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제 2 강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
말씀: 요한복음 1:6-18
요절: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는 지난 강의에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 본래 어떤 분이신가를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이요,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시요, 생명의 근원이 되십니다. 오늘 본문은 참 빛 되신 예수님과 성육신하신 예수님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배우고자 합니다.
Ⅰ. 참 빛 되신 예수님(6-9)
저자 요한은 빛의 증거자 세례 요한을 소개함으로써 예수님이 참 빛이 되심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최초의 빛의 증거자였습니다. 그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메시야의 선구자였습니다. 그는 이 특별한 사명을 위해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당시 요한은 그의 영적 영향력과 인기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참 빛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참 빛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사명은 참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빛으로 오셔서 어두운 세상을 태양과 같이 밝게 비추셨습니다. 태양이 세상을 환하게 비추고 있는데도 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바로 소경일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이를 알게 해 줄 증거자가 필요합니다. 이와 같이 영적으로 소경된 자들은 예수님이 참 빛이 되심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빛의 증거자가 필요합니다. 어두움에 있는 자들은 스스로 빛으로 나아올 수 없습니다. 이는 어두움의 세력이 그들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빛을 소유할 수 있도록 참 빛 되신 예수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예수님은 참 빛이 되십니다. 참 빛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참 빛은 모든 사람에게 비추일 수 있는 보편성과 시대를 초월해서 영원히 비추일 수 있는 영원성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어두움의 본질인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세상에 많은 작은 빛들이 있어 왔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촛불에 비유되고, 석가는 등불에 비유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생들에게 부분적으로 빛을 비추었을 뿐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참된 구원의 길을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빛을 찾는 구도자였지 빛 그 자체는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과 같은 인물들은 그 시대 시대를 비추인 빛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온 세상이 헛된 우상을 숭배함으로 어두움에 갇혀 있던 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온전히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이를 통해 믿음으로 사는 본을 남겼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노예 근성에 젖어 육신과 감정대로 행하며 죄를 죄로 알지 못할 때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의 도를 받아 전수함으로 죄를 죄로 깨닫게 하고 구원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모세는 사람들의 영적 무지를 깨우쳐 주는 빛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믿음의 사람으로서 메시야의 그림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 공과 의를 나타낸 위대한 빛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빛을 받아 그 시대 시대마다 부분적으로 빛을 비추었을 뿐 참 빛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참 빛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자들이었습니다.
마침내 참 빛 되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이 세상은 참으로 어두웠습니다. 사람들은 교만과 이기심, 욕심과 정욕, 시기심과 미움, 회의와 불신 등 온갖 죄로 인해 어두웠습니다. 또한 무의미와 허무, 무기력과 절망, 운명과 두려움 등 죽음의 권세로 인해 어두웠습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들은 심령이 어둡고, 얼굴이 어둡고, 생각이 어둡고, 생활이 어둡습니다. 입을 열면 감사와 찬송 대신에 불평과 욕설이 튀어 나옵니다. 부정적인 생각에 시달리고 자학합니다. 어두움에 있는 자들은 자신도 어두운 인생을 살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어두움을 퍼뜨립니다. 이러한 어두움의 세력은 너무나 강하여서 촛불이나 등불과 같은 빛으로는 결코 물리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태양과 같은 강렬한 빛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태양과 같은 빛으로 오셔서 어두운 세상을 환하게 비추었습니다. 참 빛이 비추었을 때 죄와 허물로 인해 죽은 자들이 살아나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밝고 생명력이 넘치는 힘찬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또한 생명의 열매를 맺는 복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소경 거지는 날 때부터 소경에다가 거지로서 비참한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를 볼 때 너무 불쌍하여 슬픈 감상주의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로라”하시며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심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의 빛이 임했을 때 그를 덮고 있던 모든 어두움의 세력이 물러가고 생명의 빛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소경 거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황태자가 되어 예수님을 증거하는 빛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찬송가 작시자인 Fanny J.Crosby는 난 지 6주 만에 눈이 송곳에 찔려 실명하여 절망적인 상태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로부터 들은 성경 말씀이 그녀에게 생명의 빛이 되어 어두운 그녀의 내면을 환하게 비추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영적인 눈을 떠서 신령한 영적 세계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오히려 죄많고 추한 세상을 보지 않도록 육신의 눈을 멀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녀는 약 9 천 편에 달하는 신령한 찬송가를 작시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John Newton은 7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11세 때부터 선원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부터 그는 가는 곳마다 사고뭉치였습니다. 그는 죄가 되지 않는 행동을 하면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로 죄악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노예 선장이 되어 사람의 생명을 팔고 죽이기도 하는 잔인무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구제불능 인간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느 날 우연히 성경 말씀을 읽게 되었을 때 예수님의 빛이 그에게 강하게 비추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거듭나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에는 죽어가는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복음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특별히 한 소자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가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쓴 찬송시가 “amazing grace"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예수님은 우리를 빛 가운데로 초청하십니다. 우리 모두 빛 가운데로 나아갑시다. 그리하면 생명의 빛을 얻게 될 것입니다.
Ⅱ.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10-13)
10,11절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영접지 않은 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예수님은 창조주가 되십니다. 모든 인간은 예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예수님은 그들의 주인이 되십니다. 그러나 소나 개와 같은 짐승은 주인을 알건 만은 인간은 주인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을 지으신 창조주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한 것은 합당치 않은 것입니다. 그들이 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까? 이는 영적인 무지 때문입니다. 영적 무지는 심각한 죄입니다. 세상에 아무도 나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날 때부터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생득적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 속에 심어 주신 것입니다(롬1:19).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하셨습니다(롬1:20).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알기 원한다면 어떤 방법이든지 반드시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 얽매인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알기를 원치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자유를 즐기기 위해서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자유로왔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의 생각은 허망하게 되고 그들의 미련한 마음은 어두워졌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혜있다고 하나 우준하게 되어 불멸의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들은 우상 숭배자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정욕의 노예가 되어 하지 못할 짓을 하는 어두움의 자식들이 되었습니다(롬1:21-32). 창조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지만 그들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지 않았습니다.(요3:19)
11절을 보십시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자기 백성이 예수님을 영접지 않는 것은 더 합당치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사 세계 만백성을 위한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온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가 탄생되도록까지 그들을 특별한 사랑으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영적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물질적으로, 정치적으로 축복하지 않는다고 불평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의 의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10:3,4절은 이를 잘 말해 줍니다. “저희가 하니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그들은 영적 교만 때문에 예수님을 그들의 구주로 영접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싶지 않으면 까다로운 신학적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불신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불신은 어두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불신은 교만입니다. 불신은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대한 반역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두 그룹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배척하는 그룹이요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그룹입니다. 이 두 그룹은 역사적으로 계속 있어 왔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배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배척하는 자들은 불신으로 인해 하나님의 정죄 아래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엄청난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들은 어떤 축복을 받게 됩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단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됩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에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로 변화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니님의 후사로서 장차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입니다.
12절 말씀에서 ‘권세’라는 단어는 ‘힘’(power)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능력이나 의지나 업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은 온전히 은혜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어떤 자신만만한 젊은 청년이 불신자인 세상 자매님과 결혼하면서 일단 결혼한 후에 그녀를 믿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불신자인 아내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다가 결국에는 아내의 영향을 받아 믿음마저 상실하고 세상적인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이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사 그 사람을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 변화시키십니다. 이것은 진실로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입니다.
Ⅲ.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14-18)
14절을 보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공의의 심판대로 한다면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크신 능력으로 모든 죄인들을 멸하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죄인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내려 오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성육신은 기적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기적입니다. 이는 영원하신 분이 시공간에 얽매이시고, 무한자가 유한자가 되셨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성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신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인성을 덧입으신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완전한 인간인 神人(God-Man)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神人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가 되실 수 있습니다(딤전2:5). 우리는 성육신하신 예수님께로부터 두 가지를 배웁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은혜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요 창조주로서 영광과 존귀와 능력과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모든 영광과 존귀와 하나님의 나라와 심지어는 하나님으로서의 의로움까지도 다 포기하셨습니다. 이것은 측량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역사를 살펴볼 때 인간들은 권력과 영광을 얻고자 몸부림쳐 왔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남을 이용하고 중상모략하고 짓밟고 죽이는 잔인한 인간들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의 왕국을 세우고 왕이 되기를 원합니다. 한 나라의 왕이 아니라도 정당의 왕이나 회사의 왕이 되기를 원합니다. 아니면 가정에 식모를 두어서라도 왕노릇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권리와 특권을 최대한으로 사용하고자 합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것을 잃기를 원치 않습니다. 이 때문에 세상에는 불화와 분쟁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능력과 영광과 권세를 포기하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포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온전히 비우셨습니다. 이는 죄인들을 향한 크신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아무 것도 아닌 종이 되시기까지 자신을 한없이 낮추셨습니다. 예수님은 탄생하실 때부터 비천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시고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이 아기 예수님은 너무나 겸손하여서 구유에 있던 짐승까지도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건만 예수님은 너무 가난하셔서 머리 둘 곳이 없으셨습니다(눅9:58).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이는 우리의 친구요 목자가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자신이 누군가(somebody)가 되기를 원합니다. 누구나 다 남을 지배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남을 섬기는 종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긴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고 아무 것도 아닌 자(nobody)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종류의 죄인들을 섬기시기 위해 종이 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죄인들을 섬기시기 위해 종이 되시다니 이는 너무나 큰 비하요 큰 희생입니다. 이 예수님은 실로 은혜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진리란 무엇입니까? 진리란 인생을 바르게 살아나가는 길입니다. 진리란 무엇보다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진리 그 자체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 요한복음 14:6절은 말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진리를 알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8:31절은 말합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사람들은 세상에 진리가 어디 있는가? 진리를 알 수 있는 길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알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붙들 때 진리되신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진리를 알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은 요한복음 8:32절에서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예수님의 말씀만이 우리에게 진리를 알게 하고, 진리만이 우리를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자유케 할 수 있습니다.
15절 말씀은 삽입구로서 세례 요한의 증거입니다. 요한은 육신적으로는 예수님보다 먼저 났지만 예수님이 자기보다 앞선 것은 예수님이 먼저 계신 분이시기 때문임을 증거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바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예수님은 모든 인생들을 축복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로 인생들을 축복하십니다.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조화되어 충만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얼마든지 예수님께로부터 은혜와 진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로부터 사죄의 은혜를 받을 수 있고 또 인생을 바르게 살아나가고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진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17절을 봅시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율법은 노예 근성에 쪄들어 육신과 감정을 좇아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큰 축복이었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죄로 깨닫게 하고 구원이 절실히 필요함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가정교사 역할을 합니다(갈3:24). 또한 율법은 우리에게 있는 노예근성을 빼고 쓰실만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훈련시킵니다. 이렇게 율법은 축복이지만 우리에게 구원을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은혜와 진리 만이 우리에게 생명과 참 자유와 구원을 줄 수 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고 빛이시므로 아무도 육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딤전6:16). 만일 육안으로 하나님을 본다면 곧 죽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요14:9). 예수님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되십니다.(골1:15)
예수님의 은혜와 진리가 한 분 한 분의 심령에 충만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