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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1-15(거듭남과 하나님의 나라)

by Mark Yang   08/14/2019   John

Message


요한복음 제 6 강


성전을 깨끗케 하신 예수님


말씀: 요한복음 2:12-25
요절: 요한복음 2: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우리는 지난 주일 2:1-11절에서 예수님께서 쓸모 없는 물을 쓸모있는 포도주로 변화시키심으로 혼인 잔치를 축복하신 것을 배웠습니다. 이 예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시요 축복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케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무섭게 채찍을 휘두르시고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다 내어쫓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요,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두 사건은 예수님의 양면성을 잘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은혜의 예수님 뿐만 아니라 진리의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축복의 예수님 뿐만 아니라 공의와 심판의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Ⅰ.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12-17)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혼인 잔치를 축복하신 후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 가셨습니다. 거기서 며칠 계시다가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때는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 때였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유대 성인 남자들은 유월절과 오순절과 장막절에 일년에 세 차례 성전에 가서 하나님께 자신을 보여야 했습니다(신16:16).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율법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습니다.(마5:17)

유월절은 유대의 모든 명절 중에서 가장 큰 명절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바로의 권세로부터 벗어난 구원의 은혜를 새롭게 기억하면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일주일 동안 계속되는 무교절에는 애굽에서의 고난을 기억하면서 누룩 없는 떡을 먹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집안을 샅샅이 살펴 누룩을 제해야 했습니다. 이 누룩은 인간의 욕망 곧 탐심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과거 출애굽 하기 전에 애굽에서 가졌던 세상 욕심을 버리고 순수하고 진실된 마음을 가져야 했습니다.

신약의 유월절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이 되사 보배로운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해 주신 사건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늘 구원의 은혜를 새롭게 기억하면서 유월절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에서부터 인본주의의 누룩을 제하고 순수하고 진실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 당시 성전의 형편은 어떠했습니까? 유대인들이 삼대 명절 때마다 성전에 가서 하나님께 자신을 보일 때는 빈손으로 가면 안되고 하나님께서 복 주신대로 힘대로 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신16:17). 또 19세 이상되는 모든 유대인들은 성전세를 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외국의 동전은 이방 왕에게 복종을 상징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기 때문에 성전을 더럽히는 것으로 생각되어 반드시 성전 화폐인 세겔로 내야 했습니다. 각국에서 온 순례자들은 제물로 사용할 소와 양과 비둘기가 필요했고, 또 자기 나라에서 통용하는 돈을 세겔로 바꾸는 환전상이 필요했습니다. 처음에는 먼 곳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예배하러 오는 순례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순수한 목적으로 시장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후에는 이것이 폭리를 취하는 종교 시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 바쳐야 할 제물들은 흠이 없어야 되었으므로 제사장들은 이를 이용하여 장사꾼들과 짜고 폭리를 취했습니다. 환전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를 “강도의 굴혈”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시장은 이방인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오는 이방인의 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방인들 가운데 진리를 찾고자 하는 자들이 성전에 나아오면 이런 세속화된 분위기로 인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이곳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장려되고 번성하기 보다 오히려 방해를 받고 무가치하게 여겨졌습니다. 하나님과의 조용한 교제를 나누기 위해 성전에 나아오는 자들은 상인들의 외치는 소리와 짐승들의 우는 소리로 인해 경건한 마음은 산산이 부숴져 버렸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사리사욕으로 인해 성전은 강도의 굴혈이 되어버렸습니다. 정치 지도자들이 백성의 얼굴이라면, 종교 지도자들은 백성의 양심입니다. 그들은 마땅히 백성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섬기기 위해 말씀의 샘을 파야 했습니다. 유월절의 영적 의미를 마음에 새기고 백성들이 모든 세상 탐심의 누룩을 제하고 하나님께 대한 순수하고 진실된 믿음을 갖도록 말씀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유월절 기간 중에 어떻게 대목을 볼 것인가 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보다도 돈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열심히 예배를 드렸지만 그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습니다.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었으나 능력은 없었습니다. 그들의 내면은 부패할 대로 부패하여 심한 악취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곪을 대로 곪아 수술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보셨을 때 몹시 분노하셨습니다. 성전에는 1대1 말씀 공부 소리, 기도 소리 및 찬송 소리 대신에 장사치들의 외치는 소리, 짐승의 우는 소리, 돈 바꾸는 동전 소리로 인해 시끄러웠습니다. 성전은 완전히 남대문 시장같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를 보신 예수님의 눈에는 진노의 불길이 타 올랐습니다.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과 소를 다 내어 쫓으셨습니다. 돈을 쏟고 상을 엎으셨습니다. 비둘기 파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장사꾼들은 성전에서 도망치듯 쫓겨 났습니다. 하나님의 공포가 그들에게 임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분노에 차서 행동하실 때도 분별을 잃지 않으시고 지혜롭게 행동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사야 52:13절에 보면 “보라, 내 종이 지혜롭게 행하리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무서운 분노 가운데서도 신중하게 행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소와 양들을 몰아내심으로 그것들 중 하나라도 잃어 버릴 위험은 없었습니다. 또 비둘기도 날려 보내지 않으시고 그것들을 가져가라고 명하셨습니다. 돈도 바닥에 엎으심으로 주인이 모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분을 내면 감정에 사로잡혀 자제력을 상실하고 함부로 말을 하거나 혈기를 부림으로 불신자들에게 꼬투리가 잡혀 일을 어렵게 만들 경우가 많습니다. 화를 내더라도 혈기를 부리지 않고 열정과 함께 지혜롭게 화를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화를 내더도 신중하게, 지혜롭게 행동할 수 있도록 절제의 영을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채찍을 만들어서 짐승들과 장사치들을 내어 쫓으시고 성전을 깨끗케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혼인 잔치 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심으로 인생들을 축복하신 예수님의 모습과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은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초청하시는 은혜스러운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또 예수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신다”고 하셨습니다(마11:28). 예수님은 이렇게 은혜와 사랑과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은혜가 충만하실 뿐만 아니라 진리가 충만하십니다. 예수님은 불의를 용납치 않으시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거짓된 종교 지도자들은 심하게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13-33) 이 예수님은 의로우신 예수님, 공의로 심판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예수님은 어떤 몹쓸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자기에게 겸손하게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는 누구나 용납하시고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진리를 짓밟고 거짓되고 위선적인 자들에게는 무서운 진노를 발하십니다. 예수님은 의를 따라 상주실 뿐만 아니라 죄를 벌하시는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분노하셨을까요?
첫째로,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16). 성전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서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또한 성전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입니다. 언약궤는 성전에서 가장 거룩한 곳인 지성소 안에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성전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영혼의 쉼을 누리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해야 됩니다. 또한 성전은 죄사함을 받는 곳입니다. 언약궤 위에는 속죄소가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범죄할 때마다 성전에 나아가 죄 사함을 받고 새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성전은 이스라엘의 영적 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의 중심이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도 자기 방에 가서 예루살렘의 전을 향하여 열린 창에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단6:10). 또한 시편 기자는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고백했습니다.(시84:10)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돈으로 바꾸었습니다.그들은 실제적인 무신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시대의 모든 악의 근원이었습니다.

저자 마가는 이사야서 56:7절 말씀을 인용하여 성전이 어떤 곳이 되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막11:17) 하나님은 이방인들도 구원받기 위하여 성전에 나아오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이 세상 만민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집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만민 구원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눈 앞에 놓인 작은 유익만을 생각하고 탐욕의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을 막는 큰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치료 불가능할 정도로 죄에 깊이 병들어 있었습니다.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분노하신 이유는 진리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습니다(17). 제자들은 예수님이 당시 권세 잡은 종교 지도자들을 화나게 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을 만큼 매우 놀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무모한 도전을 하시는 것이 아닌가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 이때 성경 말씀을 기억함으로 속두려움을 극복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제자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성경 말씀을 기초로 이해하고자 애를 썼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분노하셨는가 하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이 시장바닥과 같이 된 것을 참으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바로 진리에 대한 열정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에 대한 열정으로 불타셨습니다. 이 말씀은 시편 69:9절을 인용한 것인데 이 말씀의 뜻은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정으로 인해 사람들의 비방과 훼방이 그에게 미치고 심지어는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까지 되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이 사건으로 인해 원수들에게 미움을 받아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권세 잡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도전한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내걸면서까지 불의의 세력에 도전하셨습니다. 이는 불의를 미워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불의를 미워하지 않는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진리를 사랑한다면 불의를 미워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죄악에 도전하신 또 다른 이유는 그들에 대한 상한 목자의 심령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자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죄악에 도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의를 행하는 데 있어서 자신을 돌아보지 아니하시고 용감히 행동하셨습니다. 이것 또한 진리에 대한 열정으로 불타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불의를 행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의롭고 진실되게 살면 눈총을 받고 따돌림을 당하고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 불의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의롭고 진실되게 살기를 원하지만 세상이 너무 불의하고 악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불의한 현실과 타협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나는 연약하여 불의한 세상을 이길 힘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약한 것이 아니라 악한 것이요, 또한 그 마음 속에 진리를 사랑하는 불타는 열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대한 열정이 있을 때 불의한 환경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비방과 핍박이 있더라도 이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용감하게 의를 행할 수 있습니다. 모든 역경을 이기고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진리에 대한 열정이 있을 때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모든 고통을 이기고 심지어 죽음 조차도 이길 수 있습니다.

조율이 자매님은 믿음으로 살자 부모님들이 핍박을 하러 서울에 올라오다가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오히려 아버님을 극진히 간호하고 주말에는 반대를 무릅쓰고 안식일을 절대적으로 지키고자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 서울에 올라왔습니다. 한 두 주일이 아니라 지난 4개월 동안 한번도 빠지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감당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심령에는 잔잔한 기쁨이 흘러 넘쳤습니다. 이는 그 심령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대한 열정이 모든 역경을 삼키고 승리의 인생을 살게 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아버지의 병도 점점 호전되고 가정에 좋은 믿음의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열정의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특히 이방선교는 지식의 사람보다 뜨거운 마음을 소유한 진리에 대한 열정의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무디는 “큰 열정과 적은 지식을 소유한 사람과 많은 지식과 작은 열정을 소유한 두 사람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언제나 열정의 사람을 택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리에 대한 불타는 열정을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Ⅱ. 성전되신 예수님(18-25)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케 하시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심하게 반발했습니다. 그들은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으로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하며 표적을 구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그들에게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엄청난 표적을 보여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으로 꽉 막혀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성전을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그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고 비웃었습니다. 당시 성전은 절대시 되었기 때문에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겠다는 것은 신성 모독에 해당됩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 말씀 때문에 고소를 받아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비로소 영적인 눈을 뜨고 성경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이 친히 성전이 되심을 선포하셨습니다. 성전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데 이를 구분하는 것이 휘장입니다. 이 휘장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악된 인간 사이에 가로 놓여 있는 죄의 장벽을 상징합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심으로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막15:38). 휘장은 예수님의 육체를 가리킵니다(히10:20b). 이로써 예수님은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The new and living way)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느 때든지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히10:19,20). 예수님께서 친히 성전이 되심으로 눈에 보이는 성전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또 짐승을 잡아 드리는 물질적이고 의식적인 제사도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죄 문제를 해결함 받을 수 있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죄사함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고 소망이 있고 참된 화목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정복하시고 영원한 생명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친히 우리의 성전이 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제자들의 말씀에 대한 자세를 배웁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성전을 깨끗케 하실 때 너무 혁명적인 사건이라 인간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그들은 사건에 부딪힐 때마다 말씀을 기억하고 말씀을 기초로 생각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을 하실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를 튕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가 후에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에야 그 말씀을 기억하고 믿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의 기초는 감정이나 기적이 아니라 성경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부족하지만 말씀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이때 그들은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의 신앙은 말씀에 기초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상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믿음을 인정치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 속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24,25). 예수님은 우리가 무엇을 기초로, 무슨 동기로 예수님을 믿는가를 잘 아십니다.

고전 6:19절은 우리의 몸이 성령께서 거하시는 전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을 주로 모셔야 합니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돈을 사랑하는 마음과 음란과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증오심과 세상 욕심으로 가득찬다면 주님께서 분노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히 채워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