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제 9 강
하나님의 선물이신 예수님
말씀: 요한복음 4:1-26
요절: 요한복음 4: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3장에서 우리는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뛰어난 인물인 니고데모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사회적으로 낮은 신분을 가진 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았습니다. 여인에게는 남편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잘 만나면 행복할 줄로 생각하고 좋은 남편을 얻기 위해 다섯번이나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전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아무도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을 깊이 이해하시고 영생의 샘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죄로 인해 버려진 한 몹쓸 인생이 구원을 받고 영생의 기쁨을 누리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겸손과 인내와 열심을 배울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한 영혼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울 수 있습니다.
Ⅰ. 물을 좀 달라(1-15)
때는 세례요한의 시대가 점점 거하고 예수님의 복음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는 역사적 전환기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정치적 압력을 가하고자 궁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복음 역사 초기부터 유대 지도자들과 충돌하기를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대를 떠나사 갈릴리로 가고자 하셨습니다. 유대는 남쪽에 있고 갈릴리는 북쪽에 있었으며 사마리아는 그 중간에 있었습니다. 유대에서 사마리아를 거쳐 갈릴리로 가면 3일이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간에 수세기 동안 형성된 민족적인 반목 때문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땅을 밟지 않기 위해 시일이 배가 걸리는 데도 요단강 건너편 베뢰아 지방을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4절을 보십시오.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장벽을 뛰어 넘어 사마리아로 통행하셨습니다. 이는 여행을 빨리 하고자 하심이 아니라 복음의 불모지인 사마리아 땅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만민의 구주가 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장벽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 되십니다.(엡2:14)
5,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 일행은 중동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유대 광야를 지나 120리나 되는 먼 길을 걸어 사마리아의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은 그 옛날 야곱이 사랑하는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또 그곳에는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야곱의 우물이 있었습니다. 이 우물은 로맨스의 우물이라고 불리웁니다. 이 우물은 역사적으로 많은 추억을 간직한 그리심산과 에발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물에 도착하시자마자 우물 곁에 그대로 주저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물가에 앉아 축복의 산인 그리심산과 저주의 산인 에발산을 바라보시며 추억에 잠기셨습니다. 순간 예수님의 마음에는 역사의 파노라마가 스쳐 지나갔습니다. 때는 제 6시 곧 낮 12시였습니다. 중동 지방의 낮 12시는 바위에 계란 후라이를 하면 익을 정도로 더운 시간입니다. 이때는 시에스타 시간으로 낮잠을 자는 시간입니다. 제자들은 배가 고파서 모두 먹을 것을 사러 동네로 갔습니다. 예수님도 몹시 배가 고프셨습니다. 또 목마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꼭 같이 피곤하시고 배고프시고 목마르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깊이 이해하시고 도우실 수 있으십니다.
바로 이때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길러 왔습니다. 이 여인은 부도덕한 여인이었기 때문에 선량한 여인들과 함께 올 수 없었습니다. 여인은 아무도 물길러 오지 않는 낮에 홀로 왔습니다. 여인은 그 시각에는 우물가에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왔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각에 여인을 기다리고 있는 한 분이 계셨습니다. 여인의 내면의 목마름을 아시는 분, 마음의 상처와 번민을 아시는 분, 여인에게 영생수를 주시고 영혼의 참 만족과 기쁨을 주실 수 있는 분, 여인과 사랑과 영원의 대화를 하고자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 바로 거기 계셨습니다. 여인은 물을 길러 왔다가 물 대신 영생의 샘 되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는 1대1 양이 찾아 왔습니다. 그러나 그 양은 반발심이 많은 까다로운 양이었습니다. 1대1 역사가 이루어지기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은 매우 지쳐 있었고 또한 예수님과 이 여인 사이에는 많은 장벽이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영혼을 영원한 파멸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믿음으로 불가능한 상황에 도전하셨습니다.
첫째, 먼저 대화하신 예수님. 사마리아 여인이 낮에 물을 길러 온 것은 그 당시로서는 특이한일이었습니다. 여인들은 보통 더운 날을 피하여 20-30명씩 짝을 지어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우물가로 왔습니다. 그리고 주위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 하며 그 시간을 즐겼습니다. 그 시간은 율법적이고 남성 위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그들에게는 유일한 자유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가장 더운 때에 홀로 물 길러 왔습니다. 여인이 왜 가장 더운 때에 홀로 물 길러 온 것입니까? 이는 여인이 그 동네의 여인들로부터 완전히 소외 당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을 멸시하고,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멸시하고, 사마리아 남자들은 사마리아 여자들을 멸시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들은 이 여자를 멸시했습니다. 여인은 세상에서 가장 멸시받는 자였습니다. 아무도 여인과 말하거나 쳐다보기조차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을 위해 무엇을 하셨습니까? 7b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예수님은 여인에게 다가가 먼저 대화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말을 거신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여인 사이에 여러가지 장벽이 가로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뿌리 깊은 민족적, 종교적 장벽이 있었습니다. 또한 남녀간의 엄격한 신분 상의 장벽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길가에서 남자가 여자와 대화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흠도 없고 점도 없는 거룩한 황태자요 여인은 만신창이가 된 타락한 여인으로서 도덕적 장벽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대화의 가장 큰 장애물은 자존심입니다. 사람들은 쥐꼬리만한 자존심 때문에 죽으면 죽었지 먼저 찾아가서 대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자기를 낮추시고 여인에게 다가가 아쉬운 소리를 하셨습니다. “물 좀 주시겠습니까?” 이로써 예수님은 일순간에 모든 장벽을 깨뜨리셨습니다. “물을 좀 달라” 이는 실로 놀라운 겸손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겸손이 여인을 생명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물을 좀 달라.” 이는 죄인을 구원에로 초대하시고 아무 값없이 영생수를 주시기 위한 구세주의 음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죄인을 먼저 찾아 오십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요한1서4:9). 예수님은 우리에게 먼저 대화하시기 위해 우리 마음 문 밖에 서서 기다리시고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계3:20)
예수님께서 왜 이 비천한 여인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신 것입니까? 여인에게는 죄로 인한 깊은 상처와 아픔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마음 문을 굳게 닫고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 문을 열 수 없었습니다. 만일 석가모니가 그녀에게 “모든 것을 잊으십시오”라고 말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인이 지난 날의 상처와 아픔을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생생하게 살아나서 괴롭혔을 것입니다. 만일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다면 여인은 무엇이라고 대답했을까요? “나는 내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어요. 당신 자신이나 아세요.”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어떤 위대한 성현이나 그들의 말도 상처 많은 이 여인의 닫혀진 마음을 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조용히 여인에게 다가가 “물 좀 주시겠습니까?” 하며 아쉬운 소리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실로 은혜가 충만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여인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여인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있는 민족적 장벽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B.C 722년 경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를 침략했습니다. 앗수르인들은 사마리아를 침략한 후 강제 이민 정책을 써서 국제 결혼을 통하여 혼혈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선민의 순수성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반면 유대인들은 70년 동안의 바벨론 포로 생활에도 불구하고 선민의 순수성을 지켰습니다.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자기 의가 생겨 사마리아인들을 멸시하고 상종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이지만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말씀하심으로 이 여인과 상종하셨습니다. 이에 여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여인은 무엇보다 예수님의 겸손에 놀랐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선물(10-15). 여인의 말에 반응한다면 민족적 편견에 대해 논쟁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에 말려 들지 않으시고 대화를 이끌어 나가셨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인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여인에게 진정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영생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6:23절은 말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선물)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또한 하나님의 선물은 독생자 예수님을 의미합니다(요3:16). 예수님은 여인이 하나님의 선물과 예수님 자신에게 관심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만일 이 여인이 하나님의 선물을 알았더라면 참으로 행복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서, 또 예수님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얻었다 할찌라도 결코 행복을 맛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인생은 꽃병의 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경제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직장 문제나 진급 문제, 결혼 문제, 집, 차 등 가시적이고 현세적인 것에는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정말 관심을 가져야 할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사람들은 영생이 얼마나 가치있고 풍성하고 고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또 사람들은 예수님이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만 하면 예수님께 적극적으로 구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에 대해 몰랐을 때 이단으로 알고 그를 따르는 자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영적이 눈을 뜨게 되었을 때 그의 자세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기고 예수님을 알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빌3:7,8)
하나님의 선물은 율법을 지키거나 선행이나 도덕적 생활 등 자기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다만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은혜로우셔서 구하는 자에게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선물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놀랍습니다. 또한 그 선물을 주시는 분도 놀랍습니다. 또 구하기만 하면 아무 값없이 선물을 받게 되는 것도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여인은 아직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해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그리고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하며 비교를 했습니다. 여인은 일생동안 라헬 한 사람을 변함없이 사랑한 야곱을 이상적인 남성으로 생각하고 흠모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남과 비교해서 말할 때 가장 화가 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에 조금도 개의치 않으시고 비교법을 써서 여인에게 영생수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야곱의 우물 물은 일시적으로 목마름을 해소해 주지만 다시 목마릅니다. 이 세상에서 야곱의 우물 물로 만족을 얻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의 공허를 채우기 위해 쾌락의 물을 마십니다. 쾌락은 순간적으로 즐거움을 주지만 그 후에는 더 큰 공허감이 몰려옵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캠퍼스 지성인들에게는 민주주의에 대한 목마름이 심각했습니다. 그러나 요사히는 인생을 즐기는 것으로 분위기가 바뀌어졌습니다. 요즈음에는 노래 방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또 사람들에게는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사랑에 대한 목마름 때문에 경력 있는 사마리아 여자, 사마리아 남자가 됩니다. 또 인정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때 삐뚤어집니다. 또 지식에 대한 목마름, 권력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이러한 목마름은 욕망의 늪과 같아서 아무리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일찌기 부귀 영화를 한 몸에 누렸던 솔로몬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전1:8).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이런 목마름의 근본 원인이 무엇입니까? 이는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렘2:13). 또한 아모스 선지자는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요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하였습니다(암8:11).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할 때 무엇을 하나 참 만족과 기쁨이 없습니다.
반면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어떠합니까? 이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합니다. 이는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의 내면에는 영샘이 샘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는 이 샘에서 사랑의 물, 기쁨의 물, 진리와 정의와 자유의 물을 얼마든지 길을 수 있습니다. 이 샘물은 믿는 자 속에 내재하시는 성령을 의미합니다(요한7:38,39). 인간은 영혼에 성령께서 거하실 때만이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때로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예수님 외에 다른데서 만족을 찾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의 내면에 있는 샘물에 죄의 찌꺼기가 있어 막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회개함으로 죄의 찌꺼기를 제거할 때 심령에서부터 사랑과 기쁨과 평강의 물이 콸콸콸 솟아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영생수에 대해 말씀하시자 여인은 마음 문을 열고 간구했습니다.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15). 여인은 매일 물 길러 와야 하는 생활에 몹시 지쳐 있었습니다. 이는 시계 추와 같이 반복해야 하는 일상성에서 오는 권태와 피곤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여인은 예수님께 영생수를 간구했습니다.
Ⅱ.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16-26)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는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였습니다. 여인은 꿈을 꾸는 것 같이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이는 정말 청천벽력과 같은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이 영생수를 얻기 위해서는 남편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는 바로 죄 문제였습니다. 남편은 일반적으로 사랑과 의지의 대상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정신적인 남편이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은 곧 남편입니다. 만일 내가 돈을 사랑하고 의지하고 귀히 여긴다면 돈이 나의 남편이 될 것입니다. 참 남편되신 예수님을 모실려면 우리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거짓 남편을 몰아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씀하실 때 여인의 죄가 빛 앞에 밝히 드러났습니다. 우리가 영생수를 마시고 주님의 놀라우신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 문제가 드러나고 뿌리 뽑혀져야만 합니다. 여기에는 수치와 아픔이 따르지만 그 후에는 놀라운 하늘나라의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요한 1서 1:8,9절은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예수님께서 여인의 치부를 드러내신 것은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요, 그 죄를 담당해 주시고 하늘나라의 모든 축복으로 채워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이는 예수님의 영적 사랑이요 생명을 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예수님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여인은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에게 “이 나쁜 여자야, 네가 회개치 않으면 무서운 심판을 받을 것이다”라고 꾸짖지 아니하셨습니다. 오히려 여인의 괴로운 심정을 읽으시고 그 말을 받아 주셨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예수님은 여인의 과거와 현재를 훤히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갈증도 아시고 죄도 아시고 여인의 모든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행한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벌거벗은 것처럼 다 드러납니다.(히4:13) 여인이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고 현재도 어쩔 수 없이 남편 아닌 남편과 살고 있는 것을 볼 때, 남편이 그녀에게 참 만족을 주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인은 진정으로 만족 줄 것을 찾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볼 때 여인은 음란하고 타락한 구제불능의 여인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겉 모습을 보고 “저 사람은 몹쓸 사람이야, 구제불능이야”라고 판단하고 정죄해 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의 내면을 깊이 이해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남편을 다섯이나 바꾼 것은 단순히 육신의 쾌락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참 남편을 얻기 위한 정신적인 방황으로 보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들은 진심이 많고 정열적이며 능력이 많습니다. 또 사람을 끄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진심과 정열과 능력을 바칠 참다운 대상을 알지 못해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 남자 저 남자(남자들은 이 여자 저 여자), 이 단체 저 단체를 돌아다니며 끊임없이 찾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진정한 만족의 대상을 찾지 못한 것입니다. 이들이 방황을 그칠려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여인은 예수님 앞에서 더 이상 자신을 숨길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정했습니다. 선지자란 백성의 죄를 책망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자입니다. 이로써 여인은 자신의 죄를 시인한 것입니다. 여인은 이제 예배에 대해서 묻기 시작했습니다. 여인은 죄 많은 여자로서 내면의 죄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 예배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어디서, 어떻게 예배해야 될지 몰랐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해야 된다고 주장하고,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해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며 자기들이 옳다고 싸웠습니다. 그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은 양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의 때와 대상과 자세가 중요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배의 때는 예수님이 오신 바로 그 때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물질적이고 의식적인 제사제도가 폐하여지고 영적인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막15:38, 히10:18-20). 22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사마리아 사람들은 모세 오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통해 구속 역사를 이루어 오셨고, 마침내 그들에게서 메시야를 허락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었고 유다지파에서 나셨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예배의 대상은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우상을 만들어서는 안됩니다(24).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시공간에 제한 받지 않으십니다. 신령(spirit)은 형식과 대조해서 의식적이고 물질적인 예배가 아니라, 마음을 바쳐서 영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truth)은 거짓과 대조해서 진리의 말씀에 기초한 예배를 드려야 함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메시야가 오시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인은 모든 인생 문제의 해결자되신 메시야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녀에게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예수님은 여인의 진정한 남편이 되시고, 영생의 샘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하나님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내가 그로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은 여인의 심령에는 영생수가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여인은 벅찬 감격과 기쁨을 이기지 못해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달려가 외쳤습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메시야를 만난 여인은 완전히 변화되어 많은 사람을 주님께 인도한 위대한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피곤을 무릅쓰시고 작열하는 중동의 태양 아래서 장시간 동안 대화하심으로 시름시름 죽어가는 한 영혼을 구원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인생들의 메시야가 되시기에 합당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