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제 4 강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말씀: 요한복음 1:35-51
요절: 요한복음 1: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첫 번 제자들이 어떻게 메시야를 만나고 증거했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간절히 찾았고 마침내는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감격적인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그들은 신앙고백을 할 뿐만 아니라 즉시로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들의 증거는 살아 있었고 생동감이 넘쳤습니다. 그들의 증거를 통하여 생명의 역사가 창조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첫 번 제자들이 체험하고 증거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배우고자 합니다.
Ⅰ. 와 보라(35-42)
우리는 첫 번 제자들을 통하여 참된 크리스챤이 되는 몇 가지 단계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세례 요한의 증거를 듣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35-37).
35,36절을 보십시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거한 지 그 이튿날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님이 다니심을 보고 외쳤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의 메세지는 항상 같았으나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많은 사람을 자기 주위에 모으고자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나 요한은 오히려 자기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도록 도왔습니다. 이는 그들이 자기 양이 아니라 예수님의 양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자신의 인기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높이고 선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제자는 안드레와 저자 요한이었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증거를 듣고 깊은 감동을 받고 그들의 눈을 하나님의 어린 양되신 예수님께로 돌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좇으므로 요한의 제자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크리스챤이 되는 첫 번째 단계는 예수님에 관한 증거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전하는 증거의 말씀에 겸손히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둘째, 그들은 예수님을 알고자 하는 영적 소원으로 충만했습니다(38).
38,39절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두 제자 사이에 매우 짧지만 매우 의미가 있는 대화가 오고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두 제자가 예수님을 좇았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무조건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은 대답하기가 매우 쉬운 질문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막상 “내가 무엇을 구하는가?” 생각해 보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는 너무 많은 것을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내가 정말 무엇을 구하는가도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좇는 두 제자에게 이런 질문을 하신 것은 그들이 순수한 동기로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잘못된 동기와 목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병고침을 받기 위해 예수님을 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삼박자 축복을 받기 위해 예수님을 따릅니다. 또 입학 시험, 취직 시험, 고시 등 각종 시험에 붙을 것을 소망하며 예수님을 따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소심한 성격과 같은 성격적인 결함을 고쳐보기 위해 예수님을 따릅니다. 이런 사람은 소심한 성격이 고쳐져서 담대해지면 목적이 달성되었기 때문에 담대하게 떠납니다. 우리는 순수한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을 좇아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왜 예수님을 좇고 있는가? 무슨 동기와 목적으로 예수님을 좇고 있는가? 깊이 생각해 봐야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38b) 이는 동문서답 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과 깊은 사귐을 갖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인격적 사귐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자체를 알고 예수님을 체험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증거를 듣고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 증거가 참인지 직접 알아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고자 하는 영적 소원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찾는 구도자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알고자 하는 영적 소원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 과거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던 모든 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겼습니다(빌3:8). 그는 빌 3:10,1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그는 그리스도를 알되 그의 인격과 사상, 그리고 그의 고난과 죽으심, 부활의 능력 등 모든 것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알고 부활의 능력을 덧입기 위해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 생활을 했습니다. 이러한 영적 소원 때문에 그는 능력있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셋째, 그들은 메시야를 만났습니다(39,40).
39a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Come, and you will see.) 이 말씀은 와서 직접 예수님을 체험해 보면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위대해도 약점이 있고 허물과 실수가 있게 마련입니다. 멀리서 보면 흠이 없이 훌륭하게 보이는 사람도 가까이서 함께 지내 보면 실망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함께 생활하고 가까이서 알면 알수록 얼마나 놀라우신 분이신가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알면 알수록 그 깊이와 넓이를 측량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분이십니다. 누구든지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알 때 변화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벤허의 저자 월리스 장군은 동료들에게 예수님을 비판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성경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 공부를 하는 중에 예수님의 인격에 접하게 되었을 때 그는 완전히 변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증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와 보라!” 이는 참으로 은혜스러운 주님의 초청입니다. 메시야의 초청에는 전제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초청하시면서 무엇을 갖고 오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돈을 가지고 오라거나 학교 성적표를 갖고 오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또 자신이 지은 죄를 깨끗이 씻고 오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빈 손 들고 죄 있는 모습 그대로 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초청은 값없는 은혜의 초청입니다. 이사야 55:1절은 말합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와 보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생명과 쉼을 주시기 위해 초청하십니다. 마태복음 11:28절은 말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계 3:20절은 말합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누구든지 예수님의 초청의 음성을 듣고 그에게로 나아가기만 하면 예수님 안에서 무한한 사랑과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영혼의 안식과 마음의 평강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초청의 음성을 듣고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하였습니다. 때는 제 십시 즉 오후 4시였습니다. 이는 역사적인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어디로 가서 무엇을 보았는지 모릅니다. 누가복음 9:58절에 보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고 하셨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예수님을 주제 강사로 모시고 주말 수양회를 가졌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성경 공부를 했습니다. 성경 공부를 통하여 그들의 영적 눈이 떠졌습니다. 이때 그들은 예수님이 바로 약속된 메시야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의 증거대로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때 그들은 감격에 벅찬 음성으로 외쳤습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We have found the Messiah!) 이는 오랫 동안 메시야를 찾고 찾았는데 마침내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메시야란 말의 뜻이 무엇이며, 메시야가 우리를 위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메시야를 만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구원하시는 구주가 되십니다. 메시야란 “세상의 구주”란 뜻입니다. 세상에는 자신이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장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메시야가 될려면 인간들을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죄와 사망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아무도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는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인간은 슬프고 운명적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운명적인 상태에서 구원해 줄 메시야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불쌍히 여기사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 예수님만이 인류를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날 때 영원한 멸망 길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 길로들어 가게 됩니다.
둘째로, 메시야는 우리에게 존재 의미와 삶의 목적과 산 소망을 주십니다. 메시야는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개개인의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문제의 해결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인생들의 근본 문제인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해 주실 뿐만 아니라 존재 의미, 삶의 목적, 산 소망, 거룩한 사명 등 실제적인 문제도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날 때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고 보람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한 많은 열매를 맺고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메시야를 반드시 만나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죄 가운데서 죽게 됩니다(요8:24). 이는 영원한 파멸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야를 만나는 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라 생과 사의 중요한 문제입니다. 메시야를 만나는 것은 나의 생애에 있어서 B.C와 A.D를 가름하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메시야를 만났을 때 그들의 생애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어두움의 자식에서 빛의 자녀가 되고, 마귀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또 고기 낚는 무의미한 인생에서 사람 낚는 사명인의 인생이 되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약소 민족 청년들이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는 위대한 역사 창조의 일꾼들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메시야를 만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넷째, 그들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40-42a).
그들은 메시야를 만난 후 그 은혜를 자신들만 누리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를 원했습니다. 안드레는 먼저 자기 형제 시몬을 찾아가 벅찬 감격으로 증거했습니다. “형, 우리가 그토록 애타게 찾던 바로 그 메시야를 만났어!” 그리고 그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가족에게 예수님을 증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가장 먼저 형인 시몬에게 가서 증거했습니다. 안드레는 멍한 사람 같이 보이지만 포인트가 있었습니다. 그의 고백은 조금도 모호한 데가 없는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세례 요한으로부터 예수님에 관한 증거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성경 공부)을 통해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바로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그들의 증거를 통해서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올 수 있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은혜만 누리고 증거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런 하나님의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증거의 역사가 없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는 없습니다. 그러나 증거의 역사가 있는 곳에 반드시 생명의 역사가 창조됩니다. 증거는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역사 방법입니다. 고린도전서 1:21b절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단순한 증거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복잡한 신학 이론은 생명이 없습니다. 박사 학위를 가진 신학자의 이론보다 별 아는 것이 없지만 확신에 찬 학생들의 증거가 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한 증거를 통해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리석을 만큼 단순하게 가족이나 친구나 이웃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의 말씀을 증거해야 합니다.
다섯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희망으로 사람을 보십니다(42b).
안드레는 메시야를 만난 후 자기 형제 시몬을 찾아 증거하고 그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이는 자존심과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주로 자기보다 못난 사람만 예수님께로 데리고 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자기보다 훌륭한 인물이 될 베드로를 예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보시자 심히 기뻐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시몬은 충동적이고 경솔하고 모래와 같이 불안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냄새나는 어부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현재 그의 모습을 보지 않고 그에게서 장차 위대한 영적 지도자로서 성장할 어떤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의 싹을 키워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실수한다고 해서 중간에서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소망이 없다고 짜르지 않으셨습니다. 그에게 두신 소망을 끝까지 변치 않으시고 그를 쓰실만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육하셨습니다. 마침내 이 예수님의 소망대로 그는 반석과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희망이 없을 때 사람을 키울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천부적으로 부여 받은 위대한 장점이 있고 또 위대한 약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약점을 자꾸 꼬집고 물고 늘어진다면 기가 죽어 못쓰게 되고 맙니다. 그러나 부족하지만 장점을 살려주고 약점을 감당해 준다면 성장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부족한 자라 할지라도 있는 모습 그대로 영접하시고 희망을 두고 키우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희망으로 보시고 키우시는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Ⅱ. 빌립과 나다나엘을 부르신 예수님(43-51)
이튿날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고자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을 보실 때 그는 지도자감이었습니다. 그는 지성적이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제자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의 영적 권위에 압도되어 즉시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리고 친구인 나다나엘을 찾아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그러나 나다나엘은 메시야는 다윗의 동네에서 태어난다는 상식에 막혀 빌립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날 수 없다는 편견이 있었습니다. 이때 빌립은 그와 논쟁하지 않고 “와 보라!”고 초청했습니다. “와 보라!” 이 말씀은 모든 논쟁을 불식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에 대해 편견을 갖고 좋지 않게 생각했으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를 순수하고 진실된 사람으로 보셨습니다. 나다나엘은 자기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예수님의 영적 통찰력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초 자연적인 예지에 더욱 놀라 그 앞에 엎드려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 모든 상식과 편견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50, 51절은 창세기 28장에 나타난 야곱의 꿈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비유적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아마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그늘에 앉아서 창세기 28장 말씀을 읽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나다나엘에게 장차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중보자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고 자유롭게 교제할 수 있게 된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여셨습니다.
우리는 이번 봄학기에 성경공부를 통하여 메시야를 인격적으로 만나야 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증거함으로써 생명의 역사가 창조되는 생동감이 넘치는 역사가 충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