의자가 되고, 쇼펜하우어를 깊이 생각하면 염세주의자가 되지만,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 내면이 깊고 넓은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인간은 아무리 훌륭해도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그 바닥이 드러나지만, 예수님은 깊은 바다와 같아서 아무리 깊이 생각해도 그 깊이를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것은 모든 생각을 예수님께 고정시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초점을 예수님께 두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것은 예수님께 뿌리를 깊이 내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인생관과 가치관, 더 나아가 역사관과 세계관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핍박이나 죄의 유혹에 쉽게 흔들리는 것은 예수님께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3F 시대라고 합니다. Feeling(느낌, 감각), Female(여성), Fashion(양식, 스타일) 이 지배하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Female을 제외하고는 Feeling이나 Fashion은 생각하는 것보다 느끼고 외적인 모양을 중시합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싫어하고 보고 느끼는 감각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신앙생활도 말씀을 깊이 생각함으로써 은혜를 받고자 하기보다 가슴을 시원하게 해 주는 메시지를 들음으로써 은혜 받고자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자칫 잘못하면 샤머니즘적인 신앙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함으로써 예수님께 뿌리를 내릴 때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저자는 2-6절에서 예수님은 모세보다 존귀한 분이심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모세의 공통점은 모두 자기를 세우신 하나님께 충성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겨 주신 직분에 충성했습니다. 모세는 출애굽의 과업을 완수하고, 40일을 금식하며 율법을 전수하였으며, 노예근성에 찌든 백성들을 끝까지 참고 섬겼습니다. 백성들은 끊임없이 불평하고 원망하며 모세를 대적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들과 싸우지 아니하고 자기를 세우신 하나님께 충성을 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를 가리켜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민12:7)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충성하셨고, 맡겨 주신 제자를 양성하는데 충성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인류를 죄와 사망권세로부터 구원하는 인류 구원역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 하나님께 충성하셨습니다(빌2:6-8). 하나님의 종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입니다(고전4:2).
예수님과 모세는 충성된 점에서는 같으나 신분면에서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집이 아무리 훌륭하고 멋있다 할지라도 그 집을 지은 건축주보다 존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모스크바에 있는 붉은 광장에는 유명한 바실레이 성당이 있습니다. 그 성당은 바실레이가 설계를 했는데 너무 아름답고 멋있게 지었기 때문에 그런 성당을 다시 설계하여 다른 데에 짓지 못하도록 이반뇌제가 그의 눈을 뽑아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반뇌제를 무시무시한 이반(Ivan the terrible)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실레이 성당이 아무리 아름답다 하더라도 그 성당을 설계하고 지은 바실레이보다 존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세가 민족의 창시자요, 율법의 전수자로서 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계를 지으신 창조주가 되십니다. 모세는 장차 올 인류 구원역사의 모형으로서 하나님의 온 집에 사환으로서 충성하였지만, 예수님은 인류 구원역사의 원형으로서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모세보다 존귀하시고 더욱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6b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하나님의 집은 건물이나 조직이나 제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곧 하나님의 가족을 말합니다. 표준 새번역에서는 “우리가 그 소망을 두고 확신과 자랑을 지니고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그것을 자랑하고 기뻐하면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II.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3:7-4:13)

저자는 예수님이 본질적으로 모세보다 더 존귀하신 분이심을 증거한 후 이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구약의 실례를 들어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의 실패를 통한 교훈 (3:7-4:2). 7-11절은 시편 95편 8-11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독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이 시를 썼습니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을 듣기를 원하노라.”(시95:6,7) 그리고 시편 기자는 출애굽기 17장과 민수기 13,14장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실패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이르기를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 맛사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말찌어다. 그 때에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며 나를 탐지하고 나의 행사를 보았도다. 내가 사십년을 그 세대로 인하여 근심하여 이르기를 저희는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도를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시95:8-11)
출애굽기 17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어 지도자 모세와 다투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사막과 같은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다는 것은 생존을 위협하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런 심각한 문제가 생기면 과거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두 잊어버리고 현실의 어려움에 얽매여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그들은 모세가 자기들을 잘못 인도했다고 생각하고 모세를 원망하고 대적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반석을 치라”고 명하셨습니다. 모세가 믿음으로 반석을 치자 샘물이 콸콸콸 쏟아져서 그들의 목마름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출애굽기 17:7절은 그들의 근본문제가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라.” 그들이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고 모세와 다툰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불신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민수기 13,14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긴 광야의 여정을 끝내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바로 직전에 생긴 사건에 대한 기록입니다. 모세는 열 두 지파 가운데 믿음이 좋은 지도자를 뽑아서 가나안 땅을 정탐케 했습니다. 12 두령들은 사십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에 돌아와 보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꼭 같이 정탐을 했는데 열 두령의 보고와 갈렙과 여호수아의 보고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열 두령의 보고는 완전히 겁 먹은 보고였습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13:32,33) 그들은 가나안 백성들을 과대 평가하고 자신들은 과소 평가했습니다. 그들은 견고한 성과 장대한 백성들을 보고 스스로 겁에 질려 위축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을 때 그냥 들어가서 살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막상 그 땅에 가보니 현실은 달랐습니다. 원주민들은 시퍼렇게 살아 있고 자신들은 그들에 비하면 메뚜기 같이 보였습니다. 그들은 믿음이 없어 절망하고 자포자기했습니다. 그들은 배후에 역사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힘든 현실만 바라보고 낙심하고 절망했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로 가득찬 가나안 땅을 심판하고자 작정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고자 하셨습니다. 가나안 정복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약속의 성취지만, 가나안 백성들에게는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도전하여 그 땅을 쟁취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언제나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쟁취해야 합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확신있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밥먹듯이 그들을 쉽게 물리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살아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열 두 지도자들의 각기 상반된 보고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열 지도자들의 불신에 찬 보고가 백성들에게 미치는 악영향은 매우 컸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을 낙심케 하고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들의 불신은 전염병과 같이 삽시간에 백성들에게 퍼져서 백성들은 밤새도록 통곡을 하며 울었습니다. 열 지도자들의 문제는 한마디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이었습니다. 그들의 불신은 자신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실족시키는 엄청난 결과를 낳았습니다. 하나님은 불신하는 이들에게 진노하사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광야에서 유리하다가 엎드러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있는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안식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불신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배웁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불신하게 되면 관계성이 파괴되어 버립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불신하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파괴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은 불신을 가장 싫어 하십니다. 불신은 치료 받아야 할 영적인 질병입니다. 불신과 의심과 두려움은 사단이 우리 마음에 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신과 의심과 두려움이 생기면 사단이 우리 마음에 심는 것으로 인식하고 사단과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불신의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불신의 사람은 원망과 불평을 많이 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고 회개하기에 힘쓰고 조용한 가운데서 기도합니다.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를 통해서 히브리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첫째로,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12) 불신의 마음은 악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불신할 때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둘째로, 매일 피차 권면해야 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우리는 광야와 같은 불신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인 어려움도 많고 죄의 유혹도 많습니다. 세상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육신의 정욕은 가장 이기기 힘든 죄의 유혹입니다. 특히 혼자 있으면 이런 유혹을 이기기가 더욱 힘이 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모여서 피차 권면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권면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살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친하다 보면 서로 믿음으로 살도록 신앙적인 권면을 하기보다 인간적으로 서로 동정하고 인간적인 교제만 나누기 쉽습니다. 그러면 피차 망하게 됩니다. 우리는 광야와 같은 험한 세상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어려운 현실에 도전하고 믿음으로 살도록 피차 권면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서로 힘과 위로를 얻고 은혜가 차고 넘치는 참된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셋째로, 처음 확신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 합니다(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우리는 처음 말씀을 영접하고 믿음을 가졌을 때 감격과 소망이 넘쳤습니다. 그러나 점점 세월이 흘러갈수록 처음 감격은 어느덧 옛 추억이 되어버리고 신앙생활이 무덤덤해지게 됩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의 신앙생활은 챨스 스터드가 말한 대로 날이 갈수록 더 열정적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처음 가졌던 믿음의 확신을 끝까지 견지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안식에 참예할 수가 있습니다.
3:15-4:2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듣는 마음 자세가 매우 중요함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두가지 상반된 반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열 두령과 같이 마음이 강퍅케 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갈렙과 여호수아와 같이 믿음으로 화합하는 것입니다. 열 두령들의 마음이 강퍅케 된 것은 근본적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강퍅’이란 이미 메말라서 더 이상 수용 불가능한 인간의 굳어진 심령을 말합니다. 마음이 강퍅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권면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기 주장만 합니다. 마음이 강퍅한 자는 회개하기를 싫어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이 강퍅케 되는 것은 우리에게 전혀 유익을 주지 못하고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강퍅하게 되어 순종치 않은 자는 모두 광야에서 엎드러져 그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16-19).
그러나 말씀을 들을 때에 믿음으로 화답하는 자는 구원을 얻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실제 삶에서도 믿음으로 화답할 때 심령에 참 평강과 기쁨을 얻고 날로 날로 영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3절은 말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예를 들어서 우리가 마태복음 6: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을 들을 때에 현실적으로 이 말씀을 실천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불신으로 인해 마음이 굳어지고 강퍅하게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굳게 붙들고 어려운 현실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기에 힘쓰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축복하사 믿음대로 역사하시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비결 (4:3-13). 4:3-13절까지는 본문 구조가 복잡하여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이라는 단어와 ‘안식’이라는 단어의 개념을 파악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오늘날’이라는 단어가 많이 반복되어 나옵니다(3:7,13,15, 4:7a,b). 오늘날은 어떤 날입니까? 오늘날은 오늘날입니다. 오늘날은 과거도 아니요, 미래도 아닌 늘 현재입니다. 출애굽기 17장의 사건과 민수기 14장의 사건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가 시편 95편을 쓸 때 그 사건들은 현재 독자들에게 살아 있는 사건으로 부각되었습니다. 또 히브리서 저자가 히브리서를 쓸 때도 그 사건들은 현재 살아있는 사건으로 부각되어 당시 그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생생한 경고를 주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과거의 사건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살아있는 사건으로 부활되어 우리에게 생생한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10,11절에서 말했습니다.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우리는 성경공부를 할 때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으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존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늘 현재 살아 계셔서 성경 말씀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안식은 ‘하나님의 안식’을 말합니다. 우리는 ‘안식’이라고 하면 하던 일을 그만 두고 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도 안식입니다. 그러나 안식의 진정한 개념은 무조건 아무 일도 안하고 쉬는 것은 아닙니다. 육신은 아무리 잠을 많이 자고 쉰다 할지라도 걱정과 근심, 긴장과 초조, 불안과 두려움, 죄의식과 자의식으로 시달리게 되면 아무리 육신이 쉬어도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참된 안식은 마음의 안식, 영혼의 안식을 얻는 것입니다. 이 안식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옵니다. 4절에 나오는 안식은 안식의 원형으로서 하나님께서 창조역사를 끝낸 후에 안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6일간 창조의 역사를 끝내고 쉬신 것은 피곤하여 쉬신 것이 아닙니다. 이는 순전히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안식일을 창설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날로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안에서 교제를 나누는 날입니다. 이렇게 할 때 참된 영혼의 안식이 있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안식을 얻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큰 착각이었습니다. 그들이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 땅에 들어갔지만 거기에도 참 안식이 없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안식은 단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성을 맺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자행자지 했을 때는 안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살았을 때는 하나님께서 안식을 주심으로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안식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참 안식을 누리기 전에는 그 어디서도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방황하다가 하나님 안에서 참 안식을 누리게 된 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아니고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빈공간이 있다.”
가인이 쉼이 없는 방랑자가 된 것은 그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반발하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이 온갖 문명의 혜택을 누리면서도 갖가지 정신질환에 시달리며 그 마음에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 돌아가 하나님의 품에 안길 때만이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10).
1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불순종하고 반발하면 마음에 안식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에 힘쓰면 마음에 참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12).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말과 달리 생명력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죄인들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갤만큼 예리합니다. 그래서 말씀에 순종하는 자의 마음에 능력으로 역사하여 그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줍니다. 증오심에 불타는 사람을 사랑의 사도로 변화시켜 주고, 의심의 사람을 확신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며, 불순종과 반발심이 강한 사람을 순종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줍니다. 우리의 죄악된 내면에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할 때 타락한 본성이 변화되어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내면의 모든 죄를 파헤쳐 모든 것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게 함으로써 삶을 변화시키고 인격을 변화시킵니다(13). 하나님의 말씀에 겸손히 순종하는 것이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는 비결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광야와 같이 거칠고 황량합니다. 우리는 치열한 생존경쟁 시대에 살면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느라 끊임없이 스트레스가 쌓이고 쉼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쌓이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죄를 짓습니다. 그러면 죄로 인해 더욱 스트레스가 쌓입니다. 죄를 물마시듯이 하는 현대인에게는 참된 영혼의 안식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참 영혼의 안식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을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누구든지 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께 나아갈 때 주님께서 주시는 영혼의 참된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참 안식을 주시는 예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