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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2:1-13:16(여호와의 유월절)

by Mark Yang   08/14/2019   Exodus

Message


출애굽기 제 4 강


여호와의 유월절


말씀: 출애굽기 12:1-13:16
요절: 출애굽기 12: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지난 강의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기 전에 여러 가지 재앙으로 바로와 애굽을 치신 것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재앙의 역사를 통해서 애굽에 있는 모든 신들은 헛것이며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신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장엄한 출애굽 역사에 관한 말씀입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간의 굴욕적인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새 역사를 시작하는 역사의 출발점이라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그보다도 여기에는 구속역사의 모형으로 장차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될 구속역사의 비밀이 계시되어 있다는데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무서운 진노의 심판 가운데서 어린 양의 피로 죄인들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배우고자 합니다.

Ⅰ. 유월절 어린 양(12:1-13, 21-42)

바로가 계속되는 재앙에도 끝까지 회개치 않고 마음을 강퍅케 하자 하나님께서는 최후로 장자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이는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까지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이 다 죽는 것이었습니다. 반복된 경고에도 듣지 않을 때 갑작스럽고도 혹독한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그런데 장자는 애굽인의 장자만이 아니라 애굽 가운데 있는 모든 장자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장자도 포함되었습니다. 이렇게 애굽 안에 있는 모든 장자가 죽임을 당해야 하는 이유는 종과 횡으로 애굽에 죄악이 넘쳤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죽음의 심판은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도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스라엘을 구별하사 장자 재앙을 면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장자 나라로 택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구속하사 만 백성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알리는 제사장 나라로 쓰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속하시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방향을 주셨습니까?

첫째, 어린 양을 취하라(1-10).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하는 그 달을 해의 첫달이 되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달은 아빕월 또는 니산월로서 양력으로는 3월말 또는 4월초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출애굽한 그날부터 역사의 시작을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지난 430년 동안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출애굽한 그날부터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 뿐 아니라 개인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와 사단의 노예로 살던 지난 날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예수님의 보배 피로 거듭나서 하나님을 섬기는 바로 그때부터 의미 있는 역사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가족 단위로 어린 양을 취하라고 하셨습니다. 한 마리를 먹는 식구의 수는 대개 10명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인구가 약 200만 명이었다고 하면 출애굽 역사를 위해 약 20만 마리의 양이 희생되었습니다. 어린 양을 가족 단위로 잡아서 유월절 식사를 하도록 한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는 가족이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이루는 기본 단위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이 건전하지 못하면 결코 구원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날 미국이 영적으로 황폐하게 된 것은 높은 이혼율로 인해 가정이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가족 복음화에서 시작됩니다. 각 가정은 하나님께 제단을 쌓는 가정 교회(house church)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가족 복음화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그들이 취할 어린 양은 흠 없고 일년 된 수컷이어야 합니다. 이는 일년 된 수컷이 가장 활발한 청년기의 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생명이 가장 왕성하신 33세 때 유월절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 흠 없는 양이어야 하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열납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레22:21,22). 온전한 희생만이 온전하신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 없이 흠 없고 점 없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유월절 희생이 되셨습니다.(벧전1:18,19)
어린 양은 그 달 열흘에 취하여 14일까지 간직하였다가 14일 해 질 때에 어린 양을 잡으라고 하십니다. 왜 나흘 동안 간직한 후에 양을 잡으라고 하셨을까요? 이는 그 사이에 흠이 발견되면 교체할 시간을 갖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니 그보다도 자기들을 위해 대신 희생될 양과 함께 거하는 동안 구원의 은혜를 마음에 새기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4일 해 질 때에 양을 잡은 후 그 피는 양을 먹을 집의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릅니다. 그리고 고기는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그 날 밤에 먹어야 하고 아침까지 남겨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 밤에 유월절 잔치가 벌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잔치는 먹고 마시고 즐기기 위한 잔치가 아닙니다. 이는 어린 양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구원의 은혜를 새기기 위한 잔치입니다. 무교병과 쓴 나물은 애굽에서의 고난을 상징하는 것이요, 양의 고기는 희생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특히 고기를 먹되 날로 회를 해서 먹거나, 물에 삶아서 먹거나, 끓여서 찌개를 해서 먹어서도 안 되고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하나도 남김 없이 모두 불에 구워 먹어야 됩니다. 불에 굽는 것은 정결케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유월절 양은 완전히 희생 되었습니다. 이런 희생을 통해 출애굽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는 장차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우리 죄를 위해 보배 피를 흘리시고 고귀한 살을 찢기심으로 자신을 완전히 희생하실 것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 받게 된 것은 우리 주님의 완전한 희생 때문입니다.

둘째, 너희는 이렇게 먹으라(11).
그들이 유월절 음식을 먹되 어떤 자세로 먹어야 되는 것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보통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는 허리띠를 풀고 느긋하게 먹습니다. 대화를 나누며 때로는 소화가 잘 되라고 음악을 들으며 여유 있게 식사를 합니다. 그런데 유월절 음식을 먹을 때는 도리어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는 포크 대신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먹으면 체하기 알맞습니다. 이는 마치 군대의 5분 대기조가 완전무장을 한 후에 급히 식사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엇이 급하기에 이런 자세로 먹으라고 하십니까? 이는 출애굽 역사가 그만큼 긴박하고 조금도 지체할 수 없음을 말해 줍니다. 또한 출애굽 역사에는 단호한 결단의 자세가 필요함을 말해 줍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기를 지체할 때 바로의 세력에 붙잡히게 됩니다.
롯은 소돔, 고모라 성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대한 미련을 끊지 못해 지체하고 머뭇거렸습니다. 결국 그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리고 롯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구원의 은혜를 감당치 못했습니다. 우리가 애굽에서 떠날 때 조금도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애굽에 대한 미련을 철저하게 끊고 단호한 자세로 애굽을 떠나야 합니다.

셋째, 그 피가 표적이 되리라(12,13).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을 철저히 준비시키신 후 장자 재앙을 내리십니다. 12, 13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되리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우리는 심판의 하나님과 구원의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심판의 하나님.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장자를 멸하시겠다는 것은 애굽에 대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장자를 치시는 것은 뜻이 있습니다. 장자는 기력의 시작이요 혈통을 잇는 계승자입니다. 낳기 힘든 장자를 친다는 것은 애굽의 머리를 치고 숨통을 끊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때까지 모세를 통해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장자 재앙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을 치시는 것은 우상 숭배에 대한 심판이요 하나님의 주권에 굴복치 않는 교만에 대한 심판입니다. 한마디로 죄에 대한 심판입니다. 바로는 수없이 범죄하고도 후회만 하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오래 참으셨습니다. 바로는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멸시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한정 참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끝내 회개치 아니할 때 반드시 그 죄악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인생들로부터 만홀히 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갈6:7)
어떤 사람은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당장에 벌하지 않으신다고 해서 반복해서 죄를 짓습니다. 처음에는 양심에 죄책감을 느끼며 괴로워하다가 나중에는 양심이 무디어져서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자고해져서 죄짓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가 되면 반드시 그 행한 대로 심판하십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히9:27).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그 몸으로 행한 대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고후 5:10).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심판은 필연적이고 그 심판은 무섭습니다. 우리가 회개치 아니할 때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그 목에 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생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셨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하나씩 하나씩 장자들을 칠 때 아무도 그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 밤에 바로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전무후무한 큰 호곡이 있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우리가 다 죽은 자가 되었다.” 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빨리 애굽을 떠나도록 재촉했습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임할 때 그렇게 교만하던 바로도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둘째, 구원의 하나님. 하나님은 무서운 심판 가운데서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13). 이 말씀은 좌우 문설주에 바른 어린 양의 피를 보고 무서운 진노의 심판을 면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는 참으로 은혜롭고 보배로운 약속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3:16절 말씀을 사랑합니다. 이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냥 심판을 면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전제가 있습니다. 이는 어린 양의 피를 표적으로 삼고 그 피를 보고 이스라엘을 넘어가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어린 양의 피를 구원의 표적으로 삼았을까요? 그냥 봐 주시거나 붉은 천 같은 것으로 표적을 삼지 않고 왜 아무 죄 없는 어린 양을 희생시켜서 그 피를 바르도록 하셨을까요? 어린 양의 피가 무슨 역할을 하는 것입니까? 첫째로, 어린 양의 피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하는 역할을 합니다. 레위기 17:11절을 보면 피는 생명을 뜻합니다.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은 바로 생명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죄는 생명, 즉 피를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피흘림이 없이는 죄 문제가 해결될 수 없고 생명을 속할 수 없습니다(히9:22). 어린 양의 피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하는 대속의 역할을 합니다.
둘째로, 어린 양의 피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고 멸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빈부귀천,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예외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피를 보시고 심판을 면해 주시고 넘어가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도덕적 행위나 학력이나 사회적 지위나 업적을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단 한 가지 어린 양의 피를 그 마음에 발랐는가 안 발랐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피를 보실 때 진노를 누그러뜨리십니다. 그러므로 어린 양의 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나 하나님께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린 양의 피를 보시고 이스라엘을 무서운 진노의 심판 가운데서 구원하신 것은 택한 백성을 향한 크신 사랑 때문입니다. 죽음의 사자가 가가호호를 방문하며 하나씩 하나씩 장자를 칠 때 그들은 이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심판 앞에 전율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애굽 사람들의 통곡 소리가 온 누리에 퍼질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목이 메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찬송을 했을 것입니다.
어린 양의 희생으로 구원 받게 된 것은 장차 올 구속 역사의 예표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을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제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그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잔치를 하실 때 떡과 잔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6-28).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신 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심판을 면하고 구원 받게 된 것은 오직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로마서 5:9절은 말합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리 인간 조건이 훌륭하고 부족함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출애굽의 역사는 피의 은혜를 덧입고 중생하는 데서 일어납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죄의 사슬에서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빠져 나오고자 몸부림치면 칠수록 죄의 사슬은 더욱 더 우리를 옭아맵니다. 우리는 정말 죄악된 옛 생활을 청산하고 새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죄악된 구습을 끊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 단단히 결심도 하지만 작심 3일입니다. 그러면 내 의지가 이렇게 약한가 자신의 무력함을 탄식하며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게 됩니다. 우리는 절대로 우리 스스로의 힘과 의지와 노력으로 죄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피는 죄의 사슬을 끊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무력함을 철저히 깨닫고 온전히 예수님의 피를 믿을 때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의 능력을 찬양합니다.

넷째, 여호와의 밤(21-42).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 주고 출애굽 역사를 준비시켰습니다(21-28). 이스라엘은 마침내 어린 양의 희생으로 출애굽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영광의 탈출의 노래를 부르며 200만 대군이 라암셋에서 발행하여 숙곳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그들이 애굽에 거주한지 430년 만이었습니다. 그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애굽에서 당당히 나왔습니다. 그 밤은 여호와의 밤으로서 가장 영광스럽고 엄숙한 밤이었습니다.
이러한 출애굽의 장엄한 역사는 자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권능과 지도자 모세의 영적 지도력과 백성들의 순종하는 믿음이 삼위일체가 되어 일어난 역사입니다. 어떤 사람은 죄를 회개하고 순종하지는 않고 하나님께서 크신 권능으로 자기를 출애굽시켜 주기만을 바랍니다. 이는 하나님의 권능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역사에는 우리의 순종하는 믿음이 절대적으로 요구됩니다.

Ⅱ. 유월절 규례(12:14-20, 24-28, 43-51, 13:1-16)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유월절 규례를 만들어서 이것을 대대로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누룩을 제하라(15-20). 유월절을 기념하여 7일 동안에는 무교병을 먹고 누룩을 철저히 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누룩을 제하되 네 지경 안에서 보이지도 말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애굽의 좋지 못한 영향력을 철저히 제거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생활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죄악된 생활이 몸에 깊이 배었을 것입니다. 안일주의와 물질주의 또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사는 인본주의, 쾌락주의의 누룩이 생활 구석구석에 끼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누룩을 철저히 제거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남겨 둘 때 그것이 순식간에 퍼져 전체를 못쓰게 만듭니다. 적은 누룩이 출애굽의 은혜를 헛되게 합니다.
성경에서 누룩은 악을 상징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내에 역사하는 음란의 누룩을 언급하면서 누룩의 악영향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고전 5:6-8). 누룩은 악영향을 끼칩니다. 우리가 죄악된 습관을 벗어버리지 아니할 때 그것은 나 한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끼쳐 병들게 만들고 하나님의 역사를 망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보지 않기 때문에 몰래 누룩있는 떡을 먹기 쉽습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냄새는 속일 수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 복음적인 냄새가 나는가, 구린내가 나는가 하는 것은 냄새를 맡아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누룩을 제하는 것은 성화로서 구원 받은 후 성결한 생활을 해야 함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애굽의 삶의 양식과 사고방법을 버려야 합니다. 구속 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노래도 유행가 대신 찬송가를 하고 언어도 세상적인 언어를 버리고 복음적인 언어를 써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있지만 그 영향력을 상실하고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은 신앙 따로, 생활 따로, 따로 국밥과 같은 신앙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애굽의 누룩을 온전히 제거해야 합니다.

둘째, 영원한 규례(12:14, 24-28, 43-51, 13:1-16). 12:14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유월절 사건을 중히 여기고 대대로 지키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은 인간들이 얼마나 간사한가를 잘 아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쉽게 잊어버리는 좋지 못한 습성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과연 여호수아가 죽자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유월절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요시야나 히스기야와 같은 왕들이 종교개혁을 한 후 회개의 열매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유월절을 지키는 것은 믿음의 중심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유월절 음식을 나누시면서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사실을 매일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힘찬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43-51절에서는 이방인일지라도 할례를 받으면 유월절 잔치에 참예할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이는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의 잔치에 참예할 수 있다는 복음의 보편성을 예표해 주는 것입니다.

과거 우리는 죄와 사단의 종으로 살다가 영원히 파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 되신 예수님의 보배 피로 우리를 값주고 사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 인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헛된 우상을 섬기지 않고 참 하나님을 섬기는 복된 사명인의 인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또한 새 가나안인 하나님 나라를 희망하며 희망찬 인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이는 오직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크신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