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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4:31-44

by Mark Yang   04/22/2022   Luke 4:31~44

Message


누가복음 제 Ⅰ 부 9강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러 오신 예수님

말씀/누가복음 4:31-44
요절/누가복음 4: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를 자유케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죄와 사단의 사슬에서 놓임을 받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이 큰 빛을 보고 희망찬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복음역사는 주로 유대 땅 갈릴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갈릴리 곳곳에 예수님의 부드럽고 능력 많은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가버나움은 갈릴리 사역의 중심지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가버나움에서 있었던 복음역사입니다. 예수님은 이 곳에서 귀신 들린 자와 각색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이 시간 이 예수님을 묵상하는 가운데 은혜 받고자 합니다. 

Ⅰ. 말씀의 권세자 예수님 (31-37)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으로 오셔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 가르치심에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힘이 있었고 은혜와 생명력이 넘쳤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인생들이 나아가야 할 생명의 길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참된 소망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당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딱딱한 율법의 규례나 장로들의 유전을 가르침으로 사람을 얽어매고 부담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사함을 선포하심으로 인생들을 자유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적권세가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는 생활에서 나온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생활이 형식적이고 이중적이었기 때문에 말씀 가르치는 것도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활은 거룩하고 순결하며 양들에 대한 상한 목자의 심정으로 충만해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권세가 있었습니다. 

  33-36절에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가 더러운 귀신을 물리치심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한창 말씀을 가르치시고 있을 때 회당 예배에 참석하고 있던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크게 소리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아다.” 귀신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잘 알기 때문에 멸망할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소리 질렀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귀신이 그 사람을 사로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의 정신 문제를 다루고 있는 정신과 의사나 심리학자들의 가장 큰 고민은 과학으로는 귀신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지만 실제적으로는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귀신은 사람들의 속에서 역사하여 사람의 인격을 파괴시키고 멸망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귀신은 더러운 귀신이비다. 더러운 귀신은 사람을 더럽게 하고 추하게 합니다. 정욕 귀신들린 자를 보면 자기 자신을 주체치 못하고 밤거리를 헤매고 짐승과 같이 날뜁니다. 이런 자들은 참으로 추하고 더럽게 보입니다. 귀신은 거룩한 것, 고상한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귀신들린 자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거룩한 성도들,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하고 회피합니다. 할 수 있는대로 말씀을 안보고자 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종들과 관계성을 맺기를 두려워합니다. 귀신은 그 사람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어떻게 고쳐 주셨습니까?


 3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귀신을 꾸짖으셨습니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그러자 귀신은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귀신과 사람을 분리시켜 보시고 귀신을 쫓아 내셨습니다. 귀신은 좋은 말로 타이르거나 대화로 해서는 안됩니다. 말씀으로 대적하여 쫓아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었을 때 사람들은 다 놀라 설로 말했습니다.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36). 예수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졌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더러운 귀신의 세력도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귀신들은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아무도 귀신들린 자들을 도울 수 없습니다. 정신병원에서는 전기 쇼크를 주고 약물치료를 합니다. 그러면 일시적으로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조금 지나면 상태는 더 악화되어 버립니다. 귀신은 영의 세려이기 때문에 인간의 지혜와 힘으로 물리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 권세와 그의 말씀만이 귀신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악령의 세력을 파하고 사람을 근본적으로 살리실 수 있는 영적 권세자 이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정욕귀신, 교만귀신, 자의식귀신, 물질귀신 등 갖가지 귀신이 사로잡혀 신음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귀신들린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악경에 시달립니다. 악령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꾸준히 공부할 때 말씀이 내 안에서 세력을 얻어 나를 지배하고 있던 모든 악령의 세력을 물리쳐 주십니다. 

Ⅱ. 가색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38-41)

3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심방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집안 형편을 아심으로 그와 깊은 인격적 관계를 맺고자 하셨습니다. 마침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렸습니다. 열이 39도 40도 오르내리고 온 몸에 식은 땀을 흘리며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열을 내리기 위해 키니네를 먹이고 얼음 찜질을 했으나 차도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 일로 간구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가까이 가서 열병을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열병이 떠나고 깨끗이 낫게 되었습니다. 장모는 곧 일어나 맛있는 된장찌개로 예수님께 점심 대접을 하였습니다.

열병은 과도하게 열이 나는 병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민주주의의 열병에 걸려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땅에 민주주의만 건설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생각됩니다. 캠퍼스에는 많은 학생들이 사회주의의 열병에 걸려 끊임없이 데모를 합니다. 또 경찰은 데모를 진압하는데 열병에 걸려 있습니다. 그래서 성역시 된 캠퍼스 안에까지 들어와 상주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학생들은 더욱 열이나 충돌은 끊일 날이 없습니다. 이 사회는 마치 중한 열병에 걸린 환자와 같습니다.

또 봄이 되어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조금씩 열이 나기 시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봄의 열병에 걸리면 정신이 혼미해지고 자신을 주체할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정신나간 사람 같이 멍하게 되고 중풍병자와 같이 무기력하게 되어 버립니다. 이런 열병을 어떻게 치료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말씀으로 열병을 꾸짖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1:1 말씀으로 열병에 사로잡힌 캠퍼스 지성인들을 구원해야겠습니다.

40절을 보십시오.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자 사람들이 각새 병자들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나아 왔습니다. 유대인의 안식일은 해가 지면 끝이 납니다. 그들은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병고침을 받고자 나아온 것입니다. 사람들이 데리고 온 것을 보면 그들은 다잇 의술로는 고칠수 없는 각색 불치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세상에는 각색 병으로 고통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현대 의학으로도 치료 불가능한 암, 백혈병, 문둥병, 당뇨병, 중풍, 심장병, 동맥경화증, 신부전증을 위시하여 신장결석, 축녹증, 맹장, 눈병, 자매님들이 가장 싫어하는 여드름, 종기, 무좀, 치질, 감기 등 종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없이 많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적어도 한가지씩은 병으로 고통하고 있습니다. 이 사회는 온통 병자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병원은 어떤 경우나 불황을 타지 아니합니다. 사람들은 각색 병으로 인해 괴로운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육신의 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병과 정신의 병이 있습니다. 노이로제, 강박관념, 조울증, 정신분열증, 신경쇠약 등이 있고 갖가지 귀신들린 자들이 많습니다. 석가모니는 인생들에게 108가지 번뇌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마음의 병은 여러 가지 원인에서 발생합니다. 육신의 병을 오래 앓다가 이로 인해 내면의 병을 앓게 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 그 내면은 어둡고 부정적입니다.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자신은 쓸모없는 자라고 자학합니다. 남을 의존하고 무기력한 인생을 삽니다. 또한 가정환경으로 인해 내면이 깊이 병든 자들이 많습니다. 어릴 때 부모님들이 늘 싸우는 것을 보며 자란 사람들은 정서가 불안정하고 반항적이 되어 버립니다. 또한 강한 부모들 밑에서 심한 잔소리를 듣고 모든 것에 간섭을 받고 자란 사람은 주눅이 들려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부모의 지나친 보호와 섬김을 받고 자란 경우는 의존심으로 내면이 깊이 병들어 남이 도와 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내면이 연약하여 틈만 있으면 드러눕습니다. 또 가난에 대한 운명주의로 반항적으로 삐뚜러진 인생을 사는 자들이 많습니다. 어릴 때 정욕에 대한 호기심으로 죄를 짓고 이로 인해 죄의식으로 고통하며 병든 인생을 사는 자들이 많습니다. 캠퍼스 지성인들은 겉으로 볼 때 멋있고 낭만적이고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들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파고 들어가 보면 한 사람도 제대로 된 사람이 없이 깊은 내면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19세기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로 케고르는 이 세상에 내면 깊숙이 어떤 동요, 불화, 부조화, 불안을 느끼고 있지 않는 인간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인간은 절망이라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알고 있다고 진단하였습니다. 인간은 절망을 느끼든 느끼지 않든 다 절망상태에 있으며 절망 중에 있으면서 이를 느끼지 않는 사람은 중병에 걸렸으면서도 이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과 같이 가장 비참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절망을 느끼는 자는 한 걸음 구원에 다가서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20세기의 유명한 사회 심리학자 에릭 프롬은 이 사회를 병든 사회라고 진단하였습니다.

오늘날 이 사회가 얼마나 병들었는가 하는 것은 단적으로 초강대국인 미국 사회를 살펴 볼 때 잘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은 짧은 200년의 세월 동안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며 복지사회를 건설했습니다. 또한 고도로 발달한 과학문명으로 과거 공상소설에서나 볼 수 있었던 우주 정복의 꿈을 하나씩 실현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그 내면은 치료 불가능한 중환자와 같이 깊이 병들어 신음하고 있습니다. 최근 20-30년간 그 중상은 급격히 나타났습니다. 성적 타락으로 인하여 인혼율은 무려 50%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두 팀이 결혼을 하면 한 팀은 이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파괴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반항적이 되고 파괴적이 됩니다. 그리고 이들도 자라서 또 파괴적인 가정을 낳습니다. 이렇게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미국사회에서 13,14세 소녀가 어머니가 되는 미혼모 문제는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또한 마약 중독 문제는 미국이 얼마나 병들었는가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지난 주 Time지를(1986.3.17)를 보면 미국이 얼마나 마약문제로 고통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잇습니다. Triangle조사 연구소에 의하면 1983년 한 해 동안 마약 복용으로 사용된 비용이 600억불 약 54조원이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예산의 4배가 됩니다. 연방 전문가들에 의하면 미국 전 노동자의 10-23%가 일을 하면서 위험한 마약을 복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마약은 미국인의 생활에 깊이 침투되어 걷잡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마약을 복용하므로 생기는 부작용은 심각합니다. 도둑질을 하거나 좋지못한 결정을 내리거나 우발적인 저지르고 자신의 생활을 파괴시킵니다. 좋지 않은 줄 알면서도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마약을 복용하는 것입니까? 이는 내면이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죄를 짓고 죄의식으로 인해 악령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괴로운 현실을 잊기 위해 마약을 복용합니다. 마리화나를 피우면 현실의 고통을 벗어나 황홀한 지경에 빠지게 된다고 합니다. 오늘날 현대는 기관사 없이 어둠 속을 뚫고 질주하는 열차와 같이 내면의 병으로 인해 점점 걷잡을 수 없는 파국 상태에 치닫고 있습니다. 누가 이 인류의 병을 고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인간에게는 육신의 병, 정신의 병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더욱 못쓰게 만드는 영혼의 병이 있습니다. 이 영혼의 병은 인간이 사는 날 동안 허무, 무의미, 무기력 등 죽음의 요소에 시달리게 하다가 결국에는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이 영혼의 병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반항하며 결국 하나님 없이 마음이 원하는대로 욕심대로 사는 데서 생기는 병입니다. 그런데 이 병은 문둥병과 같아서 처음에는 고통을 느끼다가 얼마 지나면 마비되어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는 무감각 상태가 되어 버린다는데 큰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이 고통을 느끼고 낫고자 해야 소망이 있는 것이지 무감각 상태가 되어 낫고자 하는 소원마저 상실해 버린다면 소망이 없게 됩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결국 영혼의 병을 앓고 있는 데서 발생합니다. 인간이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병을 고침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병을 고침받을 수 있습니까? 40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각색 병 앓는 자들은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자기 힘으로 나갈 수 없는 자들은 사람들의 이끌림을 받아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권능을 믿고 나아왔습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나아왔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외면치 아니하시고 따뜻이 영접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일이 그위에 손을 얹으사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병 종류별로 묶어서 도매금으로 취급하지 않으시고 인격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 1:1로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깊이 이해하시고 그들의 연약함을 동정하시고 따뜻한 사랑으로 품어 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의 품에 안겨 힘과 위로를 얻고 안식을 얻고 소망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는 누구든지 깊은 이해와 사랑으로 영접해 주시고 크신 창조의 권능으로 그 고질병으로 치료해 주십니다. 41절을 보면 예수님은 귀신들린 자들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근본 영혼의 병을 치료해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무서운 고통을 당하시고 보배피를 흘리셨습니다. 또한 치명적인 죽음의 병을 치료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치료자가 되십니다. 예수님께 치료함을 받은 자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또한 치명적인 죽음의 병을 치료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치료자가 되십니다. 예수님께 치료함을 받은 자는 밝고 힘찬 인생을 삽니다. 기쁨과 감사와 소망이 넘치는 행복한 인생을 삽니다.

III. 전도자 예수님 (42-44)

42절을 보십시오. 날이 밝자 예수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전날 많은 일을 하셨으므로 몹시 피곤하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른 새벽에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루 일을 시작하기 전 먼저 한적한 곳에서 말씀을 통해 주의 음성을 듣고 기도하심으로 영력을 덧입으시고 영적 방향을 잡으셨습니다. 제가 피곤함을 느끼는 때는 많은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언제든지 한적한 곳에서 주님과 교제 시간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잡한 도시에 살고 있기 때문에 한적한 곳을 찾기 힘듭니다. 또 도시인의 삶은 너무나 복잡하여 조금의 여유를 갖기도 합니다. 하루종일 사람들 사이에서 복잡한 세상일에 매이다 보면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어디로 있는지 방향 감각을 잃고 표류하는 배와 같은 인생을 살기 쉽습니다. 우리에게는 바쁠수록 더욱 한적한 곳이 필요합니다. 한적한 곳에 나아가서 주의 음성을 듣고 조용히 기도할 때 우리의 영혼은 소생함을 얻고 방향성 있는 힘찬 인생을 살게 됩니다. 한적한 곳은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영적 지혜를 줍니다. 방향을 줍니다.

예수님이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고 있을 때 무리들이 찾다가 만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도록 만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들 속에 머무시면서 그들의 주치의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만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누리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무엇이라 말씀 하셨습니까? 43절을 보십시오.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그리고 갈릴리 여러 회당을 다니면서 전도 하셨습니다(44).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배웁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보편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 동네 사람들뿐만 아니라 갈릴리 모든 동네 사람들에게 은혜와 사랑을 나누어 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 사람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 만민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셨습니다(막 15:16). 예수님은 다른 동네, 다른 나라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이 필요함을 아시고 그들에게 그 은혜를 나누어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예수님의 보편적인 사랑을 덧입을 때 편협한 자기 중심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만민 구속 역사를 섬길 수 있습니다.

둘째는, 복음 전파의 사명에 충성하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병고치는 일이 성공적이라고 해서 그 일에 말려들지 않으시고 복음 전파의 사명에 충성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는 흔들릴 수 없는 사명에 대한 분명한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사명에 대한 분명한 부르심이 있을 때 어떤 핍박과 유혹 가운데서도 중심을 지키고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그 어떤 일보다도 시급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알지 못할 때 사람들은 사단의 지배를 받으며 땅의 일에 얽매여 벌레와 같이 살다가 멸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임할 때 사단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그때 우리의 내면은 사랑과 평화와 자유와 기쁨으로 넘치게 됩니다. 또한 이 땅에서 부정부패, 고문학대가 물러가고 공평과 정의가 지배하는 평화로운 사회가 건설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할 때 사단의 나라가 물러가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게 됩니다.

이번 봄학기 힘써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