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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8:40-56

by Mark Yang   04/22/2022   Luke 8:40~56

Message


누가복음 제 1부 22강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말씀/ 누가복음 8:40-56
요절/ 누가복음 8:50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I. 혈루증 여인을 믿음을 축복하신 예수님 (40-48)

예수님은 거라사대에서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신 것 때문에 그 지방에서 쫓겨나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러자 무리가 예수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가 환영했습니다. 그들은 선한 목자의 사랑을 맛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모했습니다. 그들 가운데서도 회당장 야이로가 더 사모했습니다. 41,42절을 보십시오. “이에 회당장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와서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집에 오시기를 간구하니 이는 자기에게 열 두 살 먹은 외딸이 있어 죽어감이러라.” 유대 사회는 회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회당장은 그 지방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회당장은 회당 건물의 유지 및 운영과 집회를 인도하는 책임을 말고 있었습니다. 또한 율법 낭독이나 설교를 할당해 줄 권리를 갖고 있었으며, 사소한 재판 업무를 수행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당시 회당장은 권위적으로 율법적이었습니다(눅 13:14). 그러나 야이로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지체 높은 자였으나 예수님 앞에 겸손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달려가 그 발 아래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예수님! 제발 내 집에 오셔서 내 어린 딸을 고쳐 주세요. 제발 와 주세요.” 그의 간구는 듣는 사람의 심금을 울린 만큼 실로 절실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12살 난 외동딸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외딸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했습니다. 딸은 무럭무럭 자라나 12살이 되었습니다. 12살 난 딸은 막 피어나는 꽃봉오리와 같이 청순하고 아름답고 귀여웠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원인모를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감기몸살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으나 아무리 약을 먹여도 낫지 않았습니다. 용하다는 의사와 한의사를 다 불러 치료를 하였으나 조금의 차도도 없었습니다. 병은 점점 더 중하여져서 열이 40도를 오르내리며 빈사상태가 되어 갔습니다. 시시각각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어린 달을 뒤덮을 때 야이로는 절망의 늪으로 빠져 들어 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바로 이때 그는 예수님을 기억했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도 고치시고 소경의 눈도 뜨게 하시고 죽은 청년도 살리신 전능하신 분이심을 기억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야말로 죽어가는 자기 딸을 살릴 수 있는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는 맨발로 예수님께 달려 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가고 없었습니다. 야이로는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갈릴리 호수를 바라보며 예수님이 오시기만을 학수고대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달려와 그의 발 아래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그는 회당장으로서의 권위, 자존심과 체면을 다 버리고 겸손하게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이는 사랑하는 달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 아버지의 마음은 죽어가는 한 어린 양을 살리고자 애타게 간구하는 목자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어가고 있는 양들에 대해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께 나아가 간절히 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에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전날 광풍을 만나고 또 거라사 지방에서는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시느라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조금도 쉴 틈이 없이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일한다는 것은 참으로 짜증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음의 간구를 외면치 않으시고 기쁨으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한 자를 도우실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 도중이었습니다. 무리들은 저마다 예수님 가까이 가기위해 에워싸 밀면서 따라 갔습니다. 그런데 무리들 가운데 뒤에서 남몰래 예수님께 접근하는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여인입니까? 43절을 보십시오. “이에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은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여기서 혈루증은 자궁 출혈로서 계속해서 피가 나오는 불치의 병입니다. 1,2년도 아니고 12년 동안 병마에 시달렸으니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마가복음 5:26절에는 여인의 상태를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저자 마가는 의사에 대해 기록했으나 누가는 자신이 의사이기 때문인지 이를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여인은 병고침을 받기 위해 당시 용하다 하는 의사는 다 찾아 다녔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자신있게 대답하다가 돈만 받아 먹고 나중에는 꽁무니를 뺐습니다. 이로 인해 마음의 상처만 받고 있던 재산도 다 허비하고 병만 더 중하여졌습니다. 
여인들은 아름다워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또 고운 피부를 갖기 위해 콜드크림 맛사지도 하고 비싼 화장품을 사서 바르기도 합니다. 또 에어로빅과 같은 미용체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는 이런 노력이 아무 필요가 없었습니다. 여인도 캠퍼스 시절에는 아름다움을 자랑했을 것입니다. 청바지가 잘 어울리고 무스를 바르지 않아도 머리가 윤기가 났습니다. 그러나 병이 들자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추한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불그스럼하고 통통하던 얼굴이 점점 마르고 윤기가 없어지더니 늙고 기미가 생기고 나중에는 시커멓게 되어 버렸습니다. 몸은 꼬챙이와 같이 마르게 되었습니다.

또한 정신적으로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불신과 마음의 상처로 인해 피폐해졌습니다. 무엇보다 영적으로 심한 죄의식으로 고통해야 했습니다. 레위기 15:1-12절에 보면 이 병은 유출병으로서 부정한 병입니다. 그의 눕는 상도 부정하고 앉았던 자리도 부정하고 그와 접촉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부정하였습니다. 자연히 여인은 사람과의 관계성이 단절된 채 고독하고 운명적이고 슬픈 버림 받은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여인은 이제 삶의 의욕과 희망을 상실하고 자포자기의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인은 살았으나 죽은 자와 방불한 자였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시름시름 죽어가는 여인에게 새로운 생명력과 희망을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절망이 컸던 만큼 예수님께 대한 희망도 컸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나아가 그 옷자락에 손만 대기만 하면 고질병이 낫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간다하면 고질병이 낫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인은 마음 속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불신과 의심과 싸워야 했습니다. 죄의식과 자의식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절망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인은 연약하고 병든 몸으로 태산과 같은 무리를 뚫고 헤쳐 나가야 했습니다. 무리 속을 파고 들어가려면 많은 사람을 부정케 해야 되고 다만 믿음으로 무리 속을 뚫고 들어가 필사적으로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여인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예수님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장애물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는 데에는 많은 외적, 내적 장애물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부모님이나 친구들 같은 사람들이 장애물이 되기도 하고 환경이 장애물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내면의 불신이 장애물이 되기도 하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장애물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반복해서 죄를 짓고 “나는 어쩔 수 없는 놈이야. 아무리 결심해도 안돼.” 하며 자포가지 하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믿음이란 이런 장애물을 극복하고 예수님께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주위 사람이나 나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예수님을 바라볼 때만이 가능합니다.

4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 옷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여인이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가에 손을 대자마다 오랫동안 그를 괴롭히던 혈루증이 순식간에 나았습니다. 이는 실로 놀라운 믿음의 역사였습니다.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것은 보잘것 없는 행동에 불과했지만 그 결과는 엄청났습니다. 무리들 가운데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자가 많았습니다. 손을 대는 정도가 아니라 몸을 비벼대는 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잠깐 손을 대었지만 믿음으로 했기 때문에 능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막 5:28). 여인은 마음으로 믿고 믿음으로 손을 댄 것입니다. 여인은 행동하기에 앞서 마음에서 승리했습니다. 마음에서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절망을 극복했습니다. 마음에서 의심과 불신을 극복했습니다. 마음에서 운명적인 생각과 부정적인 생각을 극복했습니다. 마음에서 연약함과 두려움을 극복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는 큰소리를 치고 몸으로는 열심히 뛰지만 마음으로는 불신하고 의심합니다. 이 때문에 아무런 능력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합니다. 양을 칠 때도 ‘저 사람이 과연 변화될 수 있을까?’ 마음으로 의심하기 때문에 아무런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미도 행할 때만이 불가능이 가능케 됩니다. 마가복음 11:22,23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이 하나님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능력있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여인은 믿음으로 고침을 받은 후 아무도 몰래 살짝 빠져 나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의 행동을 감지하시고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다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무리가 옹위하여 미는 것을 보시면서 이상한 말씀을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시며 계속해서 여인을 찾으셨습니다. 여인은 더 이상 자신을 숨길 수 없음을 알고 떨며 예수님 앞에 나아와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손 댄 이유과 곧 나은 것을 모두 앞에서 고백했습니다. 여인은 책망 받을 것 같은 두려움과 자의식과 수치심을 무릎쓰고 고백했습니다.

여인이 믿음으로 고백했을 때 예수님은 사랑스러운 딸로 영접하시고 그 믿음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4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이를 볼 때 예수님께서 여인을 그토록 찾으신 이유가 무엇인가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여인의 마음에 평강을 주시고 그 믿음을 온전케 하고자 하셨습니다. 여인은 몰래 행했기 때문에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또 육신의 병은 나았지만 그 영혼이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로마서 10:9절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이 마음으로 믿을 뿐만 아니라 입으로 고백하도록 함으로서 마음에 평강을 주시고 그 영혼이 구원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으로 믿으면 되었지 꼭 입으로 고백할 필요가 있는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고백이 없는 신앙은 두더지 신앙으로서 온전한 신앙이 아닙니다. 입으로 고백할 때 불이익이 따르고 고난이 따르지만 우리의 심령에 참 평강과 구원의 확신이 있게 됩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여인과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고자 하셨습니다. 만일 여인이 병고침을 받은 것으로 끝났으면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이 맺어지지 않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은혜 받은 후 그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때문에 믿음이 더 이상 성장 하지 못하고 필요할 때만 찾는 무당신앙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온전한 믿음이란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고 계속해서 예수님을 좇는 것입니다.

셋째는, 숨은 믿음의 역사를 드러내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야이로와 무리들에게 부활의 믿음을 심고자 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구원의 선포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우리를 죄와 사단의 권세로부터 구원한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여기에는 선한 행위와 업적이나 공로가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믿음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은총입니다.

II.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신 예수님 (49-55)

예수님께서 아직 여인과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소식을 알려 주었습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 이 말은 예수님을 위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더 괴롭히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에는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체념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도 죽음은 어찌할 수 없다는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이 말에는 예수님의 능력을 한계 지우고 야이로로 하여금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버리도록 하는 사단의 궤계가 숨어 있었습니다. 이 말을 예수님과 관계성을 파괴시키는 사단의 음성이었습니다. 야이로가 이 말을 듣게 될 경우 두려움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불신하게 됩니다. 또한 몰래 새치기한 여인과 이로 인해 지체하신 예수님에 대한 원망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슬픔과 절망감과 허무가 엄습하여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게 됩니다. 바로 이때 예수님은 야이로를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5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마가복음 5:36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고 야이로에게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두려움은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에 야이로의 마음에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려움은 죽음의 세력을 잡은 사단이 심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두려움의 독화살이 꽂히면 손발이 마비되어 무기력해 집니다. 이때는 아무리 힘을 쓰고자 해도 힘을 쓸 수가 없게 됩니다. 또 머리 회전이 안되어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진도가 나가지 않게 됩니다. 두려움에 사로 잡히게 되면 목소리가 기어 들어가고 안면근육이 굳어지고 심령이 딱딱해지게 됩니다. 또 두려움이 생기면 이기적이 되어서 남을 생각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무엇보다 두려움이 생기면 마음에 불신이 생겨 결국 믿음의 길을 떠나고 맙니다. 이와 같이 두려움은 사람을 못쓰게 만들고 파멸로 이끕니다. 두려움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단절시키고 사람들과의 관계성도 단절시킵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모두 사단이 우리의 마음에 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딤후 1:7). 사단은 우리의 마음에 건강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결혼에 대한 두려움, 장래에 대한 두려움, 막연한 두려움을 심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지 않을 때 모든 것이 두렵게 됩니다. 이러한 두려움이 생길 때 이는 심리학적으로 생기는 감정이 아니라 사단이 우리의 마음에 심어주는 것임을 알고 대적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대적할 때 사단은 물러갑니다(약 4:7).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마음에 역사하는 두려움과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면에 역사하는 두려움을 이길 때 못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자를 가장 싫어하시고 믿음의 용사를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마음에서 두려움의 독화살을 뽑으신 후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이 말씀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전폭적으로 예수님을 신뢰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불신과 두려움을 심는 사람들의 말을 듣지 말고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상황이 어렵게 진행될지라도 요동하지 말고 그가 처음 가졌던 믿음을 끝까지 지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믿기만 하면 딸이 비록 죽었을지라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야이로가 두려움을 모르는 믿음의 용사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믿음의 능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그가 믿기만 할 때 죽은 딸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가 믿기만 할 때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가 믿기만 할 때 슬픔을 이기고 운명을 이기고 절망을 이기고 능력있는 인생, 승리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믿기만 하는 것을 어리석게 생각합니다. 믿기만 한다고 해서 밥이 나오고 돈이 나오는가를 말합니다. 그러나 믿기만 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셔서 모든 것을 형통케 하십니다. 믿기만 하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건강, 결혼문제, 장래를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축복하사 필요한 물질도 주시고 건강도 주시고 가장 알맞은 믿음의 동역자도 주시고 그 장래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지혜도 주시고 능력도 주셔서 실제 생활에서도 능력있는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가 믿기만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통해 세계 187개국을 능히 개척케 하실 것입니다. “두려워 하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야이로에게 믿음을 심으신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및 아이의 부모만 데리고 집으로 들어 가셨습니다. 왜 이들만 데리고 들어가셨을까요? 방이 너무 좁아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이는 영적 분위기를 만들고자 하심이었습니다. 또한 수제가 양성을 하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야이로의 집에는 통곡하는 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죽음의 권세가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은 자는 것으로 보셨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께는 죽음이 없습니다. 죽음의 그림자도 없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이의 손을 잡고 자는 아이를 깨우듯 말씀하셨습니다. “아이야, 일어나라.” 그러자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아빠, 배고파. 막을 것 좀 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관자 되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허물과 죄로 죽은 영혼들을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사단이 심는 의심과 불신과 두려움을 물리치고 능력있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