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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7:1-28(영원하고 온전한 대제사장)

by Mark Yang   08/14/2019   Hebrews

Message


1997년 히브리서 제 6 강

영원하고 온전한 대제사장
 말씀: 히브리서 7:1-28
 요절: 히브리서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오늘 말씀은 히브리서 본론 중에서 핵심이 되는 말씀으로서 예수님이 영원하고 온전한 대제사장이 되심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멜기세덱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에 관한 기사는 창세기 14장과 시편 110:4절과 본문의 히브리서 7장 뿐입니다. 저자는 5:6절에서 시편 110:4절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이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 되심을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시편 110:4절의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성취되었음을 증거했습니다(5:7-9). 이로써 예수님은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5:10). 그 후 저자는 멜기세덱에 관하여 설명하려고 할 때 독자들이 그동안 영적 투쟁을 게을리 함으로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여 영적 어린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5:11-6:20절까지 그들이 영적으로 성장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권면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 7장에서 본격적으로 멜기세덱에 관하여 설명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멜기세덱에 관하여 언급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하고 온전한 대제사장이 되심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예수님이 어떤 점에서 영원하고 온전한 대제사장이 되시며, 또 이 예수님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영적 의미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I. 레위보다 높으신 예수님 (1-10)

첫째, 의의 왕, 평강의 왕 (1-3). 구약시대에는 왕과 제사장이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멜기세덱은 왕겸 제사장이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멜기세덱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창세기 14장입니다. 아브라함이 전쟁 포로로 사로잡힌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318인을 거느리고 백발을 휘날리며 전쟁에 참여하여 조카 롯과 빼앗겼던 모든 것을 찾아왔습니다. 그때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였습니다.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의 제사장직분을 인정하고 동시에 전쟁에서 큰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시로 드린 것입니다. 멜기세덱이 누구냐에 대해서는 신적 사람이다, 천사다,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다 등 끊임없는 추측이 나돌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바는 그가 살렘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것 밖에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가는 곳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 멈추어야 합니다. 살렘은 예루살렘의 옛 명칭으로서(시76:2) 평강이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살던 세계는 우상숭배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당시 우상의 종류가 3천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우상문화는 반드시 쾌락문화를 낳게 마련입니다. 소돔이 호모섹스로 유명하고, 소돔 고모라가 우상숭배와 도덕적 부패로 멸망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절망적인 시대 가운데서도 자기 이름을 위하여 거룩한 그루터기인 남은 자를 남겨 두시는 것 같이, 어두운 시대에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모형적인 인물인 멜기세덱을 남겨 두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멜기세덱이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모형적인 인물이라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그리스도와 닮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점에서 그리스도를 닮았습니까? 첫째로, 그는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 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멜기세덱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왕’이라는 뜻인 ‘멜레크’( )와 ‘의’라는 뜻인 ‘쩨다카’( )의 합성어로서 의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살렘은 히브리어로 평강이라는 뜻인 ‘살룜’( )에서 유래했습니다. 멜기세덱은 의로운 왕이요, 평강의 왕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예표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 되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 왕국의 특징을 공평과 정의, 평강으로 묘사했습니다(사 9:6,7). 여기서 유의할 것은 의(義)가 먼저 나오고 또 의와 평강은 함께 따라 다닌다는 것입니다. 요사이 우리나라에 불안이 팽배한 이유는 의(義)가 서지 못하고 부정과 부패, 불의가 난무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평강은 먼저 의(義)가 서야 하고, 의(義)가 서면 평강이 따르기 마련인 것입니다. 시편 85:10절은 말합니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또 이사야 32:17절은 말합니다. “의의 공효(열매)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사32:17). 예수님이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라고 한 것은 예수님이 의와 평강을 만들어 내고 이를 공급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요일2:1). 그 분은 이 땅에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 오셨습니다(마3:17). 예수님은 율법 아래 나시고 철두철미하게 율법에 순종하시고 십자가에서 율법이 요구하는 값을 다 치루심으로 의를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하나님으로 더불어 참된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1절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사람들은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면서 장래가 불투명하기 때문에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참된 안식과 평화를 얻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경주합니다. 그러나 비상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참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불화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어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 깊은 곳에 잔잔한 평화가 임하게 됩니다. 이는 깊은 바다속에 면면히 흐르는 저류와 같습니다. 이 평화는 어느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마음에 깊이 묻힌 보배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에 근심과 두려움으로 가득찬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예수님께서 평강의 왕이 되신 것은 자기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화평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골1:20).
멜기세덱이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모형적인 인물이 되는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이 말은 멜기세덱이 초인적인 인물이거나 신적이고 천사적인 존재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히브리서 5:1절을 볼 때 제사장이 되기 위해서는 인성을 취하는 것이 선결조건이었습니다. 7:4절에서 이 사람이라고 한 것을 보면 멜기세덱은 역사적인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역사상에 갑자기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졌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아론의 제사장과 관련하여 제사장의 족보는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혈통을 잘 유지하기 위해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멜기세덱은 그들과는 대조적으로 육신적인 혈통과는 전혀 관계없는 반열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레위 지파에 속하지 아니한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이었습니다. 레위 계통의 제사장은 반드시 족보가 있고, 그 족보에 부모가 누구인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멜기세덱에 관해서는 족보도 없고 그 부모에 관해서 성경 어느 곳에서도 한마디 언급도 없습니다.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다”는 말도 같은 원리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레위인들은 25세때부터 50세까지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했습니다(민8:24,25). 말하자면 50세가 되면 제사장의 생명이 끝났습니다. 그러나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에는 그러한 제한이 전혀 주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제사장으로 있습니다. 이는 멜기세덱의 육신적 생명이 끝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제사장직의 생명이 오십세에서 끝나지 않고 그가 세상에 존재하는 한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는 말입니다. 그에게는 선임자나 그의 대를 이를 후임자도 없었습니다. 이는 그가 한정된 시기에 제사장 직무를 끝마치고 그 직무를 다른 사람들에게 이양하는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과는 달리 영구적 제사장직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과 닮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멜기세덱을 닮았다는 것이 아니라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아들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보다 먼저 존재하셨음을 말해 줍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아들의 제사장직은 근원적인 것이고,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은 그 복사품에 불과했습니다. 멜기세덱은 하나의 모형으로서 하나님의 아들과 닮았던 것입니다.

둘째, 아브라함보다 높은 멜기세덱 (4-10). 4-10절에서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높다는 것을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노략물 중에서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바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매우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육적으로 하면 그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었고, 영적으로는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됩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자랑하고 그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였습니다(요8:33). 그들은 아브라함을 하나님 다음으로 존경했습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으니 멜기세덱은 아브라함보다 더 위대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은 그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에 이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종인 멜기세덱을 존귀히 여기고 십일조를 바친 것입니다. 이는 그가 신앙의 사람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십일조를 바친다는 것은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열 두 지파 가운데 레위 지파는 특별히 하나님을 섬기도록 구별된 자들로서 따로 기업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만 전무하기 위하여 다른 열한 지파로부터 십일조를 취하여 먹고 살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다른 열한 지파는 십일조를 드리도록 명령을 받았지만 레위지파는 십일조를 취하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 명령은 둘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둘째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기 때문에 아브라함보다 위대합니다.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빎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8절에서 죽을 자들이란 레위인들을 가리키고,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는 멜기세덱을 가리킵니다. 레위인들이나 멜기세덱이 똑같이 십일조를 받았다 할지라도 제사장 직무를 감당하다고 죽을 레위인들이 십일조를 받은 것보다, 항상 제사장으로 있는 멜기세덱이 십일조를 받은 것이 더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을 때 레위는 아브라함의 허리 안에 있었으므로 레위는 뱃속에서 함께 십일조를 바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대표원리입니다. 창세기에 나타나는 아브라함은 하나의 개인으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그 후에 올 모든 자손들의 대표로 취급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릴 때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의 이름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더 높고, 이는 당연히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모형인 멜기세덱이 레위보다 뛰어나다면 원형인 그리스도는 레위보다 더욱 뛰어난 것입니다. 결국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예수님이 레위보다 뛰어나고 높으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의 제사장직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보다 본질적으로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II.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으신 예수님 (11-28)

멜기세덱에 관한 기사는 창세기 14장 외에 시편 110:4절에 나옵니다. 시편 110:4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여기서 ‘반차’는 ‘차례’, ‘순서’(order)를 말합니다. 이 말씀은 메시야에 관한 예언의 말씀으로서 예수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 되셨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예수님을 아론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으로 세우지 아니하시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까? 이는 레위 계통의 제사직분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11). 제사제도가 불완전하다면 제사제도의 근간이 되는 율법도 불완전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제사 직분이 변화되였기 때문에 율법도 반드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을 하나님께서 주신 절대적인 계명으로 생각한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적인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모든 제도는 장차 올 참된 것을 위하여 임시적으로 마련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참된 것이 오면 당연히 폐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양심의 법으로서 임시적으로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폐하여 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사제도에 관한 의식법이나 그 당시 사회생활에 관계되는 시민법은 폐지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모세는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레위 지파의 사람들만이 제사장이 되도록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레위지파 출신이 아니라 이때까지 한 번도 제단 일을 섬긴 적이 없는, 다시 말하면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한 적이 없는 유다지파 사람이었습니다(13,14). 성경은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으로서 이새의 줄기에서 태어날 것을 예언했습니다(사11:1). 그런데 다윗은 레위지파가 아니라 유다지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레위지파가 아닌 다른 지파에서 제사장으로 세우실 때는 율법을 좇아 세운 모든 제사직분이 폐하여졌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제사장이 되신 것을 보면 제사제도에 관한 모세의 모든 율법체계가 폐하여졌다는 것은 더욱 분명한 일입니다(15).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16-19). 16절을 보십시오.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이란 모세의 모든 율법체계를 말합니다. 이 계명이 폐하여 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8절을 보면 전엣 계명이 연약하여 무익하므로 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율법의 한계를 말합니다.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하지 못합니다(19a). 율법은 죄를 인식하고 죄인임을 깨닫게 해 주지만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 주지는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함으로써 구원의 필요성을 인식시키지만 죄로부터 구원할 능력은 없다는 것입니다. 죄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연히 죽음 문제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친히 속죄제물이 되시고, 또 죽은 자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인간을 괴롭히는 죄와 죽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는 영원한 부활의 능력을 좇아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과거 율법을 통해 주신 소망보다 훨씬 더 좋은 소망입니다. 우리는 이제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19b). 죄악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죄 씻음 받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것처럼 축복되고 영광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맹세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20-22). 율법에서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을 세우실 때는 맹세 없이 되었습니다. 맹세 없이 된 것은 그 직분이 일시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편 110:4절에서 메시야를 대제사장으로 세우실 때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맹세하셨습니다. 이는 그의 제사직분이 영원히 불변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습니다.

셋째로, 죽음을 이기심으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23-25). 구약의 제사직분은 이 직분을 감당하는 제사장들이 죽기 때문에 가변적이고 영속성이 없었습니다.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에 의하면 아론부터 A.D.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멸망하기까지 무려 83명의 대제사장이 갈렸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제사장이라도 죽음으로써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 권세를 파하시고 영원히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 제사직분도 갈리지 아니합니다(24). 2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예수님은 항상 살아 계신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기도를 하시며 중보역할을 감당하시기 때문에 그 효과는 완전합니다. 예수님의 제사직분은 갈리지 아니하고 영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기에 완전하고도 충분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능력을 소유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은 죄의 오염과 죄책감, 율법의 저주, 사망권세, 영원한 심판 등에서 능히 구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구원은 오직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은 우리를 영원히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예수님은 거룩하고 흠이 없으시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되시기에 합당하십니다 (26-28). 구약의 대제사장은 제사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거룩하게 구별되었습니다. 그러나 거룩하게 구별되었다고 해서 인격과 사역에 있어서 아무 흠과 죄가 없는 완전히 거룩한 자가 되었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죄에 싸여 있기 때문에 제사 지낼 때마다 먼저 자기를 위하여 제사를 지내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본래 아무 죄가 없으신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거룩하게 구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격과 사역면에서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지만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이상에서 볼 때 예수님은 영원하고 온전한 대제사장이 되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영원하고 온전한 대제사장이 되신다는 사실이 왜 그렇게 중요하며, 이 사실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 인간은 짐승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큰 특권을 부여 받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범죄한 후에는 하나님과 관계성이 단절되어 버렸습니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과 인간은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건너 뛸 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 심연을 ‘눈얼음 계곡’, ‘극(極) 지역’, ‘황폐 지대(地帶)’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연결시켜 주는 중보자가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그 중보자는 하나님과 인간 양편을 다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영원하고 온전한 중보자라야 합니다. 역사이래로 인간은 끊임없이 중보자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고자 갈망해 왔습니다. 이는 인간이 낙원을 상실한 이후 중보자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함으로써 낙원을 회복하고자 하는 갈망입니다. 이것이 우상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무당이 중보자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병이 나거나 사업이 잘 안되면 무당에게 가서 카운슬링을 받고 무당이 요구하는 대로 돈을 주고 굿을 했습니다. 무당은 백성들의 중보자요, 목자였습니다. 무당이나 점쟁이는 옛날에만 있었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는 고도로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인구의 70%가 점을 본다고 합니다. 어제(1997. 11. 1) 국민일보에 요사이 사상 최악의 취업난 속에서 점집을 찾는 대학생들이 늘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로 인해 대학가 점집은 때 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합니다. 방송국 공채 필기시험을 통과한 S대 신문방송학과 4학년 이모군은 2차 면접시험에 붙을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 학교 앞에 있는 ‘작두도령’집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세운 중보자는 근본적으로 거짓되어서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지 못하고 파멸의 길로 인도합니다. 인간이 세운 중보자는 죄가 많고 결국 죽기 때문에 불완전하고 영원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참된 중보자가 없어서 유리방황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하나님의 아들을 참된 중보자로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인간들의 모든 연약함과 허물을 다 담당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우리 죄를 담당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 인간을 괴롭히는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해 주심으로 영원하고 온전한 참된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점쟁이에게 나아갈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괴롭고 답답하고 힘들 때마다 영원하고 온전한 대제사장이 되시는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갈 때 참 생명을 부여 받을 수 있고, 죄 용서함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참 자유와 참 안식과 참 소망과 참 위로를 덧입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는 누구든지 크신 사랑으로 용납하시고 품어 주시고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시고 새 생명을 덧입혀 주십니다. 우리가 날마다 영원하고 온전한 중보자 되신 예수님께 나아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덧입고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백성이 절망의 때에 점쟁이를 찾아가지 아니하고 영원하고 온전한 대제사장이 되시는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