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히브리서 제 8 강
한 영원한 제사
말씀: 히브리서 9:23-10:18
요절: 히브리서 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우리는 지난 주일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죄로 인해 죽은 양심을 회복시키고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누리게 하고, 조상의 망령된 행실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줍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은혜를 깨닫게 함으로써 감사와 감격이 넘치게 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하게 합니다. 확실히 그리스도의 피는 은혜의 원천이요, 생명의 원천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피로 하나님께 단 한번에 드린 제사가 어떤 효력을 지니고 있으며, 또 어떤 자세로 제사를 드리셨는가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제사가 미치는 효력과 또 이로 인해 우리가 누리게 된 영적 축복에 살펴 보고자 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인류구속 역사를 섬기신 자세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배우고자 합니다.
I. 단 한번의 제사 (9:23-28)
8장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새 언약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9:1-22절에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새 언약을 인치심으로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셨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9:23-28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대속(代贖)의 사건이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고 더 나아가 심판을 초월한 놀라운 사건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이 어떤 점에서 시간과 장소와 심판을 초월하였습니까?
첫째, 그리스도의 제사는 장소를 초월합니다(23,24). 23절은 땅의 성소에서는 짐승의 피로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 성소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제물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4절을 보면 그리스도 자신이 친히 제물이 되셔서 모형과 그림자인 땅의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원형인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는 장소를 초월하여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인간이 손으로 만든 땅에 있는 성소는 특별한 장소에 국한되어 공간의 제약을 받았습니다. 출애굽기 25-27장에는 성막에 관한 기사가 나옵니다. 성막의 크기는 가로 50m(100규빗, 출27:9), 세로 25m(50규빗, 출27:12)에 해당되고, 성막 안에 있는 성소의 크기는 가로 10m(20규빗), 세로 5m(10규빗)이었으며, 지성소는 가로, 세로가 각각 5m였습니다. 이렇게 땅의 성소는 특별한 장소에 국한되어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모형에 불과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성막은 일정한 장소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장소를 이동할 수 있도록 이동식 텐트와 같이 설계되었다는 것입니다. 언약궤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메고 갈 수 있도록 고리가 달려 있었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민수기 9:17-22절은 이를 잘 말해 줍니다.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진행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였고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을 쳤으며 …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유진하고 진행치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진행하였더라.” 하나님은 그들의 인도자였고,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거룩한 순례길을 행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역동적으로 움직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한 장소에 가두어 둘 수 없었습니다. 후에 성막이 가나안 땅에 와서 성전이 되어 한 장소에 고착되었을 때 부패하기 시작했고, 부패한 성전은 마침내 A.D. 70년에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하늘 성소에 들어가심으로 눈에 보이는 성전은 사라지고 예수님이 친히 성전이 되셨습니다(요2:19,21). 구약의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공간이 필요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로 하늘 성소에 들어가심으로 공간은 필요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늘 성소라고 하면 하늘의 한 장소를 생각하기 쉽지만 이는 장소를 초월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어디서 예배할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된다고 주장하였고, 사마리아인들은 모세가 축복을 선포한 그리심산에서 예배해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그리심산에서도 말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하며,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요4:20-24). 이것은 성전되신 예수님을 통해서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함을 말해 줍니다. 다시 말하면 예배하는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예배하는 자의 자세가 문제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제사는 시간을 초월합니다(25,26). 25,26절을 보십시오. 땅에 있는 대제사장들이 해마다 짐승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예수님은 반복해서 자기를 드리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은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으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리심으로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습니다. 세상 끝에 나타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사건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없게 하시려고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리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때까지 ‘단번에’라는 단어를 여러 번 사용했습니다(7:27, 9:12,26,28 10:2,10) ‘단번에’(once for all)라는 말은 헬라어로 ‘하파크스’( παξ, once 한번) 또는 ‘엡하파크스’(?φ?παξ, once for all 단 한번)인데 이는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이 역사적으로 단 한번의 유일한 사건인데 과거, 현재, 미래를 다 포함하는 영원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은 역사상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유일하고 단 일회적인 사건이지만 과거, 현재, 미래에 다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원히 유효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은 역사상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이지만 1,2차 세계대전과 같이 단순히 과거에 일어났던 역사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이는 그 제사의 효력과 결과와 축복이 십자가의 사건을 중심으로 과거에 속한 시간이든지, 미래에 속한 시간이든지, 현재의 시간이든지 언제든지 유효한 영원히 현재적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유명한 스위스 신학자인 오스카 쿨만은 그의 명저 「그리스도와 시간」이라는 책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은 역사 특히, 구속사의 중심점이라고 하였습니다.〔오스카 쿨만, 「그리스도와 시간」김수근 옮김 (서울:도서출판 나단, 1995), pp. 173-174.〕그래서 인류역사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B.C(Before Christ)와 A.D(anno Domini: in the year of the Lord)가 나뉘어졌습니다. 그는 과거 구약의 모든 사건들과 또 미래의 종말론적인 사건과 현재의 모든 사건들이 역사의 중심점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과 관련될 때에만 그것이 가지는 구속사적 의미가 올바르게 인식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Ibid., p. 191.)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구약을 바라볼 때만이 구약의 모든 사건들이 의미가 있으며, 미래의 종말도 희망이 있게 되고, 현재의 사건도 가치가 부여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구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향하여 모든 것을 준비하여 왔으며, 신약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완성된 구속사건을 선포함으로써 생명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헬라사상은 순환적 시간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원이 시간의 상징이었습니다. (Ibid., p. 83.) 모든 것이 원과 같이 영원히 순환한다는 사고의 세계에서는 시간이라는 개념은 무의미해집니다. 이런 세계는 결국 무(無)가 지배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허무해지게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시간관은 직선입니다. 여기에는 시작과 끝이 있고 모든 것이 종말을 향해 움직입니다. 영원도 칼바르트가 말한대로 시간을 동반한 영원이 됩니다. 이 영원의 개념은 시공간의 제한을 받고 있는 인간으로서는 인식이 불가능하고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나님만이 인식할 수 있습니다.
요약해서 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은 우리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까지도 다 소멸한 사건으로서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현재적으로 유효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배피를 흘리고 죽으심으로 우리가 치루어야 할 모든 죄값을 다 치루셨고, 또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영원히 살아계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제사는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현재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예수님이 약 2천년전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사건이 어떻게 오늘날 현대를 사는 나에게까지 효력을 미칠 수 있으며, 또한 지리적으로도 유대 골고다 언덕에서 죽은 사건이 어떻게 전 세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효력을 미칠 수 있겠는가 하는 회의가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회의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代贖)의 사건이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역사의 중심점이 되는 우주적인 사건임을 깨닫게 될 때 깨끗이 사라지게 됩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제사는 심판을 초월합니다(27,28). 27절과 28절은 대표원리를 이해할 때만이 이해될 수 있습니다. 대표원리는 로마서 5:12-19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담 한 사람이 죄를 범하였는데 어떻게 아담과 꼭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되었으며, 또 죄로 인해서 사망에 이르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담은 인류의 대표로서 아담이 범죄할 때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그 허리 안에 있는 모든 인류가 함께 범죄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조상이 노예이면 그 후손은 자동적으로 노예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표원리입니다. 이와 꼭 같은 방법으로 예수님 한 분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고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방법은 꼭 같지만 그 결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27절을 보십시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본래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설하신 아름다운 에덴동산에서 위로는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아래로는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사명을 감당하면서 무한한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사단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게 되자 순식간에 불행의 먹구름이 덮치게 되었습니다. 축복이 저주가 되고, 생명이 사망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범죄했을 때 무서운 사망선고가 내려지게 되었습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 범죄한 결과 인간에게 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면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석가모니나 공자와 같은 성인군자도, 알렉산더나 나폴레옹과 같은 영웅도, 클레오파트라나 양귀비와 같은 절세의 미인도 일반 사람과 꼭 같이 이 죽음의 운명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인간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죽음의 운명에 처해 있다는 점에서는 동등합니다.
사람들은 어차피 죽을 인생, 즐기다가 죽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내일 죽을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며 쾌락을 즐기고자 합니다. 이는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이것은 둘째 사망으로서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영원토록 고통하는 것입니다(계21:8). 예수님은 마가복음 9:48,49절에서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가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그곳은 다시는 회개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영원토록 고통해야 하는, 전혀 희망이 없는 절망적인 곳입니다.
우리 인간이 이런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 한 사람의 범죄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표원리입니다. 이와 꼭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사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28a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 피로 단번에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궁극적으로 심판을 면제시켜 주셨습니다. 과거 우리는 죽음 앞에서 아무리 담대하고 태연한 척 해도 소름끼치는 죽음의 공포를 떨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이는 죽음 후에 받게 될 무시무시한 심판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망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심판을 면제시켜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5:24절은 말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심판을 면제 받고 사망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옮겨지게 됩니다. 28b절에서 예수님은 영혼의 구원 뿐만 아니라 몸까지도 영화롭게 되는 온전한 구원을 위해서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게 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대속(代贖)의 사건이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고 더 나아가 심판을 초월한 놀라운 사건이었음을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힘입어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어디서든지, 또 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언제든지,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가 사랑하는 어머니의 품에 나아가듯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나아가 죄사함의 은혜를 덧입고, 위로와 힘을 덧입고, 참 자유와 평화와 안식을 덧입고 무한한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II. 단 한번의 제사로 인해 누리게 된 영적 축복 (10:1-18)
10:1-18절은 그리스도께서 제사를 드리실 때 어떤 자세로 드리셨으며, 또 이로 인해 누리게 된 영적 축복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오신 예수님 (1-10). 1-4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제사로 드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그림자이지 실체가 아님으로 해마다 드리는 짐승의 제물로는 예배자들을 온전케 할 수 없었습니다(1,2). 왜냐하면 드리는 제물도 불완전했고, 중보자도 불완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불완전한 제사 때문에 온전히 죄사함을 받지 못하여 늘 죄책감으로 고통하고 심판의 두려움에 시달려야 했습니다(3). 이는 짐승의 피가 능히 죄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4). 이것이 구약의 제사의 한계였습니다. 죄 문제는 인류 최대의 문제로서 반드시 해결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죽음 문제와 심판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제사제도로는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의 어떤 노력과 종교적인 행위로도 죄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류 최대의 문제인 죄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습니까? 5,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실 때에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두신 뜻이 무엇인가를 잘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구약에서 드리는 모든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짐승의 피를 원치 않으셨고 그 피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죄를 위해 짐승의 피를 드리도록 하신 데에는 죄의 심각성과 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완전한 한 인간의 몸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는 즐길만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죄 짓는 것을 차 마시는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는 아무리 작은 죄라도 결코 가볍게 생각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지은 결과는 죽음이고 그 후에는 영원한 심판에 처하게 됩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는 이 죄를 속하기 위해서는 피가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기 때문입니다(레17:11). 그러나 짐승의 피로는 인간의 죄를 온전히 속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한 몸을 예비하셨습니다. 그 몸은 아무 죄가 없이 순결하고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는 완전한 인간이었습니다. 죄가 없는 완전한 인간만이 인간의 죄를 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두신 뜻이 무엇인지 잘 아셨습니다. 그것은 육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어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세상 죄를 위해 저주스러운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죽기를 원치 않습니다. 어차피 죽어야 한다면 곱게 죽기를 원하지 비참하게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에 못박혀 비참하게 죽는 것이었습니다. 만민의 비방의 표적이 되어 저주스럽게 죽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 때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갖기 쉬울까요? 왜 하필 내가 이런 십자가를 져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슨 유감이 있어서 왜 나에게 이렇게 하시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하나님께 불만을 품고 대들기 쉽습니다. 또한 꼭 나만 이런 십자가를 져야 하는가, 다른 사람도 함께 져야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베드로도 한 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나님의 양무리를 먹이는 영광스러운 사명을 주시고 영광스러운 죽음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자기만 그렇게 하는 것이 억울했는지 요한을 가리키면서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심으로 부르심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성질의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요21:21,22).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자 할 때 꼭 이런 방법으로 져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또 어쩔 수 없이 십자가를 져야 할 때는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슬픈 마음을 품고 억지로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원하시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임을 잘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를 회피하기는커녕 오히려 적극적이고도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성경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대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의 길이 견디기 힘들만큼 저주스럽고 고통스러운 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자발적으로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수님을 심히 기뻐하시고 인류구속역사를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히 쓰신 사람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을 본받아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기쁨으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한번은 그가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그를 시기하는 유대인들이 몰려 와서 무리를 충동하여 돌로 바울을 치도록 하였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까무러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죽은 줄로 생각하고 성밖으로 내쳤습니다. 제자들은 슬피 울며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이때 바울은 찬송소리를 듣고 깨어나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 자기를 돌로 쳐 죽인 그 성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굳게 하며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권면했습니다(행14:19-22). 그가 예수님을 본받아 적극적으로 십자가를 지고자 했을 때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불사조와 같은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십자가의 비밀을 깨닫지 못했을 때는 예수님께서 심문 받으실 때 두려워서 계집종 앞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십자가의 비밀을 깨달았을 때 적극적으로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그리고 고난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2,13) 바울이나 베드로 뿐만 아니라 역사상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여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했습니다. 어느 독실한 크리스천 대대장의 좌우명은 이러합니다. “누가 해도 할 일이면 내가 하자. 언제라도 할 일이면 지금하자. 어차피 할 일이면 잘 하자.” 저는 오늘 말씀을 공부하면서 심히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내가 성냥개비만한 조그만한 십자가를 지면서 인상을 쓰고 한숨을 쉴 때가 얼마나 많았는가 십자가를 감당하는 저의 자세가 되먹지 못한 것을 깨닫고 애통히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신 십자가를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기쁨으로 감당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영적 소원에 불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십자가가 한결 가볍게 느껴지고 심령에 기쁨이 용솟음쳤습니다. 십자가는 회피하고자 하면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지지만,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지고자 하면 가벼운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8-10절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은 율법을 따라 드리는 제사제도를 폐하시고, 예수님을 통하여 완전한 제사를 드리고자 하심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기 몸을 우리의 죄를 위해 단번에 드리셨습니다(10).
둘째, 단 한번의 제사로 우리가 누리게 된 영적 축복 (10b-18). 11절을 보십시오. 땅에 있는 성소의 특이한 점은 앉을 의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사장들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계속해서 제사장직무를 수행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단 한번에 영원히 유효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12). 예수님께서 앉으신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첫째로, 예수님이 드린 제사가 다시는 죄를 위해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을만큼 완전한 것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15-18절을 보면 성령께서도 이미 우리에게 증거해 주신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죄사함을 받고 거룩함을 얻게 되었습니다(18a, 10b).
둘째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통치를 나타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이 말씀은 원수들에 대한 그의 지배가 완성될 때까지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수는 사단입니다. 사단은 공중의 권세잡은 자요,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사단은 그 세력이 완전히 꺽이고 지금은 패잔병이 남아 있어 인간을 괴롭히고 있는 실정입니다. 예수님은 최후 심판날에 패잔병마저도 온전히 결박함으로써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 믿는 자들의 온전한 구원을 위하여 끊임없이 중보기도를 해 주십니다(14). 7:25절에서도 저자는 중보기도하시는 예수님을 언급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사도 바울도 로마서 8:34절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시적으로 묘사했습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우리는 연약하여 늘 넘어지고 깨지고 부서지기를 잘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 승천 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사 지금도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끊임없이 간구해 주시는 예수님을 인하여 우리는 넉넉히 이기고도 남는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예수님을 찬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