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제 10 강
시몬 베드로를 취하신 예수님
말씀/ 누가복음 5:1-11
요절/ 누가복음 5:10b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
을 취하리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어부 시몬 베드로를 사람을 취하는 사명인으로 부르시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평범한 사건 같이 보이지만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는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통하여 시몬 베드로는 무명의 촌 어부에서 모든 사람이 흠모하는 인류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쓸모없는 인생을 쓸모있게 하고, 무의미한 인생을 생명이 충만한 값진 인생이 되게 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사람을 위대하게 합니다. 이 시간 아름다운 게네사렛 호숫가로 가서 우리 주님의 음성을 들읍시다.
I.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1-7)
1절을 보십시오. 어느 따스한 봄날 예수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셨습니다. 게네사렛 호수는 길이가 약20km, 폭이 약12km 되는 호수입니다. 그 모양이 거문고와 같다고 해서 게네사렛 호수라 하기도 하고, 바다와 같이 크기 때문에 갈릴리 바다, 디베랴 바다라고도 하였습니다. 호수 주위에는 높고 낮은 산들이 병풍같이 둘러 있고 북쪽에는 하얀 빵떡 모자를 쓴 것 같이 사시사철 흰 눈이 덮혀있는 헬몬산이 있었습니다. 헬몬산에는 눈이 녹아 흘러내리는 물과 레바논 산들에서 흐르는 물이 모여 요단강을 이루고, 요단강의 물이 게네사렛 호수로 흘러 들어와 사해로 흘러 나가게 됩니다. 호수의 물은 고이지 않고 흐르기 때문에 늘 맑고 푸르며 맛있는 고기가 많이 잡히기로 유명합니다. 특히 베드로 고기가 유명합니다. 그래서 옛부터 이곳에는 어업이 성행했습니다. 게네사렛 호수는 예나 지금이나 그 풍경이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이 아름답고 신비감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이 호수가 유명하게 된 것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또한 물 위로 걸어가기도 하시고 광풍을 잔잔케 하기도 하셨습니다. 게네사렛 호수는 예수님의 아름다운 복음역사를 말 없이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호숫가에 우리 주님께서 찬란한 아침 햇살을 맞으며 서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이른 아침 조용해야 할 게네사렛 호숫가에 예수님을 옹위하는 무리들로 붐볐습니다. 이들은 새벽잠을 설치고 이른 아침부터 예수님께로 나아 왔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병든 자들로서 현실문제가 절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영혼의 갈증이 더욱 절실하였습니다. 그들은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이른 아침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이를 볼 때 사람들이 정말 갈급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서로 예수님 가까이서 말씀을 듣고자 미는 바람에 예수님이 호수에 빠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고 그 중 한 배에 오르셨습니다. 그 배는 시몬의 배였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배를 조금만 띄어 주시겠습니까? 하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시몬은 하던 일을 멈추고 예, 그러지요 하며 즉시 배를 띄웠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겸손히 도움을 요청하심으로 그가 말씀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배에 앉으사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쉽고도 재미있게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른 아침 예수님의 낭랑한 음성이 조용한 게네사렛 호숫가에 잔잔한 파고를 일며 울려 퍼졌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자 숨을 죽여가며 듣고 있었습니다. 갈매기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까악까악하며 모여 들었고 물고기들은 물위로 머리를 내밀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두운 시대에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쉬임없이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는 것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인생 문제를 해결하고 사람을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여러가지 많은 문제가 있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영적 세계에 대해 무지한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이 어떻게 해서 존재하게 되었으며, 인생의 참된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또 눈에 보이는 현상 세계만이 전부인 줄 알고 물질과 육신에 얽매여 살아갑니다. 이런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적 무지를 깨우쳐 주고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살려 줄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쉬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무리에게 말씀을 가르치기를 마치신 후 시몬에게 관심을 가지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뜻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의 실패를 만회시켜 주고자 함이었습니다. 현재 그의 문제는 고기 잡는 데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잘 도우려면 고기를 많이 잡도록 해야 합니다. 공부에 실패한 사람은 공부를 잘하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학교 공부 같은 것은 허무하니 말씀 공부만 하라고 하면 안됩니다. 학교 공부를 잘 하도록 도와야 믿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당면한 현실문제를 외면치 않으시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현실의 어려움에 주저앉아 패배의 인생을 살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믿음으로 다시 도전하여 실패를 만회하고 승리의 인생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둘째로, 그를 깊은 세계로 인도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시몬은 이때까지 얕은 세계에서 고기 잡는 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는 상식적으로 깊은 세계에는 고기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상식과 이성과 경험의 굴레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이성을 초월한 영적 세계, 믿음의 세계로 인도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므로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영적인 눈을 떠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도 우리를 깊은 세계로 인도하고자 하십니다. 말씀의 세계는 깊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한번 대충 읽어보고 졸음만 오고 별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는 마치 바다의 겉 모습만 보고 별것 아니라고 말하는 자와 같습니다. 바다는 겉으로 볼 때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깊은 곳으로 들어가 보면 상상치 못한 신비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그곳에는 온갖 진기한 물고기와 보화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말씀의 세계도 조금만 깊이 들어가 보면 내가 이때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영적 세계가 펼쳐지게 됩니다. 이곳에는 분명한 삶의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고 일생 감당할 사명이 있습니다. 사죄의 은혜가 있고, 승리의 인생, 의미있고 값진 인생을 살 수 있는 비결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실로 무궁무진한 보화를 가지고 있는 깊은 세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말씀의 깊은 세계로 나아가서 풍성한 보화를 건지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의 세계에서도 가장 깊은 세계는 예수님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한마디로 예수님을 배우고 본받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배우고 본받지 않는다면 수박의 겉만 핥고 속은 맛보지 않는 것과 같이 신앙의 본질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사업적이 되어 사업만 하다가 예수님을 놓치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신앙생활은 피곤하고 짜증스럽고 무의미하게 됩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을 배우고 본받고자 하면 우리의 생활은 기쁨과 생명력으로 차고 넘치게 됩니다. 또한 우리의 내면에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조각됩니다. 사도 바울이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생명력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를 배우고 본받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년에 옥중에 있으면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3:7-9a) 또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3:10,11). 그가 옥중에서도 그리스도를 배우고 본받고자 했을 때 그의 내면은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이 때문에 빌립보서는 기쁨의 서신이 되었습니다. 그의 모든 관심의 촛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알되 그의 인격과 사상, 그의 죽으심과 부활 등 전부를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로서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져 있다고 하였습니다(골2:2,3).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무궁무진한 보화를 캐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깊은 겸손과 온유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의 무한하신 은혜와 사랑을 배울 수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의 의미와 부활의 권능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생동안 아무리 배워도 알 수 없는 깊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얕은 물가에서 찰싹 거리고 있는 우리를 깊은 세계로 초청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시몬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 앞에 겸손한 시몬의 위대한 내면성을 보게 됩니다. 시몬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힘든 점은 한 두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밤새도록 수고하였기 때문에 육신적으로 매우 지치고 피곤하였습니다. 오늘은 재수가 없어 공쳤으니 빨리 그물을 씻고 해장국이나 먹고 한잠 푹 자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때 다시 그물을 내린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또 그의 마음에는 최선을 다해 보았는데 안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안된다는 불신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try again 해보라고 하면 목자님, 안해 본 것이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서 양을 fishing하고 1대1을 해 보았는데 안되는 걸 어떻게 합니까? 나는 체질적으로 목자가 될 수 없어요 라고 말합니다. 체험으로 형성된 부정적인 생각과 불신은 말씀에 순중하는데 큰 장애물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장애물은 자존심입니다. 사람들은 쥐꼬리만한 자존심일찌라도 자존심이 상하면 화를 냅니다. 시몬은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노련한 어부로서 목수 출신인 예수님께 카운슬링을 받는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제 전공분야는 간섭하지 마시고 말씀이나 잘 가르쳐 주세요 라고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러가지로 순종하기 힘든 상황 가운데서도 다만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했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여기에 시몬 베드로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그는 상식이나 이성, 경험, 피곤한 마음, 자존심, 자기 생각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앞세웠습니다. 그에게는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겸손하게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깊은 세계로 나아가 말씀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려면 반드시 깊은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깊은 세계로 나아가는데 가장 큰 장애물은 이성에 기초한 합리적인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이성으로 생각해서 타당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성을 판단의 최고 권위자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의 이성이 모든 사물의 절대적인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 이성의 한계를 논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인간의 이성을 절대시하고 모든 것을 이성에 비추어서 판단하고자 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말씀도 인간 이성으로 분석, 비판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심오한 뜻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씌여졌기 때문에 인간 이성으로 분석할 수 없고 근본적으로 성령의 도우심으로만이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딤후3:16,벧후1:20,21)
또 사람들이 깊은 세계로 나아가기 힘든 이유는 자기를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모험보다 안정을 원합니다. 이 때문에 깊은 곳에 가기를 원치 않고 얕은 물가에서 고기를 잡고자 합니다. 깊은 곳으로 가다가 빠져 죽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이런 자는 두려움 때문에 깊은 물이 아니라 접시물에도 빠져 죽습니다. 깊은 세계로 나아가려면 모험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모험입니다. 그러나 이는 확실한 보장이 약속되어 있는 모험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을 때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두 배에 채우게 되었습니다. 그가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였을 때 그의 빈 그물은 굵직굵직한 고기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경험과 능력을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을 때는 빈 그물만 끌어 올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을 때는 풍성한 수확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릴 때 상상을 초월하여 풍성한 축복을 주시는 주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약속의 말씀들이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8:35). 이런 약속의 말씀들은 결코 빈 말씀들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이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기만 하면 반드시 풍성한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넘치도록 능히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엡3:20)
II.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8-11)
시몬은 평소 보지 못한 굵직굵직한 고기를 잡았을 때 와! 와! 하며 고기에 정신이 팔리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기보다 예수님께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깊은 경외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5절에서 그는 예수님을 선생 이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주 라고 불렀습니다. 주 란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단순히 존경받을 선생이 아니라 물고기조차도 지배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그 앞에 엎드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신은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무가치한 존재이며 본질적으로 죄인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만날 때 비로소 죄인으로서의 참 자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리새인으로서 흠이 없는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가를 깨닫고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딤전1:15). 이사야 선지자도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났을 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외쳤습니다(6:3-5). 저도 과거에는 세상에 나처럼 착하고 순진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나처럼 추하고 비참한 죄인이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죄인임을 고백했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10b). 무서워 말라 이 말씀은 시몬에게 임한 사죄의 은혜였습니다. 시몬이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했을 때 예수님은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 새로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주셨습니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이제 후로는 이 말씀은 과거야 어떤 인생을 살았든간에 개의치 않으시고 앞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방향을 주신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는 고기 잡는 인생에서 이제 후로는 사람을 취하는 인생으로 삶의 큰 방향 전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시몬은 이때까지 고기 잡는 생활인의 삶을 살아 왔습니다. 그의 직장은 게네사렛 호수였습니다. 그는 매일 이곳에 출근하여 열심히 고기를 잡았습니다. 고기를 많이 잡을 때는 그의 삶은 희망으로 부풀었으나 고기를 잡지 못했을 때는 절망의 먹구름이 뒤덮였습니다. 그는 고기에 울고 웃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삶에는 참된 인생의 의미나 비젼이나 역사 창조와 같은 단어들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삶의 권태와 피곤과 무의미와 허무의 열매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고기를 잡는 생활은 근본적으로 자기를 위한 삶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에게서 하나님께로 방향 전환을 해야 됩니다.
사람을 취하는 인생은 어떤 인생을 말합니까? 인신 매매범이 되는 것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명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람을 취한다는 것은 사람을 산 채로 사로잡는 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한마디로 말해서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고, 쓸모없는 사람을 쓸모있는 사람으로 키우는 일입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인생의 의미와 목적이 있습니다. 좀 고생스럽기는 하지만 생명의 열매가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고 키우는 일이야말로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도 가장 가치있고 보람된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을 살리고 키우는 일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잠언24:11절에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주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인생들은 죄로 말미암아 병든 인생을 살며 사망으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이런 인생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구원하고 주님의 제자로 키우는 삶이야 말로 가장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삶입니다. 이는 바로 예수님께서 감당하신 목자의 삶입니다.
사람을 취하는 목자의 삶을 살려면 무엇보다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과거 시몬 베드로의 관심은 물고기였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물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을까? 다시 말하면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어서 잘 먹고 편히 살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의 관심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사람을 살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사람을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사람으로 키울 수 있을 것인가? 연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돕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인간이란 참으로 신비한 존재입니다. 신묘막측한 존재입니다. 이런 인간을 인간의 힘과 지혜로 도울 수 없습니다. 인간을 바로 도우려면 하나님의 지혜와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위대한 사명인이신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사람을 취하는 위대한 사명인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발견하자 아무 것도 아까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렸지만 큰 보화 되신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전 인생을 예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발견했을 때 이를 좇는 진정으로 용기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결론: 이제 후로는 사람을 취하리라. 이 말씀 속에서 내가 너를 사람을 취하는 사명인으로 키우시겠다는 예수님의 의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또한 너를 통해 사망의 바다에서 빠져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시겠다는 예수님의 비젼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를 부르실 때 그가 장차 큰 영적 지도자가 될 희망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 한 사람을 통해 온 세계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부르시고 그가 영향력 있는 위대한 영적 지도자가 되기까지 그의 온갖 허물과 실수를 다 감당해 주셨습니다. 시몬 베드로를 취하신 예수님은 실로 가장 위대한 사명인이십니다. 예수님은 오늘날도 허무의 바다에서 무의미하게 고기 잡고 있는 이 시대 젊은 지성인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