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제 1부 26 강
예수님의 제자의 자세
말씀/ 누가복음 9:43b-62
요절/ 누가복음 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
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역을 끝내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 가시는 전환기에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이 사건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가져야 할 내면성에 대해 말해 주고 있습니다.
I . 진정으로 큰자(43b-56)
본문에는 세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첫째는, 제자들이 서로 영접하지 못하고 누가 크냐 하며 다투는 것이요, 둘째는 다른 그룹의 사람을 영접지 못하고 배척하는 것이요, 셋째는, 다른 민족을 영접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진정으로 위대한 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서로를 영접해야 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는 등 많은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바로 앞 사건에서도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이히 여겼습니다(43). 사람들은 능력 많으신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모든 인생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특히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영광의 날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들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남몰래 총리 취임 연설문을 작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이때 제자들에게 자신이 받을 고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44절을 보십시오.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예수님이 고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때 제자들은 영광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또 그들은 이 말씀을 묻기조차 두려워 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인간적인 야심과 꿈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비밀에 대해 말씀하실 때마다 반발하고 귀를 막고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반발한다고해서 물러나지 않으시고 반복해서 말씀을 심으셨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길만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46절을 보십시오.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제자들은 바로 조금 전에 예수님께로부터 고난에 관한 말씀을 듣고도 누가 크냐 하는 문제로 다투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시면 당장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눅19:11). 그들은 예수님께서 내각 편성을 하실 때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신경이 날카로와졌습니다. 그들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계파 별로 나누어 치열한 헤게모니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베드로에 대해 불안을 느낀 나머지 연합전선을 펴서 예수님께 자리 교섭을 하기도 하였습니다(막10:35). 그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의 이름을 먼저 부르시며, 또 누구를 통해서 연락하시는가? 또한 누구에게 어떤 메시지를 맡기시는가 하는데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그들은 서열에 예민하였으며 직분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제자들 가운데는 순진한 바돌로매나 다대오 조차도 큰 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아무도 둘째가 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이고 정치적이었습니다. 그들은 경쟁심과 시기심으로 인해 뼈가 썩는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인간들이 사는 곳에는 어디나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납니다. 특히 이 문제는 명예를 중시하는 남자의 세계에서는 더욱 심각합니다. 서로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투쟁을 합니다. 상대방을 중상모략하고 헐뜯습니다. 이러한 경쟁심은 사람을 못쓰게 만듭니다. 또 인간 관계를 파괴시키고 모임을 파괴시킵니다. 이는 심각한 인간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습니까?
47,4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 이가 큰 자니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어떤 자가 진정으로 위대한 자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린 아이는 힘이 없고 이용가치가 없기 때문에 영접하기 힘듭니다. 당시에는 어린 아이는 수에도 치지 않을 만큼 무시했습니다, 제자들이 이런 그들을 영접하려면 마음을 낮추고 겸손해져야 합니다. 근본적으론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겸손하게 보잘 것 없는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겸손한 마음을 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장 위대한 사람은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겸손한 자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는 위치나 직분의 문제가 아니라 인격의 문제로 내면성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소원을 꺽지 아니하셨습니다. 다만 정말 위대한 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어떤 투쟁을 해야 되는가 하는 내면적인 방향을 잡아 주셨습니다. 사실 인간에게 위대한 자가 되고자 하는 소원이 있다는 것은 귀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위대한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소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위대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낮추는 투쟁을 해야 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위대한 자가 되기 위해 자기를 높이는 투쟁을 합니다. 자기를 자랑하고 어떤 모양으로든지 자기를 드러내고자 애씁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섬기고자 하면서도 자신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섬긴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기를 드러내고 높인다고 해서 위대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를 높이려고 하면 할수록 더 낮아지고 내면은 더욱 비참하게 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위대한 자가 되려면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투쟁을 해야됩니다. 그러나 이런 투쟁을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자기를 낮추면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되는 것 같고 자기 존재가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낮출 때 자기가 높아집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4:11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모세의 위대성은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궁중교육을 받은 데 있지 않습니다. 그의 위대성은 40년간 광야에서 겸손훈련을 받고 겸손하게 노예 백성 이스라엘을 섬긴 데 있습니다. 민수기 12: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분으로서 겸손의 표본이 되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 예수님의 겸손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2:6-8). 예수님은 그 본체가 하나님으로서 하늘 나라의 권세와 영광, 존귀와 위엄으로 옷입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를 비어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창조주께서 피조물인 인간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얼마나 큰 비하입니까? 이는 인간이 지렁이로 되는 것보다 더 큰 비하입니다. 또 인간들 중에서도 군림하는 자로 오시지 않고 섬기는 종으로 오셔서 냄새나는 인간들을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겸손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가장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둘째,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다른 그룹을 영접해야 됩니다. 하루는 요한이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한은 이를 보고 마땅히 기뻐해야 했지만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즉시 그 활동을 못하도록 금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자기들의 그룹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귀신 쫓아내는 일은 사도의 전유물로 생각했습니다. 요한은 사도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이 지나친 나머지 자기 중심적이 되고 배타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50절을 보십시오.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우리만 옳다는 독선과 좁고 편협한 마음을 버리고 다른 그룹의 사람들을 품고 섬길 수 있는 포용성 있는 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포용성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계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포용성입니다. 우리는 내 모임, 내 교파만 옳다는 독선에 빠져 다른 교파에 속한 자를 무시하고 이단이니 삼단이니 하며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은 삼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복음역사를 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복음의 동역자로 영접해야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체의식을 가져야 됩니다. 세상에는 복음 단체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캠퍼스 복음 단체만 하더라도 많이 있습니다. 각 단체들은 각기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몸의 지체가 각기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서 몸을 세우므로 몸 전체가 하나의 조화를 이루는 것과 같이, 각 복음 단체들은 각기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므로 전체가 하나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5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승천하실 기약이 차 간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승천하실 때가 가까워 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현재 갈릴리에서 왕성한 복음역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를 뒤로 하고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예루살렘에는 영광과 승리 대신 배척과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로부터 배반을 당하시고 종교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게 됩니다. 또 침뱉음과 조롱과 능욕을 받고 채찍에 맞게 됩니다. 마침내는 저주와 수치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 십자가에 못박혀 고통스럽게 죽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섬짓해지며 뒤로 물러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아시고도 십자가를 회피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고자 굳게 결심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 가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모습은 불요불굴의 장군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가 좀 무겁게 느껴지면 짜증을 내고 불평을 합니다, 또 의심하고 두려워 합니다. 이는 할 수만 있으면 십자가를 안지고 가볍게 지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믿음을 배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자 굳게 결심하면 위로부터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덧입을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십자가를 통해 놀라운 영적 세계의 비밀을 깨닫고 부활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저는 여름 수양회를 준비하고자 할 때 감당해야 할 많은 십자가로 인해 잠시 심령이 무거웠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고자 굳게 결심하고 예수님을 배우고자 할 때 심령에 새로운 힘이 솟구쳤습니다. 그리고 제가 작은 십자가이지만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요 특권인가를 깨닫고 심령으로부터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바라보셨습니다. 십자가를 보실 때 수치와 고통만 바라보신 것이 아니라 그 후에 올 영광과 승리, 즉 부활과 승천도 바라보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제자들은 민족 감정을 극복해야 됩니다. 5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사마리아에도 복음을 전하시고자 사자들을 앞서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에 대한 민족 감정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이를 본 야고보와 요한은 속에서 불이 났습니다. 그들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나이까 그들은 예수님께 과잉충성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도 몹시 화가 나셔서 자기들의 생각에 동의하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좁은 민족 감정을 극복하고 세계만민을 품는 보편적인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좁은 민족 감정을 벗어나 범세계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보편적이고 범세계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만민을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좁은 민족 감정을 극복하지 못할 때 위대한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경쟁심 때문에 서로를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또 독선 때문에 자기 그룹에 속하지 않은 다른 사람을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민족 감정 때문에 사마리아 사람들을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좁고 편협한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넓은 마음을 품기를 원하셨습니다. 좁은 마음은 비참합니다. 좁은 마음은 싸움과 분열을 일으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마음이 넓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좁은 마음 문을 넓히사 어떤 사람도 다 품고 섬길 수 있는 보편적인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II.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57-62)
57-62절에는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세 종류의 제자 지망생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실격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지불해야 할 댓가가 무엇인가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가난한 생활도 각오해야 합니다(57,58). 57절을 보십시오. 길 가실 때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이 사람은 마태복음 8:19절에 보면 서기관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당시 서기관들과는 달리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열망이 대단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가시는 곳은 어디든지 가고자 했습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의 사명인의 생활이 참으로 아름답고 멋있게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어디를 가시든지 환영을 받고 존경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예수님을 따르면 자신도 자연히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또 장차 메시야 왕국이 건설되면 장래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겉에 나타난 화려한 영광만 보고 뒤에 숨겨진 고난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사명인의 삶을 이상적으로만 보는 이상주의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58절을 보십시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예수님은 그에게 머리 둘 곳 없는 냉혹한 현실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하챦은 여우도 안식처인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예수님께는 머리를 둘만한 안정된 안식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부요하신 분이시지만 이렇게 가난하게 되신 것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우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었습니다(고후8:9). 사명인의 삶에는 희생과 헌신이 요구됩니다. 또 장래에 대한 눈에 보이는 확실한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명인의 삶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두고 천성을 향해 나아가는 거룩한 순례자의 삶입니다. 여기에는 가장 확실한 희망과 보장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서 꾸리지 않고 검소한 삶을 살며 기쁨으로 또 확신있게 사명인의 삶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명인의 삶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희생과 아픔이 따릅니다. 희생과 아픔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각오하고 주님의 뒤를 따를 때 후에 우리 주님께서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벧전5:4)
둘째, 하나님 나라의 일에 최고 우선권을 두어야 합니다(59,60). 예수님은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59a). 예수님은 아무에게나 이런 초정을 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영광스러운 초청의 음성이 임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제자로서의 희망을 두시고 그를 부르사 복음역사에 귀하게 쓰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59b). 부친을 장사하는 일은 인륜지 대사로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60절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죽은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 이 말씀은 윤리적으로 볼 때 오해를 사기 쉬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부친 장사도 지내지 말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이는 세상의 그 어떤 일도 하나님 나라의 일보다 우선권을 둘 수 없다는 뜻입니다. 죽은 자를 장사 지내는 일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은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그 영혼을 살리는 일입니다.
셋째, 앞만 보고 전진해야 합니다(61,62). 61절을 보십시오. 또 다른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지망했습니다.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61). 이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기는 하겠지만 마지막으로 가족과 인사를 한 후에 따르겠다는 단서를 붙였습니다. 그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는 한가닥 남은 가족에 대한 정과 미련을 끊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62절을 보십시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손에 쟁기를 잡은 자는 오직 앞만 보고 전진해야 합니다. 만일 쟁기를 잡은 자가 자꾸 뒤를 쳐다 본다면 밭을 바로 갈 수 없습니다. 이처럼 부르심을 받은 자는 가족에 대한 인간적인 정을 부인하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맡은 바 사명에 충성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잔인하고 무자비한 것 같습니다. 사단은 우리의 마음 속에 꼭 이렇게까지 해야 되는가 하는 회의를 심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남은 정과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면 결정적인 순간에 인본주의자가 되어 주님을 배반하게 됩니다. 우리는 마지막 인간적인 꿈과 이상, 마지막 남은 인간에 대한 정, 마지막 남은 세상에 대한 미련을 부인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예수님 한 분만을 바라보고 맡은 바 사명에 충성할 때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주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 손에 쟁기를 잡은 자들입니다. 우리 모두가 한 눈 팔지 않고 맡은 바 사명을 힘써 감당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