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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1-15(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by Mark Yang   08/14/2019   John

Message


요한복음 제 11 강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


말씀: 요한복음 5:1-15
요절: 요한복음 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사람은 누구나 자립적이고 개척 정신이 충만한 승리의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러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은 그 비결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저자 요한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되는 특별한 문제를 가진 대표적인 사람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자아 완성을 추구하는 지성인의 대표요,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은 참 예배의 대상을 찾아 방황하는 사람들의 대표입니다. 오늘 5장에 나오는 38년된 병자는 내면이 병든 자들의 대표입니다. 그는 낫고자 하는 소망조차 상실한 소망이 없는 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찾아 오셔서 낫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을 심어 주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병든 영혼에 대한 그리스도의 긍휼을 배웁니다.

Ⅰ. 네가 낫고자 하느냐?(1-6)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 가셨습니다. 유대 모든 성인 남자들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지켜야 할 명절에는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이 있는데 본문은 어떤 명절인지 알 수 없습니다(신16:16). 명절이 되면 사람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이 날에도 슬픈 운명에 울며 저주스러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고 하는 못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는 많은 병자들,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즐비하게 누워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란 ‘자비의 집’이란 뜻인데 그들은 이곳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병원의 중환자실에 가 보면 생사의 갈림길에서 고통하며 절망 가운데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이와 같이 베데스다 못가의 분위기는 어두움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절망과 패배감과 무기력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물의 동함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희망 때문에 삶을 포기치 않고 지탱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제한된 희망 때문에 그들은 치열하게 경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먼저 들어갈 태세를 갖추고 최고의 행운이 자기에게 찾아오기를 기대하면서 자리에 누워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료얄 박스를 얻고자 프리미엄을 주면서 투쟁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제각기 비참함과 슬픔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나는 유사이래로 제일 불쌍한 사람일꺼야”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나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일꺼야”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그들은 서로에 대해서 우월감과 열등감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절름발이는 소경에 대해 “나는 이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지만 너는 볼 수 없지”하면서 우월감을 가졌습니다. 반면 소경은 절름발이에 대해 “나는 당당히 걸을 수 있지만 너는 걸을 수 없지”하면서 우월감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서로 경쟁의 대상이기 때문에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경쟁하면서 삶을 영위해 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인간적 동정심과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고 서로 불쌍히 여기며 상부상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물이 동하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기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이 되고 무정하고 무자비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휴머니즘의 딜레마입니다. 영국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기 때문에 서로 적이 되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베데스다 못가는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와 더 나아가 타락한 인간의 영적 상태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교만과 아집으로 인해 영적인 세계를 보지 못하는 영적인 소경이었습니다. 이로인해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가 이 땅에 오셨으나 알아 보지 못하고 배척했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좇아 걸을 수 없는 영적 절름발이들이었습니다. 또 심령이 마비되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없는 혈기마른 자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무기력하여 아무 쓸모가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은 하나의 거대한 베데스다 못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생존을 위한 치열한 경쟁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입시 경쟁, 취직 경쟁, 승진 경쟁 등 우리의 삶은 경쟁의 연속입니다. 이제는 묘지 문제 때문에 죽을 때도 경쟁해야 됩니다. 경쟁에서는 소수의 사람만이 승리하고 대부분 패배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패배감과 열등감과 좌절과 절망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또 경쟁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각종 정신 질환에 시달립니다. 요사이 10대 청소년들이 공부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여 자살하는 학생들이 늘어감에 따라 큰 사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는 경쟁 사회의 한 단면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가리켜서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후기 현대화) 시대라고 일컫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특징은 절대 의미 추구의 불가능성, 불확실성, 두려움과 불안, 부조리와 혼란, 무의미, 무질서, 우연성, 자아 상실, 정신 분열, 권태, 구원자의 부재 등 입니다. 이는 인간의 이성과 과학의 힘을 믿고 역사의 발전에 대한 낙관적 희망을 갖던 모더니즘 사상이 붕괴됨으로써 20세기 말 인류 전반에 나타난 현대 사회의 병리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병리 현상들은 절망에서 옵니다. 절망은 철학, 문학, 음악, 건축 등 여러 분야에서 나타납니다. 이는 하나님 없는 사회의 특징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는 절망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베데스다 못가에 찾아오셔서 38년된 병자를 만나시고 질문하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배웁니다.

첫째, 예수님은 은혜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5절을 보십시오. 베데스다 못가에 38년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최고 대표 병자였습니다. 그는 오랜 동안 목욕을 하지 않아 냄새가 지독했습니다. 그는 피골이 상접하였으며 눈이 뀅하게 들어가 마치 해골과 같았습니다. 그는 살았으나 죽은 자와 방불하였습니다. 그는 삶의 의지나 희망을 상실한 채 38년 동안 누워 있었습니다. 10년이면 세계가 변하고, 30년이면 세계 역사가 바뀌어집니다. 지난 30년 동안 세계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서 이념 전쟁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념의 시대가 끝나고 세계는 실리를 따지는 경제 전쟁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세계는 지난 38년 동안 많이 변했지만 이 병자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고 못쓰게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았습니다. 아무도 이런 그에게 관심을 갖고 그의 비참한 상태를 이해할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와 이야기하고 심지어는 그를 쳐다 보기조차 원치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부담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못가에 찾아 오신 것은 참으로 큰 은혜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38년 된 병자를 찾아오신 것은 은혜 중에 은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대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은 먼저 그 누운 것을 보셨습니다. 보셨다는 것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셨다는 뜻입니다. 사람을 바로 도우려면 그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관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첫눈에 그를 깊이 관찰하셨지만 우리는 관찰하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그를 보시는 예수님의 눈길은 미움과 정죄의 눈길이 아니라 사랑의 눈길이요 소망의 눈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의 비참한 상황을 깊이 이해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아무 희망도 없이 자포자기 상태에 있음을 아셨습니다. 대개 병이 깊은 줄 알면 소망을 두기 힘들어서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포기치 않으시고 도와 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그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예수님은 실로 은혜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1:14b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의 은혜는 에베레스트산보다 더 높고 태평양 바다보다 더 깊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그에게 거룩한 소원을 심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질문은 병자에게는 쓸데 없는 질문인 것처럼 보입니다. 의사가 환자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뺨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문제는 낫고자 하는 소원을 잃어버린 것이 문제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병은 동화성이라는 병입니다. 재래식 화장실에 가면 냄새가 고약하여 눈을 뜨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동화되어 냄새가 덜 나게 됩니다. 죄도 처음 지을 때는 심한 죄의식 때문에 괴로와합니다. 그러나 자꾸 반복해서 죄를 짓게 되면 죄에 동화되어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죄에 면역이 되어 불감증 환자가 되어 버립니다. 이와 같이 누워있는 것이 습관화되고 체질화되면 누워 있는 것이 자연스럽고 일어나는 것이 귀찮게 됩니다. 자연히 낫고자 하는 소원을 상실하게 됩니다. 우리가 고질 병에서 고침을 받을려면 낫고자 하는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낫고자 하는 소원이 없으면 항생제로 목욕을 해도 낫지 않습니다. 낫고자 하는 소원이 없으면 일으켜 세워도 또 주저앉고 누워버립니다. 예수님은 그의 마음에 낫고자 하는 소원을 심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코자 하시는 거룩한 소원을 심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쓰실만한 영적인 사람이 되고자 하는 소원, 겸손의 사람, 순종의 사람이 되고자 하는 소원을 심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복의 근원이 되고자 하는 소원, 어떤 시련 가운데서도 굴하지 아니하는 강하고 담대한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고자 하는 소원, 거룩한 제사장 나라가 되고자 하는 소원을 심으십니다. 자신이 죄로 병든 죄인임을 인정하고 낫고자 하는 소원이 있는 자는 가능성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로 병든 죄인임을 인정하지도 않고 낫고자 하는 소원이 없는 자는 소망이 없는 자입니다. 낫고자 하는 소원이 없는 자는 죄의 소욕 가운데 머물기를 원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소원이 없는 죄를 치료하시고자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말씀은 또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심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기만 하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의 고질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운명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낫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없다면 예수님조차도 치료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7:7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


Ⅱ. 일어나 걸어가라(7-9a)

“네가 낫고자 하느냐?”하는 질문에 병자는 “예! 제가 낫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크신 능력으로 저를 치료해 주셔서 한 번 만이라도 걸어 보게 해 주십시오.”라고 대답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물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 가나이다.” 그의 대답은 그의 내면 문제를 드러내었습니다. 우리가 평소 마음에 품은 생각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나타나게 됩니다. 평소에 감사하는 생활에 힘쓰고 감사가 충만한 사람은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감사하게 됩니다. 아파도 감사, 핍박을 받아도 감사, 범사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습관적으로 불평불만을 일삼고 불평이 가득한 사람은 만지기만 해도 자연스럽게 불평이 튀어 나옵니다. 그는 자기를 도와 줄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목자님이 안도와주신다고 불평합니다. 중풍병자의 특징은 감사할 줄 모르고 늘 원망하고 불평한다는 것입니다. 감사치 않는 것은 교만과 함께 죄의 뿌리입니다.(롬1:21)

이런 원망과 불평은 대개 사람을 의존하는 의존심에서 나옵니다. 38년 된 병자는 사람들이 마땅히 자기를 도와 주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인간 조건을 살펴볼 때 그가 사람을 의존하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사람을 의존하는 것은 큰 죄입니다. 사람은 본래 자립적인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자립이란 영어로 indenpendence로서 이는 dependence on God의 준말입니다. 그러므로 자립이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의지하게 되면 무기력해지고 불평하고 원망하게 됩니다. 또 상황에 굴복당하고 패배적인 인생을 살게 됩니다. 사람은 도와줄 대상이지 의지할 대상이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면 자립적이고 개척적인 능력있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사람을 병들게 하는 것은 신체 조건이나 환경이 아니라 의존심입니다. 의존심이 사람을 무기력하게 하고 못쓰게 만듭니다.

또 이 병자의 문제는 패배주의입니다. 그는 수없이 시도를 했지만 그 때마다 빈번이 경쟁에서 패배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나는 해도 안된다.”는 패배주의가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이 패배주의는 체험을 통해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뿌리가 깊습니다. 이런 자는 도전해 보기도 전에 “나는 반드시 실패한다”는 이상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패배주의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시도도 하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누워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베데스다 못가에 들어오는 한 사람 한 사람과 1대1 말씀 공부를 했더라면 그는 많은 양 무리를 거느리는 대목자가 되고 베데스다 못가는 복음화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누워 있느라고 귀중한 세월을 허비하였습니다. 그는 한마디로 소망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는 절망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어찌하든지 도와주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어떻게 도와주셨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에게 명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예수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은혜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또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가 불쌍하다고 동정하지 않으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돕고자 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 말씀 가운데는 예수님께서 그에게 두신 크신 소원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자립적으로 일어나 걸어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사람을 의존하고 불평하며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그가 패배주의와 운명주의에 빠져있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는 쓸모없는 인생을 살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일어나 자립적이고 개척적인 인생,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나누어 주는 복의 근원의 인생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명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예수님은 먼저 그에게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워있는 것을 가장 싫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기력하게 누워있도록 창조하지 않으시고 일어나 일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창1:28). 그런데 인간은 죄 때문에 할 수 있는대로 눕고자 합니다. 중풍병자는 문제만 생기면 무조건 드러눕고 봅니다. 그리고 온갖 헛생각과 정욕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리를 들고 자립적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이때 참된 기쁨이 심령에서부터 생기게 됩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 말씀은 그에게 임한 전능하신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9b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예수님의 말씀은 권면이 아니라 순종을 요구하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순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는 구걸하는 직장을 잃어 버리게 됩니다. 또한 오랫동안 누워지냈기 때문에 돗자리가 편했을 것입니다. 그가 순종하기 힘든 점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은 생명의 음성이었습니다. 그가 그 음성을 들었을 때 팔다리에 힘이 생겼습니다. 그는 의존심의 돗자리, 불평의 돗자리, 패배와 운명의 돗자리, 무기력의 돗자리를 들고 당당히 걸어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사람을 살리는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5:25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세상에는 게으름과 이기심과 근거없는 교만과 정욕과 두려움에 마비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고침 받으려면 예수님께 나아가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Ⅲ.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10-15)

38년 된 병자가 나아서 일어나 걸어가게 된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가 돗자리를 들고 위풍당당하게 걸어가자 유대인들은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 가는 것은 안식일 법 제 6조 1항을 어기는 것이므로 도로 누워 있으라고 했습니다. 한 몹쓸 병자가 오랜 병마에서 놓임을 받고 새 인생을 출발하였다면 함께 기뻐하며 베데스다 축제를 벌여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법으로 사람을 옭아 매었습니다. 그들은 지극히 율법적이고 권위적이었습니다. 율법의 정신은 사랑인데 그들에게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사랑이 없는 법은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법적인 문제를 따지자 그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를 낫게 한 그가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했기 때문에 명령에 순종했을 뿐이고 고의로 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두려움에 마비되어 책임을 회피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를 어떻게 도와 주셨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그를 만나셨습니다. 그는 제사장에게 예물을 드려 병이 나았다는 건강 진단서를 받고 정상적인 사회 생활을 하고자 성전에 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이 말씀은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가 어떤 생활을 해야 하는가 분명한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이 말씀은 그가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서 구원받았는가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늘 새롭게 기억하고 감사치 아니할 때 자신도 모르게 교만해지고 쓸모없게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돌에 새긴다.”는 속담과 같이 은혜를 기억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과거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기억하고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자신을 기억할 때 오늘의 나를 발견할 수 있고 그때 우리는 더 깊은 은혜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과거 자신이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 핍박자요 포행자요 훼방자로서 죄인 중의 괴수임을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증거했습니다. 그가 구원의 은혜를 기억했을 때 그에게는 항상 은혜의 샘물이 넘쳤습니다.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이 말씀은 은혜를 감당키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죄와 싸우는 생활을 해야함을 가르쳐 줍니다. 과거 그는 사람을 의존하고 원망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또 무기력하게 누워 귀중한 인생을 낭비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 큰 죄였습니다. 그는 여기서 나음을 받았으므로 이제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자립적이고 개척적인 삶을 살아야 됩니다. 또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힘써 사명을 감당해야 됩니다. 한마디로 자신을 의의 병기로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생활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롬6:14). 그렇지 아니할 때 더 심한 병에 걸려 전보다 더 비참한 상태로 전락하게 됩니다. 중풍병에서 구원받은 자는 능력이 생겨 그 능력으로 과거 실패를 만회하고자 하는 욕심이 발동하여 세리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면 중풍세리라는 합병증이 생겨 전보다 더 몹쓸 죄인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 받은 후 은혜를 감당키 위해 더욱 힘써 영적 투쟁을 해야 됩니다. 그때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고 심령에 기쁨이 있게 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알렸습니다. 그는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소경 거지와는 달리 자신이 받은 바 한가지 아는 은혜를 증거치 않았습니다. 그는 현실의 두려움 때문에 타협하고 결과적으로 은혜를 배반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유든 간에 은혜를 배반하는 것은 몹쓸 짓입니다.

결론적으로 베데스다 못가에 찾아오셔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예수님은 성육신의 은혜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나라는 5천년의 역사를 자랑하지만 울밑에 선 봉선화와 같이 슬픈 운명과 한이 많습니다. 또 우리에게는 역사적으로 좁은 땅덩이에서 사색당파로 나누어 싸우기를 잘하는 뿌리 깊은 고질병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백성에게 복음을 허락하시고 이 시대에 왕같은 제사장 나라로 삼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가 일어나 복음으로 세계를 정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