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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0:19-39(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by Mark Yang   08/14/2019   Hebrews

Message


1997년 히브리서 제 9 강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 말씀: 히브리서 10:19-39
 요절: 히브리서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우리는 이때까지 그리스도의 우월하신 인격과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와 그의 제사직분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좀 더 세부적으로 말하자면 1:1-4:13절에서는 그리스도는 천사와 모세보다 우월하신 인격을 가지신 분이심을 증명합니다. 또한 4:14-10:18절에서는 구약의 대제사장이나 제사는 불완전한 반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 되시기에 합당하며, 또 그리스도의 제사는 완전하고 그 효력이 영원함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주제는 예수님은 큰 대제사장이 되시며, 그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은 완전하고 영원히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10:19-13:25절은 실천적 권면으로서 불굴의 신앙을 가지고 전진할 것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과 아울러 감당해야 할 의무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I. 새롭고 산 길 (10:19-25)

첫째, 신자의 특권 (19-21). 19절에서 ‘그러므로’라는 부사에는 10:18절까지 히브리서 저자가 논한 요지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심으로 속죄 사역을 완성하셨고,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난제(難題)들이 완전하고 영원히 해결되었으므로” 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19-21절에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리게 된 은혜와 특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갈 담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과거에는 죄많은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극히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직접 나아갈 수 없고 반드시 대제사장을 통하여 나아갈 수 있었으며, 대제사장도 1년중 대속죄일에 한번만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짐승의 피를 가지고 심판에 대한 공포와 두려운 마음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렇게 복잡한 절차를 거쳐 하나님께 나아간다 하더라도 여전히 죄문제는 해결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물질, 시간, 전도, 봉사, 업적 등 우리가 드리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열납하실 수 없는 무가치한 것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시간과 물질을 드리고 젊음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께서 아무 값없이 베푸신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자신이 친히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 되시는 예수님의 피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피만이 하나님의 의(義, Righteousness)를 만족시키고 또 우리의 죄를 완전하고도 영원히 없이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피는 신비한 물질입니다. 피는 적혈구와 백혈구와 혈소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적혈구는 산소와 영양분을 운반하고, 백혈구는 각종 병균과 싸우는 경찰기능을 담당하고, 혈소판은 혈관을 보호하기 위해 출혈했을 때 응고하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성경은 피의 화학적 구조에 대해서는 말해 주지 않지만 모든 살아있는 생물의 생명은 그 피 안에 있음을 말해 줍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레17:11) 이 말씀은 피 자체가 생명이라는 말이 아니라 피가 생명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을 담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를 영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거하게 되어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한 현재로서 역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공포와 두려움 없이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어느 십대 소년이 어머니가 다른 곳을 방문하는 동안 자기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을 때 가족 도서실에서 신앙서적을 읽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한 책을 읽다가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이라는 말에 사로잡힌 바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이라니 저자가 왜 이런 표현을 썼을까?” 그때 소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신 말씀이 떠오르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구원의 일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일이 다 이루어졌다면 빚을 다 갚았다는 뜻인데 그러면 내가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그는 자기가 할 일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덧입는 것 뿐임을 깨닫고 무릎을 꿇고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죄를 영접하였습니다. 그가 바로 중국 내지 선교회의 창시자 ‘허드슨 테일러’였습니다.
20절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어떤 길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구약의 대제사장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 죄사함을 받고 그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지성소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두꺼운 천으로 만든 휘장이 쳐져 있었습니다. 이 휘장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많은 인간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죄의 장벽이었습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이 죄의 장벽은 허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운명하심과 동시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막15:37,38).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이 제거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아가 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놀라운 은혜를 덧입게 되었습니다. 황수연 자매님은 이 놀라운 은혜를 졸업 미전 작품으로 전시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 작품은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둘로 찢어진 사이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고귀한 살을 찢기시고 보배로운 피를 흘리신 사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열어 놓으신 그 길을 ‘새롭고 산 길’(a new and living way)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새롭고 산 길’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새롭다’는 말은 헬라어 원문으로 ‘프로스파토스’(πρ σφατο )인데 이 단어는 ‘앞에’라는 뜻인 ‘프로스’(προ )와 ‘도살하다’의 뜻인 ‘스파조’(σφ?ζω)에서 유래된 ‘스파토스’(σφ?το )의 합성어로서 “새로이 죽임당한”이라는 뜻입니다. 새로이 죽임당한 피는 신선하고 생동감이 넘칩니다. 물고기도 바로 잡아서 먹으면 싱싱하고 신선한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새로이 죽임당한 피와 같이 항상 신선하고 생동감이 넘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늘 새롭게 역사함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믿는 그 순간에 우리의 추하고 더러운 죄가 새롭게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보혈로 인해 깨끗이 씻음받게 됩니다. ‘산 길’이라는 말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생명의 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생명의 길이 되십니다(요14:6).

둘째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이 마련되었다 할지라도 우리 스스로 그리로 들어갈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해 주고, 허물과 죄를 용서해 주고,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해 줄 큰 대제사장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이 되실 뿐만 아니라 큰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온전히 인도해 주십니다.

19-21절은 문장이 분사구문 형태로 되어 있으며, 또 “소유하고 있으니”(에콘테스, χοντε )라는 단어가 문장의 서두에 대문자로 나와 있어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항상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되고, 또 우리를 성소로 인도할 큰 대제사장을 항상 소유하고 있으므로”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을 통해 큰 은혜와 특권을 얻었으므로 22-25절에서는 이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의무가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둘째, 신자의 의무 (22-25). 22-25절은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말미암아 은혜와 특권을 누리게 된 자들이 감당해야 할 의무를 세가지로 말해 줍니다. 그것은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요(22),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는 것이요(23),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것입니다(24,25).

첫째로,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2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나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저자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은혜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은 표준 새번역에 보면 “마음에다 예수의 피를 뿌려서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양심의 가책에서 해방된 것을 의미합니다. 현대 심리학은 기발한 방법으로 죄책감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강력하고 사악한 내면의 대적에 쫓기고 시달립니다. 우리는 죄를 지으면 이를 합리화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합리화해도 내면 깊은 곳에서 “그래도 너는 죄인이야” 하는 양심의 고발이 있습니다. 이 죄책감 때문에 마음에 안식과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이 죄책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덧입을 때만이 사라집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마음으로부터 믿을 때 신기하게도 나를 끈질기게 괴롭히던 정죄감이 사라지고 위로부터 참 안식과 평화가 임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이런 은혜를 덧입었습니다. 또한 몸을 맑은 물로 씻었다는 것은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갈 때 물로 씻어 정결케 하는 의식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말미암아 양심의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되고 마음과 몸이 깨끗하게 되었으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같이 은혜를 덧입었으니 저자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권면합니다. 참 마음이란 이중적이거나 외식적인 마음이 아닌 진실되고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온전한 믿음이란 물질이나 재능이나 능력 등 어떤 인간적인 것도 의지하지 않고 온전히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만을 의지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러면 저자가 왜 이렇게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우리는 에덴을 생명과 기쁨과 자유와 평화가 넘치는 행복의 동산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에덴이 에덴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의식주 생활이 풍요롭거나 환경이 아름답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런 외적 요인이라면 오늘날도 에덴과 같은 곳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적으로 부족함이 없고 천국과 같은 환경 가운데서 사는데도 그 마음에 전혀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을 보면 행복은 결코 외적 요인에 있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에덴이 에덴 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문제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시요, 우리 인간은 그의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성을 맺지 못할 때 존재의미를 상실하고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말미암아 창조주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 나라의 참 기쁨과 자유와 안식과 평화를 누리며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아무리 외적인 환경이 힘들지라도 마음에 에덴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영광스러운 하나님과 교제하는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둘째로,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읍시다. 23절을 보십시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자.” 믿는 도리는 신앙고백을 의미합니다. 신앙고백은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모시고 이제 더 이상 나를 위해서 살지 않고 진심으로 주와 복음을 위해서 살겠다는 공적인 선언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생명의 구주이심을 믿고 주와 복음을 위해서 사는 것이야말로 우리 믿는 자들의 소망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믿는 도리의 소망’이라고 하였습니다. 돈 벌어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 될 수 없고, 권세를 얻어 큰 소리치며 사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소망을 가질 때 실망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포항제철 신화의 주인공인 박태준 총재는 과거 철교신자(鐵敎信者)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는 민자당 총재까지 지내다가 지난 93년 4월경 정치권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마음의 큰 고통을 안고 일본에 가서 고독한 투병생활을 하고 있을 때 평소 친분이 있던 한 중소기업인이 찾아와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박회장님, 역경에 처했을 때 철(鐵)이 무슨 유익이 됩니까? 하나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후에 그가 다시 찾아와 성경과 기도문이 적힌 쪽지를 전해주며 간절한 마음으로 전도를 했습니다. 외로운 가운데서 투병하고 있던 박회장은 그 친절에 감동되어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외웠고, 매일 성경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년 후 딸이 있는 미국 뉴저지를 방문했을 때 급성폐렴으로 각혈까지 하는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딸이 다니는 길벗교회의 김민웅 목사님을 통해 신앙의 눈을 뜨게 되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게 된 기쁨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의 말년에 예수님을 만난 것이 최고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과거 그가 경제와 권력을 소망으로 삼았을 때는 절망하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소망이 되었을 때 마음에 참된 기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마음에 불신과 회의가 들 때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붙잡아야 됩니다. 또한 믿음으로 살다가 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 이 소망을 더욱 굳게 붙잡아야 됩니다. 또 믿음으로 살다가 핍박과 조롱을 당하고 불이익을 당할 때 이 소망을 굳게 붙잡아야 됩니다. 우리의 대적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두루다니며 우리가 어떤 모양으로든지 믿음의 길을 가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삼킬 자를 찾습니다(벧전5:8). 그러나 우리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우리의 영적 생명과 관련되는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신실하셔서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부도를 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셋째로,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합시다. 24,25절을 보십시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이 말씀은 믿는 자들이 서로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골방에 앉아 혼자서 고고하게 하는 생활이 아니라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함께 모여서 하는 공동생활입니다.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생활을 하다 보면 자연히 인간 갈등이 있게 되고 불협화음이 일어나게 마련인 것입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서로 자기를 죽이고 상대방을 위해 기도해 주고 섬김으로써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격려하는 것은 자극하여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중심적으로 함부로 말함으로써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려 화가 나도록 자극하기 쉽습니다. 또 불신적인 말을 함으로써 마음에 회의를 심고 영적 소원을 떨어뜨리며 자극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을 심고 영적 열심을 내게 함으로써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도록 격려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함께 모이면 서로 상처를 주고 썰렁한 분위기가 되어 힘들기 때문에 아예 모이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서로 권하여 재림의 날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여서 사랑과 선한 일을 행하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세상에 선한 일이 많이 있지만 한 영혼을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하는 일처럼 선한 일은 없습니다. 일대일 말씀공부는 한 영혼을 살리는 선한 일이요, 참된 사랑입니다. 우리는 힘써 모여서 이 선한 일을 행하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2:42절에 보면 초대 교회 성도들이 모여서 서로 격려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에 전혀 힘쓰니라.” 그들은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말씀 중심으로 서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또한 떡을 떼며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형식적으로 간단히 기도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합심하여 기도하기에 전혀 힘썼습니다. 그때 성령의 그릇이 든든히 이루어져 구원의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났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말미암아 은혜와 특권을 누리게 된 자들이 감당해야 할 의무가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그것은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요,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붙잡는 것이요, 서로 돌아 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또한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붙잡읍시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합시다.

II. 의인의 삶 (26-39)

26-31절까지는 배교에 대한 경고입니다. 여기서 저자가 다루는 죄는 신자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고백하면서 연약하여 습관적으로 범하는 도덕적인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다가 고의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유대교나 힌두교나 회교나 불교와 같은 다른 종교로 전향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잘 믿다가 예수 믿는 것이 너무 고리타분하게 느껴져서 고의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세상 욕심을 좇아 물질과 권력과 무당을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그리스도의 피를 모독하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죄를 범하였으므로 다시는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밖에 없게 됩니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하는 죄를 범한 자는 그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습니까? 하나님은 회개하고 겸손하게 긍휼을 구하며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는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베푸는 분이시지만, 고의로 진리를 배반하고 불순종하는 자는 공의로 엄히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심판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32-39절까지는 우리가 어떤 자세로 어려움을 극복해야 하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과거 믿음으로 싸워 승리한 믿음의 체험을 기억해야 합니다. 과거 믿음의 체험은 현재의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과거 그들은 고난의 큰 싸움을 믿음으로 잘 싸웠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비방과 환난을 당하고 재산도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아니하고 더 낫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그들이 고난의 큰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음에 위로부터 복음의 빛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외적인 어려움이 문제가 아니라 그 내면에 빛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의 내면에 말씀의 빛이 있을 때 오히려 외적인 어려움은 믿음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담대함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35). 여기서 담대함은 믿음의 확신을 말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확신을 포기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여기에는 큰 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큰 상은 죄사함 받고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얻는 것입니다.
셋째로, 인내해야 합니다(36). 인내에는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이 있습니다. 소극적인 면은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영접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요, 적극적인 면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힘써 감당하는 것입니다. 인내란 단순히 참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인내로 영혼의 구원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눅21:19).
넷째로, 믿음으로 전진해야 합니다(37-39). 우리는 주님께서 곧 재림하실 것이라는 재림신앙을 가지고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힘들다고 뒤로 물러가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 곧 멸망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여기서 뒤로 물러가는 것과 믿음으로 전진하는 것이 비교되어 나옵니다. 뒤로 물러가는 것은 힘들다고 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타협하고 회피하고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생활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따릅니다. 이런 과정이 힘들다고 해서 이를 회피하고 쉽고 편하게 신앙생활하고자 하게 되면 그때 그때는 좋을지 모르지만 열매가 없고 그 결과는 패배요, 멸망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전진하는 삶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도전하는 삶입니다. 넘어지면 또 일어나고, 넘어지면 또 일어나고, 일곱 번 넘어지면 여덟 번 일어나는 삶입니다. 이런 삶은 고생스럽지만 반드시 승리가 보장되어 있고 열매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자기를 믿고 따르는 자에게 주시는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전진 아니면 후퇴입니다. 그 중간은 없습니다. 우리가 힘들다고 해서 믿음이 없어 움츠러들고 타협하고 십자가를 회피하고 포기하게 되면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힘들수록 믿음으로 도전하고 적극적으로 십자가를 지고 역경을 뚫고 전진하는 삶을 살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도전하고 전진하는 자를 기뻐하시고 이런 자를 위해 승리의 면류관을 예비해 놓고 계십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총체적인 위기에 직면하여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낙심하고 움츠러들고 뒤로 물러갈 것이 아닙니다. 힘든 때일수록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회개하고 믿음으로 역경에 도전하고 전진해야 합니다. 현재의 위기 상황을 영적 각성의 기회로 삼고 믿음으로 도전하고 전진함으로써 새역사를 창조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