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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7:36-50

by Mark Yang   04/22/2022   Luke 7:36~50

Message


누가복음 제1부 18강

죄 많은 여인을 죄를 사하신 예수님

말씀/ 누가복음 7:36-50
요절/ 누가복음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파스칼은 세상에 두 종류의 죄인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는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과 다른 하나는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 즉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본문에는 바리새인 시몬과 죄 많은 여인이 대조적으로 나옵니다. 시몬은 바리새인으로서 명성있는 사람이었고, 여인은 악명 높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수님께 대한 자세는 아주 달랐습니다. 시몬은 자기 중심적이고 형식적이었으며, 여인은 희생적이고 헌신적이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께 뜨뜻 미지근한 자세로 대했고, 여인은 열렬하게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책망하셨지만, 여인은 영접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근본적으로 어떤 분이시며, 이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되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I. 죄 많은 여자를 영접하신 예수님 (36-38)

본문의 사건은 시몬이라는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일어났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자기 집으로 와서 함께 잡수시기를 청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적대시하고 날카롭게 비판하였습니다. 그들은 항상 예수님의 말과 행동에서 고소할 꼬투리를 찾고자 예의 주시 하였습니다. 이런 분위기 가운데서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한 것을 보면 이 바리새인든 보통 바리새인들과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정할 만큼 예수님께 호의적이었습니다(39). 그가 왜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했을까요? 아마 예수님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과 관계성을 잘 맺음으로서 사회적인 발판을 넓히고자 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말씀도 듣고 예수님이 정말 어떤 분이신가 알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어쨌든 그가 예수님을 초대한 것은 당시로서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흔쾌히 이 초대에 응하셨습니다(36).

당시 유대인들은 옆으로 비스듬이 누운 채 식사를 했습닏. 예수님과 모든 손님들이 식탁을 중심으로 비스듬이 누워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분위기를 어지럽히는 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37절을 보십시오. 그 동네에 한 죄 많은 여자가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찾아 온 것입니다(37). '그 동네의 죄인인 한 여자'라고 한 것을 보면 공인된 죄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공인된 죄인은 회당에도 나갈 수 없고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거나 대화를 나룰 수도 없었습니다. 죽으면 그를 위해 울어서도 안되었습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한번 죄인으로서 낙인이 찍히면 구제불능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당시 두 종류의 공인된 죄인이 있었는데 이는 세리와 창기였습니다. 여인은 그 동네에 창기였음에 틀림었습니다. 여인이 어쩌다가 몸을 파는 창녀가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가난한 가정을 부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 길을 들어섰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회사업가의 통계에 의하면 98%가 정욕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인은 육신의 소욕을 좇아 살다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공인된 죄인이 된 것입니다. 여인은 순결을 잃고 추하고 더러운 동물과 같은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죄 많은 여인이라는 낙인은 주홍글씨와 같이 여인이 어디를 가든지 꼬리표처럼 따라다녔습니다. 사람들은 여인을 보면 못볼 것을 본 양 머리를 돌리며 멀리 하였습니다. 이때마다 여인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여인은 죄의식과 외로움과 상처로 비참한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여인은 육신의 자유를 구가하기 위해 율법적인 사회에서도 용감하게 죄를 지었지만 죄는 오히려 여인을 강하게 옭아매어 버렸습니다. 여인은 죄의 사슬에 얽매여 절망상태에 빠져 자포자지의 인생을 살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여인이 어떻게 예수님께 나왔을까요? 당시 예수님께 대한 소문은 전국 방방곡곡에 널리 퍼졌습니다. 여인은 소경이 보고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메시야의 사역에 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어떤 몹쓸 죄인도 믿음으로 나아오기만 하면 기쁨으로 용납하시고 사죄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또한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며 인생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어 주고 생명을 살린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 여인의 마음에 크게 감동되었습니다. 여인의 마음가운데 새로운 삶의 희망이 용솟음쳤습니다. 여인은 메시야를 만나 보고자 하는 소원으로 불탔습니다. 그러나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여인은 죄 많은 여인이요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집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공인된 죄인이 의롭고 경건한 바리새인의 집에 찾아 온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집 앞에서 얼씬거리기만 해도 쫓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이를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은 여인의 모든 자의식과 수치심과 두려움을 삼켜버렸습니다. 여인은 용감하게 바리새인의 집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돌진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의 발 앞에 섰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나아올 때 빈 손으로 나아오지 않았습니다. 값비싼 향유담은 옥합을 지고 나아왔습니다. 육신으로 좇아 사는 여인들은 대부분 사치스럽고 낭비가 시마여 빚을 많이 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한푼 두푼 모아 값비싼 향유 담은 옥합을 샀습니다. 옥합은 여인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습니다. 여인의 꿈이 담겨 있고 진심이 담겨 있습니다. 장래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옥합은 여인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자기에게 가장 귀한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간 것입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나아가 무엇을 했습니까? 38절을 보십시오.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여인은 예수님께 나아가자 마자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것도 한 두 방울이 아니라 예수님의 발을 적실 만큼 엄청나게 흘렸습니다. 눈물샘이 터진 것 같이 쉴 사이없이 쏟아졌습니다. 이 눈물은 진실된 회개의 눈물이었습니다. 이 눈물은 값비싼 향유와 같이 여인의 모든 진심을 나타내는 고귀한 눈물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끝없이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인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머리털로 씻었습니다. 당시 여인에게 있어서 긴 머리털은 여인의 영광의 상징이었습니다(고전 11:15). 여인은 자신의 소중한 머리털을 예수님의 발을 씻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갑자기 온 집안에 향기로운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이 향기는 여인의 진실된 믿음과 순수한 사랑의 향기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첫째로, 예수님은 이 여인을 있는 모습 그대로 영접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죄많은 여인인 줄 알았지만 조금도 부담스러워 하거나 꺼려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믿음으로 나아왔을 때 과거를 묻지 않았습니다. 다만 현재 여인의 아름다운 내면을 보시고 거룩한 하나님의 딸로 영접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과거 어떤 몹쓸 죄를 지었을지라도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는 누구나 기쁨으로 영접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자도 믿음으로 나아왔을 때 있는 모습 그대로 영접해 주셨습니다(눅 5:13). 또한 부담스러운 중풍병자도 믿음으로 나아왔을 때 '소자야'(My son!)하며 뜨겁게 영접해 주셨습니다(막 2:5). 뿐만 아니라 흉악한 강도가 십자가 상에서 자기 죄를 뉘우치며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하늘나라의 황태자로 영접하시고 그 즉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을지라도 있는 모습 그대로 믿음으로 나아가면, 있는 모습 그대로 영접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실로 은혜가 충만한 분이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여인의 모든 진심을 받아 주셨습니다. 여인이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씻기고 발에다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붓는 모든 행동은 참으로 부담스럽고 견디기 힘든 행동이었습니다. 머리털로 발을 문지르고 입을 맞출 때 얼마나 간지럽고 쑥스럽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의 진심을 하나도 무시하지 않으시고 모두 다 받아 주셨습니다. 여인은 그 동안 사람들로부터 진심을 짓밟혀 왔습니다. 아무도 여인의 진심을 알아주기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의 모든 진심을 받아 주셨습니다. 이때 여인은 더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남몰래 드리는 모든 진심을 하나도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시고 다 받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여인의 구주가 되어 주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나아가 눈물로 죄를 고백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아낌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이로써 예수님과 여인의 관계는 구주와 죄인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여인의 만남은 구주와 죄인의 만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참 경배의 대상이 되어 주셨습니다. 여인은 그 동안 자신의 순결과 애정과 정열과 모든 진심을 받아 줄 대상을 찾아 헤매다가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만이 자신의 모든 진심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II. 시몬을 책망하신 예수님 (39-46)

여인의 행동과 예수님에 대한 시몬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39절을 보십시오. 시몬은 예수님이 여인을 심하게 책망하여 내쫓으실 줄 알았는데 오히려 뜨겁게 영접하시는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줄 알았으리라." 시몬은 여인이 죄 많은 여인임을 알고 정죄했습니다. 또 죄많은 여인을 영접하시는 예수님도 정죄했습니다. 당시 랍비의 교훈에는 여인을 1.8m 이내로 가까이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죄 많은 여인이 가까이 와서 손으로 만지고 발에 입을 맞추고 부벼대는 것을 용납한다는 것은 실로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의 속 마음을 아시고 그를 영적으로 도와 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한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40-42) 그러자 시몬은 많이 탕감함을 받는 자라고 대답하였습니다(43). 예수님은 "네 판단이 옳다"고 인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인과 대조하여 시몬을 책망하셨습니다.

44-46절을 보십시오.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네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발에 부었느니라." 손님에게 발 씻을 물을 주고 애정의 표시로 뺨에 입을 맞추고 머리에 감람유를 붓는 것은 예의에 속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시몬은 예수님을 초대하고서는 너무나 대접을 소홀히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섬겼지만 진심과 감사와 애정이 결핍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섬김은 예수님을 심히 섭섭하게 했습니다.

반면 여인은 어떠했습니까? 여인은 예수님께 회개의 눈물을 드렸습니다. 뜨거운 애정과 감사를 드렸습니다. 가장 고귀한 향유를 드렸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자신의 꿈을 드렸습니다. 장래를 드렸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Heart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 자신을 전폭적으로 드렸습니다. 시몬은 체면을 봐 가며 예수님을 적당히 사랑했습니다. 그는 매너가 있었지만 그의 사랑은 미지근하여 차지도 덥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토하여 내친다고 하였습니다(계 3:16).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정열적으로 사랑했습니다. 헌신적이고 희생적으로 사랑했습니다. 온 몸과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열렬하게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기뻐하셨습니다. 우리가 왜 예수님을 정열적으로 사랑해야 합니까? 이는 예수님께서 고귀한 자신의 몸을 주시기까지 희생적으로 나를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