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세례요한
말씀: 누가복음 7:18-35
요절: 누가복음 7:2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역사상 하나님께서 쓰신 위대한 인물들은 한결같이 사명을 감당하다가 많은 고난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메시아의 선구자 사명을 감당하다가 옥에 갇혀 외로운 투쟁을 해야 했습니다. 이런 그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구속역사가 어떻게 되어갈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확신을 심어주시고 그의 위대한 사명인의 생애를 칭찬해 주셨습니다. 이 시대는 세례 요한과 같은 사명인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사명인의 생활을 힘있게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요한에게 확신을 심어 주신 예수님 (18-23)
18절을 보십시오.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고하니” 때는 세례요한의 시대가 끝나고 예수님께서 복음 역사를 활발히 이루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당시 세례요한은 음란한 헤롯을 책망하다가 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요한의 제자들은 목자 잃은 양과 같이 방향을 잃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방황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복음 역사를 보러 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 한 마디로 죽어가는 백부장의 종도 고치시고 관속에 누워있는 죽은 청년도 살리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예수님 밑에서 신이나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행복한 제자들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들은 기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즉시 요한에게 돌아와 이 모든 일을 고했습니다.
이 때 요한은 어떻게 했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그는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오신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불어보도록 하였습니다. 그가 이 때 제자들로 하여금 왜 이런 질문을 하도록 하였을까요?
첫째로, 요한의 마음 가운데 예수님께 대한 일말의 회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외롭게 투쟁하면서 심신이 많이 연약해졌습니다.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망하는게 아닌가? 하나님의 역사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많은 염려와 근심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중에 그는 예수님을 통해 왕성히 일어나는 복음역사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심히 기뻤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수님이 과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는 이를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만일 혹시라도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야가 아니라면 그동안 자신이 수고한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의 메시야관이 이런 의문을 불러 일으켰을 것입니다. 요한은 의로운 사람으로 의로운 메시야 왕국이 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그 시대의 죄악을 사정없이 책망했습니다. 헤롯이 비록 왕일지라도 그의 비행을 책망했습니다. 그는 메시야가 오셔서 모든 불의를 없이 하고 공평과 정의가 충만한 사회를 건설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와 전혀 관계없이 복음역사만 열심히 이루고 있었습니다. 옥에 갇힌 세례 요한을 석방해 주기는 커녕 심방 한 번 오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정치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만 열심히 가르치셨습니다. 요한의 마음 가운데 자연히 이런 의문이 생긴 것입니다.
둘째는, 요한이 그의 제자들을 도와 주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제자들이 영적 위기에 있음을 느꼈습니다. 요한이 인기 절정에 있었을 때 동시에 요한의 제자들도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옥에 갇히게 되자 그들은 역사의 무대에서 밀려나 이제는 엑스트라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시기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들도 언제 스승과 같이 화를 당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승이 옥에 갇히므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회의하고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이런 제자들의 마음을 잘 알았습니다. 요한은 어려운 중에서도 자신보다 제자들의 형편을 더 생각했습니다. 그는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께 가서 자신의 석방을 위해 간구하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도 그들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알고 확신을 갖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가서 물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20). 이 때 마침 예수님은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셨습니다.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받고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었습니다. 악령에 시달리던 자가 고침을 받고 기쁨의 환호 소리를 질렀습니다. 많은 소경이 눈을 떴습니다. 이는 실로 놀라운 역사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역을 기초로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 말씀은 일찌기 이사야 선지자가 메시야의 사역에 관해서 이사야 35:5,6절과 61:1,2절에 예언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예언의 말씀대로 이 땅에 오셔서 생명을 주는 역사를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 가운데서 우리는 두가지를 배웁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하시고 약속하신 메시야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5:31-39절에서 자신이 메시야임을 증거하는 여러 증거들을 열거하셨습니다. 그 중에 예수님이 이루신 능력의 역사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소경이 보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듣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역사는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능력의 역사를 행하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역사가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역사를 열심히 감당하다가 옥에 갇혔습니다. 그래서 그의 수고는 헛되며 또 하나님의 역사는 망하는 것이 아닌가 염려를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어떤 경우에나 결코 망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요한이 옥에 갇힌 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 그는 선구자로서의 사명을 완수함으로 그의 시대 는 끝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뒤를 이어 구속역사를 감당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예수님을 통하여 강력으로 역사하고 계셨습니다. 소경은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 답답함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의 세계는 흑암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이런 그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밝히 눈을 뜨게 되고 생명의 빛을 보게 됩니다. 앉은뱅이는 일어나 걸을 수도 없고 뛸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일으키실 때 사슴과 같이 기쁨으로 뛰놀게 됩니다. 또한 문둥이는 문둥병으로 추하고 더러운 인생을 살아야 하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순결하고 정결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귀머거리는 꽉막힌 인생에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뚫린 인생을 살게 됩니다. 죽은 자와 같이 무기력하게 누워만 있던 자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음을 듣고 의미있고 희망찬 인생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생명이 살아나는 놀라운 역사가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그의 석방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현재 하나님의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고 했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위로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하여 요한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역사는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심어 주셨습니다.
때로 우리는 불의한 세상을 바라볼 때 세례 요한과 같이 의심에 사로 잡힐 때가 있습니다. 세상은 온통 어두움의 세력이 지배하는 것 같고 하나님의 역사는 이 어두움의 세력 앞에 너무나 미미한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복음 역사를 이루는데도 세상은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 같고 오히려 현실은 더욱 힘들게 되어 갑니다. 정국은 점점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 들어가고 캠퍼스는 더욱 악화되기만 합니다. 우리가 하는 복음역사는 너무나 초라하게만 보이고 우리는 현실 앞에 무력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셔서 세계 각처에서 강력으로 역사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USSR을 생각할 때 그곳에는 전혀 아무런 복음역사가 없는 것 같이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자들이 믿는 사람들을 모두 잡아 강제 노동수용소에 가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난번에 소련에서 온 Abraham Han 선교사를 통해 그 곳에 얼마나 왕성한 복음역사가 일어나고 있는가 알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순교하면 10명의 신자가 더 생기고 지하교회는 더욱 생명력 있게 복음역사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살아서 역사하신다는 산 증거입니다.
요사이는 캠퍼스에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학생들이 전경들과 맞서서 각목과 화염병을 들고 데모를 하고 있습니다. 또 한편에서는 통일교 학생들이 데모를 하지 말고 남북통일을 하자고 데모를 합니다. 이런 가운데 최류탄을 마시며 눈물을 홀리면서 캠퍼스를 분주하게 뛰어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바로 UBF 목자들입니다. 이들은 복음을 전하기위해 온갖 희생을 무릅씁니다. 이들은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 바쁜 공부 가운데서도 시간과 물질과 청춘을 희생합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믿음과 희생적인 사랑을 통해 우리 가운데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이러한 생명의 역사는 전국 각처에서 소리없이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조용한 혁명입니다. 또한 미국과 카나다와 서독과 멕시코, 필리핀, 아프리카, 사우디 아라비아 등 각곳에서 놀랍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 카나다, 서독과 같은 선진국에서 더 왕성한 복음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선진국 캠퍼스 지성인들은 교만하여 그 교만이 하늘을 찌릅니다. 반항심이 몸에 배어서 습관적으로 No!를 합니다. 또한 sex와 마약으로 깊이 병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교만과 반항심과 정욕으로 깊이 병든 선진국 캠퍼스 지성인들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이들을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약소 민족 한국 백성들이 어떻게 이들을 믿어 순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이는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선교사님들의 믿음과 기도와 희생적인 생활을 받으시고 그들 가운데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이는 20세기의 기적의 역사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셔서 만민 구속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고 계신다는 산 증거입니다. 또한 이 나라, 이 백성들을 세계 제사장 나라로 쓰신다는 산 증거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하나님께서 높은 보좌에 앉으셔서 세상을 그 뜻대로 통치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부패한 나라를 보고 절망 가운데 빠졌습니다. 또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국제 정세로 인해 언제 나라가 전쟁으로 쑥대밭이 될 지 볼라 불안에 떨었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자 나라는 풍전등화와 같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이 때 이사야 선지자는 어느날 무거운 심정을 안고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그 때 그는 성전에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사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는 천사들이 각기 여섯 날개로 날며 서로 창화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그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자 자신의 입술이 부정한 자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날카롭게 비판하던 이사야는 이제는 자신의 죄악된 모습을 보고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과 의심을 회개했습니다. 이 때 그는 죄 사함을 받고 확신있게 복음의 에시지를 전하는 사명인이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도 동시에 망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당시 로마의 국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때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 이란 책에서 세상 나라는 망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망하지 않음을 역사적으로 증거했습니다. 그의 증거대로 로마는 망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더욱 왕성히 일어났습니다.
초대 신자들은 많은 핍박을 받고 흩어졌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밧모섬에 귀양 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는 이때 살아 계셔서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그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1:17b,18).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 계셔서 온 세상 역사를 그 뜻대로 통치하고 계십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예수님은 요한과 그의 제자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경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라고 하신 것을 보면 누구든지 실족할 가능성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요한과 같이 주님을 위 해서 죽도록 희생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을 때 마음에 회의가 생기고 실족하기 쉽습니다. 주님을 위해 죽도록 충성했는데 학점이 별로 좋지 않게 나온다거나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을 때 회의합니다. 또 취직이 안되거나 집안에서나 학교에서 핍박을 받을 때 회의합니다. 또 목자님이 인정해 주지 않고 역사의 뒤안길에 있다는 생각이 들 때, 내가 꼭 이렇게 손해 봐 가면서 언제까지나 예수님 때문에 희생해야 되는가 하는 회의가 생기 실족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족하게 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끝까지 믿음의 중심을 지킬 때 복이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시고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귀하게 쓰십니다.
II. 요한을 칭찬하신 예수님 (24-28)
요한의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님은 계속해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24,25,26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나?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나은 자니라."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성공적으로 복음역사를 이룰 때에는 칭찬하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옥에 갇히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자 그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위대한 자인가 칭찬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세 종류의 인간상을 보게 됩니다.
첫째로,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은 사람입니다. 갈대는 뿌리가 깊지 못하고 연약합니다. 그래서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소리를 내면서 흔들립니다. 이와 같이 갈대와 같은 사람은 상황에 따라 쉽게 요동합니다. 분명한 인생관이나 가치관이 없이 현신의 유익을 따라 행동합니다. 신앙 생활도 자기에게 유익이 되겠다고 생각하면 열심히 합니다. 그러다가 손해보겠다고 생각되면 미련없이 떠나갑니다. 이런 자는 핍박의 바람이 불면 흔들립니다. 유혹의 바람이 불면 흔들립니다. 이런 자는 한마디로 믿음의 지조가 없는 자입니다. 이런 자는 롯과 같이 그때 그때 승리하는 것 같으나 결국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결코 축복하시지 않습니다. 시대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자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고 귀하게 쓰십니다. (사26:3)
둘째로, 부드러운 옷 입은 자입니다. 이런 자들은 주로 외모에 치장을 많이 하고 내용보다 형식을 중히 여깁니다. 궁중의 높은 지위를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고 사치스러운 문화생활을 즐기는 세속적인 자입니다. 이멜다는 구두가 3.000컬레요, 옷이 수백 벌이요, 황금대야에다 세수를 하며, 자가용이 25대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자들은 물질과 육신을 좇으며 세상 연락을 즐기는 자들입니다. 이런 세속적인 자들은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냄새가 나고 텅빈 자들입니다.
셋째는, 영적인 사람들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영적인 사람입니다. 이들은 진리를 좇으며 죄와 불의와 싸우는 자들입니다. 또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사명인입니다. 자기만을 위해 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자 몸부림치며 투쟁하는 자들입니다. 시대와 타협하지 않고 믿음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런 선지자와 같은 자들이 많이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을 인정하시고 귀히 쓰십니다.
세례 요한은 선지자였습니다. 아니 그는 선지자보다 나은 자였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27절을 보십시오.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이를 볼 때 요한이 위대한 것은 그가 맡은 사명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메시야의 길을 충성스럽게 준비했습니다. 그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안락한 생활을 부인했습니다. 또한 인기가 올라 갔을 때도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그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맡은 바 사명에 충성했습니다. 그는 사명에 살고 사명에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가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자라고 칭찬하셨습니다. 28b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이 말씀은 요한의 위대성을 깍아 내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요한이 여자가 낳은 자 중 가장 위대한 자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의 역사적인 위치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구약과 신약의 분기점에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은 오실 메시야를 멀리서 바라보며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역사적인 시점에서 가장 가까이서 메시야의 길을 준비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은 구약의 율법 시대에 속한 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는 은혜의 시대에 속한 자이기 때문에 요한보다 큰 자가 되는 것입니다.
III. 악한 시대를 책망하신 예수님 (29-35)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29절올 보십시오.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롭다 하였습니다. 그들은 요한이 회개의 메시지를 전할 때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사죄의 은혜를 덧입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고의적으로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회개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교만했고 완악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요한도 거부하고 요한이 증거한 그리스도도 거부함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인류 구속 역사를 저버린 것입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비유로 그 세대가 얼마나 완악한 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세대는 마치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노는 것과 같습니다. 당시 장터에서 아이들이 혼례와 장례놀이를 했습니다. 아이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먼저 한 편이 혼인의 흉내를 내어 피리를 불면 다른 한편은 거기에 맞추어 춤을 추게 되고, 또 한 편이 장례의 흉내를 내면 다른 편은 가슴을 치면서 울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결국 아이들은 서로 상대편을 탓하며 싸움으로 끝났습니다. 예수님은 그 세대의 사람들이 마치 어린 아이들과 같이 자기중심적임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무관심했고 무감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에 늘 비판적이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와서 경건한 생활을 하며 떡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자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했습니다(33). 또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생활을 하자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하며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방식대로 살지 않는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이런 사람들의 말로 판단받지 아니합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함을 받느니라” 여기서 지혜는 하나님의 진리를 가리키고 특별히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모든 자녀’는 업적, 즉 열매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그 열매로 평가되어 집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영적 통찰력을 가져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불의한 시대 가운데서도 살아계셔서 강력으로 역사하고 계심을 믿고 확신있게 복음 역사를 감당해 나가야겠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인생을 살지 않고 이 시대의 선구자로서 세례 요한과 같이 예수님께 칭찬 받는 위대한 사명인의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