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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1-15(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by Mark Yang   08/14/2019   John

Message


요한복음 제 7 강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말씀: 요한복음 3:1-15
요절: 요한복음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부와 권력을 얻는 것일까요? 명예를 얻는 것일까요? 사랑을 얻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본문은 영생을 얻는 길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중생은 가장 신비스러운 것이요 또 가장 절실한 것입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중생은 근본적인 본성의 변화로서 이는 장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살 수 있도록 해 줄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현재의 삶을 바르고 행복하게 살아나갈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는 성공했지만 거듭나지 못해 인생에서는 실패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왜 거듭나야 하며,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가 하는 심오한 영적 비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Ⅰ.거듭나야 합니다(1-8)

첫째, 사람이 왜 거듭나야 하는가?(1-3)
니고데모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1절 말씀은 니고데모의 종교적, 사회적 신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으로서 종교 지도자였습니다. 바리새인이란 ‘분리된 자’,‘구별된 자’란 뜻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방 문화에 물들지 않고 선민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율법을 엄격하게 지킴으로 일반 대중과 구별된 생활을 했습니다. 바리새파는 B.C 5세기 경 에스라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70년 동안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함으로써 이방 문화에 동화되어 선민의식을 상실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에스라는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가르치기로 결심하고 이방 문화와 싸웠습니다(스7:10). 그 후 B.C 2세기 경 이스라엘이 헬라의 지배 아래 있을 때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가 유대를 헬라화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목숨을 내놓고 율법을 지킨 경건주의자들이 바리새인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약 6,000명의 회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한 열심으로 인해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형식적이 되어 위선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바리새인이 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이 되려면 어릴 때부터 엄격한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모세 오경을 통째로 다 외워야 했고 성문화된 율법서인 미쉬나와 그 주석서인 탈무드를 공부해야 했습니다. 또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하루에 세 번 목욕하는 것과 같은 까다로운 규칙을 지켜야 했습니다. 바리새인으로 입단하기 전에 평생 율법을 지킬 것을 3명 이상의 증인 앞에서 선서해야 했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라는 존경 받는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 젊은 날 육신의 욕망을 부인하고 자기와의 부단한 투쟁을 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유대인의 관원으로서 산헤드린이라 불리우는 소수의 선택된 집단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산헤드린은 70명으로 구성된 유대 최고 통치 기구였습니다. 이곳에서는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유대인의 종교적 문제를 다스리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형까지 선고할 정도로 그 권세는 대단하였습니다. 이러한 산헤드린 회원이 되려면 가문도 좋아야 되고 학문적으로도 뛰어나야 했습니다. 또한 가난하고 짓밟힌 나라 형편에도 불구하고 부자여야 했습니다. 니고데모는 이 모든 조건을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니고데모란 이름은 ‘백성의 정복자’란 뜻입니다. 그는 이름에 걸맞게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을 대표하였습니다. 그는 최고의 지성과 권세와 명예와 부를 소유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행복한 자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이상의 것, 곧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했습니다.

어느 봄 날 조용한 밤에 니고데모가 그렌즈 사두마차를 타고 예수님을 찾아와 방문을 노크 했습니다. 그가 왜 밤에 예수님께 왔을까요? 높은 지위와 고귀한 신분 때문에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낮에는 업무가 너무 바빴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예수님께서 낮에는 무리들에 의해 둘려 쌓여 계시기 때문에 조용하게 대화를 나누기 위해 밤에 찾아 왔을까요? 그러나 요한복음적으로 볼 때 밤은 어두움을 상징합니다. 이는 그의 내면이 밤과 같이 어둡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는 너무 절망하여 밤에 예수님께 오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그는 표적 때문에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가 왜 표적에 관심을 가졌을까요? 이는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 무엇인가 기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 풀리지 않는 인생 문제를 기적적으로 해결 받고 싶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산헤드린 제복을 입고 가슴에 금 뱃지를 달고 그렌즈 사두마차를 몰았기 때문에 겉으로는 모든 사람들의 흠모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불행했습니다. 니고데모는 자신이 원하는 부와 명예와 권력을 얻으면 늘 행복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것들을 얻었을 때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취한 뒤에 오는 공허감과 절망감이 무섭게 그에게 엄습하였습니다. 영국의 노벨 문학상을 받은 바 있는 『버나드 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절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실패했을 때 오는 절망이고, 다른 하나는 성공했을 때 오는 절망이다. 참으로 무서운 것은 전자가 아니고 후자다.” 실패할 때 절망은 다시 노력하여 극복할 수 있지만, 성공 후의 절망은 그 무엇으로도 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는 열심히 노력하여 성공의 정점에 섰으나 그 후부터 그의 인생은 정점에서 미끄러져 내려가는 내리막길이었습니다. 그의 희망이 컸던 만큼 절망도 컸고, 그의 명성이 컸던 만큼 삶의 고통은 더욱 컸습니다. 니고데모는 자신이 늙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늙고 지쳤습니다. 그가 늙고 지쳤을 때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그의 인생 위에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니고데모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한 눈에 그의 내면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종교적인 열심과 사회적인 지위와 부와 권세와 명예가 그에게 만족과 기쁨을 주지 못함을 보셨습니다. 아니 오히려 이로 인해 심한 허탈과 절망감에 빠져 있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없음을 보셨습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없기 때문에 아무리 원하는 것을 다 얻어도 행복이 없었습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 자와 없는 자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 자는 험한 세상을 살면서도 그 심령에 말할 수 없는 영적 기쁨과 하늘 나라의 평화를 맛보며 살아갑니다. 또한 어떤 역경에 처할지라도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허무와 운명주의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기 때문에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으로 인해 즐거워합니다.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그 어디를 가든지 천국을 맛보며 살아 갑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없는 자들은 무엇을 하나 행복이 없고 아무리 좋은 환경 가운데 있어도 지옥을 맛보며 살아 갑니다. 사람이 그 마음에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려면 거듭나야 합니다.

그러면 ‘거듭난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거듭난다’는 것은 ‘위로부터 난다’, ‘새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위로부터 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고,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본질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아담 안에서의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듭나는 것은 조건 개선이나 개혁이나 정화가 아니라 새로운 창조입니다. 이는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는 것이요(고후5:17), 마귀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입니다(요1:12).

그러면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은 아담의 죄의 본성을 타고나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에 있으며 본질상 진노의 자식입니다(엡2:1-3). 사는 날 동안에도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을 뿐만 아니라 죽은 다음에도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사람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심판은 1,2년 감옥살이 하는 것이 아니라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영원토록 고통하는 것입니다. 이를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계21:8). 이처럼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받게 될 결과는 치명적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인간성이 훌륭하고 선한 일을 많이 했다 할지라도 거듭나지 않으면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사람이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받고 영원한 행복을 누릴려면 반드시 거듭나야 합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이라고 말씀하심으로 니고데모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다 거듭나야 함을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남의 문제는 인간 행 불행의 문제요 생과 사의 중대한 문제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것이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권세입니까? 사랑입니까? 아닙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영적 생명 만큼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사람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었다 할지라도 그 영혼이 영원한 파멸에 처한다면 이는 가장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을 잃고 심지어 목숨을 잃는다 할지라도 그 영혼이 구원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처럼 축복된 것은 없습니다.

둘째, 사람이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가?(4-6)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할 필연성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니고데모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4) 그는 노박사였으나 영적 세계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거듭나는 진리조차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그가 육에 속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비록 신학 박사라 할지라도 영적 세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고전2:14).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지만 영적 세계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중생을 생물학적으로 해석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아니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의 태도에 조금도 화를 내지 않으시고 사람이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가 인내심을 가지고 조근조근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파멸해 가는 한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목자의 심정으로 충만하셨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은 회개를 의미합니다(막1:4). 또한 성령은 언제나 생명과 관련이 있습니다. 또 성령은 진리의 말씀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습니다. 벧전 1:23절은 우리가 거듭난 것이 썩지 아니할 씨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다고 말합니다. 또 야고보서 1:18절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진실되게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 때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서 친히 능력으로 역사하여 변하여 새 사람 되게 하십니다. 거듭나게 하는 역사는 우리 인간의 힘이 미칠 수 없는 것으로서 전적으로 성령께 속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육적 탄생이 있듯이 영적 탄생이 있음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6,7). 육으로 난 것은 아무리 교육을 많이 시켜 교화시켜도 여전히 육입니다. 그것은 세련된 육일 수도 있고, 이성적인 육일 수도 있고, 종교적인 육일 수도 있습니다. 육은 아무리 성장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육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난 것은 영으로서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릅니다. 사람이 육으로 태어날 때 그 부모의 본성을 이어 받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성령으로 태어나면 하나님의 본성을 부여 받게 되어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됩니다(벧후1:4).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면 그 내면에 하나님의 생명의 씨가 떨어져서 점점 영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거듭난 사람은 성령의 지배를 받고 성령을 좇습니다(롬8:4,9). 거듭난 사람은 가치관이 다르고 소망이 다릅니다. 거듭난 사람은 자기 중심으로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 갑니다.

셋째, 성령의 역사(7,8)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이히 여기기만 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바람을 비유로 들어 성령의 역사를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성령과 바람은 헬라어로 똑 같이 프뉴마(πνευμα)로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언어적인 뉴앙스가 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바람은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에서도 그 정체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바람은 임으로 붑니다. 바람은 아무데서나 불고 아무 때나 불고 아무렇게나 붑니다. 바람은 그 움직임을 설명할 수 없고 예측할 수도 없습니다. 이는 신비에 속한 일입니다. 우리는 바람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분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고 또 바람이 불므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그 뜻대로 주권적으로 역사하십니다. 바람이 산들산들 불기도 하고, 나무나 집을 쓰러뜨릴 만큼 강하게 부는 것과 같이, 성령도 때로는 비둘기 같이 조용히 역사하기도 하시고 때로는 불과 같이 강하게 뜨겁게 역사하기도 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산들 바람과 같이 아주 부드럽게 역사하여 그 변화가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사도 바울의 경우와 같이 강하고 극적으로 역사하여 그 변화가 뚜렷합니다.
바람은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이성으로 분석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바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바람이 분다는 사실을 의심치 않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의 역사도 눈으로 볼 수 없고 이성으로 분석할 수 없고 또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정은 알지 못하지만 거듭난 자의 말과 행동과 생활에서 나타난 결과를 통해 성령의 역사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예수님을 욕하고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자가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변화되어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고 또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는 자가 됩니다. 또한 슬프고 운명적인 자가 밝고 환한 섭리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거듭난 자는 인생관과 가치관이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Ⅱ.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9-15)

첫째, 증거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9-13)
예수님은 이때까지 니고데모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제 니고데모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하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튕겼습니다. 그는 교만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의 교만한 마음 때문에 생명의 빛이 그의 심령에 역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포기하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포기치 않으시고 이제는 책망하심으로 완악한 그의 마음을 깨뜨리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마다 “어찌, 어찌” 하는 그에게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어찌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11,12절에서 그의 근본 문제가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는 교만임을 지적하셨습니다. 그가 왜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고자 했을까요? 이는 변화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니고데모와 같이 변화되기를 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변화되기를 두려워합니다. 이는 변화되면 자기 존재가 말살되고 이때까지 쌓아온 모든 것이 다 무너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자기 존재가 말살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씨앗이 죽지 않고서는 새로운 생명이 탄생될 수 없듯이, 옛 자아가 죽지 않고서는 새로운 자아가 탄생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땅의 일을 말하여도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고 하십니다. 땅의 일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중생의 역사로서 구원의 시작을 의미하며, 하늘 일이란 몸이 영화롭게 되는 것과 같은 구원의 궁극적인 완성을 의미합니다. 하늘에서 내려 오신 예수님 만이 신비한 하늘 일들을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13).

둘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14,15).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교만을 책망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결국에는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의 모든 허물과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높이 달리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사건은 믿음과 구원의 길이 어떤 것인가를 잘 말해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권능으로 출애굽하여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가는 새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유인이 되었지만 오랜 노예 생활로 인해 노예 근성이 몸에 베어 조금만 힘들어도 하나님과 목자를 원망하며 불평했습니다. 한번은 그들이 광야 길을 여행하다가 길이 험하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불뱀을 보내어 불평하는 입을 물게 했습니다. 독사에 물리게 되면 순식간에 온 몸에 독이 퍼져 죽게 됩니다. 백성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상처에 바를 연고를 주셨습니까? 아니면 해독제를 주셨습니까?아니면 불뱀을 타도할 비결을 가르쳐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게 하고 누구든지 이를 쳐다보는 자는 낫게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제시하신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입니다. 독사에 물리면 즉시 독이 퍼지지 못하도록 물린 부위를 동여매고 물린 자국에서 독을 빨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즉시 해독제를 먹어야 합니다. 또 더 이상 독사에 물리지 않도록 밑을 쳐다봐야 합니다. 위를 쳐다본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어리석다고 생각하고 쳐다보지 않는 자들, 쳐다본다고 과연 나을 것인가 의심하여 쳐다보지 않는 자들은 다 죽었습니다. 다만 “쳐다보면 살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쳐다본 자만이 살았습니다. 쳐다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쳐다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쳐다볼 수 없습니다. 이처럼 믿음이란 비합리적입니다. 그러나 믿음에는 사람을 구원하고 치료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놋뱀이 장대에 달린 사건은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사건을 예표합니다. 세상은 죄로 인하여 불뱀들이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교만의 불뱀, 정욕의 불뱀, 탐욕의 불뱀, 시기심의 불뱀, 불신의 불뱀에 물려 죽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인간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습니다. 누구든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상처가 나음 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상처가 깊을지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바라보는 그 순간부터 나음을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십자가의 사랑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사랑만이 완악한 마음을 녹여 회개케 함으로 사람을 근본적으로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영접합시다. 그리하여 거듭나서 심령에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고 이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