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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4:14-5:10(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예수님)

by Mark Yang   08/14/2019   Hebrews

Message


1997년 히브리서 제 4 강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예수님
 말씀: 히브리서 4:14-5:10
 요절: 히브리서 4: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는 지난 주일 우리에게 ‘참 안식을 주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안식이란 단순히 쉬는 것이 아닙니다. 참 안식은 우리 영혼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누리는 생명과 평화와 기쁨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과 순종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는 참 안식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므로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와 절대적인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만 누릴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순종하는 사람은 결코 그 마음에 참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이 때까지 우리는 히브리서 1:1-4:13절에서 선지자들과 천사와 모세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서 살펴 보았습니다. 4:14-10:18절까지는 히브리서의 본론에 해당되는 말씀으로서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논하고 있습니다. (4:14-16절은 그 서론에 해당되고, 5:1-7:28절은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자격에 대해서, 8:1-10:18절은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이 나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분이심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연약합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원치않게 범죄하고 죄의식으로 인해 고통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언제든지 나아가 사죄의 은혜를 덧입을 수 있는 ‘은혜의 보좌’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큰 대제사장 예수님 (4:14-16)

14절은 히브리서 전체의 요절이 되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저자는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다고 강조해서 말합니다. ‘있으니’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콘테스’( χοντε )인데 문장의 맨 앞에 나오고 대문자로 되어 있어 강조되어 있습니다. 또 이 단어의 시제는 분사 현재 능동태로서 늘 현재 역동적으로 소유하고 있음을 시사해 줍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큰 대제사장 예수님이 언제, 어디서든지 나를 도와 주시고자 늘 내 곁에 계시니 얼마나 든든한가”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 예수님이 늘 내 곁에 계시다는 것은 우리가 이 험한 세상에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예수님을 큰 대제사장이라고 한 것은 구약의 대제사장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고 우월하신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큰 대제사장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승천하셨다는 것은 “하늘들을 관통하셨다”는 뜻입니다. 오늘날은 우주시대로서 수많은 인공위성을 발사합니다. 지난 번 미국에서는 “Path Finder호"를 발사하여 화성을 탐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시공간을 벗어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들을 관통하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심으로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뛰어 넘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시공간의 한계를 초월하시기 때문에 그의 능력에 제한을 받지 않으시고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는 것은 하늘의 영광을 다 버리시고 성육신 하시고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음을 의미합니다.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신성을 의미하고, ‘예수’는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 가운데 오신 인성을 지니신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요, 완전한 인간이 되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온전한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저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란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신앙고백했습니다(마16:16). 초대교회 성도들은 죽음의 위협 가운데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다”라는 신앙고백을 굳게 지켰습니다. 그들은 물고기를 그림으로 신앙고백을 하였는데 이는 헬라어로 물고기는 ‘익뒤스’( χθ )로서 그 철자 하나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신앙고백은 우리가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을 얻느냐, 못얻느냐 하는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돈 버는 것을 중히 여기고 목숨을 바쳐 투쟁합니다. 또 요사이 정치가들은 대권을 잡는 것을 중히 여기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비열한 행동을 하여 우리로 하여금 분노를 자아내게 합니다. 학자들은 학문을 중히 여기고, 예술가들은 예술을 중히 여깁니다. 사람들은 각자 중히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도 우리의 영혼이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받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세상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얻었다 할지라도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가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영원토록 고통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생각만해도 끔찍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 곧,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다”라는 신앙고백을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굳게 잡는다”는 말은 “힘을 써서 단단히 붙든다”는 뜻입니다. 이는 마치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에게 구조 밧줄을 던져 주었을 때 젖먹던 힘을 다하여 그 밧줄을 단단히 붙드는 것과 같습니다. 밧줄을 굳게 붙잡지 아니할 때 목숨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이,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을 굳게 붙잡지 아니할 때 영적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곰곰히 생각해 볼 때 믿음처럼 귀한 것은 없습니다. 영국 왕립연구소 교수이며 전기분해의 탁월한 이론가인 험프리 데이비 박사(1778-1829)는 믿음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정신력 혹은 지성, 천재성, 권력, 위트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나에게 가장 귀한 것을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믿음을 택할 것이다. 믿음은 인생의 선을 훈련시키며, 희망이 쇠할 때 새로운 희망을 주고, 삶과 죽음을 일깨워주며, 굴욕과 수치를 넘어 천국으로 향하게 하는 사다리가 되게 하고, 영원한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14절은 매우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에 그 뜻을 생각하면서 다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절은 큰 대제사장 예수님이 구체적으로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4절에서 예수님이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우리 연약한 인간이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먼 당신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무나 먼 당신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지 조금도 부담없이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따뜻한 품을 지니신 인자하신 어머니와 같으신 분이 되십니다.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지 아니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은 이중 부정으로서 강한 긍정을 나타냅니다. 이는 우리에게 있는 큰 대제사장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깊이 체휼하시는 분이심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연약함은 복수로서 인간의 온갖 연약한 점들을 말합니다. 우리 인간은 육체적, 정신적, 도덕적으로 연약합니다. 이 연약함은 모든 범죄의 원인이 됩니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연약한 것은 흙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시103:13-15). 젊은이들은 힘이 넘치기 때문에 자신이 연약하다는 사실을 잘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독감에만 걸려도 힘을 잘 쓰지 못합니다. 암이나 에이즈와 같은 불치병에 걸리게 되면 인간의 무력함을 뼈져리게 느끼게 됩니다. 제가 아는 노교수는 젊을 때는 하루에 4시간을 자면서 공부하고 여러 가지 많은 활동을 하며 명성을 날렸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방광염에 걸려 방광을 제거하게 되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 노교수를 보면서 인간의 연약함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우리 인간은 육체의 연약함 뿐만 아니라 정신적 연약함, 의지의 연약함, 도덕적 연약함으로 인해 고통합니다. 우리는 의롭고 진실되고 선하게 살고자 결심하지만 작심삼일, 얼마 못가서 그 결심이 무너지고 원치않게 죄를 짓고 추하고 더러운 인생을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절망합니다. 또 상대방이 잘 될 때 시기하지 않고 축복해 주고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고 싶지만 원치않게 시기하고 미워하는 자신을 보고 절망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 자신을 통해서 우리 인간에게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선의지는 있지만 죄로 말미암아 선을 행할 능력이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죄의 세력에 패배하는 자신을 바라보고 절규하였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19-24).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고, 또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고 절망하며 자학하게 됩니다. 육체가 연약하면 쉽게 지치고 피곤하고 또 면역이 약하여 질병에 잘 걸리게 되는 것과 같이, 정신이 약하면 별 것 아닌 일에도 쉽게 상처를 입고 두려움에 시달리며 유혹에 잘 빠집니다. 오늘날 청소년들은 가능성은 많으나 연약함 때문에 그 가능성이 피어나지 못하고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고생 없이 과보호 속에서 자라난 자들은 어려움을 잘 견디지 못하고, 조금만 책망을 듣거나 작은 실패를 해도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고 자살을 시도합니다. 이는 결국 연약함에서 생기는 문제인 것입니다.
세상은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곳이기 때문에 연약한 자는 살아가기 힘듭니다. 연약한 자는 무시받고 이용 당하고 도태됩니다. 연약한 자는 자본주의 시대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에 정죄받고 짤리게 됩니다. 세상은 연약함을 결코 봐 주거나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지만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에게서 멀리 떠나 하늘에서 고독하게 있는 그런 대제사장이 아니라 우리 연약함을 깊이 체휼하시는 대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체휼이란 단순히 이해하고 동정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체휼하다는 단어는 ‘쉼파데오’(συμπαθ?ω)인데 이는 함께라는 뜻인 ‘쉰’(συν)과 ‘고난당하다, 고통을 체험하다’는 뜻인 ‘파스코’(πασχω)의 합성어로서 ‘함께 고통을 체험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체휼하는 것은 연약함을 깊이 이해하고 동정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함께 고난을 당함으로 이를 담당해 주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사랑이 풍성하신 어머니와 같습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이 허물과 실수가 많다 할지라도 결코 정죄하거나 잘라버리지 않습니다. 대신에 자식을 깊이 이해하고 동정할 뿐만 아니라 함께 고통하고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불사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이 어머니의 마음과 같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해 주고 동정해 주는 것만도 고마운데 함께 고통하며 이를 담당해 준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실 수 있는 것은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이란 ‘삶의 모든 영역’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지니고 태어나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겪는 모든 괴로움을 느끼셨으며, 모든 장애를 아셨으며, 우리들이 당하는 모든 유혹과 공포의 두려움을 당하시고 불안에 둘러싸이셨으며, 모든 걱정에 눌림을 당하셨습니다. 과부의 사정은 과부만이 알 수 있듯이 그와 똑같은 형편에 처해 보지 않고는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깊은 운명주의에 빠져 고통하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운명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운명주의를 이해하시고 이를 담당해 주시기 위해 태어나실 때부터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시고 사람이 거할 수 없는 비천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심으로 운명의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무시하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성장하시고 가난한 목수생활을 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시험 받으실 때도 우리 인간이 겪는 물질에 관한 시험, 권세와 명예에 관한 시험, 영적 교만에 관한 시험 등 모든 면에서 혹독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제자의 배반, 겟세마네의 고뇌, 십자가의 고난 등 예수님의 삶은 고난에서 시작해서 고난으로 끝나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고난의 종이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고난의 종 예수님에 대해 아름다운 시로 묘사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사53:2,3)
예수님은 이렇게 삶의 전 영역에서 격렬한 시험을 받으셨지만 이 모든 것들을 실패함이 없이 죄를 짓지 아니하시고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한번도 넘어지지 아니하시고 모든 시험을 이기심으로 진정한 의미에서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우리 인간과 다른 것은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아담의 죄악된 본성을 타고 났기 때문에 우리 내부에 죄의 욕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시험 받는 것은 외부의 시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내적인 죄의 소욕에 이끌려 시험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내적인 죄의 욕망으로 인해 시험 받으신 것이 아니라 모두 외부에서 온 시험이었습니다.
우리 연약함을 정죄하지 아니하시고 깊이 체휼하시는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으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4:1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이 말씀에서 중요한 단어는 ‘은혜의 보좌’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는 거룩하시고 영광스럽기 때문에 죄많은 인간이 감히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사야서 6장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가 얼마나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가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주님을 모셔 선 스랍들은 각기 여섯 날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둘로는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감히 쳐다 볼 수가 없어서 얼굴을 가리우고, 그 둘로는 발을 가리우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 모습을 본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하며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엄위하시고 거룩한 영광으로 충만하시기 때문에 죄많은 인간이 감히 가까이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구약에서는 대제사장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일년에 한번만 지극히 거룩한 곳인 지성소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반드시 죄를 속하는 속죄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보좌는 영광의 보좌요, 심판의 보좌입니다(마19:28, 25:31).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보좌는 은혜의 보좌입니다. 은혜의 보좌란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와 긍휼이 차고 넘치는 은혜의 근원이라는 뜻입니다. 또 은혜의 보좌란 사랑과 자비와 긍휼이 풍성할 뿐만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하여 능히 도와 주실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소유하신 분이심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우주 안에 있는 어떤 장소처럼 공간의 개념으로 잘못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늘나라는 하늘에 올라가고, 지옥은 땅 밑으로 내려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실재의 차원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보좌는 멀리 떨어진 장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 안에 거하실 때 바로 그의 마음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기도실에 들어가서 먼 하늘나라에 있는 어떤 장소를 향하여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믿는 자 안에 거하시는 그 분을 의지하고 그 분에게 나의 필요한 모든 것을 아뢰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보좌가 바로 내 가까이에, 바로 내 안에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담대히 나아간다는 것은 두려움 없이(fearlessly), 확신을 가지고(confidently), 용감하게(boldly), 자유롭게(freely)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도움이 필요할 때는 언제, 어디서든지 주님께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에스더는 황후였지만 황제에게 함부로 나아갈 수가 없어서 민족이 멸망해 가는 것을 구하기 위해 삼일을 금식하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하고 왕에게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는 것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가 필요없이 언제, 어디서든지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두려움 없이 확신을 가지고 자유롭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큰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피흘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혜의 보좌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예수님의 피 공로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납하실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예수님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들고 괴롭고 답답할 때 잠자리의 보좌나 컴퓨터 보좌로 나아갈 것이 아닙니다. 또 술집이나 비디오 방 보좌로 나아갈 것이 아닙니다. 이런 데로 나아가면 인생을 망치게 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때를 따라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때 주님은 우리가 어떤 몹쓸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결코 우리를 책망하지 아니하시고 있는 그대로 다 받아 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아무 값없이 사죄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II. 고난으로 온전케 되신 예수님 (5:1-10)

5:1-10절은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는 자격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먼저 이스라엘의 제사장이 되는 데 구비해야 할 요건과 자격과 규정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은 첫째로, 사람을 대표하기 위하여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1a). 선지자는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지만, 제사장은 인간 편에 서서 인간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그 본체가 하나님이시지만 스스로 낮추사 육의 몸을 입으시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둘째로, 제사장은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1b).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죄의 심연이 가로놓여 있어 이 죄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인간이 결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 죄악의 문제는 인류의 보편적인 문제로서 죄책감을 느끼지 아니한다거나 죄책감으로 인해 고통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죄책감은 그림자와 같이 늘 우리를 따라 다니며 괴롭힙니다. 그런데 이 죄책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명을 제물로 바쳐야 했습니다. 생명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는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피에 있고 피가 모든 것을 속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제사장이 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친히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제사장의 세 번째 자격은 그가 무지하고 또 무지로 인해 그릇된 길로 가는 자들을 능히 이해하고 용납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연약함에 싸여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2). 예수님께서 죄를 짓지 아니하시면서 어떻게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해답은 7,8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제사장의 네 번째 자격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4). 제사장이 되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제사장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론도 보통사람에 불과했지만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제사장으로 세우셨을 때 비로소 영광스러운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사장이 되신 것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5,6). 그러나 예수님의 제사장직은 아론의 반차를 따른 것이 아니라 멜기세덱이라고 일컫는 새로운 반차를 좇은 것입니다.
7-10절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대제사장이 되셨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대제사장되신 예수님이 고난의 과정을 거쳐서 인류 구속역사를 이루셨음을 인성적인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날 밤 제자들과 최후의 성만찬을 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극심한 고민을 하시다가 부지불식간에 심한 통곡을 하시고 눈물을 흘리시면서 간구와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예수님은 너무 괴로운 나머지 어린 제자들에게 기도부탁을 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그리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8,39) 이러한 모습은 과거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죽음의 공포에 싸여 두려워하는 인간의 절실한 운명에 참예하심으로 그 고뇌의 심연을 체휼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쳐 복종시키는 처절한 기도의 싸움을 싸우신 것은 인간의 내면에 역사하는 죄가 얼마나 끈질지고 지독한가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깊은 좌절과 당황하심, 그리고 마음의 불안과 영혼의 고뇌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불신하고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조금도 반발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을 깊이 경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경외하심을 인하여 간구와 소원은 들으심을 얻고 십자가를 능히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8,9절을 보십시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8절에서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은 겟세마네 기도 후에 체포당하시고 심문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관 면류관을 쓰시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못박혀 고통하시다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절규하시며 돌아가신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성을 입으셨기 때문에 우리와 똑같이 할 수 있는데로 고난의 십자가를 지지 않고 도피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자기를 쳐 복종시키시고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이론적으로 머리로 순종하신 것이 아니라 받으신 고난으로 체험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심으로 온전하게 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배울 때 온전케 된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고난 없이 온전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순종은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체험적으로 배워야 함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는데 우리는 더욱 고난을 통해 순종함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의 길, 생명의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큰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 연약함을 깊이 이해하시고 동정하시고 담당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예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