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제 1부 23강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말씀/ 누가복음 9:1-17
요절/ 누가복음 9:13a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오늘 말씀에는 두 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12제를 전도여행 내보내신 사건이요, 둘째는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사건입니다. 이 두 사건은 모두 지도자 훈련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동안 12제자를 부르시고 갈릴리를 중심으로 복음역사를 섬기셨습니다. 이제 갈릴리 전도의 결산으로 제자들을 전도여행을 내보내사 사도 훈련을 시키십니다. 또한 불가능한 상황 가운데서 믿음으로 무리들을 먹이는 목자 훈련을 시키십니다. 예수님은 이 훈련을 통하여 제자들을 자립적이고 능력있는 영적 지도자로 키우고자 하셨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믿음과 목자의 심정과 책임감이 투철한 영적 지도자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저와 여러분이 이 시대를 섬길만한 영적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열 두 제자를 내 보내신 예수님 (1-9)
예수님은 12제자들이 그 동안 배운 바를 실습해 보도록 전도여행을 내보내셨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이들은 어떻게 준비시키셨습니까?
첫째, 능력과 권세를 주셨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제자들이 싸워야 할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는 귀신과 병마와의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능력으로는 이를 이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이들에게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셨습니다. 능력은 실제 일할 수 있는 힘을 말하고, 권세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일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리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전권대사로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과 권세를 부여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셨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우리는 여행을 갈 때 여행 가방, 음식, 차비, 갈아 입을 옷 등 최소한의 필요한 것들을 가지고 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필수품 조차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굶어 죽으라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4절에서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유하라고 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이 필요한 것들을 예비해 놓으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들이 필요한 것을 다 준비해 가면 자신도 모르게 물질을 의지하거나 사람을 의지하기 쉽습니다. 그리할 때 위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을 수 없습니다. 선교지에 나가면 대개 처음 오신 분들이 양들을 데려온다고 합니다. 그들은 처음왔기 때문에 말도 잘 못하고 또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가를 알아 듣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fishing 할 문장을 달달 외워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나가서 확신있게 증거합니다. 이방양이 욕을 해도 잘 알자 듣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외운 것을 확신있게 반복해서 말합니다. 이로 인해 이방양이 감동을 받고 1:1 공부를 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할 때 위로부터 능력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작은 일에서부터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을 배우도록 훈련하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전권대사로서 자부심을 갖도록 하셨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제자들은 복음을 들고 예수님의 전권대사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는 것은 곧 예수님을 영접치 않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힘을 다하여 복음을 증거했는데도 사람들이 영접치 않고 배척하면 마음에 상처를 받고 낙심하기 쉽습니다. 또 못할 짓을 한 사람과 같이 기가 죽고 움츠러들기 쉽습니다. 또한 복음을 전하는 내가 부족하여 영접치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에 불의에 빠져 자학하거나 부르심에 대한 확신마저 흔들리기 쉽습니다. 특히 복음을 받아 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타문화권인 경우는 복음의 우월성과 절대성을 상실하고 상황에 맞추어 문화와 타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일꾼은 예수님의 전권대사로서 분명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복음은 절대적이고 또 어떤 것보다 우월합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영접치 않는 것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복음을 영접치 않을 때 그들에게 책임이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려야 합니다. 이는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요 심판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역사가 무엇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고 병든 자들을 고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세상은 사단이 지배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죄로 말미암아 영육 간에 병들어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근본 문제는 정치 문제나 경제 문제가 아니라 그 심령에 하나님 나라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심령에 하나님 나라가 없는 자들은 사단의 지배를 받으며 죄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이런 인간들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죄 사함을 통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군들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나가 각촌에 두루 행하여 처처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쳤습니다. 이들은 겸손하게 하나님만 의지하고 순수하게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이때 그들은 능력의 역사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복음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자 헤롯과 같이 악을 행한 자는 심히 두려워 떨었습니다(7-9).
이상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전도여행을 내보내신 데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로, 사도 훈련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그동안 배운 바를 자립적으로 감당해 봄으로써 자립적이고 능력있는 복음의 일군으로 키우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적으로 어린 제자들을 험한 세상에 내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0:16절에서 마치 양을 이리 가운데돌 보내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음으로 그들을 세상에 내보내사 사도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불신 세상에 나가서 복음의 원수들과 싸우는 강하고 담대한 복음의 용사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자 하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제자들을 통해서라도 세상에 보음을 전파함으로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세상은 복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복음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죄 가운데서 소망없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복음만이 사람들을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구원할 수 있습니다.
II.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예수님 (10-17)
10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의 행한 모든 것을 어린 아이와 같이 예수님께 고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신이 났습니다. 베드로는 침을 튀기며 큰 소리로 보고했습니다.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에게 명한즉 귀신도 항복하더이다. 와! 정말 신기하던데요.” 예수님은 이들에게 휴식이 필요함을 아시고 이들을 데리시고 배를 타고 벳새다라는 고을로 가셨습니다. 이 시간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들은 휘파람을 불며 신나게 노를 저어 갔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무리가 이를 눈치채고 따라온 것입니다. 마가복음 6:33절을 보면 도보로 달려와 먼저 도착하여 Welcome!하며 예수님 일행을 맞이했습니다. 그들은 목자들의 형편은 전혀 생각지 않고 예수님이 가시는 곳은 그 어디든지 따라 갔습니다. 이들이 왜 이렇게 극성스럽게 예수님 일행을 따라오는 것입니까? 이는 그들이 예수님을 통해 참된 목자의 사랑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굶주려 있었고 목자의 사랑에 굶주려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오랜만에 예수님과 함께 조용히 휴식을 취하려고 하다가 무리들로 인해 방애를 받았습니다. 이때 평소 말이 없던 다대오 입에서 조차 불평이 터져 나왔습니다. “정말 해도 너무 한다. 너무해.” 그러나 예수님은 어떠하셨습니까? 11a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저희를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 하시며 병고칠 자들을 고치시더라.” 예수님은 그들을 부담스러워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으로 맞이하든 따뜻하게 영접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목자의 마음이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는 누구든지 내어 쫓지 않으시고 기쁨으로 영접해 주십니다(요 6:37,39).
그러면 예수님이 그들을 영접하시고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무리들은 각자 심각한 인생 문제를 들고 나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에게 먼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처한 현실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압제와 헤롯의 통치 아래서 고통했습니다. 그들은 먹고 살기가 힘들었고 갖가지 병마에 시달렸습니다. 이런 현실문제는 그 어떤 것보다도 시급히 해결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러한 문제들은 결국 삶의 수단에 관한 문제이지 삶의 본질에 관한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하게 해결되어야 할 문제는 삶의 본질에 관한 것입니다. 인생의 존재의미와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으로 가치있는 삶인가? 인생의 궁극적인 희망이 무엇인가? 사람이 어떻게 죄문제를 해결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이러한 삶의 본질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리 현실문제가 좋아진다 할찌라도 행복이 없습니다. 삶의 본질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바로 삶의 본질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땅의 일에 얽매여 신음하는 무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해 주심으로 참된 희망을 심어 주셨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넘어가자 날이 저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강의는 끝날 줄을 몰랐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더니 새롭게 시작되고 마지막으로 하더니 말씀은 계속되었습니다. 많은 물소리와 같은 예수님의 음성은 조금도 피곤하거나 지친 기색도 없이 갈수록 더 우렁찼습니다. 제자들은 명색이 목자라 쉬는 것을 포기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참았습니다. 그들은 피곤하고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배가 고프다 못해 나중에는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사도 훈련을 받은 자답게 꾹 참았습니다. 그러나 해가 지고 저물기 시작하자 마침내 긴급소회를 열고 예수님께 나아와 제안을 했습니다.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 있는 여기가 빈들이니이다.” 날이 저물어 가고 여기는 빈들이니 빨리 그들을 마을과 촌으로 보내어 각자 알아서 숙식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겠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제안은 현재 그들이 처한 상황을 살펴볼 때 너무나 타당합니다. 날은 저물어 가고 그곳은 집이나 슈퍼마겟도 없는 황량한 빈들입니다. 군중은 많고 그들에게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거기다가 현재 그들은 전도여행 후 쉬지도 못하고 자치고 피곤합니다. 배도 고픕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최선의 길은 무리들을 빨리 보내어 각자 알아서 해결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힘든 현실로 인해 목자의 심정을 잃고 무책임하고 자기 중심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제안에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그것 참 좋은 생가이다.”하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형편을 누구보다 잘 아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명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이 그들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지도자로서의 책임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형편이 어렵다고 해서 무리들이 갖가 알아서 하도록 하자고 하는 무책임한 말을 들으시고 화가 나셨습니다. 제자들은 부족하지만 양무리들의 목자요 지도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지도자로서 무리들에 대해서 책임감을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지도자는 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 지도자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부모는 먹고 살기 힘들다고 자녀들에게 각자 알아서 벌어 먹으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부모는 아무리 힘들어도 자식들엑 대해 책임을 지고 먹여야 합니다. 이와같이 영적 지도자는 아무리 자신의 형편이 힘들지라도 어찌하든지 양무리를 먹여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한 영혼에 대한 책임감, 캠퍼스에 대한 책임감, 이 시대에 대한 책임감, 이러한 책임감이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책임감이 강한 자를 귀히 쓰십니다. 근대 선교의 아버지인 윌리엄 캐리는 세계선교에 대한 강한 책임강이 있었습니다. 그는 세계 선교의 모든 신자들의 의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인도 선교사로 갔습니다. 중국 선교의 아버지인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인에 대한 책임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만일 나에게 1000개의 머리가 있더라도 모두 중국인들을 위해 드리겠다.” 그는 자신이 아니면 누가 중국인들을 섬기겠는가 하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책임성 있는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둘째는, 목자의 심정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실 때 제자들에게 목자의 심정을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책임감만 있고 목자의 심정이 있다면 의무감으로 하게 됩니다. 그러나 목자의 심정이 있을 때 자발적으로 또 기쁨으로 하게 됩니다. 제자들에게 어찌하든지 배고픈 무리들을 먹여야 되겠다는 목자의 심정이 없었습니다. 만일 그들에게 목자의 심정이 있었다면 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 길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무리들보다 자기들의 배고픈 것을 더 생각했습니다. 목자의 심정은 기적을 낳습니다.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1961년 4.19와 5.16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방황하는 캠퍼스 지성인들을 어찌하든지 먹이고자 하는 상한 목자의 심정이 충만했습니다. 이 목자의 심정은 오늘날까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지성인들을 살리는 기적을 낳았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 모세는 뛰어 납니다. 모세의 위대성은 그의 탁월한 지도력이나 율법을 전수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는 노예 백성 이스라엘 대한 그의 목자의 심정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 근성에 깊이 젖어 조금만 어려움이 생겨도 불평하고 돌을 들어 모세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모세가 신 광야 가데스 므리바에서 주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은 사건 때문에 올라가서 가나안 땅을 바라 보기만 하고 죽으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이때까지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데 하나 잘못했다고 해서 그 땅을 보기만 하고 죽으라니 이 얼마나 섭섭한 말입니까? 그는 하나님께 섭섭한 감정을 품고 항의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을 염려했습니다. “여호와 모든 육체와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컨대 한 사람을 이 회중에 세워서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으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민 27:16,17) 그는 목자의 심정이 충만한 자였습니다. 이 목자의 심정이 모세를 위대하게 한 것입니다.
셋째로, 믿음의 능력을 가르쳐 주고자 하셨습니다.
13b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대답했습니다.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는 할 수 없삽나이다.” 그들은 현실을 바라보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계산만 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들이 합리적인 머리로 계산할 때 컴퓨터는 계속해서 “No”만 나왔습니다. 그들은 오천명 앞에서 다 말라빠진 떡 다섯 개와 죽은 눈을 가진 물고기 두 마리만 바라보고 운명적인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어떤 가능성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전능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은 능히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현실과 자기 자신들만 바라보고 절망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무리를 오십 명씩 떼를 지어 앉히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 앞에 놓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열 두 바구니를 거두었습니다(17). 예수님은 이를 통해 제자들에게 불가능이 없는 믿음의 능력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문제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상황을 생각할 때 모든 것이 불가능하게만 느껴집니다. 이때 우리는 부정적이 되고 운명적이 되고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무기력하게 누워 원망과 불평만 일삼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음을 가질 대 상황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이라 할지라도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고 확신있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을 때 어려운 현실은 오히려 믿음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명령을 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우리는 저물어 가는 20세기 말에 살고 있습니다. 인류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말세의 징조들이 보입니다. 또한 이 시대는 영적으로 광야와 같은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신 자기를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대신 돈과 쾌락을 사랑하므로 점점 세속화 되고 인간화 되어 가고 있습니다. 흔히 오늘날을 기독교 후기 시대(Post Christian Age)라고 말합니다. 서구 교회는 공동화 현상이 일어나서 기독교 문화만 남고, 교회는 텅텅 비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음란하고 패역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정말 이 시대는 영적으로 빈들과 같습니다. 반면 우리가 책임지고 먹여야 할 캠퍼스 지성인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극히 소수에 불과합니다. 또 우리는 영적으로 어리고 부족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의 형편을 잘 아시면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명하십니다. 이 말씀 속에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소망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족한 우리를 통하여 온 세상을 먹이고자 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이 말씀 속에는 예수님의 무리들에 대한 책임감과 목자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온 세상을 먹이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불타는 비젼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젼으로 오병이어로 오천명의 무리들을 먹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열 두 명을 통해 온 세계를 먹이셨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저희가 이 명령에 순종하여 오병이어를 주님께 드림으로서 세계 187개국을 먹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여름수양회를 기도와 심방의 오병이어를 드려서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