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 View


누가복음 2:1-20

by Mark Yang   04/22/2022   Luke 2:1~20

Message


누가복음 제 4 강 

            너희를 위해 구주 나셨다

말씀/ 누가복음 2:1-14
요절/ 누가복음 2: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
                    니라.”

  오늘 말씀은 들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던 목자들에게 임한 성탄 메시지입니다. 목자들이 맞이한 첫번 크리스마스는 실로 영광스럽고 장엄하였습니다. 목자들이 들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을 때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추었습니다. 그리고 천사의 성탄 메시지가 들려 왔습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천사는 구주 탄생이 온 인류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는 온통 좋지 않은 소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또 좋은 소식이라 할지라도 나에게는 좋은 소식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배아픈 소식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오늘 말씀에서 구유에 탄생하신 예수님이 왜 온 인류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는가 생각해 봄으로써 은혜 받고자 합니다.

Ⅰ. 베들레헴에서 나신 예수님(1-7)

  1절을 보십시오.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말씀은 예수님 탄생 당시의 시대 배경을 말해줍니다. 당시는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를 다스리는 로마 시대였습니다. 로마는 긴 정복 전쟁을 통해 대제국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지중해 연안을 비롯하여 이집트를 위시한 북부 아프리카 지역, 서쪽으로는 스페인, 동쪽으로는 소아시아 흑해 연안과 메소포타미아 지역, 북쪽으로는 영국까지 그 영토는 실로 방대 하였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탁월한 능력으로 로마제국을 다스려 법과 질서를 회복하고 평화와 번영을 가져 오게 했습니다. 그는 점령지의 지방 자치를 허용해 주었으며 또 풍습과 종교적 신념과 로마의 법과 충돌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법률까지도 존중해 주었습니다. 그가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이룩할려고 힘쓴 결과 세계는 표면상으로 오랜 세월 동안 전에 없었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찌기 알렉산더 대왕을 통해 헬레니즘 세계를 형성하여 문화적인 통일을 이루게 하시고, 또 가이사 아구스도를 통해 세계를 정치적으로 통일하게 하심으로 짧은 기간 동안 그리스도의 복음이 급속도로 온 세계에 전파되게 하셨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천하로 다 호적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가 영을 내리자 그것은 변개치 못할 법령이 되어 로마 제국 방방곡곡에 하달되었습니다. 인구 조사의 목적은 식민지 백성들의 인구와 재산을 파악하여 인두세를 징수하는 것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는데 이 모든 비용이 식민지 백성들에게 부과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이 번영하면 할수록 식민지 백성들의 고통과 슬픔은 더해 갔습니다. 로마의 평화는 단지 정치적 구호에 불과했고, 식민지 백성들은 끊임없이 불안과 공포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가이사의 호적 명령은 절대적이어서 천하 모든 사람을 움직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던 모든 일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리던 결혼식을 연기해야만 했습니다. 또 하루 벌어 생계를 유지하던 자들은 일을 하지 못해 처자식과 함께 굶어야 했습니다. 요셉도 고통받는 백성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법에는 언제나 예외가 있지만 가이사의 호적 명령에는 예외가 없었습니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약 130km나 되는 먼 거리였습니다. 만삭이 된 임신부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멀고 험한 여행을 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인줄 알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로마의 평화라는 구호 아래 인권은 여지없이 유린되었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도착하자 해산할 날이 차서 아들을 낳아야 했습니다. 여관은 호적하러 온 사람으로 인해 초만원이었습니다. 요셉은 최선을 다했으나 마리아를 위해 방 한 칸 얻을 수 없었습니다. 산모는 어딜 가나 특별대우를 받습니다. 그러나 가이사의 통치 아래 사는 사람들은 너무 힘들어서 산모에게 방 한 칸 내어줄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마리아가 산통을 하며 울부짖을 때에 귀를 틀어막고 못들은 체 했습니다. 마리아는 할 수 없이 짐승들이 거하는 외양간으로 갔습니다. 짐승들은 외면하지 않고 “음메에~ Welcome!”하며 대 환영을 했습니다.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이는 당시 로마 통치하의 민심을 단적으로 표현해 주는 말씀입니다. 백성들은 억눌리고 착취 당하여 마음이 피폐해지고 완악해졌습니다. 심령은 메마를대로 메말라 극도의 이기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께서 자기 땅에 오셨으나 세상은 그를 영접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호적 명령에 밀려 나사렛에서 베들레험까지 왔습니다. 여기서도 사람들에게 밀려 구유에 탄생하셨습니다. 이는 겉으로 볼 때 가난과 힘 없는 자의 슬픈 운명과 민족의 비애만이 가득할 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숨어 있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인생들의 모든 슬픈 운명을 담당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눅1:32,33절을 보면 천사는 마리아에게 태어나실 메시야는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고 영원히 왕노릇 하실 분”이심을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너무나 초라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가장 부요하신 분이 가장 가난한 모습으로 태어나셨습니다. 또한 가장 영광스러운 분이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태어나시고, 가장 강하신 분이 가장 연약한 자의 모습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슬프고 운명적인 모습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세상의 구주께서 사람이 거할만한 곳이 못되는 비천한 구유에 탄생하시다니 이는 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우리의 슬픈 운명을 담당하시고 우리의 질고를 짊어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슬픈 운명에 우는 자들이 많습니다. 가난에 대한 운명주의, 파괴된 가정에 대한 운명주의, 아버지 없는 운명주의, 아버지로 인한 운명주의, 외모와 성격에 대한 운명주의, 여자로 태어난 운명주의 등 갖가지 운명주의로 슬퍼하며 남몰래 웁니다. 모두 다 자기가 가진 문제가 가장 크고 심각하게 보입니다. 누가 이 슬픈 운명을 이해해 주고 담당해 줄 수 있습니까? 과부 사정은 과부만이 안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인생들의 모든 슬픈 운명을 이해하시고 담당하시기 위해 비천한 구유에 탄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해 가난하게 되셨고(고후8:9),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를 주시기 위해 슬픔의 사람이 되셨습니다(사53:4). 예수님은 인간의 고뇌에 동참하시기 위해 비천한 구유에 탄생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생애 기간 중에도 인생들의 모든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셨습니다(마8:17). 마침내는 십자가에서 인생들의 모든 허물과 죄짐을 그 몸으로 친히 담당하셨습니다(벧전2:24). 찬 94장은 예수님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 구유에 탄생하신 예수님은 실로 은혜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누구든지 부담없이 나아갈 수 있는 만민의 친구요 세상의 구주가 되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베들레험에서 탄생하신 것은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찌기 B.C 700년경 미가 선지자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미가5:2). 하나님은 이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해 가이사 아구스도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그의 절대 권력을 쓰신 것입니다. 가이사의 호적 명령이 아니었다면 만삭이 된 마리아가 베들레험까지 갈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지 않으셨다면 예언의 말씀은 거짓이 되고 메시야의 정통성이 문제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예언의 한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해 거대한 로마 제국을 움직이셨습니다. 가이사는 로마 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정책으로 호적 명령을 발하였지만 하나님은 이를 쓰셔서 구속역사를 이루고 계셨습니다. 이를 볼 때 가이사 아구스도는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이루는 도구에 불과함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에는 세속사와 구속사가 있습니다. 세속사는 바다 위에 출렁이는 물결이라면, 구속사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면면히 흐르는 저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출렁이는 물결과 같이 흥하고 망하며 끊임없이 변천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가운데서 복음전파를 통해 인류 구속역사를 줄기차게 이루어 나가십니다. 세상은 몇몇 정치 지도자에 의해 움직이는 것 같지만 지내놓고 보면 그들은 결국 만민 구속역사를 이루는데 하나님께서 쓰신 도구에 불과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러시아 개척을 위해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고르바쵸프의 마음을 움직이사 개방정책을 쓰게 하시고 선교의 문을 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시는 분이십니다.

Ⅱ.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님(8-20)

  가이사의 호적 명령으로 온 세상이 분주한 가운데서 예수님은 소리없이 조용히 탄생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주 탄생의 기쁜 소식도 메시야를 애타게 기다리던 몇몇 사람들에게만 전해졌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베들레험 근처 들에서 목자들이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당시 목자들은 법정에서 증언도 할 수 없을 만큼 가난하고 비천한 계급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양을 지극히 사랑하는 선한 목자요, 밤에 깨어서 양떼를 지키는 충성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속화 되지 않고 순수하고 진실된 자들이요,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깨어 메시야를 기다리던 진리의 파숫군들이었습니다. 구주 탄생의 기쁜 소식이 바로 이런 자들에게 임합니다. 교만하고 마음이 부요하고 세속적인 자들에게는 성탄의 기쁜 소식이 임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양떼를 지키고 있을 때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추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크게 무서워했습니다. 천사는 그들에게 구주 탄생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10). 천사는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은 온통 슬픈 소식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6공이 출발한지 2년이 다 되어가는 데도 5공비리도 청산하지 못한정치권의 소식, 중고등학교 학생이 공부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자살한 소식, 이러한 소식들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간간이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소식, 우리나라가 2년 연속 월드컵 축구에 진출하게 되었다는 소식은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그러나 이런 소식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입니다. 한쪽이 기뻐하면 다른 한쪽이 슬퍼하게 됩니다. 또 이런 소식은 순간적이며 영원히 지속되지 못합니다. 또한 근본적으로 참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천사가 전해준 소식은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을 주고 또 영원히 지속됩니다. 이 기쁨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입니다.(벧전1:8)

  그 소식이 미치는 범위가 어떠합니까? 천사는 온 백성에게 미친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나라와 민족과 종족들이 있습니다. 또 수없이 많은 계층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인종분규, 종교전쟁, 노사분규 등 각계각층에 수없이 많은 갈등과 대립이 있습니다. 이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미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인종, 국적, 신분, 빈부귀천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에게 골고루 미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이는 남한 사람이나 북한 사람이나 미국 사람이나 소련 사람이나 백인이나 흑인이나 누구에게나 미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탄생 소식이 왜 온 인류에게 미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됩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구주란 구원자란 뜻입니다. 그리스도란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기름부은 자 곧 왕이라는 뜻입니다. 주란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구원자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슬픈 소식은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한 결과 낙원을 상실하고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b) 이는 범죄한 인간에게 내려진 사형선고였습니다. 사람이 밤잠을 자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여 판검사가 되고 행정관료가 되고 전문의가 되고 박사가 되어 명예와 권세와 부를 얻어 부족함이 없이 산다 할지라도 죽게 되면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이처럼 죽음은 인생을 슬프게 만듭니다. 우리 인간은 사형 선고를 받고 시한부 인생을 사는 암환자와 같습니다. 우리는 30년, 50년, 80년 년수가 다르다 뿐이지 한 사람도 예외없이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또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는 무서운 심판이 있습니다(히9:27). 그 심판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영원토록 고통하는 것입니다.(계 21:8)

  또한 사는 날 동안에도 끊임없이 죄의 소욕과 사망권세에 시달리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정욕으로 인해 늘 죄의식에 시달리며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허무로 인해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무기력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죄와 죽음의 세력은 기쁨과 행복을 앗아갑니다. 누가 우리를 죄와 사망의 늪에서 건져낼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도 선한 의지와 행위로 의에 이르고자 몸부림치다가 그 내면에 역사하는 죄의 세력으로 인해 절규하였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롬7:24) 공자는 죽음에 대해 묻는 제자에게 삶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어찌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는가 하며 지혜롭게 대답을 회피했습니다. 석가모니도 세상에 죽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도록 권면했습니다. 무력으로 천하를 정복한 알렉산더나 나폴레옹도 죽음은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고도로 발달한 과학도 생명을 조금 연장할 수는 있을지언정 죽음을 막을 수 없습니다. 죄와 죽음 문제는 어떤 성현도, 영웅도, 위대한 과학자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는 오직 예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고, 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사망권세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히2:14,15). 그리고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골1:13). 뿐만 아니라 사는 날 동안에도 생명의 세계, 빛의 세계에서 생명과 평화를 누리며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천사는 목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탄생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12월 25일 공휴일을 만들어 주신 고마우신 분 정도로 생각합니다. 죄와 죽음이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듯이, 죄와 죽음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예수님도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나의 죄와 죽음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태어나신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오늘날” 태어나셨습니다. “오늘날”은 무슨 뜻입니까? 오늘날은 어제도 아니고 바로 오늘입니다. 오늘날에는 과거나 미래가 없고 항상 현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과거의 사건으로 끝나거나 또 미래에 있을 사건이 아닙니다. 이는 1989년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오늘날입니다. 예수님은 영존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사9:6), 항상 현재 계속해서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탄생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오늘날 나를 흑암의 세계에서 빛과 생명의 세계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은 구원을 얻게 되고 심판에서 영생으로 옮기게 됩니다(요5:24). 오늘날 예수님이 나를 위해 탄생하신 사실을 영접하게 되면 첫번 크리스마스 때 비추인 그 영광의 빛이 내 마음속에 비추이게 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천사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천사는 온 세상을 구원할 구주가 바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임을 알려주었습니다. 구유에 누인 연약하고 초라한 아기가 어떻게 온 인류를 구원할 구주가 될 수 있는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인격입니다. 그리스도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요 만왕의 왕이시지만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시되 왕궁에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비천한 구유에 태어나심으로 한없이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존심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존심이 꺽이는 날 자살하라고 말했습니다. 또 사람들은 somebody가 되기를 원하지 아무도 nobody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자존심을 버리시고 구유에 탄생하심으로 아무 것도 아닌 자와 같이 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실로 겸손의 본체가 되십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역사 방법입니다. 가이사는 높은 의자에 앉아 위에서 명령하고 지시합니다. 그리고 순종하지 않으면 힘과 무력으로 다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겸손히 낮아져서 섬기고 희생합니다. 말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님은 연약하고 무력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점점 자라나 로마를 정복하고 세계를 정복했습니다. 반면 가이사의  역사는 겉으로 볼 때 크고 힘이 있어 보이지만 생명이 없기 때문에 점점 망하여 오늘날은 관광명소가 되었습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천사의 메시지가 끝나자 홀연히 허다한 천군들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예수님의 탄생은 먼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자들에게는 평화가 됩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진정한 화해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번 성탄절에 아기 예수님이 나의 심령에 새롭게 탄생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