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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23-28(모세의 믿음)

by Mark Yang   08/14/2019   Hebrews

Message


1998년초 히브리서 제 12 강

모세의 믿음
 말씀: 히브리서 11:23-28
 요절: 히브리서 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사람은 누구나 한번밖에 살지 않는 짧은 인생을 후회함이 없는 의미있고 가치있는 인생, 위대한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모세는 우리에게 좋은 본이 됩니다. 모세는 구약에서 아브라함 다음 가는 위대한 믿음의 인물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의 건국의 아버지요, 율법의 전수자요, 출애굽의 위대한 역사를 창조하고 수많은 능력의 역사를 행한 지도자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하나님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로서 하나님의 온 집에 충성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신34:10,히3:5). 2차 대전의 명장인 몽고메리 장군은 모세를 가리켜 전무후무한 위대한 지도자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가 어떻게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었는가 하는 비결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Ⅰ. 모세의 부모의 믿음 (23)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은 대개 불우한 환경이나 비극적인 상황 가운데서 태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세도 역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암울한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출애굽기 1장은 그의 탄생 배경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요셉이 애굽 총리로 있을 때 흉년을 피하여 애굽으로 이민을 오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루고 그들을 연단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뜻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번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그들이 애굽에 올 때는 70명에 불과했지만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출1:7). 오늘날 선진국 백성들을 보면 국가에서 출산비와 양육비를 지급해 가면서 아이를 낳도록 권장하지만 인생을 즐기기 위해 아이를 잘 낳지 않아 인구가 감소추세에 있습니다. 애굽 백성들도 당시 최고의 선진국 백성들이었으므로 인생을 즐기기 위해 다이어트를 하며 아이 낳기를 꺼려했을 것입니다. 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으로 아이를 열심히 낳았습니다. 그들은 번식률이 왕성하여 보통 한 집에서 8-9명, 일개 분대를 낳아서 민수기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애굽왕은 무섭게 번식하는 이스라엘 자손으로 인해 애굽왕국이 망하게 될 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이 더 이상 번식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노예로 삼아 강제 노동을 시켰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하루아침에 노예로 전락하여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을 하며 고역으로 괴로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바로는 이를 통해 그들의 정신력을 파괴시키고 육체를 약화시켜 출생률을 줄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므로 그들은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여 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고난 중에서 연단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환경 가운데서는 생존 문제에 급급하여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없고 더군다나 지도자가 탄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여 역사를 더욱 엄하게 하였습니다. 마침내 바로는 산파들에게 명하여 조산할 때 여자는 살리고 남자는 죽이도록 극비 살인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생명을 귀히 여기는 산파들로 말미암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바로가 산파들을 불러 추궁하자 그들은 “각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라고 지혜롭게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자가 태어나면 모두 하수에 던지라는 임금의 특별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씨가 말려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절망적일수록 자식에게 희망을 두게 됩니다. 아이는 가정의 희망이요, 나라의 희망입니다. 특히 남자아이는 가정과 국가의 기둥이 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시대가 어려울수록 2세 교육에 힘쓰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남자아이가 태어나자마자 하수에 던져야 했으므로 아무런 장래 희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요사이는 남자아이를 낳으면 기쁨이 충만하여 자랑하지만 딸을 낳으면 하나님이 주권행사를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남자아이를 낳을 때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절망과 슬픔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당시에는 아들을 낳은 집은 초상집이 되었습니다. 희망의 싹이 여지없이 짓밟히고 아무런 소망을 가질 수 없는 절망적인 시대에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탄생하자마자 나일강에 빠져 물고기의 밥이 되어야 하는 슬픈 운명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위기와 절망의 때가 하나님께는 기회와 희망의 때가 될 수 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우리는 이 말씀에서 모세의 부모의 위대한 믿음을 보게 됩니다.

첫째로,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부모들은 다 자기 자식들은 보통아이로 보지 않고 특별한 존재로 봅니다. 그리고 자기가 낳은 자식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가 최고로 예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세의 부모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모세는 누가 보나 그 용모가 범상치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7:20절을 보면 그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웠다”고 하였습니다. Peter Lombard는 “모세의 부모는 이 아이의 유별난 아름다움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자기 백성들을 구출하는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려 하신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요세푸스가 쓴 유대고대사를 읽어보면 사람들이 모세를 보았을 때 그의 용모의 준수함을 보고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모세가 길을 갈 때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그들이 지나치다가 다시 돌아서서 그 아이를 쳐다보거나 한참동안이나 서서 모세를 쳐다보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서 바로의 딸은 더 이상 그로 하여금 왕궁을 떠나게 할 수 없었다고 하였습니다.〔요세푸스, 「유대고대사 I」 (서울: 도서출판 달산, 1991), P. 202.〕 어쨌든 모세는 뛰어난 용모 때문에 구원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모세의 부모들은 레위족속으로서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창세기 15:13,14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주실 때가 가까와 온 것과, 이를 위해 구원자를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이 믿음 때문에 아이에게 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믿음으로 아이를 석달동안 숨길 수 있었습니다. 석달은 사망률이 가장 높은 기간으로 아이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보호와 보살핌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간입니다. 그래서 석달이 지나면 100일 잔치를 합니다. 부모의 믿음 때문에 모세의 생명은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 그들은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했습니다. 당시 전제 군주 시대에 임금의 명령은 절대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이를 어긴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만약 발각되기만 하면 삼족이 멸망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마비되어 눈물을 삼키며 아이를 하수에 버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부모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내면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고 아이를 숨겼습니다. 이것은 생명을 거는 모험이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일대 모험을 한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이런 믿음의 용기를 가질 수 있었을까요? 마태복음 10:28절은 말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그들은 바로보다 세상역사와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믿음으로 어린아이의 생명을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세상의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의 명령이나 상관의 명령을 두려워하여 확신있게 신앙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 큰 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확신있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아이를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역청을 칠한 갈대 상자에 넣어 하수에 띄웠습니다. 이는 아이를 버리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기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멀리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날 마침 바로의 공주가 이상하게 나일강에 목욕하러 가고 싶어서 나들이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또 아이가 우는 것을 보고 히브리 아이인 줄 알고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고 마침내는 양자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누이 미리암의 지혜로 생모가 그의 유모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완전무결한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세상에서 출세하도록 키우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젖을 먹이면서 모세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선민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갖도록 철저하게 신앙교육을 시켰습니다. 이는 아이가 젖을 떼고 어느 정도 자립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어릴 때 가르친 신앙교육은 모세의 골수에 박혀서 후에 믿음의 결단을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상에서 볼 때 모세와 같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탄생하려면 믿음으로 역사환경을 만드는 모세의 부모와 같은 사람이 반드시 필요함을 배우게 됩니다. 모세가 아무리 훌륭한 자라 할지라도 어린 아이 때는 보호와 사랑과 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환경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특히 어린 아이 때는 감수성이 예민하여 주위 환경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게 됩니다. 작년에 CBF 교장인 백승원 목자님은 CBF 교육원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CBF 교육원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말씀과 찬양과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율동과 노래와 영어공부, 피아노, 태권도 등 여러 가지 유익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아이들의 언어와 행동이 달라지고 신앙적으로 보호된 환경 가운데서 아름답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하루는 백승원 목자님이 식사기도를 짧게 하자 그의 딸 수산나가 “아빠 왜 기도를 짧게 해, 내가 할께” 하며 기도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또 우영철 목자님의 아들 진호는 유치원에서 아이들에게 창세기를 가르쳐 주고 “하나님 안 믿는 사람 손들어봐!” 하자 한 명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진호는 아빠에게 그 아이에게 창세기에 관한 책을 사 달라고 졸랐다고 합니다. 환경은 아이들의 인격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하나님께서 쓰신 위대한 인물들을 보면 그 배후에 부모들이 그들이 성장할 수 있는 영적인 환경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애굽과 같이 영적으로 어린 생명을 억압하고 파괴하고 죽이는 환경입니다. 우리는 모세의 부모와 같이 영적으로 어린 생명을 보호하고 말씀과 기도로 양육하는 믿음의 아버지요,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Ⅱ. 모세의 믿음의 결단 (24-26)

모세는 기구한 운명 가운데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성장도 기구한 운명 가운데서 하였습니다. 그는 노예로 태어났으나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되어 궁중교육을 받으며 자라났습니다. 여기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과 영광이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일어날 때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섬김을 받았습니다. 음식은 날마다 진기한 궁중요리를 먹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애굽 궁중에서 선진국의 최고 학문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석학들로부터 기본적으로 서너 가지의 외국어를 비롯하여 역사, 철학, 천문, 지리, 수사학, 정치, 경제 등 각종 학문을 섭렵했습니다. 또한 칼쓰기, 창던지기, 활쏘기, 전차몰기, 태권, 쿵후 등 각종 무술도 연마했습니다. 또한 인사하는 법, 손님 접견하는 법 등 궁중예절도 배우고, 장차 각 나라의 정상들과 회동하기 위해 골프도 배웠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7:22절에 보면 “모세가 애국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궁중교육은 지도자로서의 인간기초가 되었습니다.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기초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학교 공부도 열심히 해야 되고 또 책을 읽고 육체와 마음을 끊임없이 단련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궁중교육 만으로는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 후에는 반드시 광야훈련이 필요합니다. 이는 교만과 인간적인 야심과 혈기와 욕심이 다 깨어지고 순수하고 겸손하고 온유하고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낼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빚음 받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 광야 훈련을 그의 인생의 3분의 1이나 되는 40년 동안 받았습니다. 이러한 훈련 끝에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큰 종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애굽 사람도 누리기 힘든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가 황금마차를 타고 지나갈 때면 사람들은 Moses! Moses!하며 환호했습니다. 젊은 처녀들은 오빠부대를 만들어 그가 가는 곳마다 쫓아다니며 그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쳐다보기를 소원했습니다. 그에게는 사람들이 그토록 얻고자 하는 세상 권세와 영광이 이미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어떻게 했습니까? 24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모세가 장성함에 따라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남모르는 번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택한 백성, 선민으로서의 자각과 히브리인으로서의 민족혼이 싹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궁정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호화롭게 살고 있는데 그의 동족은 헐벗고 굶주리고 채찍을 맞으며 학대를 받고 비참한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여기서 어느 편에 서야 하는가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아졌습니다. 그에게는 믿음의 결단이 요구되었습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살 것인가? 하나님의 택한 선민으로 살 것인가?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될 것인가? 세상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될 것인가? 하나님이냐? 세상이냐? 분명한 결단을 해야 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결단하는가에 따라 그의 장래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얼마든지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또 그가 권세를 잡게 되면 그의 백성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의 백성 편에 선다면 그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되기를 거부한다면 이때까지 그를 키워 준 공주의 은혜를 배반하는 일이 됩니다. 또 인간에게는 권력에의 욕망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한 번 잡은 권력을 좀처럼 놓지 않으려 합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했습니다. 이것은 온전히 믿음의 역사였습니다.
그가 왜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의 생활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생활을 동시에 할 수 없는 것입니까? 이는 두 생활이 본질상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의 생활은 본질적으로 세상에 속하여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 영광을 구하는 생활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섬김 받고 잘먹고 편히 살며 쾌락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이런 삶은 겉보기에는 멋있고 화려한 것 같지만 결국 죄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죄의 쾌락은 잠시 뿐 그 후에는 허무와 엄청난 고통이 따르게 됩니다. 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생활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생활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주와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고난받는 생활입니다. 이런 삶은 인기가 없지만 그 결국은 거룩한 열매를 맺게 되고 그 영광은 영원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의 생활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생활은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두 생활을 동시에 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요구를 충족시키면서 동시에 그리스도를 따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마6:24)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그들 생활의 본질을 잘 알았기 때문에 타협하지 않고 믿음으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결단에는 지불해야 할 대가가 너무 컸습니다. 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는 것은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 곧 권세와 영광, 부와 명성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대신 노예백성으로서 조롱과 멸시와 능욕과 채찍질과 헐벗음과 굶주림을 당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는 고난의 가시밭길이었습니다. 그의 결단이 지불해야 될 대가는 너무 컸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믿음으로 결단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 편에 섰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 편에 섰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자 결단했습니다. 그의 결단은 위대한 결단이었습니다. 그의 결단은 일시적인 감정이나 영웅심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장성하여’라는 단어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스스로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는 때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해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장성하게 되면 누구에게든 이런 믿음의 결단이 요구됩니다. 대학시절은 내가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 진지하게 생각하고 고민하고 결단할 시기입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살 것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 것인가? 자기 영광을 위해 살 것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것인가? 안일한 소시민의 삶을 살 것인가? 좀 고생스럽지만 사명인의 삶을 살 것인가? 무리냐? 예수님의 제자냐? 넓은 길이냐? 좁은 길이냐? 분명히 결단해야 됩니다.
모세는 믿음의 결단으로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과 영광을 상실하고 대신에 많은 고난과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런 결단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25,25절은 그 이유를 두가지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의 영적 가치관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말이 하나님의 백성이지 실제로는 멸시받고 학대받는 백성이요, 노예근성에 찌든 노예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들을 쓸모 없는 백성으로 보지 않고, 인류 구속역사를 위해 하나님께서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궁중에서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고난을 사랑했음을 말해줍니다. 세상에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생을 즐기면서 편안히 살기를 원합니다. 신앙생활도 편안히, 목자생활도 편안히 하기를 원합니다. 주말이면 T. V도 보고 음악감상도 하기를 원하지 1대1을 하고 소감을 쓰고 소감 발표모임에 참석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되는 줄 알지만 세상의 잔재미 때문에 믿음의 결단을 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까지나 잔재미만 즐기다가 한번뿐인 고귀한 인생을 허비할 수는 없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궁중 생활을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궁중 생활은 파티를 하며 육신의 쾌락을 즐길 수 있습니다. 여름이면 수상스키도 타고 가을이면 단풍구경도 하고 겨울이면 겨울 낚시도 하며 인생을 멋있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 낙은 잠시뿐입니다. 또 이런 생활 뒤에는 반드시 허무와 무의미와 죄의식이 따르고 죄의 열매가 있습니다. 모세는 이것을 잘 알았습니다. 시편90편은 모세의 기도입니다. 그의 기도 가운데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 모세는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아서 언젠가는 시들고 마른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벧전1:24). 그러나 좀 고생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여기에는 생명의 열매가 있고 또 이것만이 영원히 남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그의 영적 가치관이었습니다. 그는 이 가치관 때문에 기쁨으로 확신있게 고난의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 그는 상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우리는 세상일은 허무하고 죄의 열매를 맺지만 하나님의 일은 의미가 있고 생명의 열매를 맺는다는 영적 가치관 때문에 기쁨으로 사명의 십자가를 집니다. 그러나 가치관만으로는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고 희생하기란 어렵습니다. 우리에게는 근본적으로 영원한 상급이 필요합니다. 모세는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았습니다. 모세는 노예백성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기까지 실로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난을 고난으로 생각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이 고난을 장차 오실 그리스도와 연결시키고 그를 위해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가 받은 고난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위해 받으실 고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죄로 인해 조롱과 멸시를 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모진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모세는 시대적으로 훨씬 앞섰지만 장차 인류를 구속하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 고난에 동참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이는 상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난 후에 올 영광을 생각했습니다. 그가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을 때 장차 주님께서 영광의 면류관을 씌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때 고난은 더이상 고난일 수가 없었습니다. 이 고난은 장차 하나님께로부터 상급을 받을 보증수표였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고난을 사랑하고 고난을 몸에 익힐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세를 생각할 때 그의 믿음의 결단은 현명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슈바이쳐가 세상 영광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아프리카의 영혼들을 위해 일생을 헌신하고자 했을 때 사람들은 그의 결단이 어리석다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수십년 후 사람들은 그의 결단이 얼마나 그를 위대하게 하고 빛나게 하였는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고자 결단했을 떄 세상에서 낙오자가 되고 그 인생이 끝장난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고난과 아픔과 손해가 있었지만 후에는 모든 사람이 흠모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Ⅲ. 모세의 역사 창조 (27,28)

27,28절은 모세가 믿음의 결단을 한 후 무엇을 했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습니다. 이 말씀은 모세의 미디안 광야에로의 망명을 의미합니다. 모세는 동족을 도우려다가 오히려 동족으로부터 배척을 받고, 바로 왕의 노여움을 사서 미디안으로 도망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왕이 무서워서 도망갔다기보다 동족들의 배척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견디기 힘들어서 미디안으로 물러간 것입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바로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했습니다. 그에게는 앞으로의 큰 역사를 위해 광야의 연단이 필요했습니다. 모세는 40년동안 광야에서 장인의 양을 치고 일곱 처제의 등살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꿈과 이상과 교만이 다 깨어지는 겸손 훈련과 인내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말없는 양을 치면서 철저히 낮아지고 섬기고 돌보는 목자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 훈련은 외롭고 힘든 훈련이었지만 그가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영적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훈련이었습니다. 그는 이 훈련을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습니다. 때가 되자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는 역사적 사명을 맡겨 주셨습니다.

둘째로,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습니다(28). 저자는 출애굽의 역사 중 절정인 유월절과 피 뿌리는 역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노예백성 이스라엘을 이끌고 출애굽의 역사를 이룬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바로는 10가지 재앙으로 심판하여도 여전히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놓아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애굽의 모든 장자를 멸하시겠다는 장자재앙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바로가 이 재앙으로도 과연 굴복할 것인가 믿기 힘들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장자재앙을 면하기 위하여 유월절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좌우 문설주에 바르게 한다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 근성에 깊이 찌들어 조금만 힘들어도 불평하고 애굽에 안주하고자 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어찌하든지 출애굽 하고자 하는 영적 소원이 없었습니다. 모세는 이런 그들에게 영적 소원을 심고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믿는 믿음을 심어야 했습니다. 모세는 이 모든 일을 믿음으로 이루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출애굽의 새역사를 창조했습니다. 유월절은 구원과 심판의 역사입니다. 어린양의 피뿌림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그림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의 피로 우리를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속하여 주셨습니다. 한 영혼이 예수님의 보배 피로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새역사 창조입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그는 고난을 사랑하고 기쁨으로 고난을 감당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전무후무한 위대한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모세와 같이 위대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고자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결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