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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6:37-49

by Mark Yang   04/22/2022   Luke 6:37~49

Message


누가복음 제 15 강 

        예수님의 제자의 내면성(2 )

말씀/ 누가복음 6:37-49
요절/ 누가복음 6:48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
                       니와 

  본문은 지난 강의에 이어 예수님의 제자들이 가져야 할 내면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특히 오늘 말씀은 영적 지도자들이 범하기 쉬운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영적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영적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남다른 영적 투쟁을 해야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영적 투쟁을 잘 할 수 있도록 내면적인 방향을 잡아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영적 지도자로서의 인생 기초를 잘 놓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 비판하지 말라(37-42)

  37절을 보십시오.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제자들이 영적 지도자로서 범하기 쉬운 과오는 남의 허물과 죄를 보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비판한다는 것은 재판석에 앉아 재판하는 것이요, 정죄는 판사가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남의 장점과 잘한 것을 이야기 하기보다 남의 약점과 허물을 이야기 하기를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은 남의 허물과 실수를 이야기 하지 않고는 못배기는 좋지 못한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남을 비판하기를 좋아할까요? 이는 남을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고 또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남을 비판하는 것을 재미로 하지만 비판을 받는 사람은 깊은 상처를 입고 신음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들이 장난삼아 개구리에게 돌을 던지지만 개구리들에게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비판하거나 정죄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남을 비판하게 되면 나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심판을 받게 됩니다. 판단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남의 허물과 실수를 보고 비판하는 대신 어떻게 해야 됩니까?
첫째는, 상대방의 장점은 살려주고 약점과 허물과 실수는 감당해 주고자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5:1,2절에서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  세상에서는 상대방의 장점은 무시하고 약점은 캐내어 어찌하든지 짓밟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는 형제의 장점은 살려주고 약점은 감당해 주어서 어찌하든지 살리고자 합니다.

둘째는, 적극적으로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남의 허물과 실수를 용서해 줄 때 우리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용서를 받게 됩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게 됩니다. 주기도문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주어야 우리도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마6:12).

  그러면 용서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까? 사람들은 용서하는 것을 전혀 책망을 하지 않고 너그럽게 봐 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용서란 결코 잘못을 눈감아 주고 봐 주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하면 형제를 못쓰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형제가 정욕의 죄를 범했는데 너그럽게 봐 준다면 그 형제는 죄를 가볍게 여기고 회개치 않으므로 파멸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로 하여금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회개함으로써 사죄의 은혜를 덧입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리고 진실되게 회개할 때 용서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란 결코 소극적인 단어가 아니라 적극적인 단어입니다. 오늘날 인간 관계에서 생기는 대부분의 문제가 남의 허물과 죄를 용서치 못하는데서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신 것 같이, 우리도 형제를 불쌍히 여기고 용서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심령에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이 임하여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사람들은 주기는 싫어하지만 받기는 좋아합니다. 선물 받기를 좋아하고 인사 받기를 좋아합니다. 또 편지는 하지 않으면서도 편지 받기를 좋아합니다. 또한 인정 받고 섬김 받고 사랑 받기를 좋아합니다. 사람들이 왜 받기를 좋아하는 것입니까? 이는 받는 것이 복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받고자 할 때 요구하는 마음이 생기고 원망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또 관계성이 파괴될 뿐만 아니라 다툼과 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사람이 받고자 할 때 내면이 비참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받는 문화는 형성되었지만 주는 문화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축복을 받기는 원하지만 축복을 나누어 주고자 하지 않습니다. 가진 자들이 가지지 못한 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기보다 어찌하든지 더 긁어 모으고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사회는 내부적으로 점점 썩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이 적극적으로 주는 생활을 함으로써 주는 문화를 형성해 나갈 때 이 사회는 점점 밝아질 것입니다.

  주는 생활을 하게 되면 손해보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일시적으로 희생과 아픔이 있지만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여러 모양으로 축복하사 축복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이는 곡식을 줄 때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되로 되어서 풍성하게 안겨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또 축복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축복할 꼬투리가 있으면 얼마든지 축복하고자 하시는 분이십니다. 민수기 6:22-26 절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은 이렇게 축복 주시기를 원하시지만 문제는 우리의 내면성이 문제입니다. 축복을 받으려면 축복을 받을만한 그릇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축복을 많이 주시려고 해도 내면이 간장 종지만한 그릇을 가지고 있을 때 축복을 많이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주는 생활을 함으로써 믿음의 그릇을 크게 키워 나가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넘치도록 우리를 축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능히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도록 하시는 분이십니다(고후9:8). 주는 생활은 행복의 비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행20:35). 또 잠언 11:24,25절 말씀은 주는 생활의 행복을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 지리라. 

  주는 생활과 받는 생활은 갈릴리 호수와 사해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헬몬산으로부터 물을 받아들여서 사해로 내 보냅니다. 이곳의 물은 고이지 않고 흐르기 때문에 신선하여 늘 맑고 푸릅니다. 또 싱싱하고 맛있는 물고기가 많이 잡히기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사해는 물을 받기만 하고 내보내지 않으므로 생명이 전혀 살 수 없는 죽은 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주는 생활을 할 때 갈릴리 바다와 같이 생명력이 넘치지만, 받는 생활만 하게 되면 사해 바다와 같이 심령이 부패하여 썩고 맙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는 생활을 하려면 여유가 있어야 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주고 싶은데 줄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생존경쟁이 심한 사회에서 나와 내 식구도 먹고 살기 힘든데 남에게 줄 것이 어디 있느냐? 그런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주는 생활을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자는 여유가 생기면 욕심이 생겨 더 인색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는 생활은 결코 물질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습니다. 이는 물질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요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주는 생활을 하고자 할 때 없는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식사 초대를 해도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빚을 내서 식사대접을 합니다. 그리고 불평을 합니다. 이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없으면 없는대로 된장찌게나 라면이라도 정성스럽게 준비하여 대접한다면 큰 은혜가 될 것입니다. 선물도 큰 선물을 할려고 하다가 생각만 하고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작은 선물, 즉 볼펜 한자루나 쵸코렛 하나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선물도 할 형편이 못되면 남을 섬길 수 있고 이해해 주고 인정해 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줄 수 있고 기도해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주는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주는 생활은 자연스럽게 되지 않습니다. 팔이 안으로 오그라 들듯이 우리 인간의 본성은 받기는 좋아하지만 주기는 싫어하는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본성이 있습니다.  주라  이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우리는 이 명령의 말씀에 순종을 해야 됩니다. 저희 모임은 지난 30년 동안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막6:37)는 말씀에 순종하여 적극적으로 주는 생활을 하고자 몸부림을 많이 쳤습니다. 해마다 년말에는 구제 헌금을 하여 주는 생활을 했습니다. 또 1964년 제주도에 선교사를 파송한 것을 필두로 하여 선교사 파송에 전심전력 하였습니다. 그 결과 현재까지 훈련받은 정식 선교사만 34개국에 약 5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물질과 사람을 주는 생활을 하게 되면 본국 역사는 망할 것 같았지만 오히려 더욱 더 차고 넘치게 되었습니다. 주는 생활을 하는 개인이나 모임은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흥왕하게 되지만, 주는 생활을 하지 않고 꾸리는 개인이나 모임은 반드시 쭈그러들고 망하게 됩니다. 미국이 세계에 대한 주인 의식을 가지고 각곳에 선교사를 파송했을 때 살아 있고 부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주는 생활을 중단하고 자기를 지키고자 했을 때 내부가 점점 부패해지고 망해가고 있습니다.

  38절 하반절은 우리가 남을 용서하고 적극적으로 주는 생활을 하면 그것이 그대로 자기에게로 돌아옴을 말해 줍니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이 말씀은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리라 는 말씀의 뜻과 같습니다(고후9:6). 우리가 많이 거두기를 원한다면 많이 심어야 하는 것입니다.

  39-42절은 사람을 올바로 인도하고 바로 도우려면 먼저 예수님께로부터 충분히 훈련을 받고 자기를 돌아보는 생활을 해야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소경은 나아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져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됩니다. 오늘날 같으면 차에 치여 죽게 될 것입니다. 영적 소경은 영적 분별력이 없고 영적세계를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자가 선생보다 높지 못하지만 충분히 훈련을 받게 되면 그 선생과 같게 됩니다.  온전케 된 자  는 충분히 훈련을 받은 자를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희망을 보게 됩니다. 현재 제자들은 소경과 같이 영적으로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께로부터 충분히 훈련을 받기만 하면 예수님과 같이 양무리들의 좋은 인도자가 될 것을 믿으셨습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영적인 소경은 다른 사람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합니다. 들보는 건물의 서까래로 쓸 수 있는 목재이고, 티는 톱밥에서 나오는 미세한 티끌을 가리킵니다. 영적인 소경은 자신에게는 들보와 같은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 것은 보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있는 티끌과 같은 약점은 잘 봅니다. 그리고 어찌하든지 티끌을 빼 주고자 합니다. 아니 빼 주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합니다. 눈의 티를 빼려면 아주 섬세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칠게 다루다가 눈을 상하게 하여 실족케 하는 치명적인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의 약점을 보고 고쳐 주려고 하기 보다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피고 회개하는 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밝히 보고 형제의 약점을 섬세하게 도울 수 있습니다.

II. 나무와 그 열매(43-45)

  예수님은 제자들이 좋은 열매를 맺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는 인간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하나님은 열매를 따라 인간들을 심판하십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할 때 찍혀 불에 던지우게 됩니다(눅3:9).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반드시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무와 열매는 불가분의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고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합니다. 무화과나 포도와 같이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무화과 나무나 포도나무와 같이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성은 가시나무와 찔레와 같아서 이기적이고 반항적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죄의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 포도나무되신 예수님께 접붙인바 될 때 본성이 변하여 절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사람의 행위의 열매는 그 마음에 무엇을 쌓는가에 달려 있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마음에 선을 쌓게 되면 그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을 쌓게 되면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마음에 찬송을 쌓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찬송이 흘러 나옵니다.  그러나 유행가를 쌓게 되면 아무리 찬송가를 불러야 되겠다고 생각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유행가가 흘러나오게 됩니다. 또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쌓게 되면 건드리기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 음란과 욕설과 불평과 신경질을 쌓게 되면 건드리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음란과 욕설과 불평과 신경질이 튀어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마음에 무엇을 쌓는가에 따라 선한 자, 악한 자가 됩니다. 마음에 쌓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모양으로든지 말과 행동과 열매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평소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도 선을 쌓기에 힘써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쌓아야 할 선은 무엇입니까? 사도 베드로는 벧후1:5-7 절에서 우리가 힘써 쌓아야 할 선이 무엇인가를 열거했습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러한 선을 쌓아나갈 때 우리는 성숙한 영적 지도자로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III. 반석 위에 지은 집(46-49)

  46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듣고 배운 것이 많기 때문에 말만 잘하는 구신자가 되기 쉽습니다. 특히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자들은 남은 열심히 가르치지만 자신은 행치 않기 쉽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행치 않을 때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와 행치 않는 자가 어떠함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집을 짓되 깊이 파고 그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습니다. 이런 자는 말씀에 기초한 인생관과 가치관, 세계관을 확립하고자 몸부림 칩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마음이 허탈할 때나 착잡할 때나 늘 말씀을 붙들고 투쟁합니다. 기초공부도 형식적으로 풀지 않고 생각을 하면서 깊이 풀고, 소감도 라면식으로 먹지 않고 마음을 바쳐서 씁니다. 그리고 실제 생활에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말씀대로 살고자 투쟁하다가 핍박을 받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인생의 견고한 기초를 놓게 됩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으려면 돈이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걸리고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가장 중요한 것이 기초 공사입니다. 기초 공사를 든든히 할 때 위로 집을 높이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63빌딩이나 무역회관과 같은 고층 건물들은 모두 그 지반이 견고한 반석 위에 두고 있습니다. 인생의 기초 공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반석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께 인생의 기반을 두고 진리의 말씀에 기초하여 인생 기초를 쌓고자 할 때 많은 시간과 노력과 희생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기초를 쌓은 자는 세상의 어떤 환난을 만나도 요동치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어떠합니까? 이런 자는 주초없이 흙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습니다. 이런 자는 신앙생활을 쉽고 편하게 하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는 할 수 있는 대로 십자가 없이, 아무런 투쟁없이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이들은 말씀보다 자기 생각과 사상 위에 집을 짓습니다. 평소 때는 반석 위에 집을 지었는지 흙 위에 집을 지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병이나 교통사고나 화재나 지진이나 죽음과 같은 인생의 탁류에 부딪히면 드러나게 됩니다. 이때 흙 위에 집을 지은 자는 여지없이 넘어지고 맙니다. 85년도에 멕시코에 큰 지진이 일어났을 때 지진을 대비하여 설계대로 지은 집은 많은 물질이 들어가고 시간과 노력이 많이 걸렸지만 기초가 든든하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날림 공사를 한 건물들은 대 참사를 겪었습니다.

  오늘날 20C 말 고도로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서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탁류를 만날 때 말씀대로 사는 것이 지혜로운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젊은 날에 어리석을 만큼 우직하게 말씀에 기초한 인생관과 가치관을 쌓음으로 인생의 기초를 견고하게 놓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