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제 2부 1 강
칠십인을 내 보내신 예수님
말씀/ 누가복음 10:1-24
요절/ 누가복음 10:2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9:1-6절에서 예수님은 12제자들을 내 보내사 전도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보다 훨씬 많은 70인을 세워 전도여행을 내 보내십니다. 이 두 사건은 여러 면에서 비슷합니다. 그러나 70인을 보낼 때 주신 교훈이 좀 더 구체적이며, 또한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목자의 심정도 더욱 잘 나타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온 세상을 복음화 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불타는 개척정신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이 시대의 추수할 일군으로 귀히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1-3)
1절을 보십시오. 이 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이 후 란 예수님께서 9:57-62절에서 제자로서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 말씀하신 후를 말합니다. 이 후 예수님은 12제자 외에 제자로서 합당한 70인을 세우셨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복음 역사를 위해 이때 특별히 임명하신 자들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70을 세계의 국가수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70인을 각동 각처로 보내신 것은 유대지방 뿐만 아니라 온 세계를 복음화 하고자 하시는 뜻이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현재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십니다. 대개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질 여유를 잃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심각한 문제를 앞에 두시고도 슬픔에 빠지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70인을 보내심으로 온 세상을 복음화 하고자 하시는 열망으로 가득 차셨습니다. 예수님은 개척정신으로 불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셨습니다. 한 사람씩 보낸다면 더 많은 곳에 보낼 수 있으므로 훨씬 경제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왜 둘씩 보내셨을까요? 이는 동역하는 믿음을 배우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혼자 가면 헛생각하다가 사단의 시험에 들기 쉽습니다. 또 문제가 생겨도 이를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둘씩 가게 되면 서로 힘을 주고 붙들어 줄 수 있습니다. 또 합심기도를 통해 영력과 지혜를 덧입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독불장군의 역사가 아니라 동역의 역사입니다. 한 사람은 연약하지만 두 사람이 마음과 뜻을 합하면 놀라운 능력의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8:19절에서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2a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세상을 보는 눈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당시 세상은 어두웠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 초강대국의 지배 아래 분봉왕들에 의해 분할 통치를 받고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는 하루 두끼도 먹기 힘들만큼 피폐하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형식과 권위주의와 독선에 빠져 양들을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너무 힘들어서 날로 귀신 들린 자와 병마에 시달리는 자들이 늘어 났습니다. 그 시대는 어느모로 보나 절망적인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를 추수할 것이 많은 밭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가 절망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영적으로 갈급한 시대임을 아셨습니다. 그 시대가 육신적이고 물질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가 많음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구원 받을 자들이 수없이 널려 있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을 추수할 비젼으로 불타셨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이 시대를 불안의 시대, 공포의 시대,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 이 시대야말로 추수할 시대입니다.
그런데 추수할 것이 많지만 문제는 일군이 적은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그 시대에 정말 필요한 사람은 위대한 정치가나 경제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도 영혼을 구원하는 추수할 일군들이었습니다. 영혼의 목자요 책임성 있는 1:1 성경선생들이 절실히 필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많으나 복음의 일군들이 너무 부족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제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2b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이 말씀에는 두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제자들 자신이 부족하지만 추수할 일군으로 보내어 달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추수할 일군들을 더 많이 보내어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군 양성을 기도제목으로 잡으시고 이를 위해 기도하도록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온 세계를 복음화 할 수 있는 비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추수할 일군들을 많이 세워 주시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힘과 지혜로 할 수 없습니다. 또 돈으로 복음의 일군들을 고용할 수도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추수할 일군들을 세워 주시고 보내 주시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먼저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추수할 일군으로 써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함께 추수할 일군들을 많이 보내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사 많은 일군들을 세워 주십니다. 모라비안 선교회의 진젠돌프 백작은 9살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것을 전 생애의 목적으로 삼고자 결심을 했습니다. 그는 내게는 단 한가지 열망 밖에는 없다. 그것은 그 분, 오직 그 분 뿐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런 불타는 열망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선교 개척자들을 세워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때 선교사역이 시작된 지 20년도 못되어 지난 2세기 동안 영국교회와 개신교 교회가 수행한 것보다 더 많은 선교사업을 하셨습니다. 이들은 3,000여명의 평신도 선교사를 각곳에, 그것도 오지에 파송하였습니다. 이는 12명의 신자 중 1사람의 비율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하십니다.
3절을 보십시오. 갈찌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어린 제자들을 세상에 내 보내시는 예수님의 심정은 마치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 세상은 약육강식의 원리 아래 움직이고 있습니다. 약자는 강자에게 짓밟히고 도태당합니다. 사람들은 힘든 세상에 살면서 살아남기 위해 악해지고 이리와 같이 됩니다. 사람들은 속고 속이고 이용해 먹고 이용당합니다. 반면 제자들은 어린 양과 같이 순진하고 진실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들을 이용하고 핍박합니다. 예수님은 어린 제자들이 험한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을까 염려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을 세상에 내 보내십니다. 갈찌어다. (Go!) 이는 그들을 전쟁터로 내 보내시는 예수님의 진격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제자들을 전도여행 내 보내신 데는 두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세상에 대한 목자의 심정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알지 못하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하는 간절한 심정 때문에 어린 제자들을 세상에 내 보내신 것입니다. 둘째는, 제자훈련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어린 양과 같다고 해서 품에 품고만 있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호랑이나 사자와 같은 담대한 복음의 투사들로 키우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이리떼와 싸우는 복음의 투사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갈찌어다 라고 명령하셨습니다.
II .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라(4-16)
예수님은 70인을 내 보내시면서 전도자로서 가져야 할 자세와 그들이 전해야 할 메시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하나님만 의지할 것: 4a절을 보십시오.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 여행을 위해서는 반드시 돈이 필요합니다. 또 당시는 험한 길을 많이 걸어가야 했으므로 여분의 신도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들이 물질 보다도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물질이 있어야 복음 역사를 이룰 수 있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이렇게 물질이나 사람을 의지할 때 영력을 잃고 아무 것도 못하게 됩니다. 사람이 돈이 없어서 또 신발이 없어서 복음 역사를 감당치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복음 역사를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덧입혀 주십니다. 또한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도 부족함이 없이 다 채워 주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 고 하십니다(4b). 이는 다른데 신경 쓰지 말고 맡은 바 사명에만 충성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길에서 친척이나 아는 사라을 만나면 끝없는 문안으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우리도 캠퍼스에 fishing하러 갔다가 동창을 만나면 다방에 가서 차 마시며 이야기 하다가 돌아오기 쉽습니다. 이런 자세로는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사명인은 사명에만 전념해야 합니다.
둘째, 평화의 사도로서의 자세를 가질 것: 5절을 보십시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찌어다 하라. 왜 제일 먼저 평화를 기원하도록 하셨을까요? 이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별 뚜렷한 이유도 없이 불안해하고 두려워 합니다. 심령은 늘 불안과 초조, 염려와 근심으로 가득차 잠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밤마다 악몽을 꾸고 악령에 시달리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화평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으로 하나님과 화평할 때 가장 먼저 생기는 것이 심령의 평화입니다(롬5:1). 그러므로 복음은 평화의 복음입니다(행10:36,엡2:14-17). 제자들은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평화의 사도입니다. 제자들이 평안을 기원할 때 만일 그 집에 평안을 받을 만한 사람이 있으면 그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제자들에게로 돌아옵니다(6). 그러므로 축복기도는 절대 손해가 아닙니다.
7,8절 말씀은 숙식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그들이 복음 역사를 감당할 때 반드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람들이 있어 섬겨 줍니다. 이때 조금도 미안한 감정을 가질 필요없이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마시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일군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감사하는 마음이나 염치도 없이 행동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 음식이 좋지 않다고 이집 저집으로 옮겨다녀서는 안됩니다.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영접하는 자의 집에서 차려 놓은 것을 맛있게 먹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 나라를 전파할 것: 9절을 보십시오.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이 말씀에서 볼 때 병든 자를 치료하는 것과 말씀을 전파하는 것은 복음의 2대 사업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육신의 병 뿐만 아니라 죄로 병들어 고통하는 영혼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육신의 병은 병원에 가면 고침을 받을 수 있지만 죄로 병든 것은 아무도 고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죄의식으로 고통하며 허무와 운명주의 병으로 신음합니다. 또한 삐뚜러진 성격과 좋지 못한 습관으로 자학합니다. 죄로 병든 인간을 누가 고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상으로 고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고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죄로 병들어 못쓰게 된 인간을 쓸모있는 인간으로 고치는 능력이 있습니다.(롬1:16)
또 제자들이 전해야 할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는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아담 한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낙원, 즉 하나님 나라를 상실했습니다. 그 결과 세상은 사단이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사단이 통치하는 곳에는 두려움과 불안, 절망, 시기, 분열, 싸움 등이 있어 사람들은 저주스러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순종을 통하여 잃었던 낙원, 즉 하나님 나라를 찾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왕이 되어 다스리는 곳입니다. 여기에는 생명과 평화가 있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있습니다. 자유와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심령에 영접할 때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왕으로 오셔서 사랑과 평화로 다스리시게 됩니다. 그 때 우리의 마음은 천국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반드시 전해야 할 메시지입니다. 만일 우리가 양들에게 듣기 좋은 말만하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참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할 수 없습니다.
10,11절은 복음을 영접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복음을 영접치 않으면 힘이 빠집니다. 그리고 내가 혹시 잘못해서 영접지 않은 것이 아닌가 불의에 빠지거나 또는 복음이 잘못되지 않았는가 복음에 대해서도 회의하게 됩니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타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일군들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복음을 영접지 않은 것은 그들에게 책임이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발에 먼지를 탁탁 털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메시지를 전해 주어야 합니다. 이 때의 메시지는 영접지 않은 그들에게는 심판의 메시지가 됩니다.
12-15절은 복음을 영접지 않는 고라신과 벳세다의 가버나움에 대한 예수님의 상한 탄식입니다. 예수님은 이 도시에서 많은 권능의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만하여 회개치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님의 전권대사로서 자부심을 갖도록 격려해 주셨습니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 보내신 자를 저버리는 것이라.
.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17-24)
18,1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70인이 귀신을 쫓아낼 때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져 박살이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역사를 통하여 사단이 멸망하는 놀라운 승리의 역사가 일어 났습니다. 이로써 사단에게 사로 잡힌 인생들이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고 하십니다. 마귀의 세력을 제어할 수 있는 영적 권세는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로부터 나옴을 알 수 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제자들은 역사를 중심으로 기뻐하고 슬퍼했습니다. 우리도 1:1 팀 수가 올라가면 기뻐하고 역사가 잘 안되면 낙심하고 안면근육이 굳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기뻐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이름이 하늘나라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와 사단의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본적인 구원의 은혜를 인하여 항상 기뻐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상황에 좌우되거나 시들지 않는 영적 기쁨입니다.
21,22절은 예수님의 감사 기도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성령으로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쁨의 원천은 성령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기쁨이 충만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있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로서 모든 것을 그 주권대로 역사하십니다. 복음의 비밀도 스스로 지혜있다 하고 교만한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와 같이 겸손한 자들에게 나타내십니다. 교만한 자들은 복음이 어리석게 보이므로 영접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절대로 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부족하지만 겸손한 자에게 복음의 비밀을 알리시고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고전1:21).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 방법입니다. 또한 22절을 보십시오. 아무도 예수님과 예수님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자가 없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위로부터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해야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엡1:17)
그 후 예수님은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종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제자들은 어린 양과 같이 보잘 것 없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아무런 타이틀도 없고 또 돈도 벌지 못하여 물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실 때 그들은 가장 복된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선지자와 왕들이 메시야를 보고자 갈망해 왔으나 보지 못했습니다. 또한 메시야의 음성을 듣고자 했으나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바로 가까이서 메시야를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장 복된 자들입니다. 우리도 이 예수님을 바로 가까이서 보고 들을 수 있으므로 가장 복된 자들입니다.
결론: 이 세상은 에수님의 눈으로 볼 때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시대의 추수할 일군들로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개척자의 인생을 살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이미 개척된 곳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안정을 구하는 마음으로는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없습니다. 새 역사를 창조하려면 아픔과 희생과 모험이 있지만 개척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개척하고 정복하는 인생으로 지으셨습니다(창1:28). 그러므로 개척자의 인생을 살 때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안정된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안일한 마음을 버리고 추수할 일군으로서 개척의 비젼에 불타야 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 시대에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추수할 일군으로 써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세계를 복음화 할 추수할 일군들을 많이 세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누가복음 제 2부 1 강
칠십인을 내 보내신 예수님
말씀/ 누가복음 10:1-24
요절/ 누가복음 10:2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9:1-6절에서 예수님은 12제자들을 내 보내사 전도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보다 훨씬 많은 70인을 세워 전도여행을 내 보내십니다. 이 두 사건은 여러 면에서 비슷합니다. 그러나 70인을 보낼 때 주신 교훈이 좀 더 구체적이며, 또한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목자의 심정도 더욱 잘 나타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온 세상을 복음화 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불타는 개척정신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이 시대의 추수할 일군으로 귀히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1-3)
1절을 보십시오. 이 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이 후 란 예수님께서 9:57-62절에서 제자로서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 말씀하신 후를 말합니다. 이 후 예수님은 12제자 외에 제자로서 합당한 70인을 세우셨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복음 역사를 위해 이때 특별히 임명하신 자들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70을 세계의 국가수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70인을 각동 각처로 보내신 것은 유대지방 뿐만 아니라 온 세계를 복음화 하고자 하시는 뜻이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현재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십니다. 대개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질 여유를 잃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심각한 문제를 앞에 두시고도 슬픔에 빠지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70인을 보내심으로 온 세상을 복음화 하고자 하시는 열망으로 가득 차셨습니다. 예수님은 개척정신으로 불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셨습니다. 한 사람씩 보낸다면 더 많은 곳에 보낼 수 있으므로 훨씬 경제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왜 둘씩 보내셨을까요? 이는 동역하는 믿음을 배우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혼자 가면 헛생각하다가 사단의 시험에 들기 쉽습니다. 또 문제가 생겨도 이를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둘씩 가게 되면 서로 힘을 주고 붙들어 줄 수 있습니다. 또 합심기도를 통해 영력과 지혜를 덧입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독불장군의 역사가 아니라 동역의 역사입니다. 한 사람은 연약하지만 두 사람이 마음과 뜻을 합하면 놀라운 능력의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8:19절에서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2a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세상을 보는 눈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당시 세상은 어두웠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 초강대국의 지배 아래 분봉왕들에 의해 분할 통치를 받고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는 하루 두끼도 먹기 힘들만큼 피폐하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형식과 권위주의와 독선에 빠져 양들을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너무 힘들어서 날로 귀신 들린 자와 병마에 시달리는 자들이 늘어 났습니다. 그 시대는 어느모로 보나 절망적인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를 추수할 것이 많은 밭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가 절망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영적으로 갈급한 시대임을 아셨습니다. 그 시대가 육신적이고 물질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가 많음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구원 받을 자들이 수없이 널려 있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을 추수할 비젼으로 불타셨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이 시대를 불안의 시대, 공포의 시대,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 이 시대야말로 추수할 시대입니다.
그런데 추수할 것이 많지만 문제는 일군이 적은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그 시대에 정말 필요한 사람은 위대한 정치가나 경제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도 영혼을 구원하는 추수할 일군들이었습니다. 영혼의 목자요 책임성 있는 1:1 성경선생들이 절실히 필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많으나 복음의 일군들이 너무 부족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제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2b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이 말씀에는 두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제자들 자신이 부족하지만 추수할 일군으로 보내어 달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추수할 일군들을 더 많이 보내어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군 양성을 기도제목으로 잡으시고 이를 위해 기도하도록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온 세계를 복음화 할 수 있는 비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추수할 일군들을 많이 세워 주시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힘과 지혜로 할 수 없습니다. 또 돈으로 복음의 일군들을 고용할 수도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추수할 일군들을 세워 주시고 보내 주시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먼저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추수할 일군으로 써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함께 추수할 일군들을 많이 보내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사 많은 일군들을 세워 주십니다. 모라비안 선교회의 진젠돌프 백작은 9살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것을 전 생애의 목적으로 삼고자 결심을 했습니다. 그는 내게는 단 한가지 열망 밖에는 없다. 그것은 그 분, 오직 그 분 뿐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런 불타는 열망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선교 개척자들을 세워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때 선교사역이 시작된 지 20년도 못되어 지난 2세기 동안 영국교회와 개신교 교회가 수행한 것보다 더 많은 선교사업을 하셨습니다. 이들은 3,000여명의 평신도 선교사를 각곳에, 그것도 오지에 파송하였습니다. 이는 12명의 신자 중 1사람의 비율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하십니다.
3절을 보십시오. 갈찌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어린 제자들을 세상에 내 보내시는 예수님의 심정은 마치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 세상은 약육강식의 원리 아래 움직이고 있습니다. 약자는 강자에게 짓밟히고 도태당합니다. 사람들은 힘든 세상에 살면서 살아남기 위해 악해지고 이리와 같이 됩니다. 사람들은 속고 속이고 이용해 먹고 이용당합니다. 반면 제자들은 어린 양과 같이 순진하고 진실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들을 이용하고 핍박합니다. 예수님은 어린 제자들이 험한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을까 염려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을 세상에 내 보내십니다. 갈찌어다. (Go!) 이는 그들을 전쟁터로 내 보내시는 예수님의 진격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제자들을 전도여행 내 보내신 데는 두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세상에 대한 목자의 심정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알지 못하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고자 하는 간절한 심정 때문에 어린 제자들을 세상에 내 보내신 것입니다. 둘째는, 제자훈련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어린 양과 같다고 해서 품에 품고만 있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호랑이나 사자와 같은 담대한 복음의 투사들로 키우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이리떼와 싸우는 복음의 투사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갈찌어다 라고 명령하셨습니다.
II .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라(4-16)
예수님은 70인을 내 보내시면서 전도자로서 가져야 할 자세와 그들이 전해야 할 메시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하나님만 의지할 것: 4a절을 보십시오.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 여행을 위해서는 반드시 돈이 필요합니다. 또 당시는 험한 길을 많이 걸어가야 했으므로 여분의 신도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들이 물질 보다도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물질이 있어야 복음 역사를 이룰 수 있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이렇게 물질이나 사람을 의지할 때 영력을 잃고 아무 것도 못하게 됩니다. 사람이 돈이 없어서 또 신발이 없어서 복음 역사를 감당치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복음 역사를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덧입혀 주십니다. 또한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도 부족함이 없이 다 채워 주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 고 하십니다(4b). 이는 다른데 신경 쓰지 말고 맡은 바 사명에만 충성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길에서 친척이나 아는 사라을 만나면 끝없는 문안으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우리도 캠퍼스에 fishing하러 갔다가 동창을 만나면 다방에 가서 차 마시며 이야기 하다가 돌아오기 쉽습니다. 이런 자세로는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사명인은 사명에만 전념해야 합니다.
둘째, 평화의 사도로서의 자세를 가질 것: 5절을 보십시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찌어다 하라. 왜 제일 먼저 평화를 기원하도록 하셨을까요? 이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별 뚜렷한 이유도 없이 불안해하고 두려워 합니다. 심령은 늘 불안과 초조, 염려와 근심으로 가득차 잠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밤마다 악몽을 꾸고 악령에 시달리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화평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으로 하나님과 화평할 때 가장 먼저 생기는 것이 심령의 평화입니다(롬5:1). 그러므로 복음은 평화의 복음입니다(행10:36,엡2:14-17). 제자들은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평화의 사도입니다. 제자들이 평안을 기원할 때 만일 그 집에 평안을 받을 만한 사람이 있으면 그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제자들에게로 돌아옵니다(6). 그러므로 축복기도는 절대 손해가 아닙니다.
7,8절 말씀은 숙식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그들이 복음 역사를 감당할 때 반드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사람들이 있어 섬겨 줍니다. 이때 조금도 미안한 감정을 가질 필요없이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마시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일군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감사하는 마음이나 염치도 없이 행동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 음식이 좋지 않다고 이집 저집으로 옮겨다녀서는 안됩니다.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영접하는 자의 집에서 차려 놓은 것을 맛있게 먹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 나라를 전파할 것: 9절을 보십시오.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이 말씀에서 볼 때 병든 자를 치료하는 것과 말씀을 전파하는 것은 복음의 2대 사업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육신의 병 뿐만 아니라 죄로 병들어 고통하는 영혼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육신의 병은 병원에 가면 고침을 받을 수 있지만 죄로 병든 것은 아무도 고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죄의식으로 고통하며 허무와 운명주의 병으로 신음합니다. 또한 삐뚜러진 성격과 좋지 못한 습관으로 자학합니다. 죄로 병든 인간을 누가 고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상으로 고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고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죄로 병들어 못쓰게 된 인간을 쓸모있는 인간으로 고치는 능력이 있습니다.(롬1:16)
또 제자들이 전해야 할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는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아담 한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낙원, 즉 하나님 나라를 상실했습니다. 그 결과 세상은 사단이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사단이 통치하는 곳에는 두려움과 불안, 절망, 시기, 분열, 싸움 등이 있어 사람들은 저주스러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순종을 통하여 잃었던 낙원, 즉 하나님 나라를 찾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왕이 되어 다스리는 곳입니다. 여기에는 생명과 평화가 있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있습니다. 자유와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심령에 영접할 때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왕으로 오셔서 사랑과 평화로 다스리시게 됩니다. 그 때 우리의 마음은 천국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반드시 전해야 할 메시지입니다. 만일 우리가 양들에게 듣기 좋은 말만하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참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할 수 없습니다.
10,11절은 복음을 영접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복음을 영접치 않으면 힘이 빠집니다. 그리고 내가 혹시 잘못해서 영접지 않은 것이 아닌가 불의에 빠지거나 또는 복음이 잘못되지 않았는가 복음에 대해서도 회의하게 됩니다. 그리고 상황에 따라 타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일군들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복음을 영접지 않은 것은 그들에게 책임이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발에 먼지를 탁탁 털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메시지를 전해 주어야 합니다. 이 때의 메시지는 영접지 않은 그들에게는 심판의 메시지가 됩니다.
12-15절은 복음을 영접지 않는 고라신과 벳세다의 가버나움에 대한 예수님의 상한 탄식입니다. 예수님은 이 도시에서 많은 권능의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만하여 회개치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님의 전권대사로서 자부심을 갖도록 격려해 주셨습니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 보내신 자를 저버리는 것이라.
.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17-24)
18,1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70인이 귀신을 쫓아낼 때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져 박살이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역사를 통하여 사단이 멸망하는 놀라운 승리의 역사가 일어 났습니다. 이로써 사단에게 사로 잡힌 인생들이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고 하십니다. 마귀의 세력을 제어할 수 있는 영적 권세는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로부터 나옴을 알 수 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제자들은 역사를 중심으로 기뻐하고 슬퍼했습니다. 우리도 1:1 팀 수가 올라가면 기뻐하고 역사가 잘 안되면 낙심하고 안면근육이 굳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기뻐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이름이 하늘나라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와 사단의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본적인 구원의 은혜를 인하여 항상 기뻐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상황에 좌우되거나 시들지 않는 영적 기쁨입니다.
21,22절은 예수님의 감사 기도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성령으로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쁨의 원천은 성령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기쁨이 충만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있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로서 모든 것을 그 주권대로 역사하십니다. 복음의 비밀도 스스로 지혜있다 하고 교만한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와 같이 겸손한 자들에게 나타내십니다. 교만한 자들은 복음이 어리석게 보이므로 영접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절대로 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부족하지만 겸손한 자에게 복음의 비밀을 알리시고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고전1:21).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 방법입니다. 또한 22절을 보십시오. 아무도 예수님과 예수님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자가 없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위로부터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해야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엡1:17)
그 후 예수님은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종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제자들은 어린 양과 같이 보잘 것 없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아무런 타이틀도 없고 또 돈도 벌지 못하여 물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실 때 그들은 가장 복된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선지자와 왕들이 메시야를 보고자 갈망해 왔으나 보지 못했습니다. 또한 메시야의 음성을 듣고자 했으나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바로 가까이서 메시야를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장 복된 자들입니다. 우리도 이 예수님을 바로 가까이서 보고 들을 수 있으므로 가장 복된 자들입니다.
결론: 이 세상은 에수님의 눈으로 볼 때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시대의 추수할 일군들로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개척자의 인생을 살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이미 개척된 곳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안정을 구하는 마음으로는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없습니다. 새 역사를 창조하려면 아픔과 희생과 모험이 있지만 개척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개척하고 정복하는 인생으로 지으셨습니다(창1:28). 그러므로 개척자의 인생을 살 때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안정된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안일한 마음을 버리고 추수할 일군으로서 개척의 비젼에 불타야 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 시대에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추수할 일군으로 써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세계를 복음화 할 추수할 일군들을 많이 세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