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Study View


누가복음 6:1-19

by Mark Yang   04/22/2022   Luke 6:1~19

Message


누가복음 제 1부 13 강 

열 두 사도를 택하신 예수님

말씀/ 누가복음 6:1-19
요절/ 누가복음 6: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택하시게 된 직접적인 동기와 제자들에게 둔 예수님의 희망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열 두 사도 양성은 예수님의 사역 중 가장 위대한 사역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열 두 사도를 양성하심으로 힘든 시대를 이기셨고, 인류 구속 역사를 계승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좋은 제자요 제자 양성가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님(1-11)

  1-11절에서 나오는 두 사건은 안식일에 일어난 사건으로서 그 시대 종교 지도자들이 낡은 가죽 부대와 같이 얼마나 쓸모없게 되었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였습니다. 제자들은 너무 배가 고파 그 날이 안식일인 줄도 모르고 무의식적으로 밀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었습니다. 전날 제자들은 세리 레위의 초대를 받아 생전 처음 보는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튿날이 되자 또 배가 고파졌습니다. 그들은 훈련받고 양들을 섬기느라 자주 굶었으므로 항상 배가 고팠습니다. 그들은 배고픈 제자들이었습니다. 사람이 배가 고프면 체면이 없어집니다. 그들은 밀밭 사이를 지나갈 때에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밀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숨어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건수를 잡았다는 듯이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나타나 날카롭게 비난했습니다.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   어찌하여 하느뇨?  이는 바리새인의 전문용어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비추어서 항상 옳고 그름만을 따졌습니다. 그들의 사전에는 이해와 긍휼과 사랑이란 단어가 없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야 할 법도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율법은 딱딱하기는 하지만 그 정신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율법을 주셨지만 결코 율법적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배고픈 마음을 잘 이해하시고 이웃의 곡식 밭에 들어갈 때에 낫을 대서는 안되지만 손으로 이삭을 잘라먹는 것은 허용하셨습니다(신23:25).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율법적이었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잘 지키고자 하는 열심은 대단했습니다. 유대 랍비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1261개조에 달하는 까다롭고 복잡한 세부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피가 나면 싸매기는 해도 약은 바르면 안되었습니다. 또 안식일에는 추수, 타작, 키질에 해당되는 행동을 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이러한 규례는 사람들의 행동을 얽어매고 생각을 율법화시켰습니다. 바리새리인들에 의하면 이삭을 자르는 것은 추수요, 손으로 비비는 것은 타작이요, 입으로 껍질을 부는 것은 키질하는 것으로 이는 안식일 법을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배고픈 제자들의 마음을 몰랐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우리도 형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기보다 어떤 기준을 가지고 요구하는 마음으로 대할 때 바리새인과 같이 형제를 판단하게 됩니다. 1대1 약속을 잘 지키지 않으면  어찌하여 사람이 그런가? 하고 판단하게 됩니다. 또 양들도 목자가 잘 드러눕고 헤매면  어찌하여 목자가 그런가? 하고 판단하게 됩니다. 바리새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에  어찌하여 라는 단어가 생기면 바리새인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이해와 긍휼과 사랑입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다윗의 예를 들어 제자들을 변호해 주셨습니다. 사무엘상21:1-6절에 보면 다윗이 사울의 시기로 아무 죄없이 망명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자들은 먹을 것이 없어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때 그들은 놉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가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그런데 마침 그곳에는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떡 밖에 없었습니다(레24:8,9). 아히멜렉은 다윗을 율법적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배고픈 다윗을 이해하고 규례를 어기고 거룩한 떡을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다윗은 이를 먹음으로 규례를 어겼습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하나님은 다윗을 정죄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다윗은 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가 배고플 때 규례를 어긴 것을 조금도 문제삼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윗을 예로 들어 제자들을 변호하신 것은 제자들을 다윗과 같이 귀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실수할 때 왜 이런 짓을 하여서 나를 곤란하게 만드느냐 하며 핀잔을 주고 변호해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제자들은 기가 죽게 되고 매사에 실수할까봐 두려워하며 예수님의 눈치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지 않는 한 책망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모든 허물과 실수를 다 감당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규례로 제자들을 얽어매지 아니하시고 기를 살려 주셨습니다. 그들은 어린 아기가 어머니 품 안에서 마음대로 똥도 싸고 자라듯이 예수님의 품안에서 얼마든지 실수하고 자랄 수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누릴 수 있는 큰 특권이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계속해서 놀라운 선포를 하셨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제정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므로 안식일에 관한 모든 법을 초월합니다. 그러므로 안식일 법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새롭게 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합니다. 안식일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순종하고 예배하는 날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여지없이 패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안식일에 또 도전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다른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있을 때 그 곳에 오른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른 손이 마른 것 때문에 불편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두 손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른 손이 마른 것 때문에 효과적으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Violin도 켤 수 없고 피아노도 4부로 칠 수 없습니다. 또 싸움을 할 때도 남이 두 대 때리면 한 대 밖에 때릴 수 없어 항상 억울하고 분통터지는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취직을 하려고 해도 필기시험은 잘 보지만 면접 시험을 보면  집에 가서 연락할 때까지 기다리시오 라고 한 후 아무 연락이 없었습니다. 외경에 보면 그는 석공이었는데 오른 손을 다친 후 그 손이 말라 빌어 먹고 있었습니다. 한 손 마른 것으로 인해 그의 마음도 마르고 생각도 마르고 생활도 마르고 인생 전체가 말라 버렸습니다. 오른 손 마른 것은 생명에 관계되는 치명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우주만한 인생 문제가 되어 그를 못쓰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자의식으로 인해 여름에도 긴 옷을 입고 오른 손은 항상 호주머니 깊숙이 넣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악수할 때는 얼른 왼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는 운명주의에 빠져 자학하며 슬픈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도움이 필요하고 사랑이 필요한 자였습니다.

  세상에는 겉으로 볼 때 멀쩡하게 보이지만 그 내면은 깊은 인생문제를 안고 괴로와 하는 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치아가 고르지 못한 사람은 늘 입을 가리고 마음대로 웃지도 못합니다.눈에 쌍거풀이 안지거나 턱이 4각형이 되어도 자신을 학대하며 운명주의에 시달립니다. 이런 신체적인 조건 때문만이 아니라 성격 문제나 가정 환경문제로 내면이 말라 버린 자들이 많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정욕문제로 내면이 말라 비틀어져 있습니다. 이들은 도움이 필요하고 사랑이 필요한 자였습니다.

  오른 손 마른자가 어느날 도움을 받기위해 회당에 나가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양무리의 목자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에게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이 가련한 양을 미끼로 이용하여 예수님을 송사할 꼬투리를 잡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그의 병을 고치는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엿보고 있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생각을 아셨습니다.그들의 악한 의도를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과 충돌을 피하기 위해 모른 체 하시다가 나중에 오른 손 마른 사람을 따로 불러 고쳐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패한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 때문에 그들에게 도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한 가운데 세우고 그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그들은 선악의 분별력을 잃었고 생명에 대한 경외심도 상실했습니다. 그들은 약자를 이용하였고 선을 행하는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들의 가치관은 비뚤어져 있었고, 양심은 마비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안식일 규례를 잘 지키면 안식일을 잘 지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안식일을 잘 지키는 것인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안식일은 소극적으로 세상 일을 하지 않고 예배 잘 참석하는 것으로 잘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찾아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조금도 회개할 빛이 없는 완악한 종교 지도자들을 보실 때 근심하시고 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마른 손을 고쳐 주시고자 그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을 내밀라  예수님은 그 전에도  일어나 한 가운데 서라 고 명하셨습니다. 이러한 명령들은 자의식이 많은 그가 순종하기에 힘든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그에게 창피를 주고자 함이 아니라 그를 고쳐 주시고자 순종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가 고침을 받으려면 반드시 믿음으로 자의식을 극복하고 부끄러운 부분을 내 놓아야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그 사람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일어나 한가운데 섰습니다. 그리고 깊숙이 감추고 있던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는 믿음의 손, 순종의 손, 기도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손을 내밀자 신기하게도 손에 생기가 돌고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육신의 병 뿐만 아니라 마음도 병도 치료해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님을 어떻게 처치할 것인가 모의했습니다(11). 마가복음 3:6절에서는 평소 원수처럼 지내던 헤롯당과 모의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마들이었습니다. 그 시대는 선이 악에게 유린 당하고 진리가 불의에게 짓밟히는 절망적인 시대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II . 열 두 사도를 세우신 예수님(12-19)

  12절을 보십시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예수님은 어려운 시대를 타개해 나가기 위해 민중을 규합하여 민중혁명을 일으키시거나,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시고 바리새파 타도를 외치며 종교개혁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이때 조용히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혈과 육의 투쟁을 하지 않고 기도로 영적 싸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시대의 요구보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찾고자 하셨습니다.

  기도하신 후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13절을보십시오.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가지를 배웁니다.

첫째로, 소수의 영적 지도자를 양성하고자 결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던 시대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통치하에서 많은 수탈을 당하고 헤롯의 독재 정치로 인해 부패할 대로 부패했습니다. 백성들은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며 귀신 들려 고통하며 울부짖었습니다. 그 시대의 문제는 정치 문제인 것 같고 경제 문제인 것처럼 보입니다.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실 때 그 시대의 근본 문제는 영적 문제였습니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의 문제가 가장 심각했습니다. 그들은 목자로서 백성들을 품에 품고 상처를 싸매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또한 영적 지도자로서 백성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낡은 가죽 부대와 같이 굳어 있어서 아무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교만하였고 율법적이었고 권위적이어서 백성들에게 상처만 주었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열 둘을 택하사 그들을 양무리들의 선한 목자요 그 시대를 감당할 영적 지도자로 키우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1,200명이나 12,000명 정도의 많은 제자를 뽑지 않으시고 왜 12명만 뽑았을까요? 이는 많은 숫자를 뽑으면 키우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12란 숫자는 이스라엘 12지파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새 이스라엘로 뽑으셨습니다. 또 12는 완전수로서 온 족속, 온 세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12명은 이스라엘 민족의 대표요 세계 모든 족속의 대표입니다. 예수님은 열 둘을 통해서 세계 모든 족속을 보신 것입니다. 열 둘은 적은 숫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세계적인 위대한 영적 지도자로 키우고자 할 때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이는 세계 역사를 뒤바꾸어 놓기에 충분한 숫자입니다. 역사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고 창조적인 소수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소수의 제자들을 인류 구속 역사를 계승할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요 영적인 지도자로 키우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법이나 제도나 체제개선보다 사람을 키우고자 작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은 여러가지 문제로 산적해 있습니다. 에너지 문제, 공해 문제, 핵 문제, 마약 문제, AIDS 문제 등 절실히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습니다. 우리 나라만 하더라도 악법 문제, 물가 문제, 극심한 주택 문제, 부동산 투기 문제, 농정 문제는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보다도 더 시급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영적 지도자를 키우는 일입니다. 이 시대의 문제는 사람은 많은데 사람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시대는 모세나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참된 지도자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난국을 이기려면 지도자 양성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이 우상숭배로 전락하여 절망적인 시대에 아브라함 한 사람을 키우셨습니다. 그를 키우시되 그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까지 25년 동안 키우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며 부르짖을 때 당장에 출애굽 시키지 않으시고 모세 한 사람을 키우셨습니다. 그를 키우시되 결코 조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지도자로서 인간 기초를 놓도록 40년 동안 궁중교육을 시키시고 또 혈기가 다 빠지고 노예 백성을 품고 섬길만한 겸손하고 온유한 종이 되기까지 광야에서 40년 동안 신앙교육을 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80년동안 모세 한 사람을 키우신 후 그를 통해 장엄한 출애굽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소수의 지도자를 양성할 때만이 힘든 이 시대를 이길 수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소망과 인내입니다. 예수님은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사도란 어떤 특별한 사명을 위해 보냄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사도란 예수님의 전권대사입니다. 제자 하면 복음서의 제자들이 생각나지만 사도라 하면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모습이 연상됩니다. 복음서의 제자들은 자기 중심적이고 인간적이고 두려움이 많고 야심과 세상 욕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은 성령 충만하여 권세자들 앞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영적 장군들입니다. 그들은 매사에 기도하는 영적인 종이요, 또 경쟁하기보다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합심동역하는 성숙한 종들입니다. 또한 양무리의 선한 목자요, 주와 복음을 위해서는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 복음의 투사들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그 시대를 감당할만한 믿음의 아버지요, 인류 구속 역사를 계승할 역사창조의 주체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열 둘을 택하사 바로 이런 사도라 칭하신 것입니다. 칭하셨다는 것은 주권적으로 임명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주권적으로 택하시고 사도로 임명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임한 큰 은총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제자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14-16절에는 12제자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베드로는 단순하고 충성스럽고 정열적입니다. 그는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행동파입니다. 그러나 그는 감정적이고 충동적이어서 실수를 잘합니다.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고 큰 소리를 잘치는 Big mouth의 소유자입니다. 안드레는 멍하지만 심정의 사람이요 불가능에 도전하는 가능성의 사람입니다. 그는 오병이어의 신화를 창조한 사람입니다. 또 야고보와 요한은 늘 베드로와 경쟁하여 제 1인자가 되고자 하는 야심가들이었습니다. 한번은 어머니를 동원하여 예수님께 영의정과 좌의정 자리를 부탁하는 등 치맛바람을 일으킨 창시자였습니다. 요한은 사랑을 잘 받는 자요 사색가였습니다. 빌립은 지적이고 머리가 명석하지만 부정적인 사고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안드레에게 항상 선수를 빼앗겨서 콤플렉스가 많았습니다. 바돌로매는 나다나엘로서 간사한 것이 없는 순진파입니다. 그는 영화에 슬픈 장면만 나오면 눈물을 주루룩 흘리는 자였습니다. 반면 세리 레위는 이기적이고 세상 욕심이 가득찬 자였습니다. 또 도마는 의심에 박사학위를 가진 자로서 세리 레위가 과연 사도가 될 수 있을까 의심하던 자였습니다. 시몬은 열심당원으로 과거 머리를 삭발하고 데모를 주동하던 자였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아들 유다는 성경에 이름만 나오는 있으나 마나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도 있으나 마나한 족속들의 족장들이기 때문에 중요한 자들입니다. 가룟 유다는 돈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한 배은망덕한 자입니다.

  이들을 볼 때 인간 기초가 없고 배우지 못한 무식한 자들입니다. 또 먹기를 좋아하고 영적으로 깨닫는 데 둔한 자들입니다. 또 자기 나름대로의 이상과 세상 욕심으로 가득찬 자들입니다. 이들에게는 인간적인 배경이나 사회적인 배경이 없습니다. 이들은 어느모로 보나 뚜렷이 내세울 것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실 때 이들은 참으로 귀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부족하지만 믿음으로 예수님의 학교에 입학하여 예수님께 겸손히 배우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또 과거 어떤 생활을 했던 간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기로 결단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장차 사도로서의 큰 소망을 두셨습니다. 예수님은 현재 그들의 형편을 바라보고 낙심하지 않으시고 장차 변화된 모습을 보시고 큰 희망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현재 그들이 아무 쓸모없는 광석과 같지만 연단받기만 하면 빛나는 정금과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될 것을 믿으셨습니다. 또한 현재 그들은 거친 나무와 같고 보잘 것 없는 진흙과 같지만 진리의 말씀과 거룩한 사랑으로 잘 다듬기만 하면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보배와 같은 그릇이 될 것을 확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실로 위대한 제련가시요 뛰어난 목수시요 조각가가 되십니다. 아무리 거친 돌이라도 미켈란젤로의 손에 들어가면 살아 움직이는 불멸의 위대한 작품이 되는 것과 같이 무식하고 거친 촌 사람들이 예수님의 손에 들어갔을 때 인류 역사를 길이 빛낼 위대한 사도들이 된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사도로서의 희망을 가지셨을 뿐만 아니라 인내로 키우셨습니다. 그들의 병든 내면을 치료해 주시고 장점을 살려 주시고 약점은 감당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잘못된 세상 가치관을 바로 잡아 주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바른 영적 가치관을 갖도록 인내심을 가지고 섬겨 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누가 크냐 하며 경쟁하는 그들에게 겸손히 낮아져서 섬기는 자가 진정으로 큰 자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물고기 잡으러 갔을 때도 그들을 심방가셔서 자애로운 어머니와 같이 그들을 품고 섬겨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인내하시는 사랑으로 그들은 마침내 위대한 사도들로 변화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인내하시는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날도 인간적으로 볼 때 부족하기 그지없는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로 택하시고 사도로서의 소망을 두시고 키우고 계십니다. 우리는 자신을 바라볼 때 절망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늘 헤매기만 하고 자주 드러눕는 자신을 학대하고 이런 내가 과연 이 시대를 섬길만한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 회의할 때가 많습니다. 한 명의 양도 제대로 감당치 못하는 내가 어떻게 세계적인 목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 한심한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복의 근원, 열국의 아비, 역사 창조의 주인공이란 말들이 나와는 전혀 상관 없는 말처럼 들립니다. 나는 나에게 소망을 둘 수 없고 다른 사람도 나에게 소망을 둘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에게 큰 소망을 두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택하실 때 처음부터 소망을 두셨습니다. 키워보다가 쓸만하니까 소망을 두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내면의 연약함과 병든 마음을 잘 아시고도 처음부터 소망을 두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나의 병든 내면을 잘 아시고도 처음부터 영적 지도자요 믿음의 아버지요 기도의 어머니로서 큰 희망을 두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내로서 키우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크신 소망을 두시고 인내로 키우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인하여 깊은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17-19절에서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사 평지에서 제자들을 현장 교육 시키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산에서 제자들을 훈련시킨 것이 아니라 평지로 내려 오셔서 인턴훈련을 시키셨습니다. 평지는 문제가 많고 십자가가 많은 전투장입니다. 예수님께서 평지에 내려 오시자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병고침을 받고자 예수님을 좇았습니다.예수님은 이들의 선한  목자가 되사 친히 이들을 돌봐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평지에서 이 예수님을 배우며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우리를 주님의 제자로 택하시고 사도로서의 큰 희망을 두시고 인내로 키우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가 나에게 두신 예수님의 소망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배워나가는 예수님의 좋은 제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나아가 사도를 양성하는 사도 양성가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