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제 1부 16 강
이만한 믿음
말씀/ 누가복음 7:1-10
요절/ 누가복음 7:9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
였노라 하시더라.
본문은 이방인 백부장에 관한 말씀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사렙다 과부, 수리아의 나아만 장군,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감사하는 사마리아 문둥이 등 이방인에 관한 기사가 많이 나옵니다(4:26,27,10:30-37,17:16-18). 이는 복음의 세계성과 예수님이 세상 만민의 구주이심을 말해 줍니다.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은 예수님이 기이히 여기실 정도로 위대한 사랑과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크게 칭찬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백부장의 인격과 믿음을 배움으로써 예수님께 인정받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 백부장의 사랑(1-5)
예수님은 6장에서 택하신 제자들에게 제자로서 가져야 할 내면성에 대해 주옥과 같은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가버나움으로 들어 가셨습니다(1). 2절을 보십시오.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여기서 우리는 잠시 당시 백부장과 종의 위치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백부장은 100명으로 구성된 백인대 의 지휘관으로서 로마 군대의 뼈대가 되었습니다. 한 군단에는 60명의 백부장이 있는데 그들이 군단의 규율과 역량을 좌우하였습니다. 대부분의 백부장들은 말단 졸병에서부터 승진하였으므로 군대 내에서 가장 많은 경험을 축적한 자들이었습니다. 로마는 광대한 지역을 군대의 힘으로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식민 지역의 백부장의 권한은 막강했습니다. 반면 종은 노예로서 주인이 마음대로 사고 팔 수 있는 재산의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종이 병들어 쓸모없게 되면 버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습니다. 사무엘상 30장에 보면 아말렉 사람들이 다윗이 없는 틈을 타서 모든 소유와 여인들을 사로잡아 갔습니다. 이때 다윗이 400인을 거느리고 쫓아 가다가 들에 버려진 애굽 소년 하나를 만났습니다. 그는 아말렉 사람의 종이었는데 사흘 전에 병이 들자 주인이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종의 위치는 이러하였습니다.
백부장은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죽게 내버려 둔다거나 버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직업 군인들의 특성은 강포하고 무정하고 무자비합니다. 당시 로마 군인들은 강포하기로 이름났습니다(눅3:14). 그들의 직업은 침략하여 죽이고 파괴하고 점령한 지역을 무력으로 다스리는 것이었으므로 그들의 인간성은 자연히 강포 하였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생명의 존엄성이나 인간애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종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눈하나 깜짝 하지 않을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은 이런 그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첫째로, 그에게는 한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는 종을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종은 부려먹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의 인격보다는 소유나 신분이나 학력이나 사회적인 지위를 기초로 평가합니다. 아무리 인격이 훌륭해도 학력이 낮거나 사회적인 지위가 없으면 무시해 버립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종이 비록 비천한 노예 신분이었지만 존재 자체를 귀히 여겼습니다. 백부장은 종을 아끼고 사랑하며 형제님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면 종은 함박 웃음을 웃으며 마음을 바쳐 주인에게 충성했습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는 깊은 사랑과 신뢰로 맺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종이 인도네시아 개척을 위한 운동 시합에서 축구를 하다가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마태 8:6 절을 보면 그의 병은 중풍병이었습니다. 이는 하인으로서 아무 쓸모없게 되는 치명적인 병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상태는 죽게 될 지경에 이를 만큼 심각하였습니다. 백부장은 경희 의료원 한의대를 나온 유명한 한의사를 불러다가 아무리 침을 놓고 치료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 정도 되면 아무리 사랑하는 종이지만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포기치 않았습니다. 그의 사랑은 종이 병들어 쓸모없게 되어 죽게 되었을 때 더 잘 나타났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한지라 백부장은 병들어 죽어가는 종으로 인하여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는 종의 고통에 동참하여 함께 괴로와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더러운 문둥병자도 깨끗케 하시고 불치의 중풍병자도 고쳐 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아 예수님! 예수님이 계셨구나 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즉시로 유대 장로들을 찾아가서 예수님께로 가서 제발 오셔서 그 종을 구원해 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그의 간청은 절실하였습니다. 아니 절실하다 못해 애절하였습니다. 그는 한 몹쓸 종을 구원하기 위해 백부장으로서의 위신과 체면과 자존심과 자의식을 다 버렸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어찌하든지 그 종을 구원하고자 하는 사랑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랑은 바로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되 사랑스럽고 쓸만하기 때문에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만일 사랑할만 하기 때문에 사랑한다면 진정한 사랑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되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죄인 되었을 때에, 원수되었을 때에 그의 놀라운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로마서 5:8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때문에 우리가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백부장은 유대 민족을 사랑하였습니다. 백부장이 종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께 유대 장로들을 보낸 것은 예수님께 대한 예의였습니다. 그런데 유대 장로들은 율법적이고 비판적이고 체면이 강하고 완고하기로 이름난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이 백부장의 비천한 종을 위해 예수님께 나아가 간청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백부장의 종에 대한 사랑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만사를 제쳐두고 예수님께 나아가 간절히 구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이를 볼 때 유대 장로들은 백부장을 마음으로부터 존경하며 사랑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백부장과 유대 백성들 간에는 깊은 사랑의 관계성이 맺어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신뢰와 사랑의 관계성은 하루 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에 이러한 관계성을 맺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인들이 식민지 중에서 가장 다스리기 힘든 나라는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으로서의 자부심 때문에 로마의 통치를 용납할 수 없어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인들을 이방인이라 무시하고 증오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이런 유대인들을 무시하고 무력으로 다스렸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데모할 기미만 보이기만 하면 즉각 공권력을 투입하여 무자비하게 짓밟았습니다. 이로 인해 증오심은 더욱 쌓여 갔습니다. 이런 분위기 가운데서 로마 군인이 유대 민족과 신뢰와 사랑의 관계성을 맺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유대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골수 유대인인 유대 장로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는 백부장이 종을 지극히 사랑하듯, 유대 민족을 지극히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은 지배국 로마인으로서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대 민족의 입장에까지 낮아져서 그들을 겸손히 섬겼습니다. 그는 그들의 마음의 상처를 싸매주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재를 털어서 유대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회당을 지어 주었습니다. 이는 통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처음에는 그의 사랑을 의심하고 반발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그들이 반발하면 반발할수록 그들을 더욱 더 사랑했습니다. 마침내 사랑이 이겼습니다. 사랑은 그들의 불신과 의심과 반발심을 녹여 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은 그의 깊은 겸손과 자기들에 대한 희생적인 사랑을 보고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마음으로부터 백부장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깊이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랑과 신뢰의 관계성 때문에 다른 지역은 소요가 끊임없이 일어났지만 백부장이 다스리는 지역은 언제나 평화로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권위가 어디서 오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사람들은 권위를 세우려면 힘으로 누르고 강경하게 다스려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겉으로는 어쩔 수 없이 굴복할 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불만과 반발심으로 응어리지게 됩니다. 오늘날 KBS의 문제
도 통치권자가 힘으로 권위를 세우려고 하기 때문에 점점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치닫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권위란 힘으로 누르고 강경하게 다스린다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면 할수록 권위를 상실하고 반발심과 중오심만 쌓이게 됩니다. 진정한 권위란 백부장과 같이 사랑으로 품고 섬기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이는 한 나라 뿐만 아니라 어떤 모임이나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교사상에 물든 한국의 남성들은 대부분이 남편이나 아버지의 권위를 세우려면 힘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때문에 아내나 자식들에게 쌍스러운 욕을 하고 때리고 거칠게 대하는 남자들이 많습니다. 이로 인해 자녀들은 마음에 깊은상처를 받고 아버지를 미워하고 죽이고 싶도록 증오하게 됩니다.
진정한 권위란 인격적으로 대하고 이해하고 사랑으로 섬기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저는 곽베드로 목자님을 통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곽마리아 선교사님과 결혼한 후 인간적으로나 영적인 면에서 자신보다 훌륭한 동역자와 어떻게 동역을 하며 무엇보다 어떻게 남편의 권위를 세우고 가정의 질서를 세울 수 있을 것인가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한 책을 읽었는데 거기에는 남편이 아내를 하녀처럼 생각하고 부리게 되면 하녀의 남편이 되지만, 남편이 아내를 황공주와 같이 생각하고 귀히 여기고 사랑하면 황공주의 남편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글을 읽고 나서 그는 황공주의 남편이 되고자 결심하고 동역자를 황공주와 같이 대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자연히 가정에 질서가 생기고 행복이 차고 넘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를 통해 곽베드로 목자님이 앞으로 백부장과 같이 큰 목자로 성장할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백부장은 까다로운 유대 장로들로부터 인정받을 만큼 인격자요 위대한 사랑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인간에 대한 존엄성과 깊은 사랑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인간애는 민족과 국경과 신분과 계급을 초월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인간애를 가진 자를 귀히 보시고 크게 쓰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결국 백부장과 같이 사랑을 소유한 인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 사랑을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의 3대 요소인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서 제일이 사랑입니다(고전13:13).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도 사랑입니다(요한1서4:7,8).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신자들이 쌓아야 할 최고의 덕입니다(벧후1:7). 우리가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것입니다. 요한1서 3:14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II . 백부장의 믿음(6-10)
6,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유대 장로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함께 백부장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백부장이 갑자기 벗들을 보내어 말했습니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그는 병들어 죽어가는 종을 어찌하든지 살리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급히 유대 장로들을 보내어 예수님을 오시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후 그는 곧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발견하고 두렵고 떨렸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는 강대국 로마의 장교로서 권세가 있는 자요, 예수님은 약소 민족의 초라한 전도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고 내면을 보는 영적 눈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이야말로 진리요 생명임을 알았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행하신 능력의 역사를 통하여 예수님이야말로 인간 이상의 신적 권위를 가지신 분이심을 깨달게 되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주여 (Lord)라고 부른 것을 볼 때 그는 예수님을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왕이요 총사령관으로 영접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발견했을 때 동시에 자신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비천한 존재인가 자아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시는 것 뿐만 아니라 자신이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생각하고 함부로 대하였지만 이방인 백부장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두렵고 떨림으로 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부장은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를 절대적으로 믿었습니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백부장은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시공간을 초월하여 병마까지도 복종할 것을 믿었습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갚은 경외심이 있었습니다. 이는 실로 놀라운 믿음이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갖게 되었을까요? 그는 8절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그는 군인 사회에 살면서 명령의 본질을 깊이 이해했습니다. 명령은 군대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힘입니다. 군대에서 상관의 명령은 절대적입니다. 상관이 명령을 하면 이유없이 무조건 복종해야 됩니다. 그 명령이 아무리 불합리하다 할지라도 순종해야 됩니다. 이유를 따지고 불순종하며 징계를 받게 됩니다. 군대에서는 명령 불복종의 죄를 가장 큰 죄로 다루고 전시에서는 총살감입니다. 그만큼 군대에서는 상관의 명령이 갖는 권세가 대단합니다. 계급이 높을 수록 말씀의 권세도 큽니다. 사단장의 명령은 그 사단에서는 왕의 명령과 같이 권위가 있습니다.
백부장은 로마 군대의 장교로서 상관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는 많은 훈련을 통하여 명령에 자기를 쳐 복종시키는 법을 배웠습니다. 처음에 그는 자존심과 반발심 때문에 순종하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서 자존심과 반발심을 꺽고 자연스럽게 순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가 순종하는 법을 배웠을 때 명령하는 법도 깨달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한마디로 잘 훈련 받은 군인으로서 군인 정신이 충만한 자였습니다. 그가 순종을 배웠을 때 자연스럽게 믿음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를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시공간을 초월하여 병마까지도 복종할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믿음의 비밀은 순종을 배울 때만이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믿음은 곧 순종이요, 불신은 곧 불순종이기 때문입니다(요3:36). 아담의 불순종은 불신의 역사를 낳았지만 예수님의 순종은 믿음의 역사를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믿음의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순종을 배움으로 순종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원리는 모든 것에 적용됩니다. 훌륭한 군인이 되려면 먼저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육사에 들어가면 1학년 때의 교육 목적이 절대복종이라고 합니다. 절대 복종을 배우지 않고 결코 장군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훌륭한 의사가 되기 위해서도 인턴부터 수련기간 동안 절대 복종을 배웁니다. 과거에는 훌륭한 스승 밑에서 학문이나 무술을 배우려면 먼저 심부름하고 시중들면서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학문이나 무술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야 학문이나 무술을 올바로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 모임에서도 목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신학적인 지식이나 목자가 되는 기술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보다 자기가 깨어지고 순종을 배우는 인턴훈련을 시킵니다. 그래야 양무리들을 품고 섬길 수 있는 내면성 있는 목자요 능력있는 말씀의 종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순종을 배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자존심이 있습니다. 또 인간에게는 아담의 불순종의 피와 가인의 반발심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자발적으로 하고자 하다가도 누가 시키면 자존심이 상하고 속에서부터 반발심이 솟구칩니다. 이러한 자존심과 반발심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 아무 말이 없고 순종을 잘 하는 것 같이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을 살펴보면 겉으로 나타내지 않았을 뿐 속으로는 반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발하게 되면 절대로 믿음을 배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순종하면 어쩐지 어리석고 모자란 자 같이 생각되고, 반발해야 뭔가 된 것 같이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조건 반발하고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순종은 어리석은 자가 하는 것이 아니요 진정으로 지혜로운 자가 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결코 마음으로 순종할 수 없습니다. 순종은 교만한 자가 할 수 없고 정말 겸손한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존심과 반발심과 인간적인 생각을 부인하고 겸손하게 순종을 배울 때만이 믿음의 비밀을 깨달아 알 수 있고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5:8). 예수님은 순종하시되 자기를 부인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 절대적으로 순종하셨습니다(빌2:8). 이러므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게 하셨습니다(빌2:9-11). 하나님은 순종의 사람을 귀히 쓰십니다.
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백부장이 말하는 것을 들으시고 몹시 놀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보지 못하였노라. 유대인들은 선민으로서 마땅히 예수님을 영접하고 큰 믿음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능력의 역사를 보고도 따지고 의심하고 불신하며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인하여 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하시며 탄식하셨습니다(눅9:41). 이런 가운데서 예수님은 이방인 백부장에게서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는 믿음을 보시고 놀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을 크게 칭찬하시고 축복하사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하인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 시대는 백부장과 같이 사람을 인격적으로 사랑하는 사랑의 소유자와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는 믿음의 소유자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기초로 끊임없이 자신을 연단함으로써 주님께 인정받는 이 시대의 백부장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