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초 히브리서 제 10 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
말씀: 히브리서 11:1-7
요절: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1998년 무인년(戊寅年) 호랑이의 해가 밝았습니다. 새해가 밝았지만
경제위기로 인해 설렘과 기대보다는 불안과 걱정이 앞서고, 기쁨과 희망보다는 슬픔과 고통의 그림자가 우리의 심령을 드리우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 민족의 저력을 전세계에 보여 주기 위해 위기를 기회로 생각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뛰고자 하는 각오도 대단합니다. 특히 올해는 우리 민족의 상징인 호랑이 해이기 때문에 호랑이와 같은 용맹과 슬기로 난국을 헤쳐 나가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호랑이는 동작이 무척 빠르며 이동할 때 거의 소리를 내지 않고 용의주도하게 행동합니다. 일단 먹이사냥에 나서면 5,6m를 거뜬히 뛰어오르고 10m 아래를 사뿐히 뛰어 내린다고 합니다. 호시탐탐(虎視耽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호랑이가 눈을 부릅뜨고 먹이를 노려본다는 뜻으로, 기회를 노리고 형세를 살핀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호랑이의 스피릿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새로운 각오로 한 해를 출발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이는 우리의 모든 노력이 헛수고가 되고 맙니다. 우리에게는 말씀 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을 때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으며, 황무지에서 장미꽃을 피우는 놀라운 역사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절실히 필요한 이 때에 믿음의 장인 히브리서 11장을 공부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히브리서 11장 말씀공부를 통해 힘든 한 해를 이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용사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신앙의 웨스터민스터 사원”이라고 일컬어집니다. 그 이유는 믿음의 영웅들이 이곳에 보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웨스터민스터 사원은 죽은 사람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지만,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영웅들의 살아있는 믿음으로 인해 생명이 약동하는 곳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사람들은 세상에서 명성을 떨쳤거나 위대한 업적을 쌓은 사람들이 아니라 오로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들입니다. 11장에는 ‘믿음’이란 단어가 25번 나오고, ‘믿음으로’라는 구절은 20번 나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살았고, 믿음으로 죽었습니다.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행동했습니다. 그들은 어려운 일을 만날 때 결코 뒤로 물러가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전진했으며, 믿음으로 역경 가운데서 은총의 꽃을 피웠습니다.
11장에 나타난 선진들의 믿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들의 믿음은 생활믿음입니다. 그들은 믿음 따로, 생활 따로, 따로 국밥이 아니라 믿음이 바로 생활이고, 생활이 바로 믿음으로서 일상적인 삶 자체가 믿음이었습니다. 둘째로, 그들의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을 붙잡는 믿음입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일시적인 것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봄으로(by sight) 산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by faith) 살았습니다. 셋째로, 그들의 믿음은 앞을 바라보고 전진하는 믿음(forward-looking faith)이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소극적으로 중심만 지키는 정체된 믿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역사를 창조하는 역동적인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고, 더 나은 본향을 바라는 믿음이었습니다. 넷째로, 그들의 믿음은 현실의 유혹과 환난과 고통을 끝까지 견디는 견인(堅忍)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으로서 믿음의 본질과 증거를 얻는 믿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Ⅰ. 믿음의 본질 (1-3)
저자는 10:39절에서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라고 말한 후 11장에서 이 믿음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절은 믿음의 정의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여기서 볼 때 믿음에는 두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여기서 실상은 헬라어로 ‘휘포스타시스’( π στασι )인데 이는 실체(the substance) 또는 확신(the assurance)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실상은 믿는 대상 면에서 객관적인 의미를 나타내고, 확신은 믿는 자의 자세 면에서 주관적인 의미를 나타냅니다. 이는 믿음은 허망한 것을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실체를 주관적으로 확신하는 것임을 말해 줍니다. 히브리서 3:14절에서는 ‘휘포스타시스’를 ‘확실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 바라며 살아갑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를 바라고 IMF한파에도 불구하고 잘리지 않는 좋은 직장 얻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오늘보다 좀 더 나은 삶, 좀 더 나은 사회를 희망하며 살아갑니다. 전에는 건강하기를 바라는 것이 1순위였지만, 요사이는 경제안정이 1순위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바라는 것을 분석해보면 대부분 눈에 보이는 것으로서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과정에 불과하지 우리가 바라야 할 진정한 희망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24절에서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하였습니다. 진정한 희망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이어야 하며 영원한 것이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바라는 것들’은 수동태로서 ‘소망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가 인간적으로 바라는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시는 것들입니다. 이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에 속한 모든 신령한 축복들을 다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시고 영생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벧전 1:4).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는 우리 믿는 자들이 진정으로 바라야 할 것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6: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 전파하기에 힘쓰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위에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이렇게 바라는 것들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보증수표와 같습니다. 수표는 돈이 아니지만 은행이 보증을 하기 때문에 현금과 같이 사용합니다. 이와 같이 믿음이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하나님의 보증 수표입니다.
믿음이 바라는 것들로 시작된다는 것은 뒤집어서 말하면 현세적인 삶에 대한 불만족에서 시작됨을 말해 줍니다. 다시 말해서 현세적인 삶에 대해 만족하고 안주하고자 하는 자들, 인생을 단지 먹고 마시고 즐기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코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현세적인 삶에 대해 허무와 무의미를 느끼고 참되고 의미있고 가치있고 영원한 세계를 추구하는 자들만이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에는 현세적인 삶에 대해 불만족을 느끼고 참되고 영원한 것을 바라고 소원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에 간절한 영적 소원을 가진 자를 기뻐하시고 그 믿음을 축복하십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 두 소경이 따라 오며 소리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테스트 하시기 위해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소경들은 낙심하지 않고 계속해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이중창으로 부르짖으며 집에까지 따라 들어갔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 소경들에게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소경들은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확신있게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저희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의 믿음을 축복해 주셨습니다(마 9:27-30). 이와 같이 우리가 영적 소경임을 인식하고 영적 세계를 보고자 하는 간절한 영적 소원이 있을 때 주님께서 그 믿음대로 영적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75세의 늙은 나이에 신앙생활을 출발했습니다. 그는 성장하기에는 너무 늙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세상 만민의 복의 근원이요, 열국의 아비로 성장할 놀라운 희망을 가지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자신에게 희망을 둘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두신 희망을 영접하고 그 희망을 좇아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한번은 아브라함이 신앙생활한지 10년이 되어도 자식을 주시지 않자 절망에 빠져 이불을 뒤집어쓰고 하나님께 데모를 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시청각 교육을 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이는 현재 딸자식 하나 없는 아브라함에게는 도저히 바랄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는 황당무계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뭇별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능히 이를 이루실 것을 믿었습니다(창15:5).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 믿음을 축복하사 그를 복의 근원으로 삼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놀라운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민족이 로마 식민통치하에 있는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 사도행전 1:8절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는 예수님의 세계선교 명령을 영접하고 세계 복음화의 비전을 가졌습니다. 그는 이 비전 가운데 쉬지 않고 기도하고 복음을 전함으로 이방세계를 개척해 나갔습니다. 에베소를 개척한 후에는 얼마든지 노년을 편히 쉴 수 있었지만 오히려 이때 로마 정복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행19:21). 이 환상은 쇠고랑을 차는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꺼질 줄 모르는 활화산과 같이 타올랐습니다. 그에게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로마 복음화의 비전 가운데 로마의 셋집에서 위대한 1대1 전투를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믿음대로 결국 거대한 로마제국은 복음화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세계187개국을 복음으로 정복하고 세계의 제사장나라가 되고자 하는 비전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믿음이 없다면 이 비전은 한낱 망상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믿음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을 축복하사 이 나라를 21세기의 제사장 나라로 귀하게 쓰실 것입니다.
둘째로,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여기서 증거는 헬라어로 ‘엘렝코스“( λεγχο )로서 증명(proving), 확신(conviction)이라는 뜻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들‘도 수동태로서 ’보여지지 않는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보여지지 않는 것들을 증명하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존재의 세계에는 보이는 현상세계와 보이지 아니하는 실체의 세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체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실체의 세계입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실체를 보는 것처럼 증명하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배의 갑판에서 두 사람이 서서 먼 수평선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다른 한 사람은 멀리 있는 기선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고 설명합니다. 육안으로 본 사람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하지만, 망원경으로 본 사람은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불신앙으로 보면 영적인 세계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 앞에 제시한 것들은 모두 허구적이고 모호하고 쓸데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망원경으로 볼 때 하나님의 세계는 너무나 생생하게 보이기 때문에 의심할래야 의심할 수 없습니다. 과거 믿음이 없어 거듭나기 전에는 성경을 볼 때 시대에 뒤떨어지고 수면제 역할을 하는 책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거듭나서 영적인 눈을 뜨게 되었을 때 성경은 구원의 지혜를 주는 엄청난 보화가 담긴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믿음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보게 해 줍니다. 믿음이란 신비스럽고 비밀스러운 것입니다. 이 믿음의 세계는 인간의 이성이나 지혜로 알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이 알 수 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선진들은 믿음으로 산 조상들을 의미하고 ‘증거’는 divine approval, commend for로서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은 선진들은 오직 믿음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사회적인 지위와 권세가 있고 돈을 잘 벌어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에서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은 인간 조건에 관계없이 믿음이 있는 자를 인정하시고 귀히 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려면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의 믿음을 보시는 하나님은 공평합니다. 목회자나 장로나 경륜있는 목자라 할지라도 마음에 믿음이 없을 때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초신자라 할지라도 마음에 믿음이 있을 때 인정하시고 귀하게 쓰십니다.
3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저자는 믿음의 영웅들을 열거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믿는 믿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창조 신앙이 믿음의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하는 사실을 아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세계는 우연히 생겼고, 무기물질에서 진화하여 오늘날과 같은 온갖 생명체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진화론을 신봉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인격을 가진 존재가 지성을 가지고 무에서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믿지 않고 진화론을 신봉하게 될 때 모든 것이 허무하고 우리 인생은 운명적이 되어 버립니다. 그때 세계는 온통 혼돈과 흑암과 공허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이 세계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절대 주권과 섭리 가운데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을 때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게 됩니다. 생각하는 가치기준이 달라지고 삶의 양식이 달라집니다. 인간은 더 이상 운명의 노예가 되지 아니하고 분명한 존재의미와 목적과 사명을 가진 복된 존재가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것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 이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이를 증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는 다만 믿음으로만이 알 수 있습니다. 3b절의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는 말씀은 보이는 현상세계가 유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무에서 창조된 것임을 말해줍니다.
Ⅱ. 증거를 얻는 믿음 (4-7)
첫째, 아벨의 믿음: 4절은 최초의 믿음의 선진인 아벨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제사는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사는 열납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아벨과 그 제사만 열납하시고 가인과 그 제사는 열납지 아니하셨을까요? 아벨의 제사는 피의 제사이고, 가인의 제사는 곡식을 드린 제사이었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러나 레위기에서 곡식을 드리는 소제도 있는 것을 보면 제물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아벨이 믿음으로 드렸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사는 아담의 범죄 이후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제도입니다. 죄많은 인간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으려면 진실되게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심정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심령이 가난하고 겸비한 자세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받으시는 제사는 상하고 통회하는 심정입니다 (시 51:17). 아벨은 하나님의 긍휼만 의지하고 다만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믿음으로 드린 제사를 받으시고 그를 의로운 자라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죄를 회개치 않고 자기 의를 내세우며 교만한 자세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의 제사를 열납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주일예배를 드릴 때 믿음으로 드려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다는 것을 배웁니다. 회개하는 심정이 없이 딱딱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거나,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없이 형식적으로 습관적으로 드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제사는 열납하시고 가인과 그 제사는 거절하시자 가인은 열불이 났습니다. 그는 시기심의 노예가 되어 이성을 잃고 비겁하게 뒤에서 돌로 아벨을 쳐죽였습니다. 가인은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고, 아벨은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최초의 살인이 최초의 순교자를 만들었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살았지만 그 최후는 비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었으나 그의 믿음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의 믿음은 살아서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만을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의롭다 인정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벨을 통해서 믿음으로 살지만 그 결과는 좋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사람들은 믿음으로 살면 축복 받고 모든 것이 잘되고 해피앤딩으로 끝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으로 살았는 데도 결과가 좋지 않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신앙생활에 대해 회의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둘째, 에녹의 믿음: 5절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에녹의 믿음이 나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의 아들은 므두셀라인데 이는 “그가 죽을 때 심판이 온다”(When he is gone, judgment will come)는 뜻입니다. 므두셀라는 969살까지 살았는데 과연 그가 죽은 후 그의 손자인 노아 때에 홍수심판이 오게 되었습니다. 에녹이 65세 때 므두셀라를 낳았는데 그때까지는 평범하게 살다가 므두셀라를 낳고 난 후 삶의 깊은 회의를 느끼고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300년동안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클라르 루스(Clare Boothe Luce)는 “한 개인의 인생은 역사 속에서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링컨은 노예를 해방시킨 대통령으로 말할 수 있고, 세종대왕은 무지한 백성들을 위해 한글을 창제한 어진 왕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박정희는 근대화, 전두환은 광주사태와 삼청교육대, 노태우는 비자금, 김영삼 대통령은 IMF로 영원히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에녹의 삶은 한마디로 ‘하나님과 동행’한 삶이었습니다. 에녹이 살던 시대는 노아 홍수 이전의 시대로서 불경건하고 부패가 만연하고 강포가 충만한 시대였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에녹이 이런 시대에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유다서 14,15절 말씀은 그가 거스리고 강퍅한 시대에 경건한 생활을 하며 의를 전파하는 생활을 했음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이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 많은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 법도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법도대로 살았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부모 친척들과 친구들과 세상 사람들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이로써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믿음의 생활을 심히 기뻐하시고 죽음의 고통을 면제시켜 주시고 하나님 나라로 데려 가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너무 달콤해서 시간과 공간 저 넘어 낙원까지 함께 걸어 들어갔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에녹의 믿음을 기초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한다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해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기 위해서 다른 인간적인 노력을 할 필요가 없고 오로지 내면의 믿음만 키워나가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반드시 믿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말씀을 영접하기 어려운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심을 믿지 않는 일은 힘들지라도 하나님의 계심을 믿는 일은 쉽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생득적인 지식이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만물을 통해 그의 신성과 창조의 능력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특수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무신론자는 인본주의에 기초한 불신앙의 교육을 철저히 받은 후에 비롯됩니다.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거부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심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나는 무신론자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소리치게 됩니다. 또는 위험에 처하게 될 때는 무의식적으로 “아이구 하나님! 살려 주세요!”라고 외치게 됩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기 쉽습니다. 특히 핍박을 받거나 일이 잘 안 풀릴 때, 또 사회에 불의가 성행할 때 하나님이 과연 살아 계시는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불의가 판을 치는가 의심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과거에는 살아 계셨지만 지금은 너무 연세가 많으셔서 돌아가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존하시는 분으로서 항상 살아 계셔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who I am)고 계시하셨습니다. 이는 항상 현재 살아 계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지 않는 불신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큰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엄연히 살아 계시는데 살아 계시지 않는다고 말해 보십시오. 그것처럼 큰 죄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을 때 인생을 함부로 살 수 없고, 옷깃을 여미며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심을 반드시 믿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상 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치사하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지 않을 때 눈에 보이는 상급을 바라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사람들이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고 문제에 빠지는 것을 보면 눈에 보이는 성공이나 물질이나 양을 상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 자신을 의미합니다(창 15:1). 사실 우리가 이 험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 자체가 큰 상급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 상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살았기 때문에 꾿꾿하게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상급을 믿었기 때문에 애굽의 모든 보화를 버리고 기쁨으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고 믿음으로 사는 자를 결코 외면치 않으시고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상으로 채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상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살 때 눈에 보이는 결과에 얽매이지 않고 확신을 가지고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셋째, 노아의 믿음: 7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홍수로 부패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이때 경고를 받아들이고 방주를 짓는다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경고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롯의 사위와 같이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심판에 대해 이야기하면 겁주지 말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 설마 심판하시랴 자기 나름대로 생각합니다. 오늘날도 여러 모양으로 불심판에 대한 경고를 받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를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홍수심판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듣고 이를 마음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구체적으로 방주 짓는 생활을 했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은 방주 짓는 노아를 미친 놈, 어리석은 놈 등 갖은 조롱과 멸시를 했지만 그는 조금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홀로 끝까지 묵묵히 믿음으로 방주 짓는 생활을 했습니다. 이로써 그와 온 집이 구원을 받고, 또한 온 세상의 불신앙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습니다. 홍수 심판 전에는 그가 세상에서 가장 생각이 모자라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였지만, 홍수 심판 후에는 그가 세상에서 가장 생각이 깊은 지혜로운 사람임이 증명되었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실제 생활에서 믿음의 증거를 얻는 것입니다. 올 한 해 부족하지만 실제 생활에서 믿음으로 살므로 믿음의 증거를 얻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