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제1부 20강
광풍 훈련
말씀/ 누가복음 8:19-25
요절/ 누가복음 8:25a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광풍은 잔잔케 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로 광풍을 잔잔케 하심으로 천지 만물을 그 뜻대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또한 제자들을 광풍훈련 시킴으로 역경을 극복하는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광풍조차도 이기는 믿음의 용사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예수님의 가족 (19-21)
예수님께서 한창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있을 때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님을 만나고자 찾아 왔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식사할 겨를도 없이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시자 친속들이 미쳤다고 생각하고 붙들러 나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않으므로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예수님의 모습은 장남인데도 무책임하게 부모도 돌보지 않고 취직도 하지 않고 어딘가에 빠져서 이상한 일을 하는 자로 보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이며, 그 일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생각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자기들의 생활 양식에 비추어서 맞지 않으므로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자기들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직장에서는 건수를 만들어서 먹고 마시고 놉니다. 그러나 평신도 목자님들은 퇴근 후에 복음역사를 섬기기 위해 그런 모임에는 다 빠집니다. 그러면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다가 나중에는 미쳤다고 말합니다. 이는 마치 애꾸눈 사회에서 애꾸눈 가진 사람을 정상으로 보고 두 눈 가진 사람을 이상한 사람으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미친 사람들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에 미치고 정욕에 미치고 노름에 미쳤습니다. 미쳐도 올바로 미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미친 자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13,14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가족들은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였지만 무리들로 인하여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이때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가족들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만사를 제쳐두고 나올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21절을 보십시오.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사람들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을 그 어떤 관계보다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혈육의 관계는 영원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혈육의 관계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맺어진 영적 관계를 더 중히 여기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보배 피로 맺어진 영원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육신의 부모와 동생들을 경히 여겼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는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어머니의 장래를 생각하고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요 19:26,27). 예수님은 부모와 형제들을 인간적으로 대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 편에서 영적으로 대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처음에는 오해가 많았지만 후에는 모두 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귀하게 쓰임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후에 예루살렘 총회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들이 나의 가족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의 영적 가치관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믿음으로 사는 제자들을 귀히 여기시고 참 가족으로 영접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혈연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은 아직도 영적 가치관이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가족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믿음의 사람들을 더 귀히 여기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II. 광풍을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 (22-25)
예수님은 복음역사를 시작하실 때 제자들을 부르시고 소원을 두시고 키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쳐 주시고 가는 곳마다 다니시며 훈련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곁에는 밤낮으로 도움이 필요한 무리들이 매달려 있어 식사할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무리들은 돌볼 만큼 믿음이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몹시 지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의 심정을 잘 아시고 하루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제자들은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즉각적으로 알아차렸습니다. 그것은 짧은 휴가였습니다. 제자들은 예기치 않은 휴가로 인하여 일제히 “야호!”하며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갈릴리 호수를 둘러싼 산들이 그들의 기쁨을 이해라도 한 듯 메아리를 쳤습니다. “야호! 야호! 야호!.......” 그들의 눈은 갑자기 생기가 돌고 행동이 빨라졌습니다. 그들은 ‘가자’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서둘러 배를 준비했습니다. 잠시 후 예수님과 제자들은 배에 올라 깊은 바다를 향해 배를 띄우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는 어부 출신들이 많았기 때문에 익숙하게 노를 저어 나갔습니다. 배는 미끄러지듯 잔잔한 호수 위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시원한 바람이 제자들의 뺨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이번 휴가는 그들의 첫 번째 휴가였습니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예수님과 함께 가는 휴가였기 때문에 그들은 몹시 행복했습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찬송이 흘러 나왔습니다.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저 큰 바다보다 깊다. 너 곧 닻줄을 끌러 깊은 데로 저 한 가운데 가보라.” 평소 찬송가를 쌓지 않고 가곡을 즐겨 부른 빌립의 입에서는 산타루치아가 흘러 나왔습니다. “창공에 빛난 별 물 위에 어리여 바람은 고요히 불어오누나. 내 배는 살 같이 바다를 지난다. 산타루치아 산타루치아”
이제 그들은 해안으로부터 멀리 떨어졌습니다. 제자들이 보트타기를 즐기고 있을 때 예수님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23a절을 보십시오.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에수님은 배를 타시자 마자 배의 고물을 베개 삼고 깊은 잠에 빠지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는 평화의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루 생활은 새벽기도로부터 시작해서 아침부터 밤늦게가기 열심히 말씀을 가르치시고 양무리들을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을 만큼 바쁘셨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가실 때 틈틈이 단잠을 주무셨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호수 한 가우데 들어섰을 때였습니다. 이때 갑자기 광풍이 호수에 몰아쳤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지중해 해면보다 약 200m나 낮습니다. 또 호수는 높은 산들이 있는 고원으로 둘러싸여 있고 산에서 흘러 내려 호수로 들어가는 강들은 깊은 협곡을 이룹니다. 그래서 산에서 찬 바람이 불면 이 협곡들은 연통 역할을 하여 갑작스럽게 무서운 광풍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광풍은 전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갈릴리 호수의 특징입니다. 23b 절을 보십시오.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된지라.” 갑자기 청명하던 하늘이 캄캄해지더니 천둥번개가 치고 비바람이 무섭게 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쉬이익 쉬이익 우르렁 쾅! 쾅!” 성난 파도가 배를 때리고 순식간에 돛은 부러지고 배에는 물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들 중 몇 사람은 수없이 파도와 싸워 온 노련한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온갖 기술을 다 동원하여 배를 조종했으나 허사였습니다. 광풍 앞에서는 노련한 기술, 경험, 지식, 노력과 성실이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물에 빠져 죽게 될 큰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전에 재미있게 들었던 슬픈 이야기들이 실제로 자기들에게 닥쳐왔음을 알았습니다.
호수 이 편에서 저 편으로 건너가는 것은 인생 항해에 비유됩니다. 사람들은 평소 순풍에 돛을 단 듯 순탄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언제나 순탄하지만은 않습니다. 때로는 전혀 예기치 않게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암이나 중풍과 같이 질병의 광풍을 만나기도 하고 순간적인 실수로 교통사고나 화재와 같이 재난의 광풍을 만나기도 합니다. 또 갑자기 부모님이 돌아기는 죽음의 광풍이나 사업에 실패하여 하루 아침에 거지 신세가 되는 파산의 광풍을 만나기도 합니다. 이런 광풍들 앞에서는 명예나 권세나 타이틀이나 부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제가 아는 한 자매님은 의대 공부를 마치고 동료 의사와 결혼한 후에 미국에 건너가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의학 박사 부부가 되어 본국에 금의환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미래는 온통 희망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는 도중 소련 상공에서 갑자기 KAL기 사고를 만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쇠고랑을 찬 배를 타고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영적인 통찰력이 있는 바울은 이번 행선에는 하물과 배만 아니라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고 예건했습니다. 그러나 죄수 수송의 총 책임을 맡은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고 배를 출발시켰습니다. 남풍이 순하게 불자 그들은 득의 한 줄 아고 바울을 비웃으며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항해를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갑자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했습니다. 그들은 광풍에 밀려 그대로 떠내려 갔습니다. 여러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않고 큰 광풍이 계속되자 구원의 여망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때는 선장의 기술, 선주의 물질, 백부장의 권세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 광풍 앞에 모두 절망하고 다 엎드러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때 믿음 있는 바울만이 절망 가운데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로하고 힘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24,25) 결국 바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 모두가 구원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와 없는 자는 평소에는 별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으로 사는 자가 어리석은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광풍이 몰아치는 날에는 믿음 있는 자는 절망 가운데서 일어서서 광풍과 싸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광풍을 통해서 산 믿음을 배울 수 있고 깊은 믿음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잔잔하던 갈릴리 호수에 광풍이 일어나자 평화롭던 제자들의 마음에도 광풍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노도와 같은 파도로 인하여 심한 두려움에 사로 잡혔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죽음의 공포로 사색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한계상황에 부딪혀 절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원망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위기 가운데 있는데 도와 주시지 않고 왜 주무시기만 하시는가 원망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이 없었을 때 외적인 광풍이 일어나자 그들 내면에 두려움과 의심과 불신과 같은 내적인 광풍이 일어났습니다. 이제는 외적 광풍보다 두려움과 의심과 불신의 광풍이 그들을 더욱 사로잡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와중에서도 조금도 요동치 않으시고 윈드서핑을 즐기시면서 평안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광풍이 결코 예수님을 해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절망 중에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며 부르짖었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이것은 그들의 절실한 부르짖음이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절망 중에 원망섞인 목소리로 부르짖긴 했지만 예수님을 흔들어 깨운 것은 기도였습니다. 그들이 부르짖을 때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첫째, 예수님은 바람과 물결을 꾸짖어 잔잔케 하셨습니다.
24b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잠을 깨사 미친 듯이 춤추는 바람과 물결을 향하여 명하셨습니다. “잠잠하라.” 그러자 호수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잔잔해졌습니다. 요동하던 제자들의 마음도 잔잔해졌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광풍을 잔잔케 하는 권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광풍도 잔잔케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인생항로에서 광풍을 만날 때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인간적인 방법을 쓰기 쉽습니다. 그러면 광풍이 잔잔하기는커녕 더 요동하게 됩니다. 광풍을 만날 때 주님의 음성을 듣기에 힘쓰고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만이 외적, 내적 광풍을 잔잔케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광풍을 잔잔케 하심으로 창조주이심을 드러냈습니다. 예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뜻대로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골로새서 1:16절을 말합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예수님께서 바람과 성난 물결을 꾸짖으신 것을 볼 때 겉으로 보기에는 성난 바다가 문제인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이는 실제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실상 성난 파도를 이용하여 제자들을 두렵게 만든 장본인은 마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광풍을 꾸짖으실 때 사실은 그 이면에 역사하는 마귀를 보시고 마귀를 꾸짖으신 것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이 꾸짖으실 때 사이에 광풍을 일으켜 인류 구속역사를 방해하고자 했습니다. 배 안에서 구속역사의 주인공인 예수님과 제자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바다에 빠져 죽으며 인류 구속역사는 끝나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마귀가 결코 예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로 노도와 같은 마귀의 세력을 파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심으로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25a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광풍을 잔잔케 하신 후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제자들은 이때까지 광풍을 싸우느라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시고 줄기차게 주무시고만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잠을 깨우셨을 때 “내가 잠시 미안하다. 너희들 얼마나 수고했느냐”하며 위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첫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두려움을 이기는 믿음을 소유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책망하신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의 단잠을 깨웠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두려움에 사로 잡혔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 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책망하셨습니다(막 4:40). 그들은 평화롭게 주무시는 예수님과 함께 있었으나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두려움에 사로 잡혔을 때 사지가 마비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두려움 많은 사람은 지도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두려움 많은 사람은 아무 쓸모가 없으며 다른 사람에게 악영향을 끼칩니다. 이스라엘의 열 두령들이 그 좋은 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에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눈 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이때 모세는 이스라엘 12지파에서 12두령을 뽑아 정탐을 보냈습니다. 그들이 정탐을 하고 난 후 보고할 때 같은 상황을 보았는데 그 보고 내용은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열 두령들은 그 땅은 과연 젖과 꿀이 흐르지만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은 견고하여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와 같다고 보고 했습니다. 이 불신에 찬 보고로 인해 백성들은 밤새도록 통곡을 하며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결국은 그들은 하나님을 진노케 하여 모두 다 광야에 엎드러 졌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의 지도자였습니다. 지도자는 하늘이 무너져도 백성에게 솟아날 길을 제시해야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움 때문에 절망하고 백성들에게 불신을 심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장대한 가나안 거님을 조금도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민 14:9)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섬기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그들 내면의 두려움을 극복해야만 합니다. 그들은 두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장래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두려웠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죽이고자 음모를 꾸미는 바리새인들이 두려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늘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시달렸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자신의 장래를 예수님께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 하라”(눅 12:4,5) 디모데는 바울의 충성된 동역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속두려움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만큼 능력있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후서 1:7저에서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우리는 두려움에 사로 잡힐 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하시는 주님의 책망의 음성을 듣고 두려움을 회개해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말씀하실 때 그들이 믿음의 능력을 체험하고 광풍까지도 이기는 믿음의 용사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광풍 앞에서 절망하고 호들갑을 떠는 겁쟁이가 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어떤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요동치 않고 믿음으로 역경을 헤쳐 나가는 담대한 믿음의 용사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믿음의 중심만 지키는 정도가 아니라 황무지에서 장미 꽃이 피게 하는 믿음의 역사를 창조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책망하심으로 믿음을 심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요통치 않는 믿음의 용사가 될 수 있습니까? 이는 평소의 크고 작은 사건을 통해 예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또한 광풍 중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 보아야 합니다. 광풍을 바라보면 두렵습니다. 불신과 의심이 생깁니다. 그러나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의 심정은 고요해지고 찬송과 감사로 가득 차게 됩니다. 요한 웨슬레가 한번은 배를 타고 미국 선교사로 가는 도중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이때 요한 웨슬레는 마음이 요동하고 심하게 떨었습니다. 그러나 배를 타고 있던 모리비안 교도들을 조금도 요동함이 없이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그들에게서 큰 충격을 받고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5b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말했습니다.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광풍 훈련을 통하여 제자들은 영적인 눈이 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야 말고 이 땅에 오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광풍 훈련을 주셔서 믿음의 능력을 체험하고 광풍을 이기는 담대한 믿음의 용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