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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9-34(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by Mark Yang   08/14/2019   John

Message


요한복음 제 3 강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말씀: 요한복음 1:19-34
요절: 요한복음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선구자 세례 요한에 관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증거자였습니다. 우리는 그로부터 증거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며, 증거의 내용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배웁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 시간 하나님의 어린 양되신 예수님을 묵상하는 가운데 은혜 받고자 합니다.

Ⅰ.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19-28)

(ⅰ) 자기를 부인하는 세례 요한(19-21)
세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이스라엘에는 말라기 선지자 이후 약 40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이 기간은 침묵의 기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범죄로인해 침묵하셨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에 영적으로 몹시 기갈 상태에 있었습니다.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 메시야의 선구자 세례 요한을 보내셨습니다.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광야에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3:2) 그가 회개의 메세지를 전파했을 때 사람들은 부담을 느끼고 도망갔습니까? 아닙니다. 놀랍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날마다 그에게로 와서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백성들은 요한의 검소한 생활양식과 스피릿이 넘치는 살아 있는 메세지를 통해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요한에게로 나아왔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세례 요한의 사역은 날로 번창하여 온 나라를 진동시킬 정도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유대 지도자들은 몹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의 인기에 큰 위협을 느끼고 요한의 정체를 알고자 조사단을 파견하였습니다. 산헤드린에서 파송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당시 백성들이 생각하는대로 요한이 과연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알아보기 위해서 “당신은 누구요?”하며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이때 요한은 고개만 끄덕해도 메시야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숨기지 않고 공개적으로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가 어떻게 조금도 거리낌없이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이는 그 마음에 전혀 인간적인 야심이 없고 순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하고 물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삶의 스타일과 능력과 스피릿 등 여러 면에서 엘리야를 닮았습니다(눅1:17). 예수님께서도 세례 요한을 엘리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7:12). 그런데도 세례 요한은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당시 서기관들은 메시야가 오시기 전, 엘리야가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막9:11,12). 세례 요한은 자신이 그런 엘리야가 아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네가 그 선지자냐?”고 거듭 물었습니다. 이는 모세가 예언했던 선지자를 가리킵니다(신18:15). 요한은 이번에도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나는 아니라.”, “아니라”고 대답함으로써 자신에 대해서 점점 짧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기를 드러내고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자기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하고 자기 자랑하기를 좋아합니다. 오늘날은 자기 선전(self-propaganda)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를 선전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선전해 줄 것인가 생각하고 열심히 자기를 선전합니다. 신앙생활 하면서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자기가 드러나지 않으면 살 맛을 잃고 뒤집어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서 자기를 철저히 부인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선전하고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서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겸손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자기를 낮추고 그리스도를 높일 수 있었을까요?
첫째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설 때 자신이 비참한 죄인에 불과함을 잘 알았습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위대한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을 받고 칭찬을 들을 때 무엇이나 된 양 생각하고 교만해지기 쉬웠습니다. 사단은 그를 교만하게 함으로써 그가 못쓰게 되도록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단의 계략에 속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을 때 자신이 무엇이나 된 양 생각하고 교만하게 되면 사람들에게 속고, 자기 자신에게 속고, 근본적으로 사단에게 속게 됩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발견했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 그리스도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도 처음에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31-34). 다시 말하면 그는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발견하였을 때 그는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낮출 수 있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너무나 높고 위대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발견했을 때 그의 삶은 기쁨으로 충만했으며, 그리스도를 증거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발견한 사람은 다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서 자신을 적극적으로 부인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매우 교만한 자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의 이름을 본따 사울이었습니다. 그는 이름에서조차도 자신을 높이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메섹 도상으로 가는 도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겸손한 사람으로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딤전1:15), “모든 성도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엡3:8)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그리스도를 발견했을 때 그 안에서 자기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육체대로 하면 그는 자랑할 것이 많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발견했을 때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겼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하려 함이었습니다(빌3:7-9a). 그가 그리스도를 발견했을 때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었습니다.

(ⅱ)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소개하는 세례 요한(22-28)
조사반들은 마침내 신경질적으로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우리를 보낸 상관들에게 보고 할 꺼리를 주시오. 당신은 당신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를 볼 때 그들은 직업적이고 정치적이었습니다. 요한은 이번에는 분명하게 대답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이 말씀은 이사야서 40:3절에 있는 말씀으로서 메시야의 선구자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세례 요한이 이 말씀을 인용할 때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나는 왕의 선구자로서 왕중의 왕인 메시야의 오심을 선포하기 위해 온 사자에 불과하오.”라는 뜻입니다. 옛날에 왕이 행차할 때는 선구자들이 앞서 가면서 외쳤습니다. “왕이 행차하신다. 모두 다 엎드려라.” 백성들은 그 말을 듣고 모두 엎드려 왕에게 경의를 표하였습니다. 여기서 중심 인물은 왕입니다. 선구자는 왕의 행차를 준비하기 위해 외치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요한 자신은 이런 외치는 자의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소리는 의미를 전달하고 곧 사라지는 도구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요 요한은 이 말씀을 전달하는 소리였습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이번에는 바리새인들이 항의조로 요한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니면서 어찌 감히 세례를 주는거요?”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세례는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했을 때 주는 것으로써 산헤드린으로부터 자격을 부여받은 자만이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자격증도 없이 세례를 준 것은 기존 권위에 대한 큰 도전이었습니다. 그들은 요한을 통해 일어나고 있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보다 자격증과 같은 외적인 것에 더 관심을 갖는 형식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요한이 자격증도 없이 불법으로 세례를 준다고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대화의 주제를 예수님께로 돌렸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요한은 그리스도는 자신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높으신 분이심을 증거했습니다. 그 분은 너무 높으신 분이어서 자신은 그 분을 위해서 하는 것은 신들메 푸는 것 같은 비천한 일 조차도 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볼 때 예수님은 왕이시요 자신은 비천한 종에 불과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자신은 추한 죄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소개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기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오로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겨 주신 사명에 충성했습니다. 그는 참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종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큰 역사가 있습니다.

Ⅱ.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29-34)

그러면 요한은 예수님을 어떻게 증거했습니까? 29절을 보십시오. 이튿날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단의 시험을 이기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 나아 오셨습니다. 이때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감격에 찬 음성으로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은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가장 핵심있게 증거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유월절 양과 연결시켰습니다(출12:1-13). 구약에 나타난 유월절 사건이나 제사 제도나 성막 등은 장차 올 구속 역사의 모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형을 성취하신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의 권세 밑에서 노예 생활을 하며 신음했습니다. 그들은 노예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밤낮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자 모세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바로 왕은 여러가지 많은 재앙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는 것을 완강하게 거절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바로의 장자로부터 여종의 장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자들을 죽이는 장자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흠 없는 1년된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도록 하셨습니다. 마침내 무서운 심판의 날이 왔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처음난 것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쳤습니다. 애굽 전역에 큰 통곡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러나 이 무서운 심판의 밤에 죽음의 사자는 집의 문에 발린 피를 보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 때는 사람이 얼마나 소유했는가? 사회적 지위가 어떠한가? 무슨 업적을 쌓았는가? 하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때는 다만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발랐느냐? 바르지 않았느냐? 만이 문제였습니다. 어린 양의 피는 그들을 죽음의 재앙에서 구원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유월절 양이라고 부릅니다. 유월절 양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완전히 희생되었습니다.

바로의 권세는 죄와 사단의 권세를 상징합니다. 죄와 사단의 권세는 너무나 강하여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으로 죄는 우리에게 죽음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피를 흘리며 죽어야 합니다. 우리가 죄와 사단의 세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는 죄와 사단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5:7b절 말합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 어떤 것도, 그 어떤 사상도 우리를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를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18,19절은 말합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십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근본 원인은 경제 문제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교육 문제가 인간의 근본문제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회 구조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이 해결된다 할지라도 인간은 여전히 행복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가 부딪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 음란, 마약, 폭력, AIDS 등의 문제들은 겉으로 나타나는 병리 현상에 불과하지 근본 뿌리 문제는 아닙니다. 이러한 병리 현상들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떠난데서 생겨 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죄는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요,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입니다. 죄는 마치 암과 같습니다. 암 세포는 제 멋대로 자라나 마침내는 온 몸에 퍼져서 죽게 됩니다. 죄는 문둥병처럼 인간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고 사람을 추하게 만듭니다. 죄는 사람을 두렵게 합니다. 세상에는 인간 조건이 나빠서가 아니라 죄와 죄악된 습관 때문에 불행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나는 괜찮아. 나에게는 문제가 없어. 제발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속으로는 “나는 얼마나 비참한 사람인가?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랴?”하며 탄식합니다. 사람들은 일생 동안 자신들이 지은 죄로 인해 고통하며 살아갑니다. 결국 죄는 사람을 사망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히9:27). 그 심판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영원토록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이를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계21:8). 이렇게 죄는 독이 있어서 사람을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죄를 치료할 수 있는 약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히 9:22절은 말합니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 구약 시대에는 사람이 죄를 범했을 때 양이나 염소와 같은 짐승의 피를 대신 희생함으로 죄사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이고 효과도 그 때 뿐이었습니다. 이는 장차 올 참된 구속 역사의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은 점 없고 흠 없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온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보배피를 흘리셨습니다. 이로써 인간들의 죄를 완전히 속하셨습니다. 이는 단 한 번 하나님께 드린 제사였지만 다시는 번거롭게 제사 드릴 필요가 없는 영원한 속죄제사였습니다(히9:12).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피만이 죄로 더러워진 인간의 피를 깨끗케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의 피만이 죄의 독을 씻어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친히 그 몸으로 담당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셨습니다.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신 하나님의 어린 양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세례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외쳤습니다. “보라!”는 말은 모든 주의를 집중해서 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눈을 돌려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자기를 바라보던 데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던데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의 허물을 위해 채찍에 맞으시고, 나의 교만과 불순종과 정욕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보배 피를 흘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십자가의 용서의 사랑이 임하여 심령에는 사죄의 은혜가 차고 넘치게 됩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강하게 얽어매고 있던 죄의 사슬을 끊어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되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모든 문제가 시원스럽게 해결됩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자기보다 위대한 것은 예수님이 태초에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임을 증거합니다. 요한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고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로부터 성령 세례를 받을 때 우리 마음 속에 역사하는 모든 악령의 세력이 물러가고 참된 안식과 평화가 임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십니다. 이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사죄의 은혜를 충만히 덧입고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